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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활용품=돈’, 이젠  잘 버리세요!

    [인천 이야기] '재활용품=돈’, 이젠 잘 버리세요!

    ​자원순환 플랫폼 ‘인천e음 가게’, 투명·유색페트병 등 대상​1회용품 사용이 늘면서 무분별하게 버려지는 쓰레기로 인천이 몸살을 앓고 있다. 비우고 헹구고 분리하고 섞지 않는 ‘비헹분섞’ 방법으로 자원을 재활용하는 방법이 어느때보다 요구된다. 올바르고 똑똑한 분리배출로 환경도 살리고 경제도 살리면서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자원순환 가게가 있다. 바로 ‘인천e음 가게’이다. ‘인천e음 가게​'에  제대로 분리한 재활용품을 가져오면 한달후에  지역화폐인 인천이음카드 캐시 백이나 현금으로 보상한다.▲ ‘인천e음 가게’​는 올바르고 똑똑한 분리배출로 환경도 살리고 경제도 살리면서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자원순환 가게다. 사진은 구월도 '인천e음 가게'에서 일하는 자원관리사 금순씨(왼쪽)와 기연희 씨(오른쪽)​​꿩 먹고 알 먹는, 자원순환 플랫폼‘인천e음 가게’​​ 체온에 육박하는 폭염과 기후변화를 실감하는 요즘, 코로나19로 1회용품 사용이 늘면서 차고 넘치는 쓰레기는 환경오염을 부추긴다. 그럼에도 시민들의 무관심 속에 재활용품은 폐기물이 되어 무분별하게 버려진다.하지만 환경오염의 주범이 되고 있는 생활쓰레기는 분리배출만 제대로해도 폐기물이 아닌 귀중한 자원이 되어 가치 있게 사용될 수 있다. 분리배출을 올바르게 해야 하는 절실한 이유이기도 하다. ‘인천e음 가게’는 수도권 매립지 종료와 ‘환경특별시 인천’을 위해 사람과 환경, 폐기물과 자원을 이어주는 자원순환 플랫폼으로 재활용품 분리배출 문화의 확산을 위해 탄생했다.▲ 인천e음가게에 제대로 분리한 재활용품을 가져오면 무게를 측정한 후, 인천e음 지역화폐 또는 현금(계좌이체)으로 보상을 해준다. 수거한 재활용품만큼 한 달 후에 캐시 백으로 적립이 되며, 회수된 재활용품은 100% 재활용이 된다.​ ​​​​​제대로 분리한 재활용품을 가지고 가면 무게를 측정한 후, 인천e음 지역화폐 또는 현금(계좌이체)으로 보상을 해준다. 수거한 재활용품만큼 한 달 후에 캐시 백으로 적립이 되며, 회수된 재활용품은 100% 재활용이 된다.환경을 살린 만큼 돈이 돼요!‘인천e음 가게’구월점을 방문한 주부 최경애 씨(53세, 남동구 구월동)는 “인천e음 가게를 운영하는 의미가 좋아서 동참하고 싶은 마음에 재활용품을 모아 두었다”며 “오늘은 투명 페트병과 계란 판을 가져왔는데 무게를 달아서 그만큼 인천이음카드 포인트로 적립된다고 하니 앞으로도 버리지 말고 열심히 모아 와야겠다”고 말한다.그는 또 “적립금을 주니까 좋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환경을 살린다는 마음에 기분이 좋고 뿌듯하다”며 “미래세대인 아이들에게 좋은 환경을 물려주고 싶다”는 의지를 밝히고 재활용품을 담아온 장바구니를 열어 보인다.▲ 시민들이 재활용품으로 가져온 페트병과 자원관리사들이 사용하는 목장갑​​​​​‘인천e음 가게’ 안에는 시민들이 가져온 깨끗한 페트병들이 수거봉지 안에 가득 담겨있다. 곧 재활용될 자원들이다.자원관리사 금 순씨(67세)는 “요즘 코로나로 배달이 점점 늘어나면서 쓰레기가 넘쳐나고 있어서 걱정이었는데 인천e음가게가 생긴걸 알고 나부터라도 먼저 동참하고 싶었다”며 “아직 홍보가 덜 되어서 모르는 분들도 많지만 인천e음 가게를 이용하신 분들의 호응은 아주 좋고, 의식 있는 분들이 많이 참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인천e음 가게에 대한 소문이 퍼지면서 시민들 중엔 제대로 분리수거한 페트병을 가져오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자원관리사는 수거시설에서 재활용품 관리 외에도 방문자들에게 올바른 재활용 분리배출에 대한 방법과 이용안내 및 유가보상 등에 대해 알려준다.기연희(47) 자원관리사는 “시민들이 참여해서 재활용품이 쌓이는 만큼 환경과 지구가 되살아나는 느낌이고 가게에 쌓여있는 재활용품을 보면 뿌듯함을 느끼게 된다”며 “재활용품은 쓰레기가 아니라 자원이고.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환경특별시 인천에 동참해 주길 바란다”며  시민이 가져온 재활용품의 무게를 측정했다.올바른 분리배출, 선택 아닌 필수!​재활용업체의 폐기물수거 거부로 쓰레기대란이 일어나고 쓰레기 몸살을 앓은 건 어제 오늘 만의 일은 아니다.​▲ 시민들이 가져온 재활용품은 무게를 측정해 가격을 책정한 뒤 지역화폐인 인천이음카드 캐시 백이나 현금으로 보상해​ 적립한다.​​​​​​​​​​마구 버린 많은 양의 자원들이 재활용과 재사용되지 못하고 소각, 매립되면서 토양과 지하수가 오염되고 유해가스까지 발생하면서 환경은 죽어간다.이제 자원절약과 환경보호를 위해 쓰레기를 올바르게 분리하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아닐까?시 자원순환과 양수영 담당자는 “이 제도는 시민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자원순환문화를 만들어 마을쓰레기 감축과 자원순환 체계구축이 목적으로 ‘인천e음 가게’의 운영으로 시민들이 재활용품의 올바른 분리배출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 지역화폐 또는 현금보상으로 지역상권 활성화에 도움이 됐으면 한다”며 “현재는 시범사업으로 투명 페트병, 유색 페트병, 판 페트를 보상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생활 속에서 배출되는 모든 품목이 재활용될 예정이다”고 말했다.▲ 인천e음카드 가게 표지판​​​​‘인천e음 가게’ 이용방법은 모바일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회원가입 한 후, ‘인천e음 가게’에 가면 재활용품의 품목과 무게를 측정하고 나서 자원관리사가 포인트를 입력한다.올 하반기에는 시범사업으로 투명 페트병, 유색 페트병, 판 페트 등에 대해 보상을 실시하고 있다.■ 재활용품 분리배출 원칙* 비운다 : 용기안의 내용물을 깨끗이 비우기* 헹군다 : 이물질이나 음식물 등을 닦거나 헹구기* 분리한다 : 라벨, 뚜껑 등 다른 재질은 별도로 제거하기* 섞지 않는다 : 분리수거함에 넣을 수 있는 품목만 종류별, 재질별로 배출하기■ ‘인천e음 가게’ 운영○ 운영날짜 및 시간 : 매주 화·목·토요일, 오후 2시~6시○ 수거품목 : 투명 페트병, 유색 페트병, 판 페트○ 운영장소 : 푸른두레생활협동조합 구월점(남동구 용천로88번길3), 만수점(남동구 구월로378), 연수점(연수구 샘말로8번길19), 소래역점(남동구 소래역남로16번길75)박영희 i-View기자 pyh60610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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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21.08.09 (월)
  • “인하대가 미래 스마트 모빌리티 산업의 중심 됐으면…”

    [인터뷰] “인하대가 미래 스마트 모빌리티 산업의 중심 됐으면…”

