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 제1207호] 2017년 06월 15일 (목) [광고문의] [구독신청][지난신문][홈페이지]
열차 생산기지 '인천공작창'의 최후
인천과 철도 ⑤인천역과 인천항
  

 철도는 항만과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전 세계를 잇는 항로를, 내륙 거점과 잇는 고전적인 수단은 철도이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항구 주변에는 어김 없이 복잡한 철도망이 구축되어 있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자동차의 시대가 열린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세계 주요 항구들은 철도와 연계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인천항 주변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많은 철도 노선들이 폐선되었지만, 여전히 인천항 주변에는 많은 철도 노선이, 그리고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이들 화물 노선들은 경인선과 연결되어 있었고, 그러한 연결 기능을 수행하던 곳이 바로 현재의 인천역이었다.


▲인천역 인근의 여러 지선들. 배경 그림은 1985년, 인천지도포털. 만석고가는 아직 건설되지 않았다.

경인선 전동차의 관점에서만 보면, 인천역은 종착역이었다. 하지만 화물 열차의 관점에서 보자면, 인천역은 최종 목적지로 향하기 위해 거쳐가야 하는 하나의 거점이었다. 목적지까지 달려야 하는 거리는 수백m에서 수km에 이르렀다.
인천역에서 출발하는 이들 선로는 크게 세 계통으로 구분할 수 있었다. 남쪽으로 이어져, 멀리는 수 km 떨어진 (현)석탄부두까지 이어지는 축항선이 가장 큰 가지였다. 여기에는 수인선 일부를 개궤하여 동양화학(현 OCI) 인천공장으로 이어졌던 동양화학선, 그리고 주인선과 연계되는 남부구내(속칭 “남인천역”)가 연계되어 있었다. 인천 북쪽의 인천제철까지 연결되었던 북해안선이 또 다른 가지였다. 북해안선에는 1984년까지 철도차량 제조와 정비 업무를 수행했던 인천공작창 또한 연계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남부구내로부터 경인선 주안역까지 연결되는 주인선 역시 주요 계통이었다.


▲인천공작창의 평면 구조. 한국철도차량100년사

북해안선: 희미한 흔적
이 가운데, 이번 편에서는 북해안선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 노선에 대한 이야기는 필자 개인의 어렸을 적 기억부터 시작할 수 있을 듯 하다. 어렸을 적 살았던 집의 바로 뒤편으로 북해안선이 통과했었기 때문이다.
오후 시간 즈음, 아파트 7층에서도 기차 소리는 멀리서부터 밀려들어왔다. 특유의 커다란 저음을 내뿜으면서 디젤 기관차는 화차를 끌고 느리게 달렸다. 화차 위에는 무언가 둥글둥글한 것이 실려 있었다. 북쪽 창문에서 바라보았던 덕분에, 열차를 바라볼 수 있는 각도는 그리 넓지 않았지만 열차가 인천역에서부터 달려와 인천제철 공장 내부로 향한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있었다. 아마도 시설물의 각도가 적절하지 않아서인지, 인천제철 내부에서 열차가 어떻게 되는지를 살펴볼 수는 없었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 알고 보니, 화차에 실려 있던 둥글둥글한 물체는 압연코일이었다. 자동차 등에 사용되는 강판의 재료였기에 인천제철을 열차가 들락거렸던 것이다. 압연코일은 매우 무겁기 때문에, 도로로 수송하면 과적과 도로 훼손의 주범이 된다. 인천제철측에서 상당기간 철도를 수송에 활용했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인천역에서 본 북해안선 방면. 만석고가(우측 고가교) 아래쪽으로 빠져나가는 철로다.




하지만 이런 용도로 사용되어 오던 북해안선 역시 1999년에는 열차 운행이 끊어진다. 이 시기는 도로망이 크게 발전한 시기인 만큼, 트럭 수송의 비중이 크게 늘어났을 것이다. 전동차만으로도 극심한 용량 초과 현상을 겪던 경인선을 이용한 화물 수송이 점차 감소했다는 점 또한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이후 철도 주변은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채 주민들의 불만을 부르는 시설들로 전락하고 만 듯 하다. 북해안선의 철도 시설물들이 완전히 철거되고, 보도, 그리고 얇은 가로 공원으로 바뀌어 오늘날의 모습이 된 것은 2006년의 일로 보인다. 

