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인터뷰] “LA 주류 가게 이민자 가족 이야기, 다들 공감해 주셨어요”

발간일 2023.05.24 (수) 15:41
디아스포라 영화제에 작품 출품, 재미교포 엄소연 감독

1883년 개항을 맞이한 이래로 다양한 외국 사람들이 인천으로 들어왔다. 인천으로 낯선 사람들만 이주해 온 것은 아니다. 1902년에는 최초의 한국 이민자들이 인천항에서 배를 타고 드넓은 태평양을 가로질러 하와이로 건너갔다. 고향을 등지고 낯선 땅으로 향하는 이민자들의 짐보따리에는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와 막연한 불안감이 더해졌을 것이다. 인천은 여전히 항구와 공항을 통해 수많은 사람이 드나드는 이주와 이민의 중심지다.

다양한 사람들이 만나 변화를 모색해온 혼종(混種)의 도시인 인천에서 다름에 대한 포용과 공존의 가치를 고민하기 위해 2013년 시작된 ‘디아스포라영화제’가 올해로 11회를 맞이했다.


▲ 미국 LA 주류 가게를 운영하는 한국인 이민자들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 디아스포라영화제에 출품한 엄소연 감독.(출처_soyunum.com)

‘흩뿌려진 씨앗’이란 의미가 담긴 고대 그리스어에 기원한 ‘디아스포라(Diaspora)’는 고향인 팔레스타인 땅을 떠나 세계 각지에 거주하는 유대인과 그 공동체를 부르는 말이었지만 전쟁, 재난, 추방, 글로벌리즘 등 다양한 이유로 타지로 이주하게 된 사람들과 그 후손을 의미하는 말로 확장되었다. 최근에는 이주자뿐 아니라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소수자들과의 갈등과 연대를 살펴보고 공존의 가능성을 성찰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제11회 디아스포라영화제’는 인천영상위원회 주관으로 지난 5월 19~23일, 5일 동안 아트플랫폼, 한중문화회관, 애관 극장 등에서 열렸다.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축제처럼 펼쳐지고, 문화 다양성의 가치를 새로운 시선으로 담아낸 27개국, 88편의 영화가 상영됐다.

이번 영화제를 통해 관객과 만난 ‘LA 주류 가게의 아메리칸 드림(Liquor Store Dreams)’은 한국계 미국인 엄소연(34) 감독의 작품이다. 이 영화는 “LA에서 주류 판매점을 운영하는 부모님을 둔 교포 자녀들이 세대 차이, 문화 차이를 극복하는 과정을 담은” 경쾌한 스타일의 장편 다큐멘터리로, 미국 이민 2세대인 엄소연 감독 자신과 1세대인 부모, 그리고 2.5세대인 친구 대니와 1.5세대인 대니의 엄마 이야기를 통해 미국에 사는 다양한 한국계 미국인의 삶과 꿈을 조명한다.

1960, 70년대 많은 한국인이 보다 나은 삶을 위해 기회의 땅이라고 믿었던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한국인들은 성실한 노동력으로 돈을 벌어 가족을 꾸리고 LA 한인촌공동체를 만들었다. LA 남부 지역에서 술을 파는 주류 가게는 처음에는 유대인이, 그 뒤로는 일본인이 주로 하다가, 1980년대 들어서는 75% 이상을 한인들이 운영하게 되었다. 아침 7시부터 저녁 11시까지, 1년 내내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해야 하고, 뜻하지 않은 권총이나 강도 사건 등 위험에 노출되는 고된 일이지만, 안정적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사업이었다. 지금은 주로 인도나 방글라데시 사람들이 운영한다.


▲ 재미동포 엄소연 감독(가운데)과 아버지 어머니. 엄 감독의 부모는 딸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이들은 이번 11회 디아스포라영화제에 참석했다. 사진은 아버지 엄해섭(왼쪽)씨, 어머니 엄혜선씨.

엄 감독의 아버지 엄해섭(66)씨는 1981년 25살 때 ‘달랑 100달러’를 들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미국에 처음 온 사람들 영어 못하지, 기술 없지, 그러니까 청소, 주유소 이런 힘든 일을 했지. 그래도 꿈을 포기하지 않으니까 여기까지 온 거지.” 아버지는 정직함과 성실함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향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렸다. 엄 감독이 10살이 되던 2000년에 한인타운에 있는 집을 팔아 LA 남부 유색인종 지역에 주류 가게 문을 열었다.

부모가 가게에서 일하는 동안 TV와 영화가 엄 감독의 보모가 되어주었다. 그때 보았던 미국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한국인 캐릭터들은 편협하고 우스꽝스럽게 묘사되곤 했다. “잘못된 편견 속에 한국인에 대한 혐오가 들어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부모님 가게에서 자라며 느꼈던 수치심과 분노가 영화를 찍겠다는 욕망을 불러일으켰죠. LA 주류 가게 베이비로 자란 한국계 미국인인 제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일반 직장에 들어가라. 그리고 결혼해라.”라고 잔소리하는 아버지와 엄 감독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5분짜리 다큐멘터리 영화 ‘Liquor Store Baby’를 만들었다. 2019년 만들어진 이 영화가 아시안퍼시픽페스티벌 및 각종 영화제에 초청되고 주목을 받으면서 장편으로 확장되어 영화 ‘LA 주류 가게의 아메리칸 드림’으로 제작됐다.


