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이야기

[인천 이야기] 1940년대 한국 최대 무역회사 ‘만취동’ 아시나요?

발간일 2019.11.06 (수) 16:06


 인천 화교들 신포동에 세워,
중화요리점, 고량주공장 등도 운영

1930, 40년대 신포동 일대는 중국인 무역상들의 주 활동 무대였다. 당대 최고의 무역상이었던 화교들은 인천항을 통해 중국은 물론 홍콩까지 진출해 물건을 사왔고, 그 수입한 상품들을 국내에 판매하며 시장을 넓혀 나갔다.




일제강점기, 해방초기 화교 무역회사로 유명


1930, 40년대 화교 무역상의 중심에 만취동(萬聚東)이 있었다. 만취동은 화교들이 인천에서 운영했던 무역회사다. 이 회사는 1948년 연간 무역액이 6억 6,525만원에 달했을 정도로 잘 나가던 무역회사였다.


만취동은 1915년 인천 중구 내리 213번지에서 무역업을 시작했다. 해산물 무역상점과 잡화점으로 시작해, 점점 사세를 확장했고 1930년대 신정(新町) 즉 지금의 신포동으로 이전했다. 1935년 경영자는 왕승선(王承謆)으로 산둥성 출신이었다.

학익동에 있었던 ‘동생양조장​’​​ 공장


만취동은 객잔을 운영하면서 산둥과 인천을 왕래하는 화교 무역상들에게 각종 여행서비스를 제공했다. 미군정 시절에는 인천 신포동 24번지에 본사를 두고, 서울 소공동에 지점을 둘 정도로 성장했다. 비즈니스 대상은 중국 대륙, 홍콩, 마카오 등으로 중국 대륙의 국·공내전으로 발생한 전쟁수요 기회를 틈타 밀무역을 하기도 했다.

 

만취동이 밀무역을 비교적 자유롭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중국 장개석 총통이 미군과 연합해 싸워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아 중국인들은 연합국의 1등 국민 지위를 유지있었기 때문이다. 1949년 한중문화협회 광고를 보면 당시 만취동의 주소지는 신포동 24번지로 기록 되어 있다. 만취동은 무역상 뿐 아니라 백주공장, 중화요리점, 당면공장 등도 운영 했다. 만취동은 합과(合夥)였다.


만취동은 동아시아를 상대로 무역거래를 했고 외국에서 온 무역상들에게 숙식과 무역 편의까지 제공한 글로벌 기업이었다. 만취동 발행 주식은 총 1,138주였다.
 


동생양조장​’​을 운영했던 왕청화 어르신의 젊은시절 모습


만취동의 현재 위치는 제물량로 166번길 17, 19번지 일대로 보인다. 현재 위치에는 신해물탕집과 카페가 운영중이다. 만취동 양조장 자리에는 현재 신포마트 위치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이 거리는 신포동의 중심지였다. 만취동 양조장의 이름은 ‘東生’이었다. 화교 王淸華(93)어르신은 만취동에서 경리로 일하면서 양조장을 운영했다.


그는 중국에서 들어온 물건과 외상값을 장부에 꼼꼼히 기록하고 관리 했다. 또 인천항에 손님이 오면 모셔오고 대접하는 일도 했다. 1926년생인 왕청화 어르신은 15세때인 1940년 인천에 왔다. 한국에는 그의 외삼촌이자 만취동 사장인 강무정(姜茂禎)이 있었다.




‘동생양조장’ 잘 됐지만 1973년 한국인에게 매각


왕청화 어르신은 1945년 전에 인천에 왔고 그때부터 만취동에서 일했다. 그는 6.25 한국전쟁이 나자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소무의도로 피난을 간 부인과 어머니와는 다른 길이었다. 그는 피난을 가면서도 만취동의 장부를 챙겨 떠났다. 만취 동의 거래내역이 적힌 장부는 제일 귀중한 재산이었기 때문이다.

 

왕청화 어르신의 장남 왕요정(王耀庭, 69)씨의 기억에 의하면 당시 고량주의 원료인 수수는 수입했다고 한다. 고량주공장 일꾼들은 수수를 큰솥에 부어 삶고 가열하여 발효한 다음 45도의 맑은 증류주를 뽑아냈다. 당시 전국에 고량주를 만드는 회사가 4~5곳 있었는데 모두 화교들이 운영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고량주를 ‘독’에 넣어서 음식점에 배달했어요. 작은병은 없었고 1.8ℓ큰 병만 팔았던 것 같아요. 당시 아버님이 외 근 나가실 때면 중국어로 ‘하가(下街)’하러 간다고 하면서 일하러 가셨어요.”


만취동 강무정 사장과 왕청화​ 어르신(왼쪽)


동생양조장에서 제조한 고량​주


고량주 사업은 잘 됐었다. 당시만 해도 한국에는 제대로 된 술공장 이 없었기 때문이다.

 

동생양조장은 사세가 번창하자 1967년 경 학익동 독쟁이고개 부근으로 공장을 넓혀 이전했다. 신포동은 공장 부지가 작았다.

