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

[탐방] 조선 화승총에 쫓겨난 프랑스함대

발간일 2021.04.28 (수) 15:47



②​ 강화읍(중) 외규장각과 병인양요

 

한반도 역사의 축소판. 강화도는 선사 시대 이래 우리나라 역사의 아이콘을 모두 품은 ‘보물섬’입니다. 고인돌, 고려궁지, 외규장각, 광성보, 천주교성지에 이르기까지 강화도엔 지금 반만년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뚜껑 없는 박물관, 역사의 보고. 강화도를 얘기할 때면 언제나처럼 거창한 수식어가 붙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죠.

봄맞이 개편과 함께 i-View가 새 연재를 시작하는 ‘길 위의 강화도’는 5000년 강화도의 역사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에피소드(episode) 중심으로 전개해 나갈 강화도의 신비로운 유적과 유물의 속삭임에 귀 기울여보시기 바랍니다.



정조대왕 서울에 규장각, 강화도에 외규장각 설치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개혁군주로 알려진 정조(1752~1800)대왕은 조선 22대 왕에 즉위하면서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천명한다. 친아버지가 영조에 의해 뒤주 속에 갇혀 죽어간 생부의 권위를 세워야 자신도 정치적 생명을 제대로 이어갈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극심한 당쟁 속, 세손 때부터 외척과 환관 등 반대세력으로부터 여러 차례 생명의 위협을 받은 그로서는 군신관계를 확실하게 정립할 필요가 있었다.


▲외규장각은 프랑스가 천주교박해를 명분으로 침략해온 병인양요(1866) 때 약탈되고 불태워진 왕실도서관이다. 조선군에게 참패한 프랑스군은 이 때 퇴각하면서 외규장각, 장년전은 물론 강화도내 수천 여 민가를 파괴했다. 2021년 봄 외규장각 앞이 방문객들로 붐비고 있다.


정조는 즉위하던 해인 1776년 창덕궁 후원에 ‘규장각’을 설치한다. 학자 양성과 문화 융성, 왕권강화를 위한 기구였다. 규장각의 초기 역할은 역대 왕들의 친필과 서화, 왕실족보 등을 보관하고 관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후 학술·정책 연구기관으로 기능이 확장되면서 과거시험 주관부터 문신교육까지 담당한다. 정약용, 이흥순, 김조순과 같은 젊고 뛰어난 학자들이 규장각에서 성장했고 이들은 훗날 정조의 참모진이 된다.

 

규장각의 역할이 확대되면서 본래 기능을 담당할 제2의 규장각이 필요해졌고, 정조는 6년 뒤인 1782년 2월 강화도에 ‘외규장각’을 세운다. 강화도는 전란과 같은 위태로운 시기 때마다 나라를 지켜낸 보장지처였으므로 왕실도서관을 운영하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외규장각에선 왕의 결혼, 세자책봉, 장례식 등 왕실이나 국가의 주요행사 내용을 정리한 의궤 등 왕실서적 1000여 권을 보관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84년 뒤 외규장각은 불에 타고 서적들은 약탈당한다. 1866년 강화도에선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외규장각 안은 박물관처럼 꾸며놓아 관람을 할 수 있다. 外奎章閣(외규장각) 현판이 반듯하게 빛나고 있다. 




중국과 일본 함포 몇 발에 개항, 조선은 격렬하게 저항 문 못 열고 퇴각


17세기 유럽에서 시작된 제국주의는 18세기 더욱 강화되고 확산된다. 산업혁명에 성공한 프랑스, 독일, 미국 등 서구 열강은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식민지 확보 경쟁에 나선다. 19세기 중후반, 최첨단 무기인 함선과 총포로 무장한 서구열강의 마수는 동북아시아로까지 뻗쳤다.


영국은 1840년 청나라를, 미국은 1853년 일본을 강제로 개항시킨다. 이제 조선의 차례였다. 일본 개항 10년 뒤인 1866년(병인년) 조선으로 온 제국은 프랑스였다.

프랑스는 흥선대원군이 프랑스인 신부 9명을 죽인 천주교박해를 빌미로 조선을 침략해온다. 흥선대원군이 베르뇌 주교를 포함, 조선에서 활동하던 프랑스 신부 9명을 죽이고 천주교도를 처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해 시작한 ‘병인박해’는 1870년까지 계속돼 8000여 명의 천주교도가 목숨을 잃는다.


▲저 아이들은 외규장각에 서린 아픈 역사를 알고 있을까. 2021년 봄, 아이들이 외규장각 앞을 발랄하게 걸어가고 있다.


로즈제독이 이끄는 프랑스함대는 1866년 9월 통진의 문수산성, 10월 강화도 정족산성을 향해 무차별 함포사격을 가한다. “신부 9명을 죽였으니 조선인 9000명을 살해하겠다”고 호언장담한 프랑스군은 그러나 뜻밖의 참패를 당한다.


문수산성에서는 한성근 부대가, 정족산성에서는 양헌수 부대가 프랑스군에 격렬하게 맞섰고, 그 결과 70여 명의 프랑스군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당한 끝에 40일 만에 퇴각한 것이다. 중국과 일본, 조선 세 나라 가운데 서구열강과 전투를 벌여 쫓아낸 나라는 조선이 유일했다.

당시 조선군의 핵심 부대는 백두산에서 호랑이를 때려잡던 범포수들이었다. 화승총 한 자루로 호랑이와 ‘맞장’을 뜨던 호랑이사냥꾼들의 용맹과 투혼 앞에서 파란 눈의 침략자들은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범포수들의 활약은 1871년 미국과 광성보에 맞붙은 신미양요에서도 빛을 발한다.



