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이야기

[인천 이야기] 계급도, 군번도 없던 소년들, 조국수호 별이 되다

발간일 2020.06.29 (월) 16:58

6.25 전쟁의 숨은 주역 유격백마부대(켈로부대)


제70주기 유격백마부대 희생자 추도식


6월은 호국의 달이고 지난 6월 25일은 한국전쟁 7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코로나19로 기념식이 축소되거나 취소되는 상황에서 눈에 띄는 행사가 있었다. 

인천시 중구 용유동 유격백마부대 충혼탑에서 열린 ‘제70주기 유격백마부대 희생자 추도식’은 잊혀져가는 역사를 잇고자하는 소망의 행사였다.



팔미도 등대와 켈로부대


인천에서 직선거리로 9㎞가량 떨어진 섬 팔미도는 면적 0.23㎢에 불과한 작은 섬이다. 작은 섬이 우리 입에 오르내리는 이유는 국내 최초 등대 ‘팔미도 등대’ 가 있기 때문이다. 팔미도 등대의 불빛은 인천상륙작전 때 연합군 길잡이 역할을 해 한국전쟁 전세를 뒤집었다.


그 이유로 국가지정문화재(사적)로 지정될 예정이다. 지난 27일 문화재청은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당시 연합군함대를 인천으로 진입할 수 있도록 인도해 6·25전쟁의 국면을 일시에 뒤바꾸는 데 이바지한 역사와 상징적 가치가 있다며 문화재 지정예고 이유를 밝혔다.


문화재청이 국가지정문화재(사적)으로 지정 예고한 인천 팔미도 등대.
(사진=인천 중구 제공)

팔미도 등대 중심에는 미군이 조직한 첩보부대 ‘켈로(KLO)부대가 있다.

6·25 전쟁 당시 낙동강에서 방어 전선을 펼치던 연합군은 전세를 역전하기 위해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했고, 이때 팔미도 등대가 상륙 함대를 유도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켈로부대 정예 대원 6명은 1950년 9월 15일 0시를 기해 팔미도 등대를 점령하라는 임무를 받았고, 이들은 전날 저녁 팔미도 잠입에 성공했다.


대원들은 팔미도를 수비하던 북한군과의 교전에서 승리해 9월14일 오후 11시45분 상륙작전의 서막을 알린 점등에 성공했다. 1950년 9월 15일 불을 밝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영화 '인천상륙작전' 스틸컷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이후 인천 용유도에서 찍은 켈로부대 ‘8240유격백마부대’의 단체사진.
(사진=최성룡 켈로부대 ‘8240유격백마부대’ 전우회장 제공​)

‘KLO’는 ‘주한첩보연락처’(Korea Liaison Office)를 줄인 것으로, 미국 극동군 사령부가 운용한 한국인 특수부대 ‘8240부대’를 의미한다. 일명 ‘켈로부대’라 불리는 KLO는 1949년 주한미군이 전투병력을 철수하면서 첩보 수집을 위해 창설된 비정규전 부대다.

'주한 연락처(Korea Liaison Office)'라는 의미의 KLO 이니셜이 한국어 발음에 의해 ‘켈로부대’라고 불리게 됐다.

‘켈로부대’는 1949년 6월 1일 미국 극동군사령부가 북한지역 출신자를 중심으로 조직한 북파 공작 첩보부대다. ‘켈로부대’는 특정한 부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그 당시 ‘주한 첩보연락처, 주한국연락반’ 산하에 있던 10여 개의 부대(동키, 레오파드, Y 부대, 유격백마부대 등)를 총칭한다.

한국전쟁 동안 수많은 비밀작전을 수행하며 무수히 많은 희생을 치렀지만 부대 특성상 지금까지도 많은 부분이 공개되지 않는 이유다. 6·25 전쟁 당시 팔미도 등대 점등 작전, 강원 화천발전소 탈환작전 등에서 큰 공을 세웠지만 비정규군에다 기록이 많지 않아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 미군의 기밀로 취급되어 있는 것이 원인이다.



켈로부대 전신(前身)은 오산학교 학생들로 조직된 치안대


유격백마부대의 전신은 평북 정주군 일대 13개 면에 조직된 치안대였다.


유엔군이 북으로 진주할 때 평북 정주군 오산학교 학생들은 향토사수와 자유를 외치며 치안대를 조직, 중공군과 목숨 건 사투를 벌였다. 훈련도 받은 적이 없던 학생들이 무기 없이 중공군에 대항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위기에 몰린 치안대들은 1950년 11월 22일 각산면 본저리로 집결, 이곳서 육군본부 G2요원 김응수 씨를 부대장으로 추대하고 유격백마부대를 창설한다.

▲한국전쟁 당시 미 극동공군 소속 6006부대(네코부대) 부대원들이 인천 월미도에서 1954년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기념사진. 켈로부대원이었던 故 최원모 씨(오른쪽 화살표)와 신중호 씨(왼쪽 화살표)는 켈로부대 해체 후 6006부대에서도 활동했다. (사진=최성룡 켈로부대 ‘8240유격백마부대’ 전우회장 제공​)

한국전쟁 당시 인원과 복장을 점검하는 모습(국가기록원 제공)

부대를 창설한 직후 11월 26일 유격백마부대는 본저리에서 ‘애도’로 거처를 옮긴다. 일단 중공군의 공세를 피하고 전투부대로서의 편제와 조직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애도’로 들어간 유격백마부대원들은 방어진지 구축과 병력배치 등 군대의 면모를 갖춰나갔다.

