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 제1192호] 2017년 04월 13일 (목) [광고문의] [구독신청][지난신문][홈페이지]
잉글랜드 리그 실력의 강화학당 축구팀
인천, 한국축구의 도입지이자 튼실한 요람
  

2004년 6월 22일 오전 11시, 인천항에 정박한 영국 군함 ‘엑시터호’ 함상. 휘슬이 울리자 한바탕 축구 경기가 벌어졌다. 그런데 복장이 특이했다. 한 팀은 대님으로 묶은 흰색 바지와 저고리를 입었고 흰색 수건으로 머리를 동여맸다. 상대 팀은 서구의 전통 수병 복장을 했다. 그들은 조선팀과 영국 해군팀이었다. 이날 사용한 볼은 대한축구협회 전시관에 보관돼 있던 1920년대 축구공이었다. 대한축구협회는 2003년 창립 70주년을 맞아 주한 영국대사관에 공로패를 전달했다. 이 자리에서 협회와 대사관 양측은 양국이 함께 축구 전래 과정을 재연해보자는데 뜻을 모았다. 일 년 후 영국 군함이 인천항에 입항하게 되자 이 행사가 성사된 것이다.


▲공설운동장에서의 축구시합

시계 바늘을 이로부터 122년 전으로 돌려본다. 1882년 (고종 19년) 6월, 제물포항에 영국 군함 ‘플라잉 피시(Flying Fish)’호가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임오군란 직후 동맹 관계에 있는 일본을 지원하고자 제물포항에 닻을 내린 것이다. 군함의 수병들은 오랜 선상 생활에 좀이 쑤셨다. 잠시 지루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몇 명의 수병들이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며 부두로 내려왔다. 파란 눈을 한 수병의 손에는  둥근 물건이 들려 있었다. 그들은 편을 갈라 부두 공터 이쪽에서 저쪽으로 왔다 갔다 하며 그 둥근 것을 발로 차기 시작했다.
얼마 쯤 시간이 흘렀을까, 부두 위쪽 언덕에서 무장한 조선 군졸들이 부두를 향해 달려 왔다. 영국 수병들은 부랴부랴 자신들의 배로 돌아갔다. 당시 조선은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최고조에 달했던 때로 서양 함선에 대한 경계가 심했다. 플라잉 피시호 수병들은 관가의 허가도 없이 상륙했기 때문에 조선 군졸들에게 쫓기게 된 것이다.

▲강화학당의 학동들

순식간에 당한 영국 수병들은 얼떨결에 그만 그들이 발로 찼던 둥근 물건을 놓고 가고 말았다. 부둣가에서 이를 지켜보던 아이들이 그것을 주워 좀 전에 영국 군인들이 하던 것을 그대로 흉내 냈다. 둥근 것은 축구공이었으며 아이들이 흉내 낸 몸짓은 바로 축구였다. 이것이 우리나라에 축구가 처음 들어오게 된 장면이다.
수병들은 급히 쫓겨 간 것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그들은 부두에 내려 인천인들과 담배를 나눠 피우며 편안하게 환담을 나눈 후 자기들 끼리 볼을 찼고 인천인들은 이를 흥미롭게 구경했다고 한다. 돌아갈 때 구경하던 조선사람들 한테 축구공을 주고 갔다는 화기애애한 이야기까지 전해진다. 심지어 부두에서 가까운 웃터골 운동장(현 제물포고)에서 영국 수병들은 제물포 사람들에게 공차기를 가르쳤고 시합까지 했다는 이야기로까지 진화한다.
이 땅에 축구를 전래한 플라잉 피시호는 ‘다른 사건’과 연결돼 조선에 큰 영향을 끼친다. 1882년 6월 5일 임오군란이 일어난다. 이른바 신식군대(별기군)에 비해 차별을 받았던 구식군대(훈련도감) 병사들의 불만이 분출된 사건이다. 이때 병사뿐만 아니라 조선민중의 일본에 대한 감정은 극에 다다른다. “일본 놈들이 조선 부인을 보면 그 피를 빨아 먹는다.”는 흉측한 유언비어가 나돌기도 했다. 평소에 쌓인 반일 감정에 이런 해괴망측한 소문이 퍼지자 성난 군중은 서대문 밖 일본공사관을 습격했다. 일본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와 공사관 직원들은 급히 인천(제물포) 방향으로 줄행랑쳤다. 관교동, 숭의동, 도원동을 거쳐 월미도에 숨었다. 그곳에서 간신히 영국 군함 플라잉 피시호를 타고 나가사키로 귀국했다.

▲개항기 인천의 바닷가 모습

그 후 일본은 임오군란으로 인한 피해 보상을 명목으로 하나부사를 다시 조선에 파견했다. 8월 12일 육군보병 1개 대대, 네 척의 군함 등 12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제물포에 상륙했다. 그리곤 일본은 조선을 강탈할 수 있는 명분을 얻을 수 있는 제물포조약을 맺었다.  현 북성동은 한 때 그의 이름을 따서 ‘화방정(花房町)’이라 불렸고 도망칠 당시 북성동에서 하나부사가 마셨던 우물은 ‘화방우물’이란 이름을 얻었다.
인천은 대한민국 축구의 도입지이자 튼실한 요람이었다. 영국성공회 신부 시드니 J 파커는 제물포로 와서 인천 곳곳을 둘러보았다. 1901년 3월 21일 그 소감을 영국 성공회가 발행하는 잡지 '모닝컴' 편집자에게 사진과 함께 편지를 보냈다. ‘G.A. 브라이들 목사에게 수년간 훈련을 받은 강화학당 축구팀이 존재한다. 선수들은 좋은 경기력을 선보이고 있으며, 보다 체계적인 훈련을 받는다면 잉글랜드 리그 진출도 가능하다.’
강화학당 축구팀이 1890년대 후반부터 존재했고 강팀이었음을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 기록이 발굴되기 전까지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축구단이 생긴 곳은  1904년 서울의 관립 외국어학교라고 알려져 있다. 인천 지역에서는 그보다 최소한 3년 앞서 축구단을 운영했다.

▲월미도 선착장으로 추정되는 곳

6.25 전쟁 후 간혹 인천에서 한(韓)·영(英)군 친선 축구 경기가 열렸다. 1955년 4월 1일 하오 2시부터 인천공설운동장에서 인천항에 정박한 영국 순양함 ‘뉴캐슬’호를 환영하는 친선축구시합이 열렸다. 뉴캐슬팀은 인천HID팀과 겨뤘다. 전반전 HID팀이 3대0으로 앞서갔고 후반전은 영국팀의 기권으로 결국 HID팀이 승리했다. 6.25 전쟁에 참전한 영국군은 휴전 후 1957년 까지 한국에 주둔했다. 인천에서는 옛 송도유원지와 숭의로터리 부근에 주둔했다. 그들은 그들의 선배들이 전파한 축구 경기를 각종 인천팀과 친선으로 치렀다.

원고출처 <시대의 길목, 개항장> (저자 유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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