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시절

[그때 그 시절] 용유도 항일투쟁조직 ‘혈성단’, 아시나요?

발간일 2019.02.25 (월) 16:37


조명원 주축으로 조종서, 최봉학 등이 모여 결성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의 주권은 일본에 넘어갔다. 일제강점기 35년 동안 많은 억압 속에서도 많은 독립단체가 생겼고 목숨을 걸고 나라를 찾기 위한 몸부림이 있었다. 인천 용유지역 ‘혈성단’은 항일투쟁조직체였다. 어떤 목적으로 결성되었고 어떤 독립운동을 펼쳤으며, 만세운동에 참여한 인물 등 구체적인 내용이 남는 민족단체다.


▲혈성단을 조직한 조종서



19세 조명원, 혈성단을 조직하다


19세... 고3의 나이로 부모님 품에서 안락하게 공부만 할 나이다. 

기미년 (1919년), 그의 나이 19세였다. 서울 배재학당에 재학중이던 용유도 (現 인천시 중구 용유동) 조명원 청년은 서울 기미 3.1독립선언식에 참석한다.

1919년 3월24일 귀향, 동네 청년 21세 조종서, 23세 최봉학, 21세 문무년에게 3.1운동 소식을 전한다. 용유도에서도 만세운동을 결의하고 자신의 집에 모여 ‘혈성단’을 조직한다. 네 명의 피 끓는 청춘은 비밀 항일 투쟁조직체 신서 1통을 작성한 후 피로 서명한다.




3월 27일 비밀리에 만세운동을 준비하다


인천시내에서 광목천을 구입하고 대형태극기를 만든 후, ‘혈성단 주모자 조명원, 조종서, 문무년, 최봉학’ 이라는 이름을 크게 쓴 후, ‘조선운동을 거사할 것이니 28일 관청리 광장에 모이라’라는 격문을 작성한다. 80여 통의 격문을, 거사 바로 전날인 27일 어둠을 틈타 각 가정에 전달했다. 남북동, 거잠포, 을왕동, 덕교동 가정 중 문자해독이 가능한 가정만 비밀리에 배포를 마치고 을왕동 늘목에서 거사에 쓸 태극기를 밤새 만든다.


을왕리 늘목 23세 유웅렬의 집 사랑채에는 밤새 불빛이 꺼지지 않았다. 사랑채에서는 30세 이기복 씨와 네 명의 청년들이 시위 당일에 흔들 태극기를 밤새 만들었다. 

그렇게 모든 준비는 끝났다.




관청리 광장에서 울려 퍼지던 만세! 만세! 만세!


을왕리 관청말(현재 용유동복지센터 자리)에는 새벽부터 광목천으로 제작된 대형 태극기가 게양된다. 대나무 죽창에 메달린 태극기는 관청리 광장 중앙에 자랑스럽게 나부꼈다. 38세 오기섭, 24세 구길서가 덕교동 주민을 이끌고 광장으로 갔다. 남북동은 32세 김윤배, 32세 윤치방이 주민을 이끌었다. 주민 150여명은 독립선언식을 거행하며 ‘대한독립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을왕동 35세 이난의와 23세 유웅렬이 많은 주민을 이끌고 합세했다.


▲혈성단을 조직한 최봉학


혈성단원 조명원, 조종서, 문무현, 최봉학이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며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했다. 시위대들은 북을 치고 주민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용유 전 지역을 돌며 대한독립의 당위성을 알렸다.




그후 매년 울리는 “대한독립만세”


용유지역 만세운동은 타 지역 만세운동과 달리 기미년 이후 해마다 지속되었다. 

용유도는 풍년풍어를 기원하던 도선제를 매해 지내며 만세운동을 이어갔다. 오성산 정상에 설치된 봉화대에 봉화를 올리며 밤새 “대한독립만세”를 외쳐 하늘에 고하고 세계만방에 전했다. 




선조의 항일투사 넋을 소중히 잇는 후손


역사는 기록되어야 이어질 수 있다. 일본에 항거하다 투옥되고 갖가지 수난을 겪은 용유면 11명의 항일투사의 이야기가 아직도 남아있는 이유는 후손들의 노력 때문이다.