 

“한때는 화교 고량주회사들이 공동마케팅을 한 적도 있어요, 고량주협회를 만들어 판매 배송을 함께 한 것이지요.”

 

영업이 잘 됐던 동생양조장은 1973년 경 사업을 정리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 가 있지만 주주들간의 의견이 맞지 않았고 세금문제, 한국정부의 정책이 바뀌면서 어려움에 직면했다. 왕요정씨에 따르면 당시 화교사회는 모든 소리를 낮추고 한국정부 의 눈치를 보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동생양조장은 1973년 한국인에게 매각됐다. 왕청하 어르신은 신포동에서 ‘동화상사’라는 잡화상을 운영하다 1976년 8월 경 부평으로 이사한 뒤 복흥원(福興園)이라는 중국집을 열었다. 복흥원은 맛집으로 알려지면서 손님이 꽤 많았다. 부평5공단 에서 버스타고 와서 식사를 하고 갈 정도 였다고 한다.




신포국제시장내에 만취동중화요리점도 운영


만취동은 중화요리점도 운영했다. 중화요리점은 신포국제시장 1시장내에 있었다. 지금은 그 자리에 핫바와 약과, 한과 등을 파는 가게가 손님을 맞고 있다. 당시는 3층 규모의 벽돌건물이었다.

만취동중화요리점은 행잔의 형태로 숙식을 제공했다. 중국 상해, 홍콩, 마카오 등에서 물건을 사러오는 손님들이 여기서 묵고 식사를 해결했다.
 


만취동중화요리점 자리에 있었던 정양관 중화요리점


만취동중화요리점은 화교 왕소종(王昭鐘)이 운영했다. 왕소종은 1915년생으로 중국 산둥 석도(石島)가 고향이다. 그의 가족은 중국에서 자동차와 식당사업을 한 부자였다고 한다.


그 역시 중국공산당을 피해 17세때 인천으로 왔다. 왕소종은 인천에 오자마자 만취동중화요리점에 취업했다. 당시 중국집 운영자는 이경문(李慶文)이었다. 이경문은 당시 만취동의 부사장이었다. 이후 왕소종은 이경문으로부터 중국집을 인수했고, 중국집 이름을 ‘慶華樓’로 교체했고, 다시 정양관(政陽館)으로 바꿨다고 한다.


왕소종의 아들 왕조복(王祖福, 67)씨는 ‘경화루’ 간판을 또렷이 기억했다. 어릴 때 나무에 적힌 경화루 간판이 돌아다녔는데 당시 땔감이 부족해 장작으로 사용했었다고 한다. 만취동중화요리점 건물은 6.25전쟁 당시 폭격에 무너졌다. 왕소종씨 가족들은 무의도로 피난을 떠났고 전쟁 후 돌아온 집은 잿더미 상태였다. 왕조복씨는 아버지가 슬레이트로 단층집을 지은 뒤 나중에 남은 벽돌을 모아 다시 2층으로 건물을 올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만취동중화요리점을 운영했던 왕소종씨의  아들 왕조복씨와 그의 부인

만취동중화요리점이 있었던 자리엔 핫바와 한과를 파는 가게가 들어섰다.


왕조복씨 회고에 의하면 아버지는 고량주 공장에 자주갔고. 어린 그는 아버지를 찾으러 공장에 자주 가곤했다.


“고량주 공장에서 일하는 중국인들의 모습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열기가 푹푹찌는 공장에는 10여명의 중국인 노동자들이 팬티만 입고 장화를 신고서는 찐 수수를 밟고 있었지요.”

 

왕소종은 1984년에 사망했다. 왕조복씨는 아버지 일을 이어받아 그 자리에서 중국집과 분식집을 운영하며 자식들을 키워냈다.




중화인민공화국과 한국정부가 세워지면서 무역업 쇠퇴


만취동은 중국집과 고량주 공장외에도 호떡집과 당면공장도 운영했다. 호떡집은 지금 신한은행 건너편 자리였던 것으로 전해지며 당면공장은 도화동에 있었다. 당면공장의 이름은 ‘태흥당면공장’이었다. 1935년경 총 책임자는 이총길(李聰吉)로 산둥성 출신이었다.


▲만취동 양조장 있었던 자리엔 지금 신포마트가 들어서 있다.


만취동이 있었던 중구 신포동 24번지. 현재는 해물탕과 카페가 영업을 하고 있다.​


국내 최고의 화교 무역회사인 만취동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지면서 내리막길을 걸었다. 중국이 공산화 되면서 무역이 어려워졌다. 또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밀무역이 성행했던 인천항을 봉쇄하고 금융거래도 압박하자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만취동은 1951년 1.4후퇴 때 직원이 모두 남쪽으로 피난을 떠나면서 문을 닫았다. 만취동은 인천을 주 무대로 삼아 동아시아를 상대로 비즈니스를 펼쳤던 화교 최대 무역 상사였다. 그들은 한때 영화를 누렸으나 이제는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그래도 그들이 물건을 팔고 활동했던 현장은 그대로 남아 화교들의 유산이 되고 있다.



글 이용남 i-View 편집위원, 사진 서은미 자유사진가(출처 인천시 중문소식지 <인천지창>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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