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 칼럼

[기획 · 칼럼] 인천 어린이 문화공연, 서울보다 앞섰다!

발간일 2021.07.21 (수) 15:31


윤중강의 인천국악로드 ⑮
  ‘인천가나리아회’와 ‘화평리소년회’ 활약​​


​국악에는 시민들의 삶에서 묻어나오는 희로애락이 진솔하게 담겨있다.  2021년 신축년을 맞아 시민들의 가슴속에서 울고 웃고, 신명나게 놀았던 인천국악의 숨겨진 이야기들을 연재한다.



▲1921년 8월 26일 제물포구락부에는 인천의 유지들이 모여 새롭게 부임한 일본인 인천부윤을 환영하는 행사를 열었다. 사진은 옛날 제물포구락부 모습.


1921년 8월 26일, 제물포구락부에 인천의 유지 150명이 모였다. 새롭게 부임한 인천부윤 (현, 인천시장)인 후카가와 덴지로(深川傳次郞)를 환영하는 자리였다. 환영피로연은 7시부터 시작해서 10시가 넘어서 끝났다. 여기서 가무(歌舞)가 빠질 수 없었다. 용동권번(龍洞券番)의 예기(藝妓)들의 공연이 큰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왜 그렇게 짐작할 수 있었을까?



▲인천공회당 은 1923년 2월 1일 낙성식을 가졌다. 사진은 낙성식을 알리는 신문기사.


1923년 2월 1일, 인천공회당(仁川公會堂)이 낙성되었다. 오후 5시 10분에서 시작해서 6시 50분까지, 낙성식은 짧게 끝났다. 인천의 유지 200명을 초대한 낙성식에, ‘예기의 여흥’이 함께 했다는 기사가 남아있다. 용동권번(용리 171번지)의 예기(藝妓)들이 출연해서, 딱딱한 낙성식을 즐거운 자리로 만들어주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인천공회당이 생기면서 인천은 서울에 못지않은 문화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 인천공회당는 당시 인천의 복합문화공간으로 사용됐다. 위 사진은 일제강점기 시절 모습과 아래 사진은 인천부사에 실린 1934년 인천공회당 모습.


1920년 7월 10일에는 경성공회당이 새롭게 건립되었다. 인천사람들이 이를 부러워했음은 당연하다. 인천부(仁川府)도 인천공회당이 생김으로서 문화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일본인 
후카가와 덴지로는 햇수로 3년간 인천부윤을 지냈다. 그는 1923년 4월 27일, 중추원 서기관으로 임명되어서 인천을 떠나게 되었는데, 그를 위한 송별회가 열린 장소도 인천공회당이다.


당시 인천사람은 인천공회당을 ‘산수정(山手町) 공회당’으로 불렀다. 경성사람이 경성공회당을 ‘장곡천정(長谷川町) 공회당’이라고 불렀던 것과 같다. 경성의 장곡천정(소공동)과 인천의 산수정(송학동)에 공회당이 생김으로서, 그 지역의 문화적인 위상도 높아졌다.
 


▲인천시민관의 전신은 인천부공회당이다. 사진은 인천시민관에서 개최된  근로자 위안 공연 장면이다.


그 시절의 공회당(公會堂)은 복합문화공간이었다. 음악, 무용, 연극은 물론이요, 정치적 목적의 사상 강연을 비롯, 천연두 백신 종두를 맞는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여기서도 구악(舊樂, 전통음악)에 기본을 둔 무도(舞蹈, 무용)가 인기를 끌었다. 인천공회당에 예기(藝妓)들이 종종 출연했는데, 어떤 레퍼토리였는지는 더 밝혀내야 한다.


▲현재 인성여고 다목적홀. 이곳에 인천공회당이 있었다.


송학동 3가에 위치한 인천공회당은 현재 인성여고 소유의 다목적홀로 바뀌었다. 192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인천 공연문화의 중심이 인천공회당(인천시민관)이다. 여기서 특히 어린이가 중심이 된 공연이 활발했다는 것을 인천시민과 타 도시에 널리 알려야 할 특이하고 재미있는 사실이다.

1924년부터 1928년까지, 인천에선 어린이의 공연이 매우 활발했다. 서울(경성)보다 더 활발했는지 모른다. 인천공회당에서 ‘소년의 유희(遊戲) 수종(數種)’을 보면서 즐거워했다는 기사가 남아있다. 당시엔 이를 동요, 동극(가극), 무도(무용)라고 불렀다.

1924년 7월 24일, 인천에서 ‘동화극대회’가 열렸다. 빈정(사동)에 있는 가부키좌 (歌舞技座)에서 열렸다. 동화극 ‘만월(滿月)의 밤(夜)’, ‘고양이’와 함께, 악기 명칭인 양금(洋琴)이란 용어가 보인다. 현재 국악기에서 사용하는 양금(洋琴)인지는 확인할 길은 없으나, 그 시절의 공연의 한 형태를 짐작하게 한다.
 


서울에선 ‘딸리아(Dahlia)회’가 조직(1925년)된 후, 바로 인천에선 뜻있는 청년을 중심으로 ‘가나리아(canary)회’를 발족(1926년)했다. 가나리아회는 내리교회(내리예배당)과 영화학교와 연관된다.  매주 토요일밤 내리예배당에 모여서 ‘동화동요회’를 열었다 사진은 1928년의 내리교회 모습.