▲ 디아스포라영화제 상영회 후 관객과의 대화에 참여한 엄감독과 부모.(제공_인천영상위원회, 디아스포라영화제 사무국)

“단편을 장편으로 만들면서 어떤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을까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제작에 총 4년이 걸렸습니다.” 크라우드펀딩으로 마련한 제작비 3만 달러로 촬영을 마치고 러프편집 영상을 만들었다. 3번의 시도 끝에 선댄스 영화제 기금을 받을 수 있었고, 1년 동안 CAAM(The Center for Asian American Media)에서 난푸왕(Nanfu Wang) 감독의 멘토링을 받으며 영화를 완성했다.

“영화는 혼자 만들 수 없어요. 수없이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아 이 영화를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백인 중심의 미국 사회에서 소수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꿈을 이뤄가기 위해 엄 감독은 유색인 여성 영화 제작자들의 모임인 ‘Brown Girls Doc Mafia’와 아시아계 미국인 영화 제작자들의 모임인 ‘Asian American Documentary Network’의 멤버로 활약 중이다.

영화 ‘LA 주류 가게의 아메리칸 드림’은 트라이베카 영화제(Tribeca Film Festival)와 BFI런던 영화제(BFI London Film Festival), 토론토 영화제(tiff) 등 세계적인 영화제의 러브콜을 받고, 뉴욕을 시작으로 미국 여러 곳을 돌며 스크린과 인터뷰를 통해 관객을 만났다. 작년에는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을 받았다.

엄 감독의 부모는 작년에 주류 가게를 팔고 지금은 딸과 함께 영화제에 참가하면서 새로운 경험을 쌓으며 은퇴 후의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한국계 미국인들이 이 영화에 많이 공감해서 많이들 우시더라고요. 근데, 팜스프링이라고 백인들이 주로 사는 동네가 있거든요, 거기서 상영했을 때 백인들도 이 영화에 공감하는 걸 보고 많이 놀랐죠. 한국에 있는 사람들도 교포인 우리에게 별 관심이 없을 거로 생각했는데, 상영회 때 보니까 젊은이들이 많이 왔더군요. 이민 생활에 관심이 크구나, 새삼 다시 알게 됐습니다.”

엄 감독의 어머니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알려주고 부모자식 사이의 소통을 잘하기 위해 바쁜 와중에도 주말마다 아이들을 데리고 한국어 교실에 다녔다. 하지만 보통의 미국 이민 가정의 아이들이 한국말보다 영어소통이 편하기에 부모와 자식간 의사소통에 한계가 있다고 말한다. “엄마라고 해서 자식을 다 아는 게 아니잖아요. 그리고 얘들은 우리랑 문화가 다르니까 더 그렇죠. 영화를 찍을 때는 잘 몰랐는데, 영화를 계속 보고, 관객의 이야기를 듣고, 인터뷰하면서 더 많이 알게 되고 이해하고 느끼게 되네요.” 엄 감독 또한 영화를 통해서 부모 세대를 더 많이 이해하게 되었다.


▲ ‘LA 주류 가게의 아메리칸 드림’ 스틸사진 (출처_디아스포라영화제 홈페이지)

이 영화가 많은 영화제의 주목을 받고 다양한 관객들이 공감하는 것은 이민자 가족의 이야기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엄 감독은 LA 한국계 미국인들의 삶의 이면에 감추어져 있는 아픔과 불안을 영화 전면에 드러낸다. 1992년에 일어난 ‘LA 흑인 폭동’은 흑인 로드니 킹을 집단 폭행한 백인 경찰관들이 재판에서 무죄로 풀려난 것을 계기로 일어났지만, 비슷한 시기에 LA 남부 흑인거주지역에서 한국인이 운영하던 가게에 들어온 15살 흑인 소녀를 절도범으로 오해해서 총으로 살해한 ‘두순자 사건’과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LA 한인 사회에서 ‘4.29’로 불리는 이 폭동으로 한인들의 가게 절반가량이 불에 탔고, 흑인들에 대한 분노는 여전히 한인들 마음에 딱지처럼 여물지 않은 채 남아 있다.

2020년, 미국 미니애폴리스에서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미국 전역에서 ‘Black Lives Matter(흑인의 목숨도 중요하다)’를 외치며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항의 시위가 일어났다. 이 시위 뉴스를 보면서 엄 감독과 아버지의 갈등은 극에 달한다.

