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 제1114호] 2016년 06월 28일 (화) [광고문의] [구독신청][지난신문][홈페이지]
백년 넘는 한· 중 퓨전요리 '양장피'
이방인의 삶의 애환 담긴, 한국속 중국요리
  

지리적 환경이나 역사적 배경으로 보았을 때 한국인과 중국인은 꽤나 오래 전부터 교류해온 것으로 보인다. 역사가 사관(史觀)에 따라 다를 수는 있겠지만 평양(平壤) 을밀대(乙密臺) 아래에 있는, 이른바 기자(箕子, 중국 은(殷)나라 왕족)의 무덤이 한·중의 관계를 말해준다.
‘화교(華僑)’라는 단어는 근대(近代)에 들어와서야 생겨난 어휘이다. 중국 저장대학(浙江大學) 역사학과 교수인 차이수롱(蔡蘇龍)교수에 따르면, 19세기인 청나라 말에 먼저 ‘화상(華商, 화교 상인)’, ‘교민(僑民)’ 등의 개념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1883년 정관응(鄭觀應, 1842~1922, 당시 기선투자국 총판이)이 이홍장(李鴻章, 1823~1901 청나라 말 명신)에게 올린 상서에 ‘화교(華僑)’라는 단어가 처음 사용된다. 1911년 신해혁명 직후 중국의 국부인 손문(孫文)이 “화교는 혁명의 어머니(華僑爲革命之母)”라는 말을 함으로써 ‘화교(華僑)’라는 개념과 어휘가 보편화되기 시작했고, 이 후 해외에 거주하는 모든 중국계 국적을 가지고 있는 중국인들을 ‘화교(華僑)’라고 칭했다. 이 시기 한국에도 화교들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1882년 임오군란 때 청군과 함께 온 화상이 화교 원조
한국의 화교사회가 정식으로 형성된 것은 1882년부터로 보여진다. 현재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1882년 임오군란이 발발했을 때 화교가 한국으로 이주해 왔고 단체 활동도 이때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이 시기가 바로 고종 19년인데, 그 해 6월 청조가 조선을 돕기 위해 세 척의 군함과 두 척의 상선에 나누어 3천여 명의 병력을 파견한다. 중국 산둥성(山東省) 옌타이(煙臺)에서 출발한 병력들은 한 달 후 인천을 거처 서울에 도착했다. 당시 청군(淸軍)과 함께 온 화상(華商)의 수는 약 40여 명, 이들이 근대 들어 최초의 한국 화교라 할 수 있겠다.
그 후 130여년이 지난 2011년, 미국에 많은 중국요리 전문가들과 미식가들의 관심과 주목을 받은 요리가 있었으니 이 요리가 바로 양장피(兩張皮)이다. 중국 사람들한테는 매우 생소하겠지만 ‘양장피’라는 요리는 한국 사람에게 매우 익숙하면서도 배달시켜 먹을 정도로 흔한 요리이다. 미국에서 이 요리를 소개한 요리사는 조지아(Georgia) 주 콜럼버스(Columbus)에 위치한 《Chef Lee's Peking Restaurant》의 리쉐멍(李學孟) 스푸(師傅,  중국 요리사를 가리키는 말)이다. 미국의 인기 요리프로그램 《YAN CAN COOK》의 진행자 Martin, Yan(甄文達)의 극찬을 받고, 그의 프로그램을 통해 미국 시청자들에게 직접 소개되기도 한다.


특이하고도 재미있는 이름을 더해서 그런지 양장피는 미국에서 ‘한국의 중국요리’를 대표하는 요리로 자리 잡는다. 리쉐멍(李學孟) 스푸는 박정희 정권의 화교정책이 시행되던 1978년 미국 캘리포니아(California) 주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로 이주한 한국 화교 2세다. 흔히들 1960년~1990년까지 한국에는 차이나타운이 없었던 시절이라고 한다. 법무부의 통계에 따르면 화교정책에 의해 한국 화교의 인구는 점차 감소해갔고 1970년대 초부터 미국을 비롯하여 호주, 대만 등지로 이주한다. 1960년대 말까지 4만 명을 헤아렸던 화교들 가운데 2만 명 이상이 외국으로 이주하였으며, 미국의 캘리포니아 주 지역에만 현재 8천여 명의 한국 화교 출신자들이 거주하고 있다. 1980년대에서 1990년대 말까지도 이민은 꾸준히 이어져 매년 한국 화교의 약 2~4% 정도가 해외로 이주하였으며, 이 기간 동안 약 6천여 명의 한국 화교가 한국을 빠져나갔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박정희 정권의 화교정책이 한국의 중국요리가 세계 각국으로 퍼져나가게 된 촉매 역할을 한 셈이다.


