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 칼럼

[기획 · 칼럼] 26년간 450편 영화감상·10여개 극장 운영한 '인천 전설들'

발간일 2022.01.17 (월) 15:31

 

애관(愛觀)의 도시, 인천의 극장사 ㊿
인천 영화광 이광환과 극장왕 유제환

인천에서 태어나 초중고 학창시절을 보냈고 결혼도 인천에서 했다. 당연히 인천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다큐멘터리 촬영을 하면서 느낀 점은 정작 인천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학창시절 자주 갔던 애관극장이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 정확히 말하자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극장이라는 사실을 불과 5년 전에 알 정도였다. 몇몇 분들에게 이를 여쭤보니 알고 계신 분들이 적었고 애관극장과 함께 자주 갔던 현대극장, 미림극장, 오성극장, 인천극장, 자유극장 등등 사라진 옛 극장들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본 칼럼을 통해 사라진 인천의 옛 극장들이 인천시민 개인에게는 추억이었으며, 인천에는 평생 친구였고 우리나라에는 역사였다는 것을 조명하고자 한다.

영화광 이광환


▲ 2014년 송현동에 있는 수도국산박물관에서는 특별전시로 ‘인천의 영화광’을 개최했다. 사진은 수도국산박물관.


2014년 송현동에 있는 수도국산박물관에서 특별기획전시로 ‘인천의 영화광’을 개최했다. 인천의 영화 산업을 재조명하는 시간으로 영화광이었던 故이광환 씨의 일기자료와 1945년부터 1970년까지 인천에서 상영된 흥행영화 포스터들을 전시했다. 이광환의 일기에는 총 26년 동안 450여 편의 영화가 기록되어있었다. 많은 인천 시민들이 영화를 좋아했지만, 이광환이야말로 진정한 인천의 영화광이었다.


▲ 이광환 (제공 이광환 유가족, 수도국산박물관)


이광환은 송현동에 살았는데 전동변전소 직원이었다.




▲ 이광환 일기. 제공 이광환 유가족, 수도국산박물관


그는 1945년 1월부터 1970년 12월까지 총 456편의 영화를 보고 기록했다.


▲ 이광환 일기 중에서 영화 본 것을 간추린 것. (제공 수도국산박물관)


그중 애관극장에서 92편을 보았다. 일기 중 몇 글을 소개한다.


▲ 풍운의 젠다성 포스터


"1955년 7월 19일. 풍운의 젠다성. 동방극장

비는 내리고 점심시간이 되니 밥보다는 영화 구경을 더 하고 싶어서 동료들과 함께 점심시간을 넘겨 조마조마한 불안한 마음으로 감상하였다.“

이광환은 점심시간에 밥대신 영화를 볼 정도로 영화를 좋아했다. 그런데 직장인 입장에서 점심시간을 넘겨서 영화를 보고 있으니 일기 그대로 조마조마했을 것이다.


▲ 타이콘데로가의 요새 광고, 출처 한국영상자료원


"1955년 11월 2일. 타이콘데로가의 요새(입체영화). 미국영화. 애관극장

입체영화가 서울에서 상영된 후 처음으로 인천 애관에서 상영하게 되어 회사에서 퇴근하자 이호균, 변군과 같이 애관에 들어가 처음으로 미국 입체영화 타이콘데로가의 요새를 감상하였다. 입장료는 안경대 50환을 포함하여 850환이었으며 ​안경을 쓰고 보니 과연 입체감이 났고 날아오는 화살과 도끼에 몇 번이나 깜짝깜짝 놀랐다."


이광환 일기에는 단순한 사적인 영화감상을 뛰어넘어 곳곳에 인천 극장사의 흔적이 남아있다. 애관극장에서 인천 최초로 입체영화가 상영된 것을 알 수가 있다.


▲ 사랑 포스터


"1957년 2월 18일 월요일. 날씨 눈 온 후 맑음

송학동에 있는 카바레 댄스홀에서 신광영화사가 촬영하는 영화, 춘원작 '사랑'​의 한 장면을 보았다. 촬영장에는 감독 이강천, 배우 나애심, 안나영 등이 있었다.​"


​"1957년 6월 4일. 사랑. 신광영화사. 애관극장

이 영화는 인천에서 지난 겨울에 촬영한 것이라 더욱 보고 싶었다. 로케이션할 때 현장에서 실지로 본 장면이 많기 때문이었다.​"

​이강천 감독의 ‘사랑’은 김진규, 허장강 등이 출연했는데 인천에서 인천 스텝들이 합숙하며 촬영한 영화였다. 인천제철 앞 이화창고에서 병원 내부를 세트로 지어서 촬영했다.


