연재

[연재] 피난길 버려진 아기, 한동안 잊혀지지 않았죠!

발간일 2022.06.22 (수) 14:26
구술 아카이브 - 인천 원로 이야기 ⑪
부평 고 성낙필 님

인천에서 지역 어르신의 구술사업을 해온 것은 2007년 인천문화재단의 문화원로 구술사업에서부터이니 어언 15년에 이르고 있다. 그간 필자는 인천시, 인천문화재단 등 여러 기관의 구술사업에 참여해왔다. 이들 자료는 이미 인천사의 중요한 사료이나 가깝게 만나기는 쉽지 않다. 구술에 참여하신 분들은 유명세에는 차이가 있으되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여 성실하게 살아오신 것은 모두 같다. 하여 구술과정에서 접하게 된 그분들의 이야기를 하나씩 정리, 소개하여 지역에 축적되고 있는 역사자료의 중요성을 기억하고 동네 어르신들의 귀한 말씀을 함께 듣는 자리를 마련해 보고자 한다.

고 성낙필(成樂弼, 1935~2019) 님은 인천 송림동에서 출생하여 부평 신촌에서 소년기를 보내셨다. 인천상업학교 뒤쪽에 있던 글방과 십정동에 있던 조선인 간이학교에서 공부하셨고 부평동국민학교를 졸업한 후, 1949년 서울공업중학교(현 서울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하셨다. 2학년 때 발발한 한국전쟁을 겪으며 부산으로 피난하는 중에 가족과 헤어져 부산에서 학업을 이어가셨다. 이후 가족과 재회하셨고 1968년 부평으로 귀향하여 무역업 등에 종사하셨다.
2018년 부평구문화재단에서 시행한 부평 음악융합도시 구술채록사업에 참여하셨고 이 과정에서 들려주신 말씀이다.


▲ 고 성낙필 님(2019)

선친은 충남 예산분인데 인천으로 옮겨오셨어요. 제가 늦둥이라 큰누이하고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데, 큰매형이 부평시장에서 양복점을 했어요. 큰매형을 의지해서 부평 신촌으로 이사오셨던 것 같아요. 그때 여기는 그냥 산이고 들판이고 마을도 별로 없었어요. 신촌이란 이름도 나중에 사람들이 좀 모이고 난 뒤에 동네가 형성이 되어서야 붙은 것 같아요. 아이들 노는 것이야 다들 비슷하지만 그때는 겨울에 여기 개천이 얼면 앉은뱅이 썰매 타고 저 위에서 한 번 쿡 구르면 부평서국민학교 있는 데까지 덜덜덜덜 계속 내려가요. 거기에 뚝 떨어지는 데가 있어서 더 내려가지는 못하지만 그 직전까지는 쭉 내려갈 수 있었어요. 내려갈 때는 재미있지만 올라올 때는 아주 혀를 빼물고 올라왔지요. 그래도 정말 재미있었어요.


▲ 애스컴시티, 1948(사진 Norb Fay) / 사진 중앙에 하얀 건물이 미군부대와 조병창 병원 건물이다. 그 앞으로 희게 보이는 선이 개천이다. 이는 현재 동아아파트 주차장 쪽을 지나서 아울렛 앞으로 흘렀다. 성낙필 어르신을 비롯, 이 무렵 이 지역 어린이들이 놀이터였다.(사진 에스컴시티, 1948, Norb Fay)​

 


▲ 성낙필 어르신께서 어렸을 때 미끄럼 탔다는 개천의 위치를 표시했다.(사진 에스컴시티, 1948, Norb Fay)

이북 비행기 뜨자 공중에서 기총소사에 사람들 혼비백산

국민학교 졸업하고 서울공업중학교에 진학했어요. 예전에는 9월이 시작이었어요. 그런데 학기를 4월로 옮기는데 한꺼번에 옮기려면 부담이 가니까 1단계로 6월달로 옮겼어요. 그게 전쟁 나던 1950년이에요. 그러니까 1950년 6월에 2학년이 된 거예요. 중학교 2학년 되고 25일 만에 전쟁이 난 거지요.