양장피는 ‘양장피 잡채’에서 유래?
양장피는 ‘양장피(兩張皮)’라는 이름 즉, ‘두 장의 껍질’이라는 공통된 이름으로 세계 각국에 알려져 있다. 한자문화권에 나라에서는 ‘양장피(兩張皮)’라고 하고 영어권인 나라에서는 ‘DOUBLE SKIN DISH’라고 부른다.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양장피를 파는 식당은 모두 한인(韓人) 아니면 한국 화교 출신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은 더 물을 나위도 없이 ‘양장피(兩張皮)’라는 이름이 바로 한국에서 생겨났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한국의 화교에 의해 양장피가 지역의 특성에 맞게 바뀌고 한국 사람들이 이 요리를 ‘양장피’라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사람들은 왜 양장피를 ‘양장피’라고 불렀을까? 사실 이 물음은 중국요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물음이기도 하다. 뜬금없는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양장피는 한국의 잡채(雜菜)와 관련이 많다.


한국 사람들은 그동안 양장피를 ‘양장피 잡채(兩張皮 雜菜)’라고 불러왔다. 다시 말해 ‘양장피가 들어간 잡채’이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이다. ‘양장피 잡채’에서 ‘양장피’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1931년 4월 24일 동아일보 4면 생활/문화면에 실린 연재기사를 보자.
기사 내용 중에는 “…중국 사람이 파는 양장피도 불려 넣고 겨자도 치고… ”라는 내용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양장피”는 양장피 요리가 아닌 양장피의 주재료인 라피(拉皮)를 가리킨다.  라피는 ‘얇은 녹말묵’ 같은 건데 녹두나 감자녹말을 물에 희석시켜 더운물에 데치면 투명해지면서 찬물에 식혀 묵처럼 만든다. 중국 남방에서는 라피를 ‘펀피(粉皮)’라고 한다.
라피는 보관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건조를 시키기도 하는데 특히 대량생산의 유통과정에서는 건조가 필수이다. 연재기사에서 언급된 “양장피”가 바로 건조시킨 라피가 되겠다. 건조가 된 라피를 물에 불리면 다시 묵처럼 된다.
1919년 황해도(黃海道) 사리원 동리(沙里院東里)에서 당면 공장이 운영되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 제조 방법이 비슷한, 건조된 라피가 유통된 것으로 보인다.

1931년 4월 24일 동아일보 4면에 게재된 생활문화 연재기사. 양장피에 관한 내용이 실려있다.

어쩌다가 ‘라피’가 ‘양장피’로 불렸을까? 화교 스푸 사이에서는 양장피를 ‘차오러우피(炒肉皮)’라고 부른다. 한국 화교 스푸들은 요리 이름을 줄여서 부르는 습관이 있는데 탕수육(糖醋肉)을 ‘탕러우(糖肉)’, 짜장면(炸醬麪)을 ‘장미엔(醬麪)’, 해물잡탕(海雜伴)을 ‘자발(雜伴)’이라고 줄여서 말하곤 한다. 양장피도 ‘차오러우라피(炒肉拉皮)’를 줄여서 ‘차오러우피’라고 말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차오러우라피는 중국 동북지방에서 매우 유명한 요리면서 양장피와 형태적으로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차오러우피(炒肉皮)’나 ‘양장피(兩張皮)’는 중국 현지에 없거나 완전히 다른 요리이다.