    ​GPS와 자율주행차 분야 전문가원종훈 인하대학교 전기공학과 교수​​​​​​​​원종훈(49) 인하대학교 전기공학과 교수가 2020년 ‘항법시스템학회’(국내 위성항법시스템 분야의 최고 학회)의 정기 학술대회에서 위성항법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학술상을 수상했다.“대학원 시절부터 매년 참가해온 학회에서 학술상을 받게 되어 감회가 남다르네요. 특히 한국형 위성항법시스템(KPS)개발에 시동을 거는 시점에 받은 학술상이 인하대학교의 자율항법연구실 성장의 마중물이 되었으면 한다”고 수상소감을 밝혔다.▲ 원종훈 인하대학교 전기공학과 교수​​원 교수가 1994년 대학원생 시절 처음 GPS연구를 시작할 때만 해도 국내에서 GPS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 속에서 GPS는 자신만의 길이라고 생각해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고 해외에 논문도 발표하며 박사과정 때는 독일과 일본에 두 달씩 단기 파견 근무도 다녀왔다.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한국항공우주연구원 항공전자그룹 부서에서 위성항법 관련 업무를 하던 중 독일 연방국방대학교에서 단기 파견 당시 좋은 인상을 준 것이 계기가 되어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그 후 10년 동안 유럽연방정부, 유럽항공우주국, 에어버스 등의 연구과제를 수행하며 2005년에는 유럽의 차세대 GNSS인 갈릴레오 시그널 설계에도 참여하는 등 명실상부한 GPS 전문가로 성장했다.그 후 독일 연방국방대학 항공우주공학과 우주기술응용 연구소의 연구실장이 되고 그렇게 어렵다는 영구 연구직까지 제안 받았으나 원 교수가 택한 곳은 인하대학교였다. 독일 뮌헨 공과대학에서도 6년간의 강사 경험도 있었던 그는 망설이지 않고 우수한 역량을 갖춘 인재를 배출하는 것이 가장 값지다고 생각하여 2015년 인하대학교 교수로 오게 되었다.KPS(Korea Positioning System) 신호 설계 연구 이끌어GNSS(Glova Navigation Satellite System)는 전세계 어디에서나 인공위성을 이용하여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위성항법시스템’이다. 우리가 GPS라 부르는 것은 미국이 개발한 GNSS의 브랜드 네임이다. 자동차 내비게이션부터 스마트폰 각종 통신 시스템까지 우리 생활 전반에서 사용되고 있는 GPS 서비스가 어느 날 갑자기 중단되거나 유료화가 된다면 큰 혼란을 겪게 된다. 이에 세계 선진국들은 자기 나라 고유의 독자적인 위성항법시스템을 개발하게 되었다.▲ KPS의 신호체계에 관심이 있어 열심히 연구중인 이수빈 컴퓨터 공학과 학생​지난 5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한국형 KPS를 개발하고 기존 GPS와의 상호운용성도 강화하기로 한미 양국이 합의’에 따라 우리나라도 기술성과 경제성에 대한 예비타당성 검토를 마치고 2022년부터 2035년까지 총 8개의 인공위성을 발사할 예정이다.인공위성도 만들어야 하고 지상에 모니터링 시스템도 깔아야 하는 등 많은 일을 해야 하는데 원 교수가 맡은 일은 갈릴레오 설계에 참여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각종 신호를 설계하고 사용자의 수신기를 설계하는 등 KPS의 신호체계를 만드는 것이다.자율주행 분야에서의 괄목할만한 성과 창출​원 교수는 2015년 인하대학교로 부임하면서 자율주행차라는 새로운 연구 분야에 도전했고 지난 5년 동안 자율주행 분야에 굵직한 성과를 내놓았다.특히 2020년 10월 ‘제1회 경기도 자율주행 실증 챌린지’에서는 자율주행차 기술혁신 분야에서 당당히 1위를 차지했고, 2021년 1월 ‘제18회 임베디드 소프트웨어 경진대회’에서 산학프로젝트 부문에서 최우수상인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상을 수상했다.또한 지난 2월에는 미래차 산업과 협력형 첨단교통체계 분야를 이끄는 한국ITS학회에서 자율주행 시스템 연구 업적을 인정받아 논문상도 받았다.▲ 지난해 10월 경기도 자율주행 실증챌린지에서 브이텍스 관제 신호처리와 정밀 지도 활용에 좋은 성과를 내어 기술혁신분야에서 1위를 차지했다.​​“그 동안의 연구개발 노력을 인정받은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며 추후 지속적인 노력을 통해 해당 분야에서 인하대학교 연구진의 기여를 늘려가도록 하겠습니다,”현재 전세계는 자율주행 자동차의 개발 경쟁이 뜨겁다. 자동차의 자율주행이란 GNSS 수신기 안에 위성에서 쏘는 신호를 처리하여 위치와 속도를 계산하고 이를 이용하는 애플리케이션을 적용하여 자동차 스스로 도로 상황을 파악하며 다른 물체와 충돌하지 않게 목적지까지 주행하는 것이다.자율주행차 연구는 초기에 많은 돈이 들어 진입이 어려운 분야인데 대기업이나 기관 등에서 자율주행차 연구 활성화를 위하여 각종 경진대회를 개최해주고 있다. 이는 대학의 연구진들에게 연구비 지원부터 차량 제공까지 경제적 지원을 해주고 경험을 쌓은 연구원들이 바로 현장에서 일할 수 있게 하는 산학협력의 일환이다.▲ 개발한 알고리즘이 자율주행차에서 잘 수행되는지 시뮬레이터로 검증하고 있다.​​일단 각 기관의 자율주행 실증에 관한 미션이 주어지면 인하대학교 자율항법연구실 연구진들은 미리 알고리즘을 개발한 후 시뮬레이터에 코딩을 하여 마치 게임을 하듯 사전 실험을 해본다. 어느 정도 안전성이 입증된 후에야 실제 자동차에 포팅을 하여 케이시티나 판교 자율주행 실증단지에 가서 실험을 함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오차 및 사고유발 요소를 최대한 줄이는 것이다.안상훈 연구원에게 자율주행차 시장에 대하여 바라는 것을 묻자 “실리콘밸리처럼 국내에서도 자율주행을 연구할 수 있는 부화장 같은 개념의 인프라나 기업 간의 컨소시엄이 잘 구축되었으면 좋겠다”며 “자율주행 차량이 마지막으로 지향하는 것은 라이프스타일이 차량 내부에서 진행된다고 생각하기에 차량 내부가 이동용 사무실이 된다든지 요즘 차박이 대세이므로 차량이 주거 공간이 되었으면 한다”고 말한다.그들은 안전하게 자동차가 움직이는 것만이 아닌 실생활의 개혁까지를 꿈꾸고 있다.▲ 원교수가 이끄는 인하대학교 자율항법연구실 연구진들은​ 각 기관의 자율주행 실증에 관한 미션이 주어지면  미리 알고리즘을 개발한 후 시뮬레이터에 코딩을 하여 마치 게임을 하듯 사전 실험을 해본다. 이런 노력으로 다양한 곳에서 수상한 기록을 갖고 있다.​​원 교수가 이끄는 20여 연구진은 현재 10여 개나 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느라 폭염과 열대야가 지속되는 방학 중에도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원 교수에게 가장 보람을 느낄 때와 앞으로의 희망사항에 대해 물어보았다.“부족한 여건 속에도 잘 따라오는 팀원들에게 감사하며 졸업 후에도 찾아오는 제자들의 든든한 모습에 보람을 느낍니다. 앞으로도 우수한 인재 배출에 총력을 기하고 인하대학교가 미래 스마트 모빌리티 산업에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그의 소망이 꼭 이뤄지길 기대하며 더운 날씨에도 연구에 매진하는 연구원들에게 힘찬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글· 사진  신영내 i-View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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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21.08.11 (수)
  • ‘고려의 古都’에서 만난 고려의 왕릉