전쟁이 났지만 우리는 뭣도 모르고 6월 26일에도 등교를 했어요. 그때 경인선 기차를 타고 학교를 다니는데 집에서 부평역까지 걸어가고 또 영등포역에서 내려서 지금 대방에 있는 학교까지 걸어가려면 2시간 이상 걸렸어요. 그런데 아침 조회가 끝나니까 각자 집으로 가래요. 그래서 영등포역으로 나왔는데 벌써 인천 가는 기차가 안 오는 거예요.
영등포 역전 마당이 굉장히 넓었어요. 그런데 학생, 어른들 해서 그 넓은 마당이 사람들로 꽉 찼어요. 그리고 보니까 벌써 일선에서 적십자마크 붙은 군용차들이 부상자를 싣고 막 들어오는 거예요. 가까이 못 오게 하니까 멀리서 보고 사람들 말을 듣고 그런가 보다 하는데 이북 비행기가 뜬 거야! 어딜 대고 쐈는지는 모르지만 공중에서 기총소사1를 했어요. 어찌나 크게 들렸는지 몰라요. ‘우다다다!’ 쏘는데 그 많던 사람이 어딜 갔는지 다 없어져서 역전 마당에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사람들이 다 아무 골목이나 머리만 쑤셔박고 있어요. 어쩔 줄을 모르고 허둥대고 있는데 기차가 하나 왔어요. 간신히 타고 보니 사람이 엄청나게 많아요. 오류동 지나서 소사까지 왔던가? 결국 부평까지 못 오고 중간에 내려서 집까지는 걸어왔어요.

간신히 저녁에 집에 도착해서 여름이니까 마당에서 밥을 먹는데 어랍쇼! 부평 상공에도 비행기가 뜨더니 또 ‘와다다다!’ 기총소사를 갈기는 거예요. 밥 먹다가 깜짝 놀랐죠. 다 죽는 줄 알았잖아요! 옆집 살던 부인이 일본에서 살다 와서, 일본에서 폭격을 당해본 적이 있었어요. 솜이불을 뒤집어 쓰고 있어야 한다고 해서 그 더운 여름에 이불 잔뜩 뒤집어쓰고 숨도 못 쉬고 있었어요. 그래도 그날 밤에는 괜찮았어요. 이후에 며칠 동안 대포 소리가 들리면서 김포에 왔다느니 서울에 들어왔느니 소문이 들렸어요. 그런데 7월 3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밤에 자는데 이북사투리가 막 들리는 거예요.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이튿날 밝은 뒤에 나와 보니까 경인도로가 군인으로 꽉 찼어요.

사람들이 놀라서 짐 싸서 피난 간다고 나와서 지금 저 공원묘지 방향으로 가는데, 그때 조병창에 미군들이 있었잖아요. 짚차 두 대가 삼거리를 향해서 들이 달리는데 사방에서 거기다 대고 총을 쏘는 거예요. 그러니까 차들이 다시 돌려서 뒤쪽으로 피해 들어갔는데 나중에 들으니까 차를 버리고 달아났대요. 그 다음은 어찌되었는지 모르지요. 우리는 공원묘지 있는 데까지 가서 아침 겸 점심으로 밥해 먹고 있다가 돌아왔어요.

같은 학년 인민군 우는 모습 보니 불쌍한 마음 들어

그런데 인민군이 집집마다 한 명씩 나오라는 거예요. 아버지가 더 위험할 것 같아서 내가 나갔어요. 여름이기도 했지만 어리게 보이려고 짧은 속바지 같은 거 하나 입고 나갔는데 우리를 화랑농장으로 데리고 가요. 가보니까 인민군이 탄약을 적재해 놓은 것이 무지하게 많아요. 별의별 탄약이 다 있어요. 그걸 나르라는 거예요. 나중에 군대 가보니까 그게 수류탄이었어요. 상자 하나를 들고 옮기는데 어찌나 무거운지 쩔쩔매다가 트럭에다 꽝 놓으니까 “동무! 그러면 안 된다!”고 그러면서 나보고 한쪽에 서 있으래요.
보니까 인민군 하나가 서 있는데 그 옆에 가서 서니까 나도 작은 키인데, 나보다도 더 작아요. 키가 작아서 총 개머리판이 발뒤꿈치에 닿더라고요. 조금 지나니까 여름밤 이슬이 내려서 춥더라고요. 덜덜 떨고 있으려니까 이 친구가 울어요. “왜 우냐?” 물으니까 이 친구가 어머니가 생각나서 그런대요. 학교 다니다 왔다는데 나하고 같은 중학교 2학년이래요. 이 친구는 말하자면 점령군인데 불쌍한 마음이 드는 게 어째야 좋을지 모르겠더라고요.
다음 날부터는 부르지 않아서 안 갔는데, 거기에 폭격을 한 거예요. 참 요란했어요. 사흘 밤낮을 터졌다니까요. 밤에도 대낮처럼 환했어요. 큰 탄이 터지면 벼락치는 소리가 나고 작은 탄알이 터지면 콩 볶는 소리가 나고요.

그리고 나서는 돈이 있어도 식량을 살 수가 없어서 여름내 감자하고 호박만 먹었어요. 그때 질려서 내가 지금도 감자하고 호박을 안 먹는다니까. 열우물하고 철로 사이가 거의 수수밭이었어요. 낫으로 수수이삭만 쳐서 훔쳐다가 불을 때서 말려가지고 털어내면 한 옹큼이 나와요. 그걸로 밥인지 죽인지 끓이는데, 감자만 먹다가 먹으니까 그것도 맛있더라고요. 나중에 그 동네 가서 내가 거기 수수 훔쳐다 먹은 놈이라고 이실직고하고는 같이 웃었드랬어요.


