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 칼럼

[기획 · 칼럼] 고급사교장에 국악이 울려퍼진 까닭

발간일 2021.06.09 (수) 14:55


​윤중강의 인천국악로드 ⑬
송학장의 숨은 이야기​ <1>


​국악에는 시민들의 삶에서 묻어나오는 희로애락이 진솔하게 담겨있다.  2021년 신축년을 맞아 시민들의 가슴속에서 울고 웃고, 신명나게 놀았던 인천국악의 숨겨진 이야기들을 연재한다.


‘모란’으로 불렸다. 그녀를 모두 그리 불렀다.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몰랐다. 굳이 알려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여기를 송학장(인천시 중구 송학동 1가 2-2번지)이라 했다.​



▲옛 송학동 시장관사 전경​. 송학동 시장관사는  오래전에 송학장이라는 고급사교장으로 불리우며, 한국을 대표하는 국악인들이 국악공연을 벌였다 .




송악장의 주인은 '모란'으로 불렸던 풍류여걸 김복순 


모란은 여걸이었다. 풍류여걸(風流女傑)이라 해야 할까? 인천에서 풍류 좀 안다는 사람치고, 모란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모란을 통해서 사람들은 서로 친숙해졌다. 송학장은 인천에서 영향력을 좀 행사하는 사람들이 드나드는 공간이었다. 어디 인천뿐인가? 서울이나 지방의 유명한 정· 재계인사도 왔고, 당시 유명 국악인들이 인천에 오면 송학장에 들렀다. 이들은 송학장에서 며칠씩 묶으면서 소리판을 벌이기도 했다.


▲송악장의 주인이었던 모란 김복순.​ 풍류여걸이었던 송학장의 주인 김복순은 한국을 대표하는 명인, 명창들이 이곳에 오면 극진히 대접했다.


1950년대의 송학장이 그랬다. 아쉽게도 사진이나 기록이 없다. 정식 공연장도 아니었기에 팜플릿 같은 것이 남아 있을 리 없다. 그러나 참으로 다행이다. 송학장에서 6~7년을 살았던 분이 계시다. 현재 무용계에서 큰 역할을 하는 예인(藝人)으로, 이매방류 승무와 이매방류 살풀이를 올곧게 이어가는 김명자(국가무형문화재 승무 전승교육사)가 송학장을 아주 잘 알고 있다.

 

김명자의 고모가 모란이다. 김명자를 통해 모란의 실체도 좀 더 분명해진다. 모란의 본명은 ‘김복순’. 경상남도 의령이 고향인 그녀가 인천에 온 것은 정확하지 않지만, 광복 이후로 짐작된다. 모란은 인천에서 인천상륙작전을 실제 경험했다. 김명자(본명 김정수)는 전쟁의 혼란 속에서 경상도의 몇 몇 도시를 전전하다 아버지의 권유로 인천에 왔다. 그 곳이 송학장이었다. 1951년쯤이다.


“초등학교 2학년 육이오(한국전쟁)을 만나 대구로 부산으로 고난의 피난 생활이 시작되면서, 인천상륙작전 당시 인천에 살고 계셨던 막내 고모 곁으로 와  그분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해방후엔 ‘동양장’레스토랑, 사교장으로 활용


‘김명자의 춤’(1994.12.1, 부산문화회관) 팜플릿에서, 그녀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고한다.

김명자가 처음 본 송학장의 느낌은 일본 양식의 아름다운 집이었다. 알려진 대로 코노 다케노스케 (洞野竹之助)의 별장이다. 포목장사로 큰 돈을 벌었고, 매우 공들여서 별장같은 저택을 지었다. 내부는 일본식과 서양식이 공존하고, 외부는 전형적인 일본 정원의 느낌을 살린 저택이었다. 해방 후 ‘동양장’이란 레스토랑이었다고도 한다. 김명자가 기억하는 ‘송학장’은 고급 사교장이다.

인천이란 낯선 곳에서 부모와 떨어져 살게 된 김명자가 이 집(송학장)과 인천이 좋아진 건, 여기서 국악인의 풍류가 심심치 않게 펼쳐졌기 때문이다. 그녀가 국악의 길로 들어서게 된 계기도, 송학장의 풍류를 가까이서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명자 선생. 그는 한국전쟁(인천상륙작전)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송학장에 거주했다. 그녀는 신흥초등학교~ 인천여중~인천여고를 졸업했다.​​​​​ 그는 어린시절 송학장에서 살면서 국악인의 길을 걷게 된 것으로 보인다.​ 우측은 '김명자의 춤' 팜플릿.

 

“매사의 적극적이고 우리 전통예술의 애호가이신 고모님은 어려운 시대 우리 것을 지켜나가는 당대의 예인(藝人)들을 늘 가까이 하시며 거둬주신 분입니다.”


조카 명자가 기억하는 고모 김복순(모란)의 모습이다. 송학장을 대략 아는 사람들은 여길 그저 ‘사교장’으로 불렀다. 틀린 말은 아니다. 송학장 한켠은 서양춤을 추는 고급사교장으로도 쓰였다. 그러나, 실제 송학장은 국악인 악사가 상주해 있던 공간이다. 그들은 정·재계 인사들이 모이는 ‘은밀한’ 자리에서, 국악을 연주했다.