인종갈등과 혐오로 가득한 미국 사회 시스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위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한다는 딸과 흑인은 언제든 위협적인 존재가 될 수 있으며 미국에서 인종차별을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믿는 아버지 사이에는 건너기 힘든 커다란 강이 흐른다. 하지만 엄 감독은 과거를 바꾸고 자신의 미래를 창조함으로써 부모의 아메리칸 드림을 이어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친구 대니와 대니 엄마의 삶에서 희망을 본다. “대니는 저와는 완전히 다른 친구예요. 저라면 절대로 대니와 같은 선택을 하지 못할 거예요. 하지만 우리는 동전의 양면처럼 결국 조화로운 삶을 원하고 있다는 점에서 같다고 할 수 있죠.”


▲ ‘LA 주류 가게의 아메리칸 드림’ 스틸사진 (출처_디아스포라영화제 홈페이지)

1971년 부모를 따라 미국에 이민 온 대니의 엄마는 아픈 가족사와 4.29의 피해를 직접 겪었다. 하지만 분노와 혐오를 넘어 흑인 이웃들과 공존해야 한다는 걸 삶을 통해 배웠다. 미소로 20년간 가게를 운영해온 대니 엄마에게 가난한 흑인 이웃들은 박수와 환호를 보내주었다.

대니는 정말 일하고 싶었던 포틀랜드 나이키 본사에 취직했지만, 부모님이 운영하던 식료품 가게로 다시 돌아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엄마 혼자 가게를 운영하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아는 그는 이곳에서 새로운 꿈을 꾼다. ‘Best Market’에서 ‘Skid Row People’s Market’으로 새롭게 꾸민 식료품 가게가 흑인 이웃들의 커뮤니티 공간이 되길 바라며, 흑인 노숙자를 직원으로 고용하고 친구로서 응원한다. 그들과 함께 인종차별에 저항하고 목소리를 높여 평등을 외치며 또 다른 아메리칸 드림을 이어간다.

낯선 땅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 ‘Just Do It(그냥 하는 거야)’ 정신으로 ‘Don’t Give Up(포기하지 마라)’을 외치며 아메리칸 드림을 향해 내달렸던 이민 1세대와 달리, 2세대는 “Why, Just Do It? (왜 그냥 해야 하지?)’을 고민하고 ‘Keep Dreaming! (계속 꿈꿔)’을 외치면서 부모 세대와는 다른 아메리칸 드림을 모색한다.

6월 5일 송도에 ‘재외동포청’ 이 출범한다. 한국의 재외동포는 약 193개국 730만 명으로 중국, 인도에 이어 세계에서 5번째로 큰 규모다. 재외동포청은 동포사회의 높아진 기대와 세대교체 등 정책환경 변화에 체계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창설된 기관이다. 인천은 재외동포청 본청 유치로 재외동포 허브의 역할을 담당하고 개방성과 다양성, 포용성을 갖춘 글로벌도시로 성장하려 한다.

이번 디아스포라 영화제를 통해 인천이 하와이 이민이 시작된 곳이라는 걸 알게 된 엄 감독 부모는 “그런 의미에서 서울보다 인천에 본청이 있는 것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한다”며 “재외동포청이 해외에 사는 분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곳이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엄 감독은 “역사성, 다양성, 세대 간 차이를 조화롭게 바라보고 이를 바탕으로 정책들이 고민돼야 한다.”고 당부하면서 “미국에서는 K팝의 영향으로 흑인과 히스패닉계 학교에서 제2외국어로 한국어를 배우는 곳이 많아졌습니다. 한국은 그에 따른 의무감,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한국인이면서 동시에 미국인’으로 자기 정체성을 규정하는 엄 감독은 한국인들의 ‘한’과 ‘정’의 정서를 믿는다(believe). “한국에 사는 사람들에게 ‘한’과 ‘정’의 의미가 내가 믿는 ‘한’과 ‘정’의 의미와는 다를 겁니다. 제게 ‘한’은 부당함에 대해 싸워야 한다는 의미이고, ‘정’은 어딜 다녀도 한국 사람이라는 걸 안다면 공통으로 느껴지는 그 무엇이 있다는 걸 의미해요.“ 그래서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그녀는 진정한 변화를 위해서 싸워야 한다고 말한다.

“이번 영화가 아버지와 딸의 다큐멘터리 영화였다면, 다음 영화는 엄마와 딸에 대한 픽션이 될 것 같습니다.“ 엄 감독의 어머니가 영화 캐릭터에 반영되냐는 질문에 아마도 그럴 것 같다고 웃으며 말한다. 긍정적이고 유쾌한 엄마가 캐릭터의 모델이라면 다음번 영화는 무조건 재미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언젠가 디아스포라영화제에서 엄소연 감독의 어머니와 딸에 대한 영화를 스크린을 통해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한다.

■ ‘LA 주류 가게의 아메리칸 드림’ Liquor Store Dreams
: 미국, 2022, 85분, 다큐멘터리, 전체관람가
https://www.liquorstoredreams.com/
https://www.facebook.com/LiquorStoreDreams/
https://www.soyunum.com/

글 박수희 i-View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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