▲ 세일즈맨의 죽음, 출처 한국영상자료원


"1958년 2월 28일. 세일즈맨의 죽음. 미국 콜롬비아사. 동방극장

여지껏 영화감상을 한 중에 제일 감격의 느낌을 주는 영화였다. 월급쟁이는 동서간에 있어 미국인도 마찬가지이니 참으로 한심하였으며 영화의 한 장면 한 장면이 눈물을 나오게 하였으며 가슴을 뭉클하게 하였다."


한 가정의 가장이었고 직장인으로 살아갔던 이광환의 심정이 잘 묻어나오는 대목이다.


▲ 이현식 문학평론가


이현식 문학평론가는 이광환 일기의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이 일기장은 한국영화사 연구에도 매우 중요한 기록일 것 같다. 특히 한국 영화 이외에 수입 영화에 대한 기록이 변변치 못한 상황에서 이런 기록은 사료적 가치가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국영화사 연구에서 수입된 영화에 대한 실증적 자료가 정리된 것은 아직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 기록장에는 영화 제목 이외에도 제작국이나 제작사, 배우와 출연진, 영화를 본 영화관이 기록되어있다. 1945년 1월부터 기록되어있어서 해방 전에 상영된 외국 영화와 일본 영화에 대한 정보도 일부 얻을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영화가 소시민인 이광환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취미이고 생활의 여유를 찾을 수 있는 즐거움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영화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에게 정도의 차이는 있었을지라도 크게 다르지 않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 당시 사람들은 영화를 보며 감동하고 즐거워했으며 일상의 복잡한 일들에서 벗어나 자신을 사색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을 터이며 이광환 씨도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극장왕 유제환


▲ 인천의 극장왕이라 불린 유제환. 그는 인천극장을 시작으로 중앙극장, MAC9, 백마극장, 한일극장, 서울 청량리 대왕극장, 부천 신세계극장 등을 운영했으며 영화사를 설립하여 영화제작까지 했던 진정한 극장왕이었다. 출처 미추홀구 학산문화원


인천의 영화광, 이광환 선생이 있었다면 인천의 극장왕은 유제환이었다. 그는 인천극장을 시작으로 중앙극장, MAC9, 백마극장, 한일극장, 서울 청량리 대왕극장, 부천 신세계극장 등을 운영했으며 영화사를 설립하여 영화제작까지 했던 진정한 극장왕이었다. 유제환은 생전 학산문화원 초대 원장을 역임했고 학산문화원에서 발행한 ‘주안 역사, 공간, 일상’이란 책자에 실린 그의 구술 기록을 바탕으로 유제환을 소개하겠다.


▲ 1959년 인천극장


유제환은 1945년 고향인 충청도를 떠나 인천으로 올라왔다. 그때 그의 나이가 14세였다. 중앙동에서 가게를 했던 그의 삼촌 일을 도왔고 한국전쟁 때 자원입대를 했다. 제대 후에는 다시 인천으로 돌아와 신흥동에서 시멘트 가게를 했다.


그때 가게에 인천극장을 하는 사람이 시멘트를 사러 왔는데 우연히 그 사람과 대화 중에 인천극장이 화재가 났는데 그걸 복구해서 경영할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 그때 유제환은 어느 정도의 돈이 있어서 인천극장을 인수하였다. 그게 유제환의 극장업 시작이었다. 인천극장의 전신은 시민극장이었는데 1955년 김태훈이 세운 것으로 1956년 화재로 전소되었고 1957년 시민극장 터에 인천극장이 신축되었다.


▲ 1968년 슬픔은 파도를 넘어 신문광고


유제환은 15년 동안 인천극장을 운영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서울의 영화계와 인연이 닿았고 그는 신필름과 연결하여 영화판권 사업을 했다. 경기도와 강원도의 영화 배급권을 사서 영화업을 시작한 것이다. 당시 인천은 경기도에 속했다. 1964년에는 유한영화사를 설립했다.


영화 배급도 하면서 영화제작까지 하기 위해 만든 영화사였다. ‘아빠는 크레이지 보이’, ‘슬픔은 파도를 넘어’ 등 10여 편을 제작했다. ‘슬픔은 파도를 넘어’는 1968년 개봉한 영화로 신성일, 윤정희 등이 출연했다. 1969년에 대만에서도 개봉되어 흥행에 성공한 영화였다.


