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이야기

[인천 이야기] 중화요리집 경동 ‘평화각’ 을 아시나요?

발간일 2020.12.30 (수) 16:29

6,70년대 인천의 결혼식과 피로연장으로 ‘유명’
34년 시작 짜장면·해삼탕 유명…80년대 중반까지 운영

인천을 대표하는 오래된 중화요리집으로는 공화춘, 중화루를 들 수 있다. 공화춘과 중화루는 몇 번의 부침을 거친 후 옛 공화춘은 짜장면박물관이 됐고, 중화루는 여전히 시민들이 애용하는 중국집으로 사랑받고 있다. 이들 중국집들의 역사는 인천화교 이주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1960,70년대 평화각​(사진 부극정 제공)




경동 싸리재에 위치 결혼식장 피로연장소로 유명


공화춘, 중화루와 더불어 인천을 대표하는 중국집이었던 곳이 하나 더 있었다. 중구 경동 싸리재에 있던 평화각이다. 이곳은 한때 인천시민들과 화교들의 결혼식장과 피로연 장소로 각광을 누렸다. 평화각은 지금 인천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잊혀진지 오래지만 6,70세 정도 된 시민들 중에는 경동 싸리재에 있었던 평화각을 추억하는 이들이 꽤 있다. 이들 중엔 아직도 평화각에서 먹었던 고소한 짜장면 맛을 기억한다.


평화각은 80년대 초·중반까지 운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평화각을 운영했던 인천화교 주대유(周大有, 88) 씨는 1977년 평화각을 접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고, 그후 그의 동생이 인수해 운영했지만 오래 가지는 못했다. 평화각은 다시 한국인에게 매각됐고 1995년경 그 자리에 도로가 생기면서 건물마저 헐렸다.


평화각의 이야기를 취재하고자 인천화교들을 상대로 수소문했지만 오래전에 이민 간 평화각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아내기는 쉽지 않았다.


다행히도 만수동에서 한의원을 운영하고 있는 인천화교인 임치유 원장이 당시 평화각 운영자들과 아는 사이였다. 임치유 원장의 도움으로 미국에 살고 있는 평화각 사람들과 연결이 됐다. 구순을 바라보는 주대유 사장은 생존해 있고, 그의 아들 주기이(周其怡)씨와 이메일 통해 평화각 이야기를 들었다.

1950년대의 평화각


평화각은 공화춘과 중화루가 차이나타운에 있었던 것과 달리 인천 경동 싸리재에 있었다. 지금 경동 애관극장과 아주 가까운 거리였다.

영업은 1934년쯤 시작했다. 창업자는 인천화교인 주명창(周銘昌,1911년생)이었다. 주명창은 1928년경인 17세때 인천으로 이주했고, 그의 아들 주대유(周大有)는 1945년에 할머니와 함께 인천으로 왔다. 이 시기는 화교들이 인천으로 많이 이주하던 때다.

주명창은 중국 산둥에서 고깃배를 수리하는 일을 했지만 생활은 빈곤했다. 그는 한국으로 가면 돈을 벌수 있다는 사람들의 얘기에 더 나은 삶을 위해 기회의 땅인 인천으로 이주를 결심했다.

주명창은 당시 인천으로 오는 뱃삯으로 계란1줄을 사공에게 주고 겨우 배를 탈 수 있었다. 정식입국이라기 보다는 불법이주였던 셈이다.

인천에 온 주명창은 처음 1년은 다른 가게의 종업원으로 일하다가 빵집을 열었다. 빵집은 장사가 잘 됐다. 주로 중국빵을 만들어 팔았는데 당시 중국빵은 인기가 많아 만드는 데로 잘 팔렸다.



주말엔 하루 14건 정도 결혼식 진행


주명창은 빵집을 운영하다 1년 뒤 동업형태로 1934년경 평화각을 열었다. 동업이었지만 운영은 주명창이 맡았다.


평화각의 전성기는 6,70년대였다. 주말에는 하루 14건의 결혼식이 있을 정도로 식당은 결혼식과 하객들로 붐볐다. 평화각은 결혼식도 하고 피로연도 할 수 있어 인기장소였다.


또 인근의 신신예식장에 온 하객들의 식사도 평화각에서 하는 경우가 많아 사람들로 늘 북적 북적였다. 결혼식은 공화춘보다 평화각에서 더 많이 했다.