    [탐방] ‘고려의 古都’에서 만난 고려의 왕릉

    ​⑩ 양도면(하), 강화읍​​​ ​한반도 역사의 축소판. 강화도는 선사 시대 이래 우리나라 역사의 아이콘을 모두 품은 ‘보물섬’입니다. 고인돌, 고려궁지, 외규장각, 광성보, 천주교성지에 이르기까지 강화도엔 지금 반만년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뚜껑 없는 박물관, 역사의 보고. 강화도를 얘기할 때면 언제나처럼 거창한 수식어가 붙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죠.봄맞이 개편과 함께 i-View가 새 연재를 시작하는 ‘길 위의 강화도’는 5000년 강화도의 역사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에피소드(episode) 중심으로 전개해 나갈 강화도의 신비로운 유적과 유물의 속삭임에 귀 기울여보시기 바랍니다. ​▲ 고려 23대 왕으로 고려왕조의 역사에서 가장 오랜 시간 재위한 고종임금의 묘인 ‘홍릉’. 고려산 동남쪽 기슭 국화리학생야영장 위쪽에 위치한다. 푸른 하늘 아래 홍릉이 푸른 잎새들로 환하게 빛나고 있다.​‘임금의 무덤’을 찾아 오르는 길은 가팔랐다. 고려에서 가장 오래 재위한 왕. 종묘사직이 있는 고향을 떠나 강화도에서 눈을 감아야 했던 왕. 고종(23대, 1213~1259 재위)임금이 묻힌 ‘홍릉’은 고려산 동남쪽 기슭에 자리했다. 왕은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은 곳에서 강화 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낮은 지대에 크고 화려하게 조성하는 조선왕릉과는 달리, 고려왕릉인 홍릉의 묘역은 그다지 크지 않아 보인다. 동그랗고 작은 무덤은 양옆 반원형으로 솟아 무덤을 보호하는 언덕인 ‘곡장’에 둘러싸여 있다. 2번째 단에 두 개의 비석과 능을 지키는 4개의 석인이 있는 홍릉은 모두 4단의 석축으로 조성된 모습이다.고려왕릉은 봉분, 석실, 그리고 제단으로 조성된다. 무덤 주변은 지형을 따라 장방형(사각형)으로 꾸미며 3단~5단의 석축을 쌓는 것이 일반적 형태이다. 보통 1단은 무덤과 곡장, 2단은 석등과 문인석, 3단은 무인석, 4, 5단은 정자각과 능비를 배치한다. 봉분은 원형의 형태를 띠며 봉분자락엔 12지상을 새긴 병풍석이나 난간을 두르기도 한다.고려시대의 무덤은 크게 석실석곽무덤과 토광목곽묘, 화장묘로 나누어진다. 왕실과 같은 최고 권력층은 석실석곽무덤을 썼으며 신분에 따라 무덤의 구조와 형태도 달랐다. 묫자리는 대부분 남쪽으로 뻗어 내린 양지바른 산의 경사면에 쓰는 것이 보통이다. 홍릉 역시 뒤쪽으로는 큰 산이 자리 잡고 있으며 무덤 양쪽으로 산줄기가 뻗어 내리는 형상을 하고 있다. 오른쪽 골짜기로는 작은 천이 흐른다. 고종임금은 어떻게 이곳에 잠든 것일까.​▲ 고려 고종 임금의 제사를 모시고 무덤을 관리하는 홍릉 재실 전경.​​​​몽골이 고려를 침공한 1232년 6월 무신정권의 수장이자 고려의 실권자였던 최우는 나라의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기기로 하고 고종에게 강화로 갈 것을 재촉한다. 고종은 처음 머뭇거렸으나 7월 6일 수도 개경(개성)을 떠나 제포(지금의 승천포, 강화군 송해면 당산리 397, 399일대)를 통해 강화도로 들어온다. 그렇게 강화천도가 이뤄졌다. 고종은 이후 강화도에 머물며 몽골과 대치하다 1259년 영면하며 고려산에 묻힌다. 그로부터 11년 뒤인 1270년 고려는 몽골과의 화친정책에 따라 개경으로 환도한다. 홍릉 말고도 강화도 양도면엔 3개의 왕릉이 더 있다. 진강·고려산 자락에 21대 희종, 22대 고종, 원종의 비 순경태후 등 고려왕릉 오롯이 ‘석릉’(양도면 길정리 산 182)은 고려 21대 왕인 ‘희종’의 능이다. 돌로 만든 ㄷ자 곡장에 둘러싸인 석릉에선 2007년 발굴 당시 금은동 장신구와 자기류가 발견됐다. 희종은 1204년~1211년 간 재위한 왕이다. 희종은 자신의 측근인 내시 낭중 왕준명, 참정 우승경, 추밀사 홍적, 장군 왕익 등이 최충헌을 제거하는데 실패한 뒤 1215년(고종2) 강화 교동현으로 유배당한다.​▲ 석릉은 고려 21대 왕인 희종임금의 묘이다. 최충헌과 그의 아들 최우에 의해 두 차례 강화도 교동도로 유배됐다가 1237년 57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1219년 개경으로 돌아왔지만 1227년 최충헌의 큰아들인 최우가 “복위음모가 있다”며 또다시 강화도로 보냈다가 교동으로 유배한다. 희종은 그렇게 쓸쓸하게 살다 1237년 57세의 나이로 눈을 감는다.‘곤릉’(양도면 길정리 산75)은 고려 22대 왕 강종의 두 번째 왕비로 46년간 재위하고 몽골에 최후까지 항전하다 승하한 고종의 어머니 ‘원덕태후 유씨’의 무덤이다. 곤릉의 곡장은 낮고 평평하다. 단아하고 반듯해 보이는 이 무덤의 뒤로는 소나무군락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무덤을 두른 12개의 장대석은 다이아몬드처럼 보이기도 한다.▲ 곤릉은 고려 22대 왕 강종의 두 번째 왕비인 원덕태후 유씨의 무덤이다. 고종의 어머니다.​​​​원덕태후는 사평왕후가 대궐에서 쫓겨난 뒤 태자비에 책봉된다. 현종 5세손인 신안후 성의 딸인 원덕태후는 1212년(강종1)에 왕비에 봉해지며 연덕공주가 됐는데 고려가 강화로 천도한 지 7년 만인 1239년 영면한다. 원덕태후로 추존된 것은 사후의 일이다.‘가릉’(양도면 능내리 산12의 2)은 고려 제24대 원종의 비이자 충렬왕의 어머니인 순경태후의 능이다. 가릉은 묘도 앞부분에 유리문을 달아 안쪽을 들여다볼 수 있다. 본래 봉분으로 덮여 있었으나 단면을 잘라 무덤내부를 볼 수 있게 했다. 순경태후는 1236년 아들 충렬왕을 낳은 뒤 눈을 감았다.▲ 가릉은 고려 24대 왕 원종의 비이자 충렬왕의 어머니인 순경태후의 묘이다. 묘도 앞부분에 유리문을 달아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다.​​​​​​​순경태후가 태어난 해는 정확히 알 수 없다. 1219년생인 원종과 1235년 혼인해 이듬해 아이를 낳았으므로 20세가 채 되지 않아 눈을 감았을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순경태후는 ‘장익공’에 추봉된 김약선의 딸이자 무신정권시기 집권자인 최우의 외손녀이다. 원종이 태자이던 시절에 입궐한 그는 처음 경목현비였으나 남편 원종이 왕위에 오른 뒤 1262년에 왕후에 추존된다. 이 때 시호가 정순왕후였고 훗날 아들 충렬왕이 왕위에 오른 뒤 순경태후로 추존됐다. 1270년 개경환도를 추진한 원종은 4년 뒤인 1274년 6월 세상을 떠난다. 원종의 묘인 ‘소릉’은 경기도 개풍군 영남면 소릉리에 있다.고려왕릉, 남한에선 유일하게 강화도에만 있어, 보존과 함께 새롭게 발굴할 필요성가릉에서 북동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위치에서도 화려한 능을 만날 수 있다. 진강산 능선이 뻗어 내린 자리에 위치한 ‘능내리석실분’(양도면 능내리 16-1)이다. 출토유물로 미뤄 왕실의 사람일 것이란 추정은 있지만 누구의 무덤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곡장은 화강암으로 돼 있으며 3단의 석축과 두 개의 석수가 눈에 띈다.강화도의 왕릉을 포함해 <고려사>에 기록된 고려왕릉은 87기에 이른다. 지금까지 발견된 것은 58기이며 그 중 31기만이 무덤의 주인이 밝혀진 상태다. 고려왕릉은 대부분 북한에 있으며 남쪽엔 유일하게 강화도에서만 만날 수 있다. 고려의 전시 수도였고 왕가의 무덤이 있는 강화도는 지금 ‘고려 고도’(古都)의 향기를 은은히 내뿜고 있다.양도면은 조선시대 이후 화도면과 마주하면서 옛 진강현 위쪽에 자리해 상도면이라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위량면과 합하며 위량면의 양(良)자와 상도면의 도(道)자를 따서 양도면으로 부르게 됐다. 인천가톨릭대학교와 진강산(443m)이 있으며 주민들은 주로 농업에 종사한다.​글·사진  김진국 본지 총괄편집국장​.....................................................................................................- 고비고갯길​​​​​바람 따라 구름 따라 굽이굽이 고개 넘어 가는 길​​​​​강화 동쪽에서 서쪽을 가로지르는 길이다. 강화 장터로 장보러 가는 길이고 반대로 장보고 돌아오는 길이기도 하다.탁 트인 국화저수지를 지나 울창한 숲 속으로 들어서면 가는 여름을 아쉬워하는 매미들의 요란한 울음소리가 귀를 찌른다. 청록색 잎들이 무성한 나무와 오솔길 양쪽으로 피어난 풀나무들은 피로를 풀어준다. 이 길은 옛날 나무꾼들이 등짐을 지고 오르내리던 길이기도 하다.정처 없이 길을 걷다가 운이 좋으면 소박한 시골장(내가시장)과 전국의 마을굿 중 으뜸인 ‘강화 외포리 곶창굿’을 볼 수도 있다. 가을을 노래하는 덕산의 낙엽송 풍광과 크고 작은 고인돌 여러 개가 모여 있는 오상리 고인돌군도 만난다.■ 고비고갯길(강화버스터미널~외포여객터미널 20.2km, 소요시간 6시간40분)​​강화버스터미널->남문->서문->국화저수지->국화리학생야영장->오상리고인돌군->내가시장->덕산산림욕장->곶창굿당->망양돈대->외포여객터미널○ 문의 032-934-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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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21.08.09 (월)
  • 인천아 놀자 14화 - 애관극장 조조영화
  • 멀티플렉스 공룡에 맞서 꿋꿋히 견딘 ‘58년’