▲ 백마극장 1972년, 출처 국가기록원

 


▲ 대왕극장 1970년대


유제환은 계속 인천극장을 운영하면서 1975년에 부평 백마극장과 서울 청량리 대왕극장을 인수했다. 백마극장이 있던 산곡동은 부평의 원도심과 같은 곳으로 일제강점기에 조병창이 들어섰고 해방 후 미군기지가 생기면서 클럽과 술집, 다방이 즐비했던 최대 번화가였다.
 


▲ 한일극장 자리였던 곳


용현동 한일극장과 부천의 신세계극장도 유제환의 소유였다. 한일극장은 1964년에 세워진 극장인데 특이하게도 용현시장 한가운데 있었다.
 


▲ 주안에 있던 아폴로극장. 출처 인천시청기록관.

 


▲ 중앙극장 (출처 인천대관 1979년)


주안에 있었던 아폴로극장이 인천시 도시계획에 따라 도로 앞 10m가 철거되면서 유제환은 그 극장을 매입, 수리하여 1976년 12월에 중앙극장을 개관했다. 그 당시 극장 주변엔 건물도 없었고 아주 한산했었다. 그런데 극장 주변에 단독주택단지가 많이 들어설 예정이라는 소식을 듣고 당장은 어렵더라도 앞으로 극장이 잘 될 것으로 예측했다.


중앙극장이 개관한 다음, 극장 맞은편에 제일시장이 생겼고 그 옆에 도화시장도 생겨났다. 초창기에는 중앙극장이 있는 곳이 변두리로 취급받아 배급사에서 좋은 영화를 주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경광영화사라는 큰 배급사를 운영하던 이태원 사장을 알게 되었고 그를 통해 중앙극장이 점차 자리를 잡게 되었다. 1980년대에는 인천에서 제일 수입이 좋은 극장이기도 했다.


▲ 로보트 태권V 포스터


유제환의 구술 기록에 따르면 1976년 중앙극장에서 ‘로보트 태권V’를 상영할 때 아이들이 어마어마하게 몰려 중앙극장에서 제물포역까지 줄을 섰다고 했다. 1994년에는 중앙극장을 1관, 2관으로 재개관했다. ‘거지왕 김춘삼’이 개관작품이었는데 사람들이 극장이 무너질 정도로 몰려들었다. 20일 동안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했다. 당시 중앙극장 옆으로 15평, 20평의 국민주택들이 몇백 세대가 있었고 인천공고 학생들도 단골 고객이었다. 그러나 1999년 인천CGV14가 구월동에 등장하면서 인천의 극장가는 초토화되었고 중앙극장도 2002년 문을 닫고 말았다.


▲ 2004년 주안역 앞에 있던 극장 MAC9. 맥나인, 출처 인천일보


그러나 극장왕답게 유제환은 주저앉지 않고 2004년 주안역 앞에 MAC9을 설립했다. 이름 그대로 9관까지 있었고 좌석수가 1171석이었다. 본격적으로 CGV인천14와 정면승부에 나선 것이다. 특히 THX 사운드 인증관으로 유명해서 멀리서 영화광들이 일부러 찾아올 정도였다. 그러나 2006년 프리머스 주안으로 변경되었고 그 후 1년도 못 되어 폐관되었다.
 


▲ 미추홀구가 전국최초로 예술영화관으로 운영하고 있는 영화공간주안


2007년에 미추홀구는 극장을 인수하여 영화공간주안을 설립했다. 지자체가 만든 전국 최초의 예술영화관이 되었다.


유제환은 인천극장, 한일극장, 청량리 대왕극장, 부천 신세계극장, 백마극장, 중앙극장, MAC9 등 수많은 극장을 운영했으며 영화배급과 영화제작까지 했던 인천의 진정한 극장왕이었다. 그 후 그는 학산문화원 초대 원장으로 일하면서 학산소극장을 개원하기도 했다. 유제환은 2005년에 별세했다.


▲ 유제환이 인천에서 운영했던 극장들


글·사진 윤기형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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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2-08 09:38:29.0

    유제환씨는 맥나인 개관으로 CGV를 극복하려고
    나름 노력하신 영원한 인천극장사에 남을 인물이시다.그러므로 주안의 "영화공간 주안"은 그 분의 마지막 유물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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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1-18 09:01:40.0

    잠시나마 추억에 잠겨보았네요...좋은 글 감사합니다.^^

    수정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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