병인양요 때 후퇴하던 프랑스군 강화도 일대 불태우고 외규장각 도서 약탈


독이 오른 프랑스군은 강화도의 민가들을 불태우고 양민들을 학살한다. 1만 채에 가까웠던 강화도 민가의 절반이 불에 탔고 숙종과 영조 임금의 영정을 모셨던 장년전도 재가 되었다. 외규장각에 보관하던 서적이 약탈당하고 건물이 불에 탄 것도 이 때이다.

외규장각에 들이닥친 프랑스군은 359점을 책을 약탈하고 나머지는 건물과 함께 불에 태워버린다. 프랑스군은 강화 동종도 가져가려 했다. 강화읍내 남문 근처 종각에 매달려 성문이 열리고 닫히는 시간을 알려주던 종이었다. 그러나 너무 무거워 싣고 가던 중 중간에 버리고 떠난다.

▲건물 뒤편에서 바라본 외규장각. 발굴과 고증을 거쳐 2003년 복원한 건물로 오른편에 보이는 나무도 옛 기록에 있는 그대로 심은 것이다. 앞은 강화읍내이다.


병인양요 때 약탈당한 외규장각 도서가 세상에 알려진 건 1975년이다. 프랑스국립도서관 촉탁직원으로 일하던 박병선 박사가 조선시대 도서를 발견해 목록을 정리하며 비로소 존재를 드러낸 것이다.


우리나라 정부는 1992년부터 외규장각 도서의 반환을 프랑스 정부에 지속적으로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5년마다 계약을 갱신하는 영구임대 형식으로 대여하기로 합의한 끝에 2011년 반환됐다.


지금의 외규장각 건물은 2003년 복원한 것이다. 한림대학교 박물관은 1995년~2001년 4차례 발굴조사 끝에 조선시대의 궁전 건물지 위치와 규모, 특징을 파악했고 전문가와 문화재위원회 검토 등을 거쳐 건물을 지었다.


2021년 늦봄에 찾아간 외규장각 앞에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해설사의 얘기에 잔뜩 귀를 기울이고 있다. 양요 때 나라를 지켜내고 스러져간 조선군들의 영혼인 것일까. 포르르, 짹짹짹. 무슨 말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참새 떼가 사람들 사이를 이리저리 날아다닌다.


글·사진  김진국 본지 총괄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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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조선 선조들의 발자취 따라 걸어보아요
- 심도역사문화길


염하에서 불어온 봄바람을 따라 걷기 시작한다. 강화버스터미널에서 10분 정도 걸었을까. 팔작지붕을 한 아치형의 홍예문이 나타난다. 강화내성의 동쪽 문인 ‘강도동문’이다. 내성, 중성, 외성. 대몽항쟁기 고려왕조는 강화도에 3중의 철옹성을 쌓았다. 동문은 가장 안쪽성의 문 가운데 하나다.


조금 더 걸어가자 별채가 오밀조밀 모여 있는 한옥 한 채가 나온다. ‘용흥궁’은 조선 25대 철종이 14살부터 19살 때까지 살던 집이다. 본래 초가집이었으나 철종이 왕이 되어 입궐한 뒤 강화유수 정기세가 기와집을 짓고 용흥궁이란 이름을 붙였다.


용흥궁에서 마주보이는 화려한 한옥은 ‘성공회 강화성당’이다. 지붕은 왕관의 모양으로 건물은 방주를 의미하는 배 모양으로 지었다. 백두산에서 가져온 금강송을 재료로 썼다.


고려궁지를 지나 북서쪽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아담한 사당이 눈에 들어온다. 명성황후가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며 지은 ‘북관운묘’다.


유생들이 글을 읽던 ‘강화향교’를 지나 산길을 오르기 시작한다. 산길 끝에서 만난 ‘진송류’는 강화산성의 북쪽 문이다. 산성길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북장대’에 닿는다. 19세기말 강화도 마을의 유래와 풍광, 인물, 생활상을 담은 책 <심도기행>의 저자 고재형(1836~1916) 선생의 시도 적혀 있다.


산성길엔 숙종 때 쌓은 성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하산길에 ‘오읍약수터’에 들러 물을 한 잔 마시고 ‘정려문’으로 향한다. 병자호란(1637) 때 청나라에 맞서 갑곶나루에서 장렬하게 싸우다 전사한 충신 황선신(1570~1637)을 기리는 비문이다.


강화10경 중 하나인 ‘연미정’을 지나 ‘옥개방죽길’의 평야를 들어서자 가슴이 확 트인다. 종착지인 갑곶성지와 갑곶돈대에 닿기 전 지나치는 ‘통제영학당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해군사관학교가 있던 자리다. 우리나라 축구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통제영학당지 위로 예쁘게 꾸며진 공원은 19세기 후반 순교한 사람들을 추모하기 위해 조성한 갑곶성지다. 마지막 코스인 갑곶돈대에 서서 염하를 바라본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얼굴에 와 닿는다.

▲ 심도역사문화길 코스의 하나인 강화산성 걷는 길. 한 여행객이 트래킹을 하고 있다.


■ 심도역사문화길 코스(18km, 6시간 소요)

강화버스터미널->동문->성공회강화성당->용흥궁->외규장각(고려궁지)->북관제묘->강화향교->은수물->북문->북장대->오읍약수->연미정->옥개방죽->갑곶성지->갑곶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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