▲나수영 전 용유면장(좌), 서병구 3.1운동보존위원회장
​(우)


▲나수영 전 용유면장이 모은 사진 뒤에는 당시 함께 한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이 적혀있다.


나수영(91세, 전 용유면장) 어르신은 용유면장을 지냈다. 용유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의 기록을 남기지 않으면 사라질 수 있겠다는 역사의식에서 그는 독립운동을 기리는 비석을 세우기로 마음먹는다. 그가 면장일 당시 각 부락에 연락을 취해 기념비석사업에 협조를 구했다. 1982년 ‘용유면 삼일독립만세기념 공적비 건립 추진위원회’를 만들고 1983년 3월1일 제막식을 목표로 모금활동을 시작했다.


“어떤 집은 1.000원도 내고 어떤 집은 250만원도 냈어. 부족한 돈은 내가 땅을 팔아서 댔지. 그런데도 부족한 돈은 비석을 의뢰한 ‘충남석재’사장이 냈지. 땅을 팔아가면서라도 역사적 사실을 남기고 싶었어.”


나수영 전 용유면장은 지역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대대손손에게 알리고 싶었단다.




1983년 3월 28일 용유중학교 교정에서 제막식이 열렸다. 유족가족 대표로 조병국 씨가 참여했다.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했던 조명원, 조종서 씨는 자신의 고택을 시에 기증한 ‘조병수 가옥’으로 유명한 조 씨 집안이다.) 사비를 털어 기금을 조성한 나수영 전 면장, 후대 면장인 김대열 씨, 부족한 돈을 받지 않고 비석을 세워준 백완기 충남석재 사장도 제막식에 참여해 자리를 빛냈다. 만세운동이 있었던 관청리 광장에 비석을 세우고, 바로 옆 용유중학교 교정에서 제막식을 했다.

그후 추모비석은 지대가 낮아 장마 때마다 비석은 물에 잠기는 수모를 겪는다. 본체 1기 만 덩그러니 있던 그곳에 2017년 9월 12일 비석 1기가 더 추가 건립되고 추모공간이 새롭게 태어났다. 추모벽을 설치하고 화강석 계단을 설치하고 기념비와 추모비의 위치도 변경했다.

▲왼쪽부터 서병구 3.1운동 보존위원회장, 나수영 전 면장, 이광만 영종1동 주민자치위원장




“사람들은 왜 노인회에서 자비를 내가면서 그렇게 항일운동기념에 신경을 쓰냐고 묻지. 우리 용유 노인들은, 내 생전에 지역의 역사적 사건을 알리고 후세에게 항일운동 정신을 알리고 싶은 마음뿐이야. 지역에 대한 애향심, 그게 있어야 지역이 발전하고 귀한 인물들이 나올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거야.” 나수영 전 면장의 뒤를 이어 ‘3.1운동 보존위원회’ 회장을 역임 중인 서병구 노인회장은 말한다.


요즘 젊은이들은 나이든 기성세대를 ‘꼰대’라며 무시한다. 그러나 노인들은 젊은 세대들에게 잊어서는 안 될 정신을 잇기 위해 사비를 털어가며, 잠을 설쳐가며 동분서주하고 있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현주 I-view기자 o7004@naver.com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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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8-05 17:56:57.0

    가슴이 아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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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3-04 10:21:42.0

    ▲알림
    경기매일신문은 3.1절 전인 지난 2월27일 4244호 16면에 ‘용유도 항일투쟁조직 ’혈성단‘, 아시나요?’라는 특집기사를 게재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본지의 실수로 인천광역시청 소속 ‘i-view 인터넷 신문’ 이현주 기자의 기사를 인천광역시청의 보도자료로 오인해 그대로 실었습니다. 이에 ‘I-view 인터넷 신문’의 이현주 기자가 직접 작성한 기사를 본인의 허락 없이 사용한 점에 대해 해당 기자와 I-view 신문사에게 깊은 사과를 드립니다.
    추후 이 같은 실수가 없도록 경기매일신문은 더욱 노력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경기매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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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2-27 15:40:26.0


    위와 같은 똑 같은 기사가 경기매일에도....어찌된 것인가요?
    확인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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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2-26 12:37:35.0

    좋은 기사 감사드립니다. 인천의 독립운동에 대한 작품도 준비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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