인천화교협회 회장을 지낸 필명안 고문의 결혼사진. 그는 1972년 평화각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임치유 한의원 원장의 평화각에 대한 추억하나. “6,70년대 평화각에서 결혼식이 많다보니 화교학교 학생들이 주말에 이곳에서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어요. 당시 화교학교 학생들은 예식 손님들에게 음식을 서빙하고 그 대가로 짜장면을 먹고 일당을 받았어요. 당시는 짜장면을 쉽게 먹을 수 있는 때가 아니어서 평화각 아르바이트는 인기가 높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평화각의 인기메뉴는 짜장면과 해삼탕이었다. 춘장을 직접 만들고 해삼을 말려서 만든 음식은 다른 식당보다 풍미가 좋았다. 덴뿌라도 평화각의 대표 메뉴중 하나로 손님들이 즐겨 찾던 요리였다.


평화각은 3층 건물이었다. 1층은 원탁테이블 8개, 2층은 프라이빗룸 12개, 3층은 200~300명이 앉아서 식사가 가능했다. 하루 약 800여명을 수용할 수 있어 공화춘과 중화루보다 규모가 더 컸고 직원 만 해도 12~18명에 달했다.


평화각의 메인 간판은 임자풍(林子豊)선생이 썼고, 식당 출입문 작은 간판은 인천화교학교 교장을 역임한 왕덕릉 선생의 글씨다. 왕덕릉 선생은 글씨를 잘 썼던 것으로 화교들은 기억했다.



1977년 미국 이민… 애틀란타서 다시 평화각 열어


주명철에 이어 평화각을 운영한 사람은 그의 아들인 주대유였다. 그는 70년대 인천화교사회 발전을 주도했다. 70~74년 인천화교협회 회장을 지냈고, 인천화교학교 이사장을 역임하면서 인천화교들의 권익과 화교와 대만과의 유대관계 증진, 화교들이 인천에서 사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행정적 지원에 앞장섰다.


구순을 바라보는 주대유씨는 “화교협회 회장을 하면서 화교들의 주례를 많이 섰는데 사람들의 인연을 이어주고 축복해 주었던 것을 인생에서 가장 보람된 일로 여긴다 ”고 말했다.


평화각의 주대유씨 가족이 이민을 가게 된 배경은 한국 정부의 각종 규제와 화교차별 정책이 큰 원인이었다. 제2차 화폐개혁과 박정희 대통령 시절 단행된 외국인 토지 취득 및 관리에 관한 법으로 한국에서 경제활동이 어렵다고 판단한 화교들 중엔 이 시기 미국, 대만 등으로 이민을 떠난 사람들이 많다. 주대유씨도 마찬가지였다.


평화각 운영자였던 주대유옹​. 그는 현재 미국 애틀란타에서 아들과 함께 평화각을 운영하고 있다.

주대유씨 가족이 평화각에서 촬영한 가족사진

미국 애틀란타에 있는 평화각


주대유씨는 77년 코스타리카를 거쳐 미국으로 들어갔고, 1980년 미국 애틀란타에서 다시 평화각을 열었다. 미국에서도 평화각은 여전히 인기있는 중국집이다.


평화각을 운영했던 주대유 사장은 50여년 정도 운영한 평화각이 없어진 현실이 안타깝지만 그 당시에는 그 결정이 최선이었다고 술회했다.


현재 평화각은 없어졌지만 아직도 평화각을 기억하는 인천시민들은 많다. 그 시절. 인천사람들의 소중한 추억과 기억이 사라져 버린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다.

글  이용남 i-View 편집위원, 사진 부극정, 주기이 제공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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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1-01 04:21:01.0

    과거는 늘 아쉬움만 남네요. 평화각, 사진만으로도 당시의 한국이 얼마나 쓸쓸한 나라였나 싶네요. 평화각 주인장이 최선을 택한것을 보면... 평화가 그립던 시절이었죠. 지금도 우리들은 평화가 그립지만, 언제나 다가올지....? 타지에서 고생을 많이 격은 주 사장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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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2-31 10:14:05.0

    처음 들어보지만 간판이나 외관이 참 고급지네요. 간판만 봐도 음식맛이 실망스럽지 않게 생겼어요. 맛이라도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인천에 너무 늦게 왔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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