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이야기

[인천 이야기] 나전칠기 26가지 공정 거쳐야 완성, 해산의 고통같아

발간일 2022.05.18 (수) 15:49
58년 나전칠기 외길 임충휴 명장,
항도백화점에 연구소 열고 교육·전시

“아마도 제가 부도를 맞지 않았으면 명장이 안 됐을 거예요.”

임충휴(73)씨는 2004년 11월, 제384호로 지정된 대한민국 목칠공예부분 칠기명장이다. 그는 58년째 전통공예인 나전칠기 외길을 걷고 있다. 그는 최근에 인천 최초의 백화점이었던 항도 백화점 건물(개항로96번길 4)에 ‘임충휴 옻칠·나전연구소’를 열고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실시하며 전통공예를 지키고 있다.


▲ 58년째 나전칠기 외길을 걷고 있는 임충휴 명장의 대표작인 십장생 12자 장롱.

전라남도 완도의 한 섬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 졸업 후 15살의 어린 나이에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구두닦이, 신문팔이, 식당 배달일 등을 전전하다가 우연히 가구공장을 들어가게 된다.

“그곳에서 처음 자개를 봤는데 그게 조개껍데기라고 했어요. 시골에서 늘 소꿉놀이할 때 가지고 놀던 건데 그것이 자개였고, 가공해 놓은 자개의 빛이 정말 좋았어요. 그때 반했죠.”

그때부터 그는 후암동 가구공장에서 3년, 보문동 조안공예사 가구공장에서 10년 정도를 근무하면서 기술을 전수받았다. 특히 임충휴 명장은 보문동 조안공예사 가구공장에서 집중적으로 옻칠만 하게 되는데, 이때 큰 도움을 준 스승이 당시 이 회사 대표였던 안승권씨다. 안승권 대표는 임명장에게 옻칠하는 방법을 비롯해 다양한 기능을 많이 전수했다.

지금의 ‘임충휴 명장’이 존재하기까지는 많은 이들의 도움이 있었다. 보문동 가구공장에서 칠을 배우라고 적극적으로 조언한 김광치 선생을 비롯해, 당시 조흥은행에 근무하던 권태두씨의 도움으로 신용대출 300만원을 받아 공방을 차렸으며, 하청공장을 해보라는 권유와 함께 판로까지 알려 줬던 김호창 선생 등 그들의 마음씀씀이를 임 명장은 잊은 적이 없다.

1980년경 임충휴 명장은 유류파동 시기와 맞물려 자신의 공장을 시작했는데, 다행히 별 탈 없이 위기를 잘 넘겼지만, 1997년 맞은 IMF는 빗겨 갈 방법이 없었다.


▲ 인천 최초의 백화점이었던 항도 백화점 건물(개항로96번길 4)을 매입해 현재 ‘임충휴 옻칠·나전연구소’를 열었다.

임충휴 명장은 “그때 당시 12억 8천만 원이라는 금액의 엄청난 부도를 맞았다. 실질적으로 내 돈은 6억도 되지 않는데 나머지 돈은 선후배들 돈이었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신용이 좋아서 선이자를 일반인들보다 0.5% 정도 덜 냈는데 그러다 보니 선배 후배 지인들의 선이자를 내 이름으로 내주다가 부도를 맞으며 그 돈을 고스란히 안게 됐다”고 말한다.

“정말 고민 많이 했어요. 부도를 내버리면 저 하나는 잘 살았겠죠. 그런데 그동안 저를 도와주셨던 분들을 저버릴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가지고 있던 전 재산을 다 정리해서 그 돈을 모두 갚았어요. 저를 믿고 많은 돈을 빌려줬는데, 가진 돈이 없으면 모르지만, 있는데 갚지 않으면 정말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전부 갚았죠. 덕분에 지금도 신용은 돈독합니다.”

학생들 앞에 서는 것이 영광이라는 임충휴 명장은, 그때 돈을 갚지 않았다면 결코 가질 수 없는 기회라고 늘 강조한다.

나전칠기의 역사

‘나전칠기’라는 말은 칠기에서 나타내는 문양을 조개를 이용하여 장식하는 것을 말하며,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을 비롯한 동남아 등 여러 곳에서 제작되었다. 한국 · 중국 · 일본 등에서 공통으로 쓰이는 ‘나전’이란 말의 한자는 소라 ‘라(螺)’자와 보배로 꾸민 그릇 ‘전( 鈿)’자로 소라 껍데기를 활용해 장식한 기물을 뜻한다.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자개’라는 별도의 고유어를 함께 써왔으므로 자개는 나전과 같은 말이다. 아름다운 진주 광택을 지닌 조개껍데기의 안쪽 패 면을 종잇장처럼 얇고, 판판하게 갈아 놓은 것을 말하기도 하고, 그것으로 무늬를 만들어 장식하는 기술 또는 기법으로 만들어진 공예품을 이르기도 한다.

