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연재] 가난한 동네서 열렸던 부흥회, 사람들은 천국을 찾았을까

발간일 2023.05.24 (수) 15:45
응답하라! 인천 추억 ㉕
사라진 숭의동 전도관과 달동네

소래철교, 수봉공원, 자유공원, 월미도 등 인천시민들이 즐겨 찾는 공간엔 저마다의 추억이 넘쳐 난다. 잊지 못할 첫사랑을 만난 장소, 개구쟁이 시절 친구들과의 모험담이 숨겨진 곳을 생각하면 빙그레 미소 지어지는 기억들이 소환된다. 인천시민들의 내밀한 추억이 숨겨진 그 곳을 찾아가는 기억 여행을 시리즈로 연재한다.

햇살이 따갑던 한낮의 여름. 반쯤 열린 교실 창문 사이로 들어온 햇살은 마룻바닥에 누워 물결인 듯 어른거렸다. 눈이 따가운 것보다 마음이 따가운 미성년의 날들이 아주 천천히 지루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하굣길에 친구들 따라서 전도관에 갔다. 고등학교 시절, 우뚝 솟은 전도관은 어디를 가나 시야에 들어왔다. 누가 저렇게 높은 곳에 교회당을 지었을까. 궁금했는데 그 교회에서 앉은뱅이가 일어섰다는 둥, 불치병이 나았다는 둥, 귀신을 물리쳤다는 둥 기적과도 같은 소문들이 한참 떠돌았다.


▲ 철거되기 전 숭의동 전도관 모습.(2022년 3월 27일)

우리는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숭의동 달동네 끝으로 올라갔다. 무엇보다 높고 넓은 건물이 우리를 압도해왔다. 커다란 문을 열고 들어가니 강당을 가른 듯이 양쪽으로 놓인 갈색 긴 의자들에는 사람들이 빼곡하게 앉아 있었다. 목사의 목소리가 하이톤으로 높아지자 강당은 후끈거리는 열기에 휩싸였다. 반쯤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던 햇살은 바닥에 누웠고, 자줏빛 커튼은 바람에 간간이 흔들렸다.


▲ 철거된 전도관 터를 다시 찾았다. 전도관은 사라지고 새로운 공사를 위해 땅을 다진 모습이 보인다. 2023년에 필자.

목사에게 안수기도를 받던 사람이 픽 쓰러졌다. 그 뒤로 한 사람, 또 한 사람이 픽픽 쓰러졌다. 먼저 누운 햇살 위로 쓰러진 사람들은 동시에 무언가 알아들을 수 없는 외계어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곤 벌떡 일어서기도 했다. 나와 친구들은 쓰러지지 않았다.

(…) 전도관에서는 날마다 부흥회가 있었다.
사람들은 하나 둘 쓰러져 별나라의 소리를 내뱉었다.
모두가 천국을 다녀왔다고 하는데, 천국이 저마다 달라서 이상했다.

내 귓속에서는 쥐의 오줌이 새는 것같이 간지럽고 부럽기도 한, 먼 나라의 이야기들.
그들은 매일같이 모여 울다가 웃다가 어딘가를 다녀오는 것 같았다.
그것뿐이었다.

천국은 점점 더 가난해졌고, 아무도 그 동네를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골목 끝에 간신히 매달려 삐걱이던 집.
천장에서 쥐들의 발소리가 천둥소리를 흉내 내면, 아버진 점점 더 거칠어졌다. (…)
- 졸시, 「아버지 별명은 생쥐」부분, ‘우리는 좀더 어두워지기로 했네’ 창비, 2016

우리의 귓속을 맴돌던 괴괴한 소문처럼 그날 부흥회에서 기억에 남는 단어는 귀신, 사탄이었다. 또 목사는 귀신을 쫓는 특이한 제스처와 박수, 아멘으로 응답하라는 메시지를 반복했다. 그것은 약한 사람들의 슬픔을 잠시 희석시키고 잊게 만드는, 같은 공간 안에서 공통의 감정으로 뭉치게 하는 주술적인 힘이었다. 외계어 같은 방언을 응답이라 말하며, 천국을 봤다고 하는데, 천국은 저마다 달랐다. 그들은 늘 가난했고 그 동네를 벗어나지 못했다.

기차의 탄생과 전도관

나도 그 동네를 쉽게 벗어나진 못했다. 동생이 가출하고, 아버지한테 연탄집게로 맞지만 않았어도 오래도록 그 집에서 살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동생과 아버지도 이미 세상 사람이 아니고, 전도관도 이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기차 소리만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들릴 뿐이다.


▲ 전도관 자리엔 알렌 별장이 있었다. ©버튼 홈스

기차와 전도관은 기묘한 조합 같지만, 두 장소에 연결된 사람이 있다. 1897년 3월 22일 경인선 기공식이 쇠뿔고개라 불리던 우각리에서 있었다. 그 자리에 고종의 신임을 받아 한국 최초 근대식 병원인 제중원을 설립한 의료선교사 알렌도 참석했다. 알렌은 1897년 7월 주한미국공사로 임명되었고, 1898년 봄 별장 부지를 매입하여 공사를 시작했는데 그곳에 훗날 전도관이 세워졌다. 같은 해 9월 18일 경인선 기차가 인천역을 출발하면서 한국 근대 철도의 서막이 열렸다. 1900년 6월에 알렌은 별장에 입주했는데, 그 아래쪽에 우각동역이 생겼다. 경인선 부설권을 따낸 미국인 모스의 배려로 오직 알렌만을 위한 역이었다. 1905년 6월 알렌이 한국을 떠난 이듬해인 1906년 2월 10일 우각동역은 폐쇄되었다.

알렌 별장은 그 후 이완용의 조카인 이명구 별장으로, 1930년대 말에는 계명학원 교사로 사용되다가 1956년 소실되었다고 전해진다. 전도관은 1957년 박태선이 창시한 신흥종교인 천부교회(신앙촌)가 들어서면서 생긴 명칭이다. 이후 여러 차례 명의가 바뀌다가 1984년 이초석 목사가 설립한 한국예루살렘교회가 2005년까지 사용했다.


▲ 철거 전 전도관 바로 옆 골목 안쪽엔 예술가들의 작업실이 있었다. 사진은 우각로에 위치했던 행복창작소.(2016년 5월 28일)

전도관 바로 옆 골목 안쪽은 예술가들의 작업실로 잠시 사용되기도 했었다. 인천 사람들 뇌리에는 선인체육관과 함께 인천의 명물 아닌 명물로 남게 되었는데 언제부턴가 나는 그 두 건물이 괴물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모두 사라졌다. 선인체육관이 먼저 사라졌고, 전도관도 사라졌고, 내가 살던 숭의동 집도 사라졌다.

폐허가 된 전도관 터를 가끔 찾아간다. 깨진 유리창 안에 가지런히 누군가 남기고 간 신발, 마당 한 켠에 버리고 간 전화번호부, 멈춘 시계가 걸려 있는 허물어진 벽, 지붕 위의 다리 부러진 의자들, 그 폐허에서 깨진 벽돌을 뚫고 꽃이 피어나고 있다.

글· 사진 이설야 시인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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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5-24 20:13:21.0

    숭의동 전도관의 아련하면서 슬픈 이야기네요. 옛날엔 사이비종교도 참 많았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웃픈이야기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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