인민군과 몇 차례 교전을 벌이며 애도를 지키던 유격백마부대는 식량 사정 때문에 ‘애도’를 떠난다. ‘애도’를 떠나 1951년 2월26일에 황해도 ‘초도’에 도착한 유격백마부대는 그곳에서 활동하던 구월산 부대와 연합으로 적진 침투 등 전투를 벌였다.

한편 미군은 서해 도서지역에서 막강한 전투력으로 공산군을 공격하던 유격부대 전투능력을 알게 된다. 1951년 3월 유격백마부대를 미 극동군표기지 사령부 동키 제 15연대로 편입시킨다.

유격백마부대가 활동했던 지역​.

대화도를 비롯한 최북단 섬 12개 도서를 유격백마부대가 점령하고 있었다. 공산군의 목표가 백마부대가 될 수밖에 없었다. 1951년 10월13일 오후 3시 대화도 북쪽 상공에 대형 폭격기 8대와 미그15기 12대가 출현했다. 적의 대대적인 공중 폭격으로 대화도는 삽시간에 불바다가 됐다. 이날 317명의 부대원과 민간인 39명이 사망했다. 공산군은 11월9일에는 미그기 편대를 동원해 야간공습을 해왔다. 다음날에는 유격백마부대 제3연대가 주둔하고 있는 백마부대 최후의 전초기지인 탄도를 공격해 왔다.

1951년 11월30일 우리군은 북위 40도 선상에 있는 최후의 교두보를 적들에게 빼앗기게 된다. 중공군 2개 사단이 대화도를 공격, 이날 전투에서 유격백마부대는 253명의 전사자를 냈고 613명의 중상자가 발생했다.


대화도에 남아 게릴라 활동을 벌이던 50여 명 대원들은 이렇게 하나둘씩 숨져 가고 8명이 남았다. 이들 8명은 다음해인 1952년 4월 하순 구사일생으로 대화도를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유격백마부대원들은 그들을 ‘대화도 탈출 8용사’라고 부른다.


유격백마부대는 휴전협정 1주일 전 그 지역에서 철수해 인천 앞바다에 있는 용유도로 주둔지를 옮겼다. 1954년 2월26일 우리나라 전체 유격대가 해산됨으로써 유격백마부대의 역사도 막을 내렸다.


이후, 국군에 계속 남은 켈로부대 출신자들을 중심으로 1958년에 제1공수특전단이 창설됐고, 이들이 대한민국 육군 특수전사령부에 편입되게 된다.




켈로부대 마지막 주둔지였던 인천시 중구 용유동 


지난 6월 25일 인천시 중구 용유동에 위치한 유격백마부대 충혼탑에서 조촐한 추도행사가 열렸다. 영종국제도시 지역신문인 ‘영종뉴스(우경원 대표)’ 주관으로 열린 이날 행사에는 용유, 영종지역 단체장과 주민자치위원장, 주민자치회장, 중구 해병전우회원들이 함께 했다.


영종뉴스 우경원 대표는 “켈로부대 마지막 주둔지였던 용유동에서 우연한 기회로 KLO8240 유격백마부대충혼탑‘을 발견하게 됐다" 며 " 2년 전부터 중단된 추도행사를 잇고 싶었다”라며 행사의 목적을 말했다.

김희곤 중구해병전우회 회장은 “보국의 달이지만 관심이 점점 떨어지는 세태에 이렇게 추도식을 갖게 되어 기쁘게 생각한다"며 "선조들의 희생정신으로 되찾을 수 있었던 자유이다. 후손들은 잊지 않고 희생정신을 기억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영종초 46회 졸업생 김종용 씨​.


제70주기 유격백마부대 희생자 추도식


을왕동이 고향인 김종용(중구해병전우회) 씨는 “제가 초등학교 때 켈로부대가 충혼탑 뒤편에 있었으며 이곳에 주둔한 군인 1~2명이 칼빈 총을 메고 다녔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며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이곳을 계속 보존하고 호국영령들 넋을 기리는 것은 남겨진 우리가 당연히 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강동규 을왕동 주민자치위원장은 “당시 유격백마부대가 철수하면서 탑에 별표시만 하고 떠났다고 동네 어르신께 들었다"며 "용유동 입장에서 격식을 차려 그들을 예우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잊혀져가는 것들을 발굴하고 보전하는 것은 남겨진 우리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아쉬운 점은 민간인들의 손에 의해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관에 의해 이뤄진다면 다음 세대로 이어서 기념행사가 이어질 수 있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한편 2018년 6월 25일을 끝으로 KLO8240유격백마부대 전우회(회장 최성룡) 주관, 국가보훈처 인천보훈지청 후원으로 열렸던 추도행사가 사라졌었다.


20대 안팎의 젊은이들이 조국을 지키기 위해 하늘의 별이 된 지 70년이 되었다. 발길 닿기 힘든 비포장도로 후미진 그곳에 세워진 충혼탑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길가는 손들아, 잠시 걸음을 멈추고 스무 살 꽃 같던 목숨을 반공구국에 기꺼이 바친 뜻을 새기고 넋을 기려다오’

이현주 I-VIEW기자 o7004@naver.com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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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7-01 22:47:08.0

    충성!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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