▲ 고 성낙필 님(2019)

9월 중순에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미군이 들어왔어요. 미군 들어오기 전에 인민군 탱크가 들어왔는데 희망천에 여섯 대가 서 있었어요. 탱크가 폭격을 맞고 나니까 사람이 탱크에 달라붙어서 죽었어요. 미군 보병이 넘어오는데 인민군이 조밭 고랑에 하나씩 숨어있다가 잡혀나오는데 그때 죽은 사람도 많아요. 그냥 두니까 시체 썩는 냄새가 나서 어른들이 나서서 시신을 수습해가지고 경인도로 양쪽 산기슭에 묻었어요. 그때 사람들 말이 휘발유로 손을 닦아도 그 냄새가 사라지질 않더래요. 나중에 보니까 그렇게 사람 묻힌 곳에는 풀이 더 무성합디다. 지금도 그 어름을 지날 때는 저기에 사람들을 묻었는데… 하고 생각하게 돼요.

1.4후퇴 후 온가족 피난길, 가족잃고 혼자 부산 정착

그리고 곧 1⋅4후퇴였잖아요. 이때는 온가족이 피난길에 나섰어요. 첫 번째는 멋도 모르고 있다가 당했지만 두 번째잖아요. 무척 많은 사람들이 피난을 나섰어요. 그해 태어난 동생까지 우리 형제가 다섯인데, 아기는 업고 나머지는 어린 동생들까지도 다 걸어갔어요. 식구들하고 평택까지는 같이 갔는데 거기서 겨울이라 강물에 얼음이 얼었는데 짐 지고 가던 소가 얼음이 깨져서 물에 빠지고 말았어요. 얼음이 스쳐가니까 소한테서 피가 배어나오는데 끝내 소를 구하지 못했어요. 그걸 보느라 정신을 팔고 있는데 식구들이 모두 없어진 거예요. 그래서 그냥 남들 가는 거 따라서 부산으로 혼자 피난을 가게 된 거죠.
피난 가는 길에 웬 아기 울음소리가 나서 가보니까 아이가 아주 깨끗한 포대기에 곱게 싸여 있는데 돌은 지난 것 같아요. 내가 안으니까 울음을 그치겠지. 하지만 내 코가 열댓 발이나 빠져 있는데 그 아기를 안고 갈 수는 없어서 다시 사람 다닐 만한 양지 바른 곳에 내려놓고 돌아섰어요. 그 아이가 아직도 생각나요. 어떻게 되었을까? 그게 전쟁이에요. 그게 무슨 일이냐구요.

그래도 추풍령 쯤에서 어떤 가족에게서 빵도 얻어먹고 일행이 되어서 부산까지 갔어요. 성함이랑 주소랑 주고받았는데 잃어버려서 결국 다시 만나지는 못했어요. 부산에서 운좋게 아버지 친구분도 만났지만 그 댁도 아침 때거리가 없는 형편이라 얹혀있을 수는 없었어요. 항구에 노무자들 일하는 데 가서 어려서 안 된다는 것을 떼를 써서 며칠 짐 나르는 일을 하기도 했는데 짐이 너무 무거워서 계속하기는 어렵더라고요.

그런데 전단지가 붙어있는 걸 보았어요. 그림 그리는 사람을 구한대요. 가보니 미군 작전처예요. 크게 확대한 지도에다 암호 같은 숫자를 찾아서 넣는 거예요. 지도를 확대하면 어디가 어디인지 우리 같은 사람은 봐도 몰라요. 시키는 대로 지도 그림 그리고 숫자 넣고, 영어 쓸 일도 없고 그림 재주가 많이 필요한 것도 아니에요. 그걸 한 2년 했어요. 그러면서 거기에서 피난 온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공부하고 나중에 환도한다기에 부산에 있는 학교로 전학해서 졸업도 하고 전쟁이 끝난 다음에는 생각나는 곳마다 편지를 보내서 가족을 찾았죠. 부모님은 예산으로 피난해 계셨더라고요. 그래도 부산에서 자리를 잡은 상태라 부산대학교에 진학했고 그쪽에서 일하다가 1968년이 되어서야 부평으로 돌아왔어요.

글·윤진현 문학박사, 인문학연구실 오만가지 대표, 사진 서은미 자유사진가

1기총소사 : 주로 근접 또는 저공 비행을 하면서 기체에 장비된 기관총·로켓포 등으로 적의 지상·해상 목표를 난사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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