    [기획 · 칼럼] 멀티플렉스 공룡에 맞서 꿋꿋히 견딘 ‘58년’

    ​​애관(愛觀)의 도시, 인천의 극장사 ㉛대한극장​​​​ 인천에서 태어나 초중고 학창시절을 보냈고 결혼도 인천에서 했다. 당연히 인천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다큐멘터리 촬영을 하면서 느낀 점은 정작 인천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학창시절 자주 갔던 애관극장이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 정확히 말하자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극장이라는 사실을 불과 5년 전에 알 정도였다. 몇몇 분들에게 이를 여쭤보니 알고 계신 분들이 적었고 애관극장과 함께 자주 갔던 현대극장, 미림극장, 오성극장, 인천극장, 자유극장 등등 사라진 옛 극장들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본 칼럼을 통해 사라진 인천의 옛 극장들이 인천시민 개인에게는 추억이었으며, 인천에는 평생 친구였고 우리나라에는 역사였다는 것을 조명하고자 한다. ​ ▲ 대한극장은 1963년 부평동 229번지에 개관했다. 사진은 1972년 대한극장. 출처 국가기록원​대한극장은 김운봉이 1963년 11월 6일 부평동 229에 개관했다. 부평역 바로 옆에 있으며 현존하는 극장이다. 극장주가 계속 바뀌었던 다른 극장과는 달리 대한극장은 설립 이후 계속해서 김운봉 사장 가족이 운영하고 있다. 위 사진을 자세히 보면 ‘대한극장 드디어 개봉관으로!’ 현수막이 보인다. 1963년 설립 당시는 재개봉관이었다.사진 맨오른쪽 간판을 보면 ‘후렌치코넥션’이 보인다. 지금은 ‘프렌치 커넥션’으로 불리는데 윌리엄 프리드킨 감독과 진 핵크만 주연의 명작이다. 44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남우주연상, 감독상, 각색상, 편집상 등을 휩쓸었던 작품이다.▲ 1977년 9월 24일 매일경제에는 부평 대한극장에서 열린 불우이웃돕기 음악의 밤 행사를 소개했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인천 북구청 도레미합창단이 대한극장에서 불우이웃돕기 음악의 밤을 개최했다. 이날 수익금으로 북구 관내 양로원 및 16개 고아원에 위문품을 전달했다.​​▲ 부평 대한극장의 1970년대 모습​▲대한극장은 1995년에 건물을 허물었고 그 자리에 대한빌딩을 신축했다.​​​​​​​​▲ 1995년 '내마음의 지도'를 대한극장에서 상영했다. 1995년 4월 25일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1995년 ‘내 마음의 지도’를 인천에서 미림극장과 대한극장에서 상영했는데 대한극장에 ‘축 개관’이라고 쓰여 있다. 이때 대한빌딩이 완공되면서 그 빌딩 3층과 4층에 1, 2관이 들어섰다.▲ 1996년 8월 14일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대한극장의 라이벌인 부평극장이 애관극장과 협력 관계였고 대한극장은 파트너로 인형극장을 선택했다. 1990년대에 대한극장은 인형극장과 같은 영화를 많이 상영했다.그리고 1996년 금성극장, 2003년경 부평극장이 사라졌지만 대한극장은 현존하고 있다. 그러나 부평역 주위에 CGV와 롯데시네마가 생기면서 대한극장 또한 타격을 크게 입었다. 그 후 대한극장이 선택한 생존전략은 일반상업영화와 함께 독립예술영화를 상영하는 것이었다.▲ 대한극장은 현존하는 극장이다. 사진은 대한극장 로비.​​​​2004년 2월에 인천지역 각계 인사 40여 명으로 구성된 ‘우리 영화를 사랑하는 인천사람들’이 대한극장을 빌려 영화 ‘선택’을 상영했다. 이 영화는 간첩혐의로 수감된 비전향 장기수들의 삶을 그린 홍기선 감독의 작품이다. 그리고 2005년에 제1회 인천여성영화제를 개최했다. 인천여성회가 주최하고 인천시가 후원하는 행사였다. 2007년에는 북녘영화제가 열렸다.▲ 2010년 대한극장이 있는 부평의 거리뷰, 출처 네이버 거리뷰​​​​2014년에는 불미스러운 ‘가짜 개봉’사건이 발생했다. 어느 관람객이 대한극장에서 이글레시아 감독의 ‘마녀사냥꾼’이 개봉된다는 것을 보고 서울에서 일부러 대한극장까지 찾아갔는데 정작 대한극장에서는 그 영화를 개봉하지 않았다. 실제 상영을 하지 않으면서 극장에서 개봉한 것처럼 꾸미는 ‘가짜 개봉’이었다. 일종의 편법 개봉으로 IPTV의 VOD 서비스와 포털사이트 등의 영화 다운로드 서비스에서 일반 개봉작과 같은 가격을 받으려고 작은 영화들을 극장에서 하루나 이틀 정도 편법 상영하는 수법이 많았는데 그때 ‘마녀사냥꾼’은 하루도 상영을 안 하면서 개봉한 것처럼 꾸몄다. 그 당시 이런 극장을 ‘유령영화관’이라 불렀다.영화 수입·배급사가 극장을 대관한 뒤 영화진흥위원회로부터 '극장 상영작'으로 인정을 받고, 극장은 대관료만 받고 영화를 틀지 않았다. 영화배급사는 이 정도 돈을 투자해서 '극장동시개봉'으로 인정받으면 IPTV에서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었고 극장 측도 수익이 안 나는 오전 시간대를 활용해 돈을 벌 수 있으니 서로의 이해타산이 맞아 벌어진 일이었다.그 후 대한극장은 아이스하키 영화 ‘우리는 썰매를 탄다’ 상영과 도성훈 인천시 교육감 후보의 토크 콘서트, 6.15 남북공동선언 19주년 기념 영화상영 등등 계속해서 독립예술영화 상영과 대관행사를 하고 있다. ▲ 현재 대한극장 입구​ 인천의 극장들 중에서 대한극장과 비슷한 성격의 영화관은 미림극장과 영화공간 주안을 들 수 있다. 동인천에 미림극장, 주안에 영화공간 주안, 부평에 대한극장이 각 지역에서 독립예술영화를 상영하는 대표 극장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차이점도 있다.대한극장은 사기업이며 일반상업영화관이다. 미림극장은 실버극장으로 출발한 사회적기업으로 일반상업영화 DCP파일을 틀 수 있는 디지털 영사기가 없다. 영화공간 주안은 사업주체가 사기업이 아닌 미추홀구청이다.또한 대한극장은 애관극장과 비슷하게 대를 이어 현존하고 있다는 것과 대기업 멀티플렉스 위세에 눌려 어려운 상황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대한극장이 부평을 대표하는 극장으로 계속해서 존재하길 기원한다.▲ 부평 대한극장 위치​​글·사진 윤기형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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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21.08.09 (월)
  • 송도 연세대 국제캠퍼스 2단계 조성 박차