한국의 나전은 통일신라 시대(676~936)부터 시작해 고려 시대(918-1392)에는 최고 수준의 기법에 이른다. 당시 고도의 제작 기법으로 경함 및 향함 등이 정교하게 제작되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불교 경전을 보관하던 ‘고려 나전경함’이 있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조형 문화로 평가받고 있는 고려 나전경함은, 미국을 비롯해 영국, 네덜란드, 일본 등의 주요 국립박관에 소장되어 있고, 그중 한 점만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물 제1975호로 지정되어 보관되고 있다.

임충휴 명장은 이 고려나전경함을 그대로 재현해서 현재 그의 전시실에 전시 중이다.


▲ 고려나전경함 보물 제1975호(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임충휴 명장이 재현한 고려나전경함 (임충휴 갤러리 전시 중)

조선 시대에도 나전칠기는 왕실의 혼례 품이나, 양반층의 일상적인 사치품 또는 부장용 명기 등으로 제작되었으나, 18세기를 전후하여 상공업의 발전을 통해 새롭게 대두된 평민 부유층의 등장과 맞물리며 회화적인 문양과 서민적인 민화풍의 문양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십장생이나 천도복숭아, 학, 포도 넝쿨 같은 문양은 임충휴 명장의 작품에서도 주요 소재로 등장하고 있다.

임충휴 명장의 대표작품

“저는 십장생이 들어간 12자 장롱 같은 큰 작품을 주로 많이 했어요. 12자 금장 십장생 장롱 외에도 흥부 놀부(문2짝) 춘향전(문2짝) 심청전(문2짝)이 들어간 12자 민속 장롱도 많이 만들었죠. 한때는 민속장 하면 임충휴를 떠올릴 정도였죠.”


나전매화흑칠2층장(고려시대 이후 자주 사용하던 문양. 매화는 고결한 선비나 정절의 여인을 상징)


나전수국나비2층장(수국은 무병장수·부귀영화를 뜻하며, 나비의 상징적 의미와 어우러져 금슬 좋은 부부의 행복을 기원)

전시장에는 그의 대표작인 12자 십장생 장롱을 비롯하여 매화문양이 들어간 이층장, 국화문양 이층장, 당초문 화초장, 민속 끊음 삼층장, 포도문양 삼층 서랍장(흙칠), 나비문양 삼층 서랍장(비취색칠), 책가도등 중간크기의 작품과, 다양한 문양의 보석함, 액자형 약리도와 송학도, 일월오봉도와 병풍 등이 전시되어 있다.

임충휴 명장에 대한 평가는 그의 작품을 찾는 이들에 의해 진가가 발휘되었다. 1980년대 초반 중동 건설이 한창일 때 삼성종합건설에서 사우디 왕실에 선물할 병풍(12폭, 8폭)을 2개를 주문받았는데 그때 병풍값으로 받은 돈이 2억이었다. 그 외에도 12자 십장생 장롱을 1억 8천만 원 받는 등 명장이 되기 이전에도 이미 임충휴 명장은 고객들로부터 인정받고 있었다.

“몇 년 전 뉴욕의 액세서리 브랜드인 ‘티파니앤코’에서 보석함을 만들어 달라는 주문을 받았어요. 지금도 그 작품을 만들고 있는데 6년째 거래중이에요.” 보석함의 블루색상이 참으로 환상적이다.


나전모란당초문보석함(‘당초’는 여러 가지 덩굴풀이 꼬여서 뻗어나가는 모양을 그린 무늬를 뜻하며, 모란과 십장생의 상징인 학과 사슴이 어우러져 금실 좋은 부부의 행복과 부귀영화를 오래오래 누리며 장수하기를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있다.)

나전칠기의 제작 과정

“나전칠기는 26가지의 공정을 거쳐야 하나의 작품을 완성해요. 그중 옻칠은 총 7~9번까지 하는데 마지막 칠을 할 때 과연 내일 아침에 순산할 것인가 하는 마음으로 해요. 출산하는 것과 같은 마음이죠.”

칠의 결과물에 대한 장담은 어느 누구도 할 수가 없다. 습도, 온도, 그날 칠하는 사람의 컨디션 등등 너무 많은 변수가 있기 때문이다.

“칠이 너무 두꺼워도 안 되고 너무 얇아도 안 돼요. 너무 얇으면 밑바닥이 나오니까요. 그래서 칠은 매 순간 정말 어려워요. 일반인들이 생각할 때 자개 붙이는 것이 어려울 거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자개는 도안대로 썰어서 붙이면 되지만 칠은 장담을 할 수가 없어요. 문헌상엔 1:1로 배합을 하라고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아요.”