어린 명자는 송학장에서 아쟁, 거문고, 대금(퉁소), 가야금을 처음 보았다. 송학장에는 악사들이 기거하는 남자방과 여자방이 따로 있었다. 어린 명자는 가야금을 연주하는 나이 지긋한 할머니와 한 방을 썼다. 아름다운 모습의 기품있는 할머니가 타는 가야금의 모습을 기억한다. 이제는 그녀도 그 시절 할머니와 비슷한 나이였을 터인데, 그 가야금할머니의 얘기를 할 때면 목소리가 신비롭게 떨린다. 성함을 기억하지 못하는 걸 무척 안타까워했다. 당시 어린 나이에 어른의 성함을 당돌하게 여쭙는 게 쉽지 않았으리라.




송악장에 온 손님과 악사는 누구였을까


김명자가 인천으로 전학을 와서 신흥초등학교를 다닌 기억은 희미하다. 대신 인천여중과 인천여고를 다니면서, 국악을 시작하게 됐던 기억은 생생하다. 송학장의 악사들 덕분에, 풍류의 기본악기가 양금이란 걸 알게 되고, 그 분에게 귀동냥을 하면서 양금을 연주했단다.


▲1930년대 '코노 다케노스케' 별장의 모습을 담은 사진 엽서(큰 사진)와 코노 다케노스케 별장의 대문 모습을 담은 사진 엽서. 지금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인천발전연구원 김창수 인문학센터장 제공)


모두들 궁금해 하실 거다. 그 당시 송학장에 온 사람은 누굴까? 손님은 누구였고, 악사는 누구였을까? 모란 고모가 극진히 모신 손님 중에서, 정치인 정씨도 있었단다. 인천상륙작전과도 연관이 있는 그 분은, 훗날 텔레비전에도 종종 등장을 했다. 인천과 대한민국에서 상류에 속하는 손님이 드나들었던 고급 사교장이었기에, 여기에 와서 ‘공연 아닌 공연’을 하는 분들도 대한민국 최고였다. 


▲한국을 대표하는 명창 임방울. 그는 '쑥대머리'를 잘 불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인천에 오면 송학장에 머물면서 국악공연을 펼쳤다.


임방울(林芳蔚, 1904~1961), 이동안(李東安,1906~1995), 김천흥(金千興,1909~2007)은 지금도 ‘국악의 전설’로 통한다. 이들은 1950년대에 송학장을 찾아온 풍류객(風流客)이다. 그들은 일제강점기에 이름을 날렸지만, 오히려 해방공간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된 분들이다.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에서 젊은 명창으로 소문난 임방울은 ‘쑥대머리’를 잘 부른 명창이다. 화성재인청 출신의 이동안은 일제강점기 대중공연장 ‘광무대’에서 인기스타였다. ‘줄타기’, ‘진쇠춤’, ‘신칼대신무’가 그의 장기였다.

제강점기 조선의 아악(雅樂)을 전수하기 위해서 세워진 이왕직아악부(李王職 雅樂部) 출신의 김천흥은 원래 전공은 해금이다. 그런데 오히려 춤에 큰 관심이 많아서 최승희 계통의 춤을 익혔다. 지금의 많은 무용인들은 김천흥이 그 시절 궁중무용을 했을 것 같지만 아니다. 오히려 김보남이 그 맥을 이었다.


김천흥은 1960년대 초반까지도 민속적인 탈춤으로 이름을 날렸다. 훗날 국립국악원으로 들어가서 조선조의 궁중무용, 곧 정재(呈才)를 복원하고 보급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대한민국 국악인의 상여행렬 중에서 가장 유영한 임방울의 명성을 더 말해서 무엇하랴. 김천흥은 ‘종묘제례악’의 인간문화재로 지정(1964년)을 받았고, 조선조 마지막 재인청 도대방(都大房)을 지낸 이동안은 발탈의 인간문화재로 지정(1983년) 받았다.


송학장에 살았던 김명자 (사진왼쪽, 승무 전승교육사, 고 이매방 명무 아내)와 김소자 (인천출신 무용가)


그렇다면 임방울명창과 같은 대가가 왜 ‘송학장’에 머물렀을까? 그건 대우를 잘 해주는 모란이 있었기에 당연했다. 자신들의 예술(풍류)을 알아주는 인천의 유지가 찾아온다는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짐작되는 게 하나 더 있다.

그 시절엔 인천시민관(현, 인성여자고등학교)에선 대중적인 국악공연이 꽤 있었다. 송학장과 인천시민관은 지척의 거리였는데, 인천시민관에서 공연을 하게 된 명창명인 명무명고가 송학장을 숙소 삼아서 머물게 된 것으로 짐작된다.

매우 아쉽게도 이런 모든 것들이 실제 자료로는 남아 있지 않다. 그 시절을 기억하는 인천토박이들이 말을 전해줄 뿐이다. 그건 당시 인천에서 근처 여고를 다닌 학생들, 나의 할머니 세대의 기억에 존재한다.

인천시민관에서 이은관(배뱅이굿)을 보고, 박천복(장님타령)을 보고 이은주(태평가)를 보고, 또한 중국의 경극배우 ‘매란방’처럼 짙은 화장을 하고 등장한 이매방(장검무)를 보았단다. 인천의 문화인들이 예전의 자료를 찾는데 좀 더 노력을 기울인다면, 인천에서의 국악공연사가 보다 구체화될 것 같다.(송학장이야기는 다음주 17일자에도 계속 이어집니다.)

글·사진 윤중강 문화재위원, 국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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