    [뉴스 속 뉴스] 송도 연세대 국제캠퍼스 2단계 조성 박차

    ​송도 11공구, 제약바이오실용화센터·​바이오공정인력양성센터 건립​​​​​​​​인천자유구역경제청이 송도세브란스병원과 연세사이언스파크 등을 건립하는 연세대 국제캠퍼스 2단계 조성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인천경제청은 최근 송도국제도시 연세대 국제캠퍼스에서 ‘연세대 국제캠퍼스 2단계 조성(사이언스파크)을 위한 올해 제3차 실무협의회를 개최했다.▲ 인천자유구역경제청이 송도세브란스병원과 연세사이언스파크 등을 건립하는 연세대 국제캠퍼스 2단계 조성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사진은 IFEZ 송도국제도시 모습​​이날 협의에서 송도국제화복합단지개발(주)와 GS건설 컨소시엄이 연세대 국제캠퍼스 2단계 조성과 관련해 송도 11공구 수익용 부지에 공동주택과 오피스텔을 짓는 사업협약을 지난 6월말 체결함에 따라 송도세브란스 병원 건립 지원과 연세사이언스파크 조성 등에 대한 세부 사항을 논의했다.  인천경제청은 송도세브란스병원 건립과 연세사이언스파크 조성 사업이 정상적으로 추진될 수 있도록 일정별 세부 추진계획(안)을 연세대 측에 제안했다.  연세대는 송도세브란스병원 건립이 인천시와 체결한 사업협약에 따라 오는 2022년 착공, 2026년 준공을 목표로 정상 추진되고 있으며 연세대 국제캠퍼스 2단계 조성에 따른 개발이익금 투입 등 세부 일정은 실행안을 마련해 추후 다시 논의키로 했다.▲연세대는 송도세브란스병원 건립이 인천시와 체결한 사업협약에 따라 오는 2022년 착공, 2026년 준공을 목표로 정상 추진되고 있으며 연세대 국제캠퍼스 2단계 조성에 따른 개발이익금 투입 등 세부 일정은 실행안을 마련해 추후 다시 논의키로 했다. ​사진은 송도국제도시에 조성된 연세대 국제캠퍼스.​또 연세대는 연세사이언스파크 조성의 첫 사업인 제약바이오실용화센터 및 바이오공정인력양성센터 건립과 대학원생 등 연구인력 1000명 유치를 위한 ‘교직원·연구원 기숙사’ 건립을 올해 추진할 계획이며 신속한 행정절차가 이뤄질 수 있도록 인천경제청에 협조를 요청했다.  엄태호 연세대 YSP전략기획단장은 “K-바이오 랩허브 후보지로 최근 송도가 확정됨에 따라 송도세브란스 병원과 연세사이언스파크 조성에 큰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것”이라며 “연세대 국제캠퍼스를 기반으로 하는 혁신클러스터 구축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연세대 국제캠퍼스 2단계 조성사업은 송도 7공구의 연세대 국제캠퍼스 내 미개발 부지(24만6,486㎡)와 11공구 교육연구용지(14만1,291㎡) 등 총 38만7777㎡를 활용, △500병상 이상의 연구중심병원 건립 △융합연구, 창업벤처, 융합교육, 미래혁신, 산학협력, 소통혁신 등 여섯 개 구역(Zone)으로 구성되는 연세사이언스파크 조성이 골자다.▲ 송도에 건립되는 연세대 국제캠퍼스 2단계 조성사업은 송도 7공구의 연세대 국제캠퍼스 내 미개발 부지(24만6,486㎡)와 11공구 교육연구용지(14만1,291㎡) 등 총 38만7777㎡를 활용, △500병상 이상의 연구중심병원 건립 △융합연구, 창업벤처, 융합교육, 미래혁신, 산학협력, 소통혁신 등 여섯 개 구역(Zone)으로 구성되는 연세사이언스파크 조성이 골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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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21.08.09 (월)
  • 인천서 만개한, '은율탈춤'에 영혼을 바치다