인천공작창: 한국철도차량산업의 요람
북해안선을 통해 철도망과 연결되어 있었던 시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시설을 꼽자면 물론 인천공작창일 것이다. 『한국철도차량100년사』에서는 1899년 6월 17일, 경인선 사업자에 의해 철도차량용 인천공장이 설립된 것을 인천공작창의 효시로 보고 있다(1287쪽). 이 공장에서는 최초의 경인선 철도차량을 조립한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동안에는 다른 여러 철도차량 공장이 신설되었고, 인천공작창에 대한 별도의 기록이 없어 인천공작창의 실적으로 분석하기는 어렵지만, 경인선의 역할이나 이후 한국철도에서의 역할로 볼 때 일제강점기에도 인천공작창은 국내에서 매우 중요한 철도차량 공장이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로 보인다. 또한 여러 기록으로 보아 북해안선은 1920년대에 부설된 것으로 보이는데, 아직 작은 규모였던 여러 부두 시설이나 공장을 연결하는 목적보다는 인천공작창을 철도에 연결하기 위한 목적이 더 컸을 것으로 보인다.
인천공작창에 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추적할 수 있는 것은 한국전쟁 이후인 1950년대 후반이다. 인천공작창에 대한 보도는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한 가지는 차량 생산, 그리고 다른 하나는 공작창 민영화에 대한 보도다.

▲ 연도별 철도차량 신조 물량. 데이터는 한국철도차량 100년사

인천공작창이 만든 차량에 대한 보도는 1955년 9월 23일 처음 확인할 수 있다. 9월 21일, 대통령 전용열차의 객차를 만들어 운행했다는 것이다. 이후 50년대 전반에 걸쳐 인천공작창은 미국으로부터 원조되어 들어온 객화차를 조립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조립을 넘어, 객화차에 대한 국내 개발∙제조가 시작된 시점은 1962년 초반이다. 이런 작업의 성과는 인천신문이 전하는 오늘의 소사에 담겨 전해 온다. 1963년 9월 23일에 인천공작창에서 석탄화차 10량을 만들었다는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강원도 일대의 탄전이 주요 에너지원이던 당시로서는 석탄화차를 국내 기술로 만들어 냈던 것은 상당한 성과였을 것이다. 비록 외자 도입이 늦어지면 객화차 생산도 늦어지는 열악한 상황이었지만, 인천공작창은 60~70년대 한국철도가 사용한 수많은 객화차를 생산하는 데 있어 주축이 되었다.

▲인천공작창의 대차 조립 장면. 한국철도차량 100년사

이런 과정 속 중간중간, 인천공작창은 지금 식으로 말하면 민영화, 당시 표현을 따르면 “민간기업 불하”로 인한 논란을 겪는다. 첫 번째로 벌어진 민영화 논란은 1959년부터 1960년에 걸쳐 일어났다. 보도가 간략하여 명확한 전개 과정은 파악하기 어렵지만, 이 당시의 대립은 정부 부처 사이의 대립인 것으로 보인다. 교통부는 공작창을 철강을 제조할 계획이던 당시 대한중공업 측에게 매각하려 했으나, 재무부는 국가 자산을 헐값에 매각하는 것이라며 반대해 매각 계획은 성사되지 않는다. 1961년 이후의 정치적 변동 속에, 공작창을 매각하는 계획은 없던 것이 된 듯 하다.




▲1967년의 인천공작창. 인천지도포털에서



두 번째 민영화 논란은 1969년부터 시작된다. 이 당시의 민영화 논쟁에서는 철도노조의 반대가 크게 부각된다. 1969년 5월 24일, 인천공작창 소속 노조원 8백여명이 민영화 반대 투쟁에 나섰다는 보도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노조측은 국고 손실은 물론, 노조를 인정하지 않던 신진자동차 아래에서는 일을 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정부측의 복안은 1970년 시점이 되어서야 보도로 명확하게 드러난다. 객화차 제조 사업은 철도청이 아니라 민간 사업자가 수행하게 하는 한편, 인천공작창과 같은 철도청 산하 공장에서는 차량의 개조와 검수 및 수리 기능을 맞긴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철도차량 제조 물량을 이전해 기계공업의 발전을 꾀하는 한편, 공작창에서는 철도 운영에 꼭 필요한 기능을 전담하게 만들어 공공과 민간의 역할 분담을 좀 더 효과적으로 만드는 것이 이러한 조치의 핵심 이유였다. 1971년 이러한 안은 실행에 옮겨진다. 노조 측은 감원 없는 고용 승계를 얻을 수 있었다.
이후 인천공작창에 대한 보도는 급감한다. 아마도 객차 제작과 같이 외부에 드러나는 일보다는, 운행중인 열차에 대한 보수처럼 외부에 잘 드러나지 않는 일이 주된 업무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침묵은 1979년까지 이어진다. 지금도 철도공사의 주력 정비∙개조 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대전철도차량정비본부(이하 대전창)으로의 이전 예정 소식이 침묵을 깬 바로 그 소식이었다. 대전창의 건설은 1977년 연구용역이 끝난 다음 본격화되었으며, 이 때 영등포공작창은 물론 인천공작창 역시 통폐합 대상으로 지정되었다. 통폐합의 이유는, 이들 공장이 낡은 데다가 작업 동선이 비효율적으로 계획되어 있어 생산 효율도 떨어지는 상태라는 데 있었다. 전국 철도망의 한쪽에만 철도공작창이 몰려 있다는 점 또한 중요한 요인이었다.
인천공작창은 대전창이 완성되어 기능이 이전된 직후인 1984년 2월 16일 폐창된다(한국철도차량100년사, 1287쪽). 폐창 사실은 보도조차 되지 않았다. 다만 84년 초 철도청의 업무 보고에서 부지 매각 대상으로 언급될 뿐이었다. 한국철도 최초의 차량 조립 공장이자, 철도차량 국산화의 중추였던 과거에 비하면 너무도 조용한 최후였다.