임충휴 명장은, 옻칠은 자신의 숙련된 감각이 가장 중요하다며 늘 학생들에게 누구도 해 줄 수 없는 부분이 바로 이 옻칠이기 때문에 각자가 많은 경험을 통해 느껴보고 그 정점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저희도 작업을 한 달만 쉬어도 상칠 하기가 두려워져요. 그래서 다시 중칠부터 해가면서 상칠로 옮겨가죠.”

나전칠기 비싸지만, 그럼에도 꼭 있어야만 하는 이유

나전칠기가 비싼 이유는 복잡한 제작 과정도 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옻을 구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원주에서 생산이 되고 있지만, 양이 얼마 되지 않아 그 지역에서 활동 중인 문화재 선생들이 쓰기에도 부족한 형편이다. 어쩌다 한국산 옻을 구해도 옻 가격이 보통 비싼 게 아니다. 한 관에 280만 원이다. 그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수입된 옻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데 현재는 일본에서 정제된 옻을 수입해서 사용하고 있는 형편이다.

“옻나무 묘목을 심어서 옻이 생산되기까지는 9년의 세월이 필요해요. 옻 채취 기간은 6월 말에서 7월 초인데 이때가 정말 더울 때잖아요. 게다가 옻을 채취하려면 나무에도 올라가야 하는데 얼마나 힘이 들겠어요. 그래서 기술자가 많지 않고 당연히 생산량도 적을 수밖에 없어요. 옻 값이 비쌀 수밖에 없는 이유가 너무 많아요.”

임충휴 명장은 방수·방습·방충 기능이 뛰어난 옻칠의 효능에 대해 강조하며, 불이 잘 붙지 않고 독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썩는 것을 방지하는 탁월한 소재로 특히 아토피 증세를 억제하는 효과도 있음을 강조한다.

“옻의 효능에 대한 홍보가 많이 되지 않아서 사람들이 잘 몰라요. 환경친화적이고 건강에도 좋은 나전칠기가 정부 차원의 적극적인 지원이 이루어진다면, 좀 더 많은 사람이 칠기에 관심을 두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임명장의 작업실로 들어서니 송진 내음 같은 옻칠 냄새가 가득하다. 그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편안해지는 느낌이다.


▲ 임충휴 갤러리에 전시된 다양한 나전 칠기 작품들.

나전칠기의 명맥을 잇기 위한 노력

사실 옻칠은 2011년, 전국기능경기대회에서 나전칠기 종목이 사라지면서 소외당하던 한국 전통 기능 중 하나이다. 여기에다 옻칠을 정식으로 가르치던 배재대학교 칠예과 마저 2012년 통폐합으로 사라지면서 남아 있는 일부 기능인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다행스럽게도 2014년 서울시 남부기술교육원에서 정식으로 나전칠기 학과를 열어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임충휴 명장은 현재 남부기술교육원에서 매년, 기본 6개월 과정으로 20명에게 나전칠기 교육을 하고 있다. 6개월이 끝나면 기본 과정을 마친 20명 중에서 10명 정도만 선별하여 전문가 과정으로 들어가는데, 서울시 지원을 통하여 전액 무료로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럴 뿐만 아니라 정부 지원 사업으로 중·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하여 학교에 가서 자개공예 진로 체험을 하고 있으며, 일반인들을 대상으로도 수강을 하고 있다.

“각 분야의 명장들이 학교 현장으로 직접 찾아가서 학생들과 진로 체험을 하고 있어요. 그런 과정을 통해서 학생들이 자신의 적성에 맞는 분야를 찾는다면 지속적으로 배워볼 것을 권유해요. 어느 분야에서든 자신의 기능을 찾아낸다면 충분히 인정을 받을 수 있음을 강조하지요. 실제로 남부기술교육원 졸업생 중에서도 몇 명은 나전칠기를 이용해 사업을 하고 있어요.”

이런 모든 활동은 나전칠기가 중간에 단절되지 않고 직업으로까지 잘 연계되어 기능인으로서의 반열에 오를 수 있게 하기위한 염원이며, 그 여정에서 임충휴 명장은 그들을 환하게 비추어 줄 수 있는 등대가 되기 위해 매 순간 노력하고 있다.

그는 현재 인천에서 중요무형문화재 등록을 목표로, 올해 칠기 부분에서의 종목 지정을 위해 서류를 등록해 놓은 상태다.

“무형문화재나 명장이라는 제도가 있다는 걸 늦게 알았어요. 어찌 되었든 IMF 때 모든 재산을 다 털어 부도를 막고 나니 돈이 하나도 없었어요. 배운 것이라고는 이 기술밖에 없는데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죠. 먹고 살기 위해 이 일을 꾸역꾸역해오다 어느 날 이런 제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거죠.”

처음부터 명장이나 문화재가 되기 위함은 아니었지만, 58년 동안 온갖 고난에도 굴하지 않고 한 길만 열심히 걸어온 기능인으로서, 국가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은 것이 임충휴 명장의 간절한 바람이다.

글·사진 최시연 i-View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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