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이야기

[인천 이야기] 아프지만, 사랑하고 추억하다

발간일 2021.02.16 (화) 15:08


스케치에 비친 인천 ② 개항장​


‘인천, 그림이 되다.’ 낡은가 하면 새롭고, 평범한가 싶으면서도 특별한. 골목길만 지나도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지는 도시, 인천.

추억이 그리움으로, 때론 일상으로 흐르는 공간이 작가의 화폭에 담겼다. 김재열 화백의 손끝에서 피어난 자유공원과 개항장 거리.

그 따뜻하고 섬세한 붓 터치를 따라, 인천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간다.


▲인천만개(仁川滿開)  488×112(cm) 2013
자유공원 남쪽 기슭에 서면, 시간이 고인 집들과 인천 앞바다부터 멀리 섬들이 펼쳐진다.




자유공원의 나이 든 사진사​​


‘참, 변하지도 않지. 예전 그대로야…’ 여기는 자유공원. 낡은 사진첩,  빛바랜 흑백사진 속에서 보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1888년 12월, 우리나라 최초로 세운 서구식 근대 공원. 서울 탑골공원보다 9년이나 앞섰다. 원래 이름은 각국各國공원으로 개항기 때 들어온 외국인들을 위해 조성했다. 자유, 지금의 이름은 1957년 이곳에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한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세우면서 지어졌다.


인천 사람들은 자유공원을 참 좋아했다. 1970년대 그 시절엔 너도나도 맥아더 동상 앞에서 한껏 폼 잡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사진 속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어머니, 양복을 빼입고 포마드로 멋을 낸 젊은 날의 아버지는 마치 영화배우 같다.

지금도 맥아더만 찍는 건 2천원, 함께 찍는 건 3천원. 아, 자유공원엔 그때 그 시절의 사진사가 아직, 떠나지 않고 머물러 있다. 며칠만의 영업 개시인가, 뜻밖의 손님 방문에 그와 함께 있던 어르신들이 더 반가워한다. “어디서 찍어드릴까. 아무렴, 맥아더 앞에서 찍어야지.” 사진사는 누군가는 동상을 없애라 한다지만 자신은 맥아더 덕분에 여태 먹고 산다며, 그가 있어 이 자리를 떠날 수 없다고 했다.


▲자유공원의 하나뿐인 사진사.
50여 년, 인천 사람들의 ‘빛나는 한때’를 렌즈 너머로 보았다.


“잘 나올지 모르겠네. ‘일반 사람’은 괜찮은데 ‘근대 사람’은 사진을 많이 찍어봤기 때문에. 내, 떨려요.” 나이 든 사진사는 현란한 촬영 기술에 익숙한 요즘 사람을 찍는 게 아무래도 부담스럽다. 하지만 50여 년 세월을 카메라 하나로  버텨오지 않았던가. 뷰파인더 너머로 표정과 움직임 하나하나까지 잡아내는 그의 눈빛에서, 노장의 노련함과 진지함이 묻어난다.

이름은 이선우, 나이는 여든. ‘긴담모퉁이길’에서 태어났다. 사진을 처음 찍은 건 스물다섯 살 때. 카메라가 ‘재산’이던 시절, 운 좋게 미제 필름 카메라가 그의 손에 들어왔다. 동네 아이들이 예뻐서 찍어주곤 했는데, 그러면 부모들이 고맙다며 용돈을 쥐여줬다. 사진이 돈이 되겠다 싶어 자유공원 언덕을 올랐다. 1970년대 서울에 남산이 있다면 인천 사람들에겐 자유공원이 있었다. 휴일이면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던, 뽑기와 솜사탕의 달콤한 냄새 너머로 야바위꾼과 점쟁이들이 호객하는 소리가 시끌벅적 들려오던 곳. 필름 카메라를 든 사진사만 100여 명이 있었다. 순번대로 손님을 맞아도, 하루에 쌀 한 가마니 살 돈을 벌 만큼 벌이가 좋았다. 수학여행 온 학생들, 결혼식을 막 올린 부부, 나들이 온 가족들이 그의 카메라에 차곡차곡 담겼다.