▲1986년의 인천공작창 부지. 철거가 완료되어 있다. 선로와 공장의 흔적을 약간
찾아볼 수 있는 상태다.



인천공작창 부지의 개발은 폐지 이후 5년이 지나서야 시작된다. 1989년이 되어서야 미륭아파트가 건설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부지 동남측에는 동부아파트, 서북측에는 화도진중학교(1992년 개교)가 들어서, 폐지 이후 9년차에 들어서야 개발이 완료된다.




▲철도공작창 부지의 현재 모습. 일진전기 방면에서 바라본 모습.
좌측부터 화도진중학교, 미륭아파트, 동부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글쓴이가 북해안선의 압연코일 수송 화물열차를 목격한 것은 이 다음의 일이었다. 그리고 당시 글쓴이의 집은 인천공작창 터에 세워진 동부 아파트에 있었다. 글쓴이는 자신도 모르는 채 북해안선의 존재 이유였던 인천공작창 터에서 소멸해 가는 노선의 마지막 기적 소리를 기록하게 되었던 셈이다.
글쓴이가 파악하기로는, 동부아파트나 미륭아파트의 어떠한 곳에도 인천공작창을 기념하는 시설물은 없다. 작은 비석 하나조차 없는 상황인 것으로 알고 있다. 북해안선 일원 역시 마찬가지 상황이다. 최초의 철도차량이 조립된 곳이자, 객화차 국산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공기업의 민영화, 그리고 철도노조의 활동처럼 경제사적으로도 의미있는 활동이 있었던 장소라는 점에 비춰 보면, 인천공작창은 너무나도 철저하게, 그리고 공작창 폐지 이후에는 지역에 살았던 주민조차도 알지 못하는 망각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인천이 철도를 통해 역사적 가치를 발굴하고자 한다면, 바로 이런 망각을 깨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글· 사진 전현우  도시철도 연구가, 철학자


 


/ 무단 전재 및 재편집 금지(뉴스 및 콘텐츠 사용은 인천시(☎440-8302)와 상의 후, 반드시 출처 수록)



[Joy Life] 누워 쉬는 서해의 섬
[뉴스브리핑] 생생인천뉴스
[Joy Life] 문화야 놀자
[사람과 사람] 인천 연극인들 신포동 살리기 대작전
[사람과 사람] 커피로 그리는 인천萬畵
[인천@인천] 열차 생산기지 '인천공작창'의 최후
[Joy Life] 화수동에선 시간이 머문다
[뉴스브리핑] 빚 2조원 감축… 부채 다이어트 성공

발행처 : 발행인 : 인천광역시장 ◆ 편집인 : 브랜드담당관 ◆ 편집장 : 유동현 ◆ 편집위원 : 이용남

수신거부,기사제보
인천광역시 남동구 정각로 29 (구월동) Copyright (c) 2005 by Incheon. All rights reserved. ☎ 032-440-8302

ⓒ 인터넷신문 ‘I-View’는 시민의 알권리 충족과 다양한 정보제공을 목적으로 인천광역시에서 발행하고 있으며, 객원기자 및 시민기자들이 시민을 대표해서 신문제작과 구성에 참여하고 온라인을 통해서만 배포되는 사이버 매체입니다. 게재된 내용은 필자 개인의 견해이며 신문에 실린 글과 사진은 허락을 받은 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인천광역시 인터넷신문「I-View」는 매주 2회(화,목요일) 발행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