    [기획 · 칼럼] 인천서 만개한, '은율탈춤'에 영혼을 바치다

    ​윤중강의 인천국악로드 ⑯ ‘은율탈춤전수관’과 장용수 선생 ​국악에는 시민들의 삶에서 묻어나오는 희로애락이 진솔하게 담겨있다.  2021년 신축년을 맞아 시민들의 가슴속에서 울고 웃고, 신명나게 놀았던 인천국악의 숨겨진 이야기들을 연재한다. ​1940년 봄부터 초여름까지, 인천은 가뭄이 극심했다. 인천의 모든 승려들은 단합하여, 수봉산에 올라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기로 했다. 1940년 6월 21일, 스님들이 순번을 정해 번갈아가며 밤낮으로 기우제를 올렸다.▲ 1978년 2월, 국가무형문화재 제61호로 은율탈춤이 지정 받았다.​ 은율탈춤은 이때부터 인천지역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전승되었다. 사진은 은율탈춤중 ​과장中원숭이새맥시 장면 (사진 은율탈춤보존회 제공)​​​인천의 명산 수봉산! 1983년 은율탈춤 전수관 생겨주안정(朱安町) 수봉산(水峰山)에 인천사람이 거의 다 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천공립상업학교(훗날 인천고등학교)150명과 인천상업전수학교(훗날 동산고등학교)260명 등 전교생이 전원 참가했다. 인천의 모든 관공서 사람들도 빠지지 않았고, 인천지역의 유지들도 물심양면으로 힘을 보탰다. 수봉산이 생긴 이래, 이토록 많은 인천사람이 모인 건 전무후무한 일이다.▲ ‘미추홀구 수봉공원’은 인천사람에겐 영험한 산이었다. 1975년부터 공원화사업이 추진되기 시작해, 1977년부터 본격화되었다. 이런 수봉공원에 ‘은율탈춤 전수관’이 생긴 건 1983년이다.​1940년 6월 24일, 인천 전역에 이른 아침부터 장대비가 쏟아졌다. 꼬박 사흘간 밤낮이 지난 후, 나흘째 되는 날 이른 아침 단비가 내렸으니 얼마나 좋았을까! 인천사람들은 천금감우(千金甘雨)라고 하며 억만금같이 귀한 단비라고 좋아했고, 강구연월(康衢煙月)의 인천이라 했다. 이는 ‘거리마다 아름다운 연기가 피어나는 평화로운 곳’이란 뜻의 복받은 도시라는 뜻이다.서울에 남산이 있다면, 인천엔 수봉산이 있다! 지금의 ‘미추홀구 수봉공원’은 인천사람에겐 영험한 산이었다. 1938년엔 수봉산에 경보대(警報臺)가 생겼다. 인천이 개항 후, 인천 용봉산(만국공원)에서 정오를 알리는 오포(午砲)가 인근의 일본인에게 특히 도움을 주었다면, 이제 수봉산의 ‘오정사이렌’은 주안(미추홀구)에 사는 조선인들을 위한 것이었다.▲ 은율탈춤의 최초의 인간문화재는 장용수(1903 ~1997, 영감, 가면제작)와 김춘신(상좌, 의상제작)이다. ‘장용수가 없었다면, 은율탈춤을 없었다’는 말이 가능할 정도로, 그는 은율탈춤에 평생을 바친 분이다. (사진 은율탈춤보존회 제공)​수봉산은 언제 공원이 된 건걸까? 주안 네거리에 시민회관이 준공(1974년)되면서, 수봉산의 공원화 얘기가 오갔다. 1975년부터 공원화사업이 추진되기 시작해, 1977년부터 본격화되었다. 이런 수봉공원에 ‘은율탈춤 전수관’이 생긴 건 1983년이다.1978년 2월, 국가무형문화재 제61호로 은율탈춤이 지정 받았다. 은율탈춤은 이때부터 인천지역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전승되었다. 봉산탈춤(1967년 지정), 강령탈춤(1970년 지정)보다 뒤늦게 지정을 받았지만, 해서(海西) 가면극의 삼두마차의 하나로서, 은율탈춤은 점차 위상을 높여갔다. 은율탈춤의 최초의 인간문화재는 장용수(1903 ~1997, 영감, 가면제작)와 김춘신(상좌, 의상제작)이다. ‘장용수가 없었다면, 은율탈춤을 없었다’는 말이 가능할 정도로, 그는 은율탈춤에 평생을 바친 분이다.​▲ 은율탈춤 전수발표공연. 1983년 7월 23일 인천시민회관. 인간문화재 장용수, 김춘신, 김영택이 악사를 맡으며 탈춤을 지도했다.당시 은율탈춤보존회 장용수 회장은 이 공연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을 마치 자신의 손녀와 손자처럼 아꼈다.장용수 선생은 노래, 춤, 반주, 탈제작 등 두루 능통​장용수 선생이 국악계에 알려진 건, 1970년대초다. 1972년 국립극장에서 열린 황해도민속예술보존회(黃海道民俗藝術保存會)의 제1회 발표회 때 장용수 옹이 출연을 했다. 김창구 국립극장장 시절인 1975년, ‘명창대향연 – 경서도편’이란 이름으로, 서도민요와 경기민요의 명창들이 무대에 올랐다. 서도소리의 김정연과 오복녀, 선소리산타령의 정득만과 이창배, 경기민요로 스타의 반열에 오른 안비취, 이은주, 묵계월, 감옥심과 함께, 장용수가 무대에 올랐다. 그의 소리는 달랐다. 그의 노래는 통속민요가 아니라 향토민요(토속민요) 본연의 땅내음과 땀내음이 배어있었다.​▲ 장용수 선생이 손자 손녀처럼 아낀 제자들. 은율탈춤보존회 보유자(인간문화재)이수자, 국비전수장학생, 일반전수자.​​▲ 은율탈춤을 발전시킨 기능보유자 김춘신(1925~2015) 사진 은율탈춤보존회 제공1977년 10월 26일, 제18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의 마지막 날(수원 공설운동장). 황해도팀은 ‘황해도민요–감내기, 난봉가’로 참여했다. 이 때 유난히 주목받은 한 사람이 있다.  장용수 선생이 ‘개인 연기상’을 받았다. 장용수 선생은 노래, 춤, 반주, 탈제작에 두루 능통했다.1983년 7월 23일, 인천시민회관에서는 ‘은율탈춤 전수발표공연’이 있었다. 장용수와 김춘신에 이어서, 김영택(피리, 장고)이 악사보유자로 추가 지정(1982년 6월) 되면서, 은율탈춤의 전승은 더욱 활기를 띄었다. 세 분의 인간문화재와 젊은 탈꾼들이 합심한 무대였다.▲ 제18회 전문민속예술경연대회. 장용수는 황해도대표로 참가해 황해도민요(감내기, 난봉가)를 불렀다. 장용수는 개인 연기상을 받았다.은율탈춤보존회 초대회장 장용수는 젊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은율탈춤 공연은 마치 ‘본인의 손주를 보는 듯한 뿌듯함’이라고 인사말을 통해 쓴 바 있다. 이 때 은율탈춤 공연에서의 ‘손주 같은’ 젊은이는 바로 차부회(사자, 노승), 안선균(목중, 미얄할미), 윤순자(상좌, 소무), 박일홍(취발이) 으로, 모두 인천의 전통예술계의 중견으로 성장했다. 이 무대에 출연한 최정학(목중, 원숭이)은 이후 향토사학자로서 인천을 알리는 일에 치중했다.은율탈춤의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은 곧 인천에서 은율탈춤이 뿌리를 내렸다는 것인데, 40여년이 지난 지금 앞의 사람들은 이제 은율탈춤의 ‘손주같은’ 신세대를 길러내는 책임을 지고 있다. 모두 장용수 옹의 제자들이다.장용수 선생은 은율탈춤을 중심으로 해서지방(황해도)의 노래문화와 공연문화를 알리기에 평생을 바쳤다. 그는 한국전쟁에서 두 아들을 잃었고, 서울과 천안 등지를 돌았다. 그가 최종적으로 정착한 곳은 인천이다. 함께 월남한 큰 아들의 사업은 부진했다. 이런 어려운 시절에, 은율탈춤전수관이 수봉공원에 생겼고, 장용수 선생은 늘 거기에 계셨다. 전수관의 한 구석에 있는 수의실의 간이침대가 그의 잠자리였다.1992년 7월, 민속학자 이보형과 KBS-FM의 홍승철PD가 수봉공원을 찾았다. 1992년 8월 15일 광복절특집방송 ‘두고온 땅, 그곳의 토속민요’(구성 심우성, 진행 이보형, 제작 홍승철)프로그램 취재차 들렸다. 홍승철 피디는 얘기한다. 민요를 취재하는 녹음 중 쉬는 시간에 여흥으로 부르신 장용수선생의 ‘수심가’는 국악피디로서 오래도록 활동한 홍승철 PD의 몇 손에 꼽는 노래였다고.▲은율탈춤중 과장노승춤 (사진 은율탈춤보존회 제공)​​​​​KBS-FM에서 제작한 ‘북한지역의 토속민요’(21세기 KBS –FM 시리즈 17. 한국의 전통음악)엔 배치기 소리가 담겼다. 황해도 배연신굿에서도 부르는 이 노래는, 황해도 남정네의 노래다. 고기잡이를 떠나려 갈 때나, 만선이 되어서 돌아올 때, 배 위에서 신명나게 부르는 노래다. 음반에선 안승삼, 고초재, 장용수 세 명이 불렀다.1992년 7월말, 인천 수봉공원에서 장용수 선생을 취재하고 돌아온 홍승철 피디는, 당시 방송작가로 활동한 내게 이런 말을 했다.“윤 선생님, 저 촌지를 받았어요?” “아니, 홍PD가 촌지라니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인천 수봉공원에 장용수 선생님 취재 간 것 아시잖아요. 취재를 다 끝내고 내려오는데, 장 선생님이 런닝셔츠 차림을 마구 뛰어오시더라구요. 그러면서 제 손에 돈 천원을 쥐여주셨어요. ” “그래서 그걸 받으셨어요?” “한두차례 거절을 했는데, 완강히 주시는데 어른에 대한 예의도 아닌 것 같더라구요. 그래서 ‘고맙습니다’ 하면서 받았어요.”1997년 2월 5일, 장용수 선생은 세상을 떠났다. 향년 93세. 그가 세상을 하직한 곳도 바로 전수관이다. 이곳은 그의 집이자, 그의 일터였다. 평생 경제적으로 윤택한 삶을 살지 못했으나, 아들같고 손자같고, 딸같고 손녀같은 많은 제자를 길러낸 분이 장용수 선생이다.▲ 2003년에 진행된 은율탈춤 공연 포스터어느 무더운 여름날, 런닝 차림의 장용수 옹이 좁은 수의실에서 부채질하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내가 그 현장에 있었던 건 아니지만, 자신의 노래와 얘기를 담으려고 서울서부터 찾아온 젊은 프로듀서에게, 러닝셔츠차림으로 뒤따라오면서 배웅해준 선생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인천사람에게, 인천에 터를 잡은 실향민들에게, 장용수 선생은 종가의 큰 어른’같은 존재였다. 공원에 가서, 위인의 동상을 만난다. 수봉공원에선, 장용수선생을 만났으면 좋겠다. 은율탈춤 최초 인간문화재 장용수 흉상이 수봉공원에 세웠으면 한다. 은율탈춤보존회와 인천미추홀구가 의기투합하면 가능하지 않을까?​글· 사진 윤중강 문화재위원, 국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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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21.08.11 (수)
  • 감염병전문병원, 서울7호선 청라연장 꼭 실현돼야