양장피와 비슷한 ‘차오러우(炒肉)’는 고기볶음
‘차오러우(炒肉)’는 ‘고기볶음’이라는 뜻으로 차오러우라피가 양장피의 원형이며 초창기 양장피의 모습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차오러우라피에서 가장 주요한 재료는 라피이며, 찬물로 다시 식히는 과정이 필요해 중국요리 식당의 구조로 보았을 때 먼저 만드는 것이 순서이다. 때문에 처오러우라피 주문이 들어오면 통상적으로 먼저 “라장피!(拉張皮! 라피 한 장 뽑아!)”라고 외쳤을 것이고  ‘라장피’가 ‘양장피’로 발전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치 “짱이꺼!(醬一個! 짜장 하나!)”가 ‘짱깨’로 불리고, 중국 민방언(閩方言)의 인사말이 짬뽕으로, ‘난젠완쯔(南煎丸子)’가 ‘난자완스’로 불리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양장피는 라피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양장피 잡채’의 잡채는 어쩌다가 붙은 이름일까? 『규곤요람(閨壼要覽)』(1860년)이나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1936)에서 언급되는 잡채의 조리법을 정리하면 ‘고기나 야채 혹은 해산물 등을 채 썰어 익힌 후 섞어 겨자장이나 초장에 찍어 먹는다.’로 요약된다. 특이한 점은 『규곤요람』에서는 당면에 대해 언급조차 없었으며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서는 당면의 사용을 좋지 않다고 했다. 이렇듯 과거 한국에서 먹었던 잡채는 라피 없는 차오러우라피와 비슷하다. 차오러우라피는 양장피와 달리 참깨장(芝麻酱)을 뿌려 섞어 먹는다.

중국 동북지역의 차오러우라피(炒肉拉皮)

당연히 차오러우라피가 한국의 잡채와 비슷한 음식으로 보였고 라피가 들어간 것이 특징이기 때문에 ‘양장피 잡채’라고 옮겨 불렀을 것이다. 이것은 마치 ‘총빠우하이센(葱爆海参)’을 한국의 ‘해삼탕(海蔘湯)’으로 옮겨 부르고, ‘하이자발(海雜伴)’을 한국의 ‘해물잡탕(海物雜湯)’으로 옮겨 부르는 것과 같다. 


이방인의 삶의 애환이 그대로 담긴 음식
지금의 양장피는 차오러우라피와는 많이 다르다. 중국을 제외한 모든 중국요리는 그 지역 특성에 맞게 바뀌는 것이 특징인데 지금의 양장피는 과거 한국 잡채의 재료 중 고기와 해산물 특히 불린 건해삼이 들어가고 참깨장인 아닌 겨자장을 뿌려 섞어 먹는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이러한 양장피는 과거 한국의 잡채에 영향을 많이 받아 차오러우라피와 과거의 잡채가 섞인 형태를 띠고 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한국의 중국요리에는 ‘잡채’라는 요리가 따로 있는데, 한국의 잡채를 중국의 요리 기법으로 당면을 넣고 센 불로 볶아내는 것이다. 흔히 우리가 말하는 ‘잡채밥’의 그 잡채이다. 한국의 중국요리 잡채를 화교들은 뭐라고 부를까? ‘차오러우(炒肉)’, 뜻밖에도 ‘고기볶음’이라고 부른다. ‘잡채’가 어떻게 ‘고기볶음’으로 부릴 수 있을까? 답은 ‘양장피 잡채’와 ‘차오러우라피’에 있다. ‘양장피 잡채’의 ‘양장피’가 ‘차오러우라피’의 ‘라피’가 되니까 자연스럽게 ‘잡채’가 ‘차오러우’가 되고 ‘잡채’를 ‘차오러우’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래서 ‘차오러우라피’에는 라피 위에 ‘고기볶음’만 있는 반면 양장피에는 요즘의 잡채와 형태가 비슷한 ‘차오러우’가 라피 위에 있다. 이것은 라피가 양장피로 불렸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양장피는 어쩌면 한국 화교들의 삶을 대변하고 있는 요리일지도 모른다. ‘두 장의 껍질’이라는 이름이 마치 이를 대변하듯이 이방인의 애환을 그대로 나타낸다. 국적이 불분명한 요리이면서 더운 요리도(러차이) 아닌 것이 차가운 요리도 아니다. 현대 중국어에는 이른바 ‘양장피현상(兩張皮現象)’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한 가지 일을 두 가지 관점으로 보거나 한 가지 일에서 두 가지 결과가 나타날 때 쓰는 말이다. 양장피(兩張皮)야말로 이 요리에 가장 어울리는 이름이 아닌가싶다.


글·사진 주희풍 인천화교, 서울대 중문과 박사과정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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