이후 당시 조선의 도시에선, 서서히 어린이 운동이 일어난다. 서울에선 ‘딸리아(Dahlia)회’가 조직(1925년)된 후, 바로 인천에선 뜻있는 청년을 중심으로 ‘가나리아(canary)회’를 발족(1926년)한다. 가나리아회는 내리교회(내리예배당)과 영화학교와 연관된다. 아이들이 지속적인 참여하기 위해서, 매주 크로스워드(crossword)를 내어주고 다음 주에 정답을 알려주는 전략(?)으로 매우 진행하였다고 한다. 매주 토요일 밤 내리예배당에 모여서 ‘동화동요회’를 열었다. 이를 통해서 인천출신 어린이들의 공연단이 만들어진다. 이들은 인천은 물론 부평, 소사, 영등포, 노량진, 시흥 등지를 돌면서 공연 했다.

‘인천가나리아회‘의 노래하고 춤추고 극을 공연하는 모습은 마치 귀엽고 앙증맞은 카나리아새(canary)와 같지 않았을까? 당시 인천에는 또한 화평리소년회(1927년 창단)도 창단되어서, 인천공회당에서 공연을 했다. 단체의 이름에 알 수 있듯이, 화평동(화평리)에 사는 소년들만으로 구성된 단체다. 이외에도 꽃별회, 엡윗소년회, 인우(仁友소년회), 인천소년군본부 등이 인천의 소년중심의 단체가 활약했다.

1928년 1월 14일, 소년소녀음악무도가극대회(少年少女音樂舞蹈歌劇大會)가 인천공회당에서 열렸다. ‘모양 빠진 선생(先生), ‘동전 한 푼’, ‘잊을 소냐 동무여!’라는 동극(童劇)과 함께. ‘사무치는 마음’ ‘황금배(黃金舟)의 행로’라는 유희(遊戲) 등을 공연했다. ‘어린이 뮤지컬’의 초기 형태로 짐작이 간다.

1928년 5월 5일, 화평리소년회 창립 1주년 기념 동화극(童話劇)이 산수정공회당에서 열렸다. ‘어린이데이’ 제정을 기념도 겸한 이 공연에는 인천청년동맹 화평리반원 전부가 참석해서 성황을 이루었다. 한네레의 승천 (고장환 각색), 산도령의 유리구두 (손계산 각색), 맘의 꽃 (양백화 각색) 등의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당시의 어린이들이 부른 노래는 반달(윤극영 작곡)과 같은 노래로, 아리랑 도라지 양산도 등의 민요와, 이런 민요적 정서가 담긴 동요를 어린이들의 불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시기에는 이런 노래가 태동이 되었고, 그런 노래들은 이후 그리운 강남(안기영작곡, 1929년)과 방아 찧은 색시의 노래(홍난파 작곡, 1930년)과 같은 민요풍 가곡으로 이어진다.
 


▲잡화점 희문당 광고 사진


희문당(喜文堂)은 유명하다. 그 시절 이런 공연의 티켓을 살 수 있는 곳, 곧 당시 표현대로 회원권 교부처가 희문당이었다. 희문당의 주인 윤병희는 아무리 어린 아이가 손님으로 와도 꼭 존대말을 했던 것으로 유명한다. 이 얘기는 인천토박이들이라면 누구나 알지만, 싸리재에서 반평생을 살았던 내 외할머니가 종종 하시던 말씀이다.

당시 외리(경동) 170번지에 있었던 희문당은 인천의 어린이 관련 공연의 티켓 판매처이자 또한 후원자였다. ‘희문당’이란 인천에서 가장 유명한 문구점과 당시 인천에서 펼친 어린이공연물에 대해서 누가 기억을 할까? 아쉽게도 이 당시를 증언해줄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일말의 기대를 하게 된다. 인천의 오래된 가게 ‘칠성문구사’의 주인은 희문당을 통해서 문구업을 알게 된 분이다. 칠성문구사(1961년)의 주인 이칠성(1938년생)이 혹시 희문당의 주인 윤병희에게 들을 이야기는 없을까?

인천의 오래된 가게 ‘칠성문구사’의 주인은 희문당을 통해서 문구업을 알게 됐다. 칠성문구사(1961년)의 주인 이칠성(1938년생)이 혹시 희문당의 주인 윤병희에게 들을 이야기는 없을지 궁금해진다.

인천은 이렇게 빨랐다. 인천은 또 이렇게 활발했다. 훗날의 선명회 월드비전 합창단(1960년 창단)과 리틀엔젤스 예술단(1962년 창단)에 비교될 수 있는 어린이공연단체가 1920년대 중반에 인천은 물론 여러 지역을 순회하면서 인기를 끌었다니, 인천시민으로서 가슴 뿌듯해진다.

그 시절 어린이를 위한 운동을 주도한 인물로, 서울에는 안석주(1901~1950) 윤극영 (1903~1988) 등이 있고, ‘대구 가나리아회’와 연관된 윤복진 (1907 ~ 1991)이 있다. 인천에도 분명 그런 역할을 한 청년 선각자가 있었다. 그들을 밝혀내는 것이, 앞으로 인천사람의 행복한 숙제다. (*)

글· 사진 윤중강 문화재위원, 국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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