    [동네방네] 감염병전문병원, 서울7호선 청라연장 꼭 실현돼야

    ​기재부와 면담, 인천 현안 담은 7개 사업 건의​​​​​​​​​인천시는 지난 10일 기획재정부 제2차관이 주재하는 ‘지역별 예산협의회’에서 안도걸 2차관과의 면담을 갖고 주요 현안인 GCF 콤플렉스(Complex) 건립, 병원선 대체 건조, 백령공항 건설사업 등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적극적인 지원을 요청했다.지역별 예산협의회는 기획재정부가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정부예산안 편성에 반영하기 위해 마련한 것으로, 8월 3일 대구·경북을 시작으로 지역별 순회 방식으로 진행했으며, 금일 서울, 인천, 경기와 강원도를 마지막으로 5회에 걸쳐 개최됐다.▲인천시는 지난 10일 기획재정부 제2차관이 주재하는 ‘지역별 예산협의회’에서 안도걸 2차관과의 면담을 갖고 주요 현안인 GCF 콤플렉스(Complex) 건립, 병원선 대체 건조, 백령공항 건설사업 등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적극적인 지원을 요청했다.​ 사진은 기재부와 수도권 및 강원 예산협의회 장면.​​​이날 협의회에서 인천시는 2022년 국비사업 5건에 대한 1936억 원 지원과 2개 예비타당성 조사대상 선정 등 총 7건을 건의했다.2022년 국비 지원을 요청한 주요 사업은 국가균형발전 관련사업인 ▲GCF 콤플렉스(Complex) 건립 6억 원과 ▲감염병 전문병원 구축 ▲수도권광역급행철도(GTX-B노선) 신속 추진 ▲서울도시철도 7호선 청라국제도시 연장, ▲병원선 대체 건조 등 지역 발전·활성화 관련 사업 4건, 1930억 원이다.또한, ▲백령공항 건설과 ▲인천 바이오 부생수소 생산 클러스터 구축사업 2건에 대해 예비타당성 조사대상 선정을 건의했다.▲인천시가 기재부에 2022년 주요사업 예산지원을 요청한 사업 중에는 백령공항 건설사업도 포함되어 있다. 사진은 백령동 사곶해변.​ ▲서울 도시철도 7호선 청라국제도시 연장선에 포함될 역명​​특히, 시는 인천바이오 부생수소생산 클러스터 구축을 통한 ‘인천형 뉴딜’사업으로 저탄소·친환경 특별시로 대전환을 가속화한다는 방침이다.이날 협의회에 참석한 안영규 인천시 행정부시장은 “인천시가 기획재정부에 건의한 사업은 지역경제의 스마트화와 저탄소 경제기반으로의 전환, 시민들의 건강권 보장을 위한 지역의료체계 구축, 지역 교통망 확충으로 수도권 교통난 완화 등 지방과 중앙정부가 상생 가능한 사업으로 기재부의 각별한 관심과 적극적인 지원을 요청했다”고 말했다.이어, 향후 인천시에서는 정부안 확정시까지 지역현안 사업이 최대한 반영될 수 있도록 모든 행정력을 동원해 2022년 국비 확보 목표액 5조원(국비 4조 2000억, 보통교부세 8000억) 달성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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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21.08.11 (수)
  • ‘수채화’가 전하는 위로와 치유

    [전시 · 공연] ‘수채화’가 전하는 위로와 치유

    ​​‘2021 인천현대수채화제전’, 13~19일​​인천시가 후원하고 인천시 수채화협회가 주최하는 ‘2021 인천현대수채화제전’이 13일(금) ~ 19일(목) 인천문화예술회관 대·​중·​소 전시실에서 개최된다.올해로 6회째를 맞이하고 있는 ‘2021 인천현대수채화제전’은 ‘안부를 묻다’라는 주제로 코로나19 확산으로 힘든 시기에 서로를 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해 위로하고 치유가 되는 기회가 되길 바라며 마련했다.▲ Stanislaw Zoladz 'Windy day' (스웨덴) - 왼쪽,  심우채 '삶' (한국) - 오른쪽​​해외 17개국의 권위 있는 작가들과 국내 각 지역의 대표작가 150명의 수준 높은 수채화 150여점을 전시해 시민들에게 수채화의 예술적 가치와 아름다움을 선보이고자 한다.인천수채화협회는 풍성한 전시를 위해 전시기간 중 참여 작가들의 그림 공연을 기획했으나 코로나19로 개막식 등 부대행사 없이 전시만 진행한다. 다만, 사전 예약제로‘수채화마켓’을 운영해 전시된 작품을 판매할 예정이다.▲ 김종원 '모란' (한국) - 왼쪽,  Zhu Zhigang '회모' (중국) - 오른쪽​▲김상용 '우도인상' (한국)​​이상엽 회장은 이번 전시가 시민을 위한 고품격 문화가치 창조를 모색하고, 인천이 문화도시로 나아가는 길에 작은 디딤이 되길 소망한다고 밝혔다.​

    2021.08.13 ~ 2021.08.19
    작성일 2021.08.11 (수)
  • 인천화교 항일조직 ‘日東會’ 를  들어보셨나요?

    [인천 이야기] 인천화교 항일조직 ‘日東會’ 를 들어보셨나요?