오늘 자유공원의 사진사는, 그 혼자다. 휴대폰으로도 누구나 쉽게 사진을 찍는 시대에 손님이 있을 리 없다. 매일 자유공원을 지키고 있어도, 카메라 셔터 한번 못 누르는 날이 허다하다. 장롱 깊숙이 간직한 먼지 쌓인 앨범 속 흔적을 찾아, 그를 보러 오는 사람이 아주 가끔 있을 뿐이다. 

“5월에 장미꽃 필 때 다시 와요. 가족과 함께, 사진 잘 나오게 빨강, 분홍색 옷을 입고.” 그가 오래된 기계를 살살 달래가며 인화한 ‘진짜 사진’을 건네준다. 손으로 만지고 기억할 수 있는, 추억 하나가 그렇게 가슴 한편에 새겨진다.


▲자유공원 맥아더 동상을 바라보면서  53×45.5(cm)
2014 인천 사람 중에 그 시절 자유공원에 관한 추억 하나쯤 없는 이가 있을까.
서울에 남산이 있다면 인천에는 자유공원이 있었다.


▲‘생애 가장 빛나던 시절’이 깃든 자유공원은, 인생의 황혼기마저 품어준다.



아직, 그 자리의 구멍가게​


자유공원 광장 한편에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쌓인 구멍가게. 낡은 지붕엔 이름이 하얗게 지워진 간판이 아무렇게나 얹혀 있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니, 주인장이 손님이 쓰는 테이블에 후루룩 끓인 찌개에 밥 한 공기 놓고 때늦은 점심을 먹고 있었다.

조명환(53) 씨는 이 오래된 가게를 아내와 오붓이 꾸려가고 있다. 누이가 하던 일을 잠시 도와주려던 것이 어느새 10년을 훌쩍 넘겼다. 자유식당은 1960년대에 처음 문을 열었다. 자유공원이 전성기를 누리던 1970~1980년대 이곳도 잘나갔다. 가게 일에 식당 일에, 2층 옥상에선 새벽까지 포장마차를 열었다. 장사가 잘됐다고 해서 돈을 많이 번 것은 아니다. 당시 주인 어르신들은 음식이며 물건값을 돈이 있으면 있는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받았다. 가게를 찾는 이들은 그들에게 손님이 아니라, 사는 이야기 주고받고 때론 밤늦도록 술잔을 함께 기울이는 친구이자 이웃이었다.

오늘 이 자리를 지키는 부부도 욕심이 없다. 이곳은 자유공원 사람들의 쉼터고 사랑방이다. 삶이 저물어갈 무렵, 젊은 시절부터 찾던 공원에서 하루 대부분을 보내는 노인들은 추우면 이 안에서 온기를 채우고, 주머니가 비었을 땐 외상으로 커피 한잔 편히 마시고 간다.

부부는 쉬고 싶어도, 가게 문을 마음대로 못 닫는다. 매일같이 오는 단골 어르신들이 실망할까, 문득 그리움을 좇아온 사람들이 헛걸음이라도 할까 싶어. “일부러 찾아오는 분들도 많아요. 근처 학교에 담 넘어서 다니던 추억도 이야기하고. 언젠간 탤런트 박상원 씨가 왔어요. 요 아래 살았거든요. 전 주인하고 동갑이었다며 안부를 묻더라고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데….”


가파른 세상의 변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래전 기억을 붙잡고 있는 곳. 그 낡아가는 풍경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 오늘도 자유공원의 구멍가게는 지나온 날처럼, 문을 활짝 열고 손님을 기다린다.


▲50여 년 된 자유공원 구멍가게를 지키는 조명환 대표. 고양이 ‘뱁새’와 함께


▲그대로 있어줘서 고마운. 자유공원의 쉼터, 추억의 공간




그럼에도, 기억해야 할 시간


자유공원 언덕 아래 개항장 거리. 힘으로 밀어붙인 개항, 그 아픈 역사가 ‘옹이’로 깊이 박힌 동네. 오늘, 따사로이 비추는 햇살이 그날의 상처를 가만히 어루만진다. 굴곡의 시간을 간직한 그 오래된 골목에, 새로운 삶이 스며들고 있다.


카페 ‘팟알(pot_R)’. 시간의 풍상을 고스란히 간직한 근대건축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이곳은 개항기 인천항에 노동자들을 대주던 하역업체 대화조大和組의 사무소(등록문화재 제567호)였다. 일본의 전형적인 ‘마찌야(町家)’ 양식이지만, 인천만의 이야기로 꽉 채워 전국에서 찾는 명소로 거듭났다.

“마당에 태극기를 걸어놓았어요. 일본식 집이잖아요. 일본인 관광객들이 와서 ‘그들 나라 건축물이 한국의 문화재’라며 행여 우월감에 젖을까 봐서요.” 이 집의 역사는 1880년대 말에서 189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백영임(58) 팟알 대표는 그 기나긴 세월을 차마 거스를 수 없어서, 또 아픈 역사일수록 기억해야 하기에, 시간의 증거들을 붙잡아 이 집을 살려냈다.


▲관동교회 앞길  75×56(cm) 2013 인천 개항장.
거리 전체가  ‘아프기에, 아픈 만큼’ 기억해야 할 역사의 박물관이다.


▲팟알은 일본식 근대건축물이지만 그 안은 인천, 대한민국으로 꽉 차 있다.


▲옛 문헌 그대로 빚은, 팟알의 팥죽과 나가사키 카스텔라


옆 골목으로 들어서면 시곗바늘은 1880년대에서 1970년대로 돌아간다. ‘도든아트하우스’는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1970년대에 지은 전형적인 2층 양옥집이었다. 이창구(60) 작가가 먼지 자욱이 쌓인 빈집을 발견해 쓸고 닦아 새 숨을 불어넣었다. 남겨진 것은 최대한 살렸다. 공간에 스민 시간의 흔적은 한번 지우면 되돌릴 수 없기에.

‘도든’은 ‘도圖, 그림이 든 집’과 ‘돋아나다’라는 뜻을 품고 있다. “모든 일엔 ‘희망’이 전제돼야 합니다. 예술과 삶이 어우러진 공간으로 이곳을 오래도록 지켜내고 싶습니다. 내 생이 다한 이후에도….” 이제 1년, 정원 있는 갤러리에서 피어난 예술의 향기는 골목골목에 스미며 멀리 퍼져나갈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깊고 그윽한 향을 풍기며.
 




▲1970년대 2층 양옥집에서 문화예술의 새 숨을 튼 도든아트하우스, 그리고 이창구 관장


문화 살롱 ‘花요일’. 테이블 두 개로도 꽉 차는 작은 공간이지만, 깊고 풍요롭다. 그 안엔 세상 모든 이야기가 담긴 책이 가득하고, 한 뼘 갤러리가 있고, 비밀스러운 다락방이 있다. ‘花요일’에서 인문학 강의를 한 작가 김훈은 이 공간을 ‘재미있다’라고 표현했다. 공간지기의 이름도 달의 계수나무, 신월계(55). 삶의 결도 다르다. 그의 고향은 홍천. 고등학교 교사인 남편을 따라 30년 전 인천으로 왔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위로가 필요할 때면, 자유공원을 돌다 개항장 거리를 거닐곤 했다. 그러다 문득 ‘책을 맘껏 읽고 싶어서’ 7년 전, 하던 일을 그만두고 카페 문을 열었다. “이 안에서 난 끌림이 있는, 소중한 사람들을 만난답니다.” 따뜻한 골목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살아가는 그는, 행복하다.


긴긴 세월을 보듬은 나무로 지은 집과 오래된 돌계단, 구불구불한 골목, 그리고 햇살 좋은 날이면 더 짙푸르게 빛나는 키 큰 플라타너스…. 마음으로 걷는 그 길 위에서, 발걸음은 점점 느려져만 간다. 여기는 아프지만, 우리가 사랑하고 추억하는 인천 개항장이다.


▲작지만 깊은 공간, 花요일. 그 안에서 행복한, 공간지기 신월계​



▲김재열 작가


■ 그림 김재열

인천예총 회장, 홍익대학교 산업미술대학원 교수 등을 역임한 인천의 원로 작가다. 인천 구석구석의 풍경과 건물에 내재된 가치를 캔버스에 담는다. 18회에 걸쳐 수채화 개인전을 열었으며, NIB남인천방송 ‘인천 여행 스케치 기행’, 인천일보 ‘풍경 드로잉’을 연재하며 삶과 예술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현재 인천미술협회와 한국미술협회 고문, 대한민국 수채화 작가 원로회 의장을 맡고 있다.



원고출처 : 굿모닝인천 웹진 
https://www.incheon.go.kr/goodmorning/index

​글  정경숙 굿모닝인천 편집장│사진 임학현 포토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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