    ​산동출신 화교들 주축, 일본관련 ·​ 세관 창고 방화 등 저항운동 벌여​인천화교들의 항일조직 ‘일동회(日東會)’를 아시나요. 우리가 일제 36년을 겪는 동안 조국의 광복과 해방을 위해 싸웠던 것처럼 화교들도 중국인들의 행복과 자유를 위해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대항했다. 그들은 인천에 있는 일본인들이 운영하는 정미소, 카페, 항구, 회사 등에 폭탄을 투척하며 적극적인 저항운동을 벌였다.▲​ 우리가 일제 36년을 겪는 동안 조국의 광복과 해방을 위해 싸웠던 것처럼 화교들도 중국인들의 행복과 자유를 위해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대항했다. 그들은 인천에 있는 일본인들이 운영하는 정미소, 카페, 항구, 회사 등에 폭탄을 투척하며 적극적인 저항운동을 벌였다. 그 항일운동의 중심에는 인천화교들로 조직된 '일동회'가 있었다. 사진 인천 차이나타운 전경.    ​인천에 거주하는 산둥성 출신 21명이 주축​​ 일동회는 인천화교들의 항일조직체였다. 인천대학교 이정희 교수가 쓴 논문 <중일전쟁 시기 조선화교의 항일활동>에 따르면 일제말기인 1930~40년대 사이에 인천, 신의주, 함흥, 경성, 대전 등에서 화교들이 항일운동을 벌였던 것으로 보고하고 있다. 화교들의 항일 활동은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가려진 역사다.이정희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일동회는 1940년 2월 중국팔로군 유격대 소속 장세원(張世元)의 주도로 인천부에 거주하는 산둥성 출신 21명의 노동자, 농민이 주축이 된 조직이었다.일동회의 항일활동은 1940년 2월 22일부터 1943년 4월 24일까지 약 3년간 집중됐다. 이들은 약 3년 동안 방화 12건, 군의 첩보 제보 2건을 감행했다. 일동회의 방화로 재산손해는 약 68만원, 사망자도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일동회는 인천화교 사환락(史桓樂,34)이 조직을 주도했다. 그는 18세 때 산둥성에서 중학을 졸업하고 1920년대 중반 부친 사축삼(史祝三)이 거주하던 인천으로 이주했다.▲ 인천청물사매시장은 일동회 조직원들의회합장소였다. 아래사진은 현재 동인천역 부근 청과물 시장모습이다.​​​​​그는 1936년 부친이 사망하자 아버지가 운영했던 인천시 선린동에 위치한 復成棧(여관 겸 잡화점)을 경영했고 1939년 12월 중공팔로군에 가입한 뒤 항일운동을 전개했다.사환락은 1939년 12월 복성잔의 점원 손덕진(孫德進), 왕배국(王培國)과 함께 인천항 부근 군사 정보를 탐지한다. 그는 1941년 9월까지 손덕진, 왕배국과 함께 일본 국방상의 이익을 방해하고자 인천내 재정경제 상태, 식량부족 정보를 산둥성으로 전달했다.▲ 일동회를 주도했던 사환락이 운영했던 복성잔 건물(가운데). 아래 사진은 옛날 복성잔이 있던 건물 현재 자리​​​​​​일동회는 일본의 정보를 탐지만이 아닌 직접 다이너마이트를 제조하여 일본인들의 재산, 시설을 폭파하는 일까지 감행했다. 그들이 다이너마이트를 던진 곳은 일본인들이 운영한 정미소, 제조회사, 창고였다. 제일먼저 다이너마이트가 터진곳은 인천 항동 소재의 인천세관 구내 제1창고였다. 이 폭발로 인해 세관 창고와 화물 전부가 전소됐다.두 번째 폭발사건은 인천 중앙동 3가에 위치한 강전시계점(岡田時計店) 부근의 상점 방화사건이었다. 일동회 조직원들이 제조한 다이너마이트는 강전시계점 서쪽에 위치한 공익사(共益社) 주택 남쪽 골목으로 투척했고 일본인 상점이나 주택에서 폭발해, 약 3만3천원의 재산손해를 발생시켰다.​​​​▲ 일동회 조직원들은 신포동에 있던 강전시계점 주변으로 다이너마이트를 던졌다.​​​​​​​정보수집, 일본인 창고 등 다이너마이트 폭파 주 활동​1942년 신포동29번지에 있는 인천키네마 인근의 다방 ‘도원(桃園)고토’에 이웃한 일본인 와카야마(若山)의 집 창고에도 폭발사건이 있었다. 이 방화로 와카야마(약산)의 주택이 전소하고 이웃한 일본인들의 창고가 불탔다.방세현(方世賢, 37, 榮成懸, 농업)도 일동회의 멤버였다. 그는 인천부 용현동에서 채소농사를 짓던 화농이었다. 그는 1940년 8월 방세능(方世能), 왕지신(王志信, 50, 萊陽懸, 농업)의 권유로 일동회에 가입했다. 방세현은 왕지신, 왕병경(王秉經, 43, 모평현, 충북음성군 거주)과 학익동507번지 일본인 소유의 위생재료공장을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했다.▲ 현재 신포로21번길. 이 길은 일동회 조직원들의 항일활동 노선 중에 하나였다.​​​​​​​​​​​방세영(方世英, 34, 榮城懸)은 주안에서 채소농사를 지었다. 그는 1941년 6월 방세능의 권유로 방세현의 집에서 중국인의 행복과 일본 타도를 위해 일동회에 가입했다.왕병경은 16세 때 조선으로 이주, 충북 음성군에서 호떡집을 운영하다 1942년 6월 1일 일동회에 가입했고, 군사비밀 정보를 수집하여 했으나 구체적인 성과는 없었다.왕지신(50, 래양현, 농업)은 24세 때 조선에 이주 함경남도 흥남읍에서 약 3년간 농업에 종사한 후 인천에서도 채소농사를 했다. 1940년 6~7월 방세능의 권유로 가입했다.그 역시 1942년 7월 왕지신의 주택에서 오진매(44, 모평현)와 인천부근의 군사상의 정보 및 재정 경제관련 정보를 수집했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오진매는 16세때 인천으로 왔고, 송현동에 거주하며 채소재배 농사를 지었다. 1942년 7월 왕지신의 주택에서 일동회에 가입했다.▲ 일동회는 신흥동에 있던 정미소를 방화했다. 정미소는 일제의 수탈현장이었기 때문에 타격의 대상이 됐다. 아래사진은 예전 정미소가 있던 자리의 현재 거리모습이다.​​​​​일동회 멤버들의 항일활동은 일본경찰의 대대적인 검거작전으로 일단락됐다. 결국 이들은 외환군사보호법, 국방치안법 등으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다. 이들 중 사환락, 왕지신, 방숭학, 오진매는 1943년 12월에서 1944년 2월 사이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사망했다. 사망의 원인은 아마도 열악한 환경에서의 신문과 가혹한 고문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서대문형무소는 조선의 많은 독립운동가가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옥사한 곳이지만 같은 형무소에서 외국인 4명의 화교가 항일활동을 하다 고문으로 옥사한 것은 새롭게 밝혀진 사실이다.인천화교협회 방승무 고문은 집안어른들 중에 일본에 대항하다 죽은 분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했다. 일동회 멤버중 방세능, 방세현, 방세영, 방숭학은 방씨 집안과 관련이 있는 인물들이다.잊혀진 역사된지 오래…방숭학 무덤만 인천가족공원에방승무 고문에 의하면 방세현(37, 농업)과 방세영은 친형제였고, 방세능은 이들과 사촌형제였다고 밝혔다. 나이가 제일 많았던 방세능의 직업은 인천항 부두노동자였다.그는 이들에 대한 안타까운 기억도 전했다,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혹독한 심문과 고문을 견디고 나온 방세영은 용현동에서 강도가 쏜 총을 맞고 사망했다고 한다. 타국에서 엄혹한 시절을 살다 비운의 삶을 마친 셈이다.▲ 일동회 조직원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사망한 방숭학의 묘는 인천가족공원 무연고 묘지에서 찾을 수 있다. 가족이 없는 방숭학의 시신은 집안 어른들이 수습해 인천화교묘지에 수습했다 부평에 있는 인천가족공원으로 옮겨졌다.  ​​​방숭학도 그의 집안사람이었다. 가문의 어른들로부터 그가 형무소에서 맞아 죽었다는 소리를 전해 들었다고 했다. 다른 항일 운동가들은 무덤도 없고 현재 자손들이 있는지도 모른채 뿔뿔이 흩어진 상태이지만 방숭학은 부평 인천가족공원에 무덤이 오롯이 있다. 방숭학의 시신은 집안 어른들이 수습했고 만수동 인천화교묘지에 있다 부평으로 이장했다.일동회는 인천화교들의 기억속에서 완전히 사라진 역사다. 인천 차이나타운에 거주하는 60대 이상 화교들 대부분이 일동회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항일의 역사가 완전히 사라진 안타까운 현실이다.글  이용남 i-View 편집위원, 사진 장현선 자유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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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21.08.11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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