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이야기

[인천 이야기] 일제강점의 흔적, 부평지하호 ‘다크투어’

발간일 2019.05.22 (수) 16:22


부평엔 ‘토굴’ 24개 잔재, 당시 고통의 상처 남아

과하지 않게 피어난 꽃들이 향기로 길손을 맞는다. 부평 함봉산 자락의 초록은 도심보다 더 깊다. 그지없이 평화로운 이 숲속엔 부평의 슬프고도 고통스런 역사가 깃들어 있다. 부평문화원 탐방프로그램에 참여해 가슴 아픈 역사의 뒤안길을 더듬었다.


▲부평지하호 필드워크




80여 년 전 부평은

1930년대 이후 대륙침략 전쟁에 돌입한 일본은 부평을 남한 최대 군수기지로 만들 목표를 세웠다. 이에 따라 조병창을 비롯한 각종 군수공장을 설치하고 전쟁에 필요한 총, 잠수정, 탱크 등 모든 무기를 이곳에서 만들었다.
 


▲부평지하호(토굴)


부평이 타깃이었던 이유는 계양, 김포까지 이어지며 산세가 감싸여 있고, 안개가 많이 끼어 잘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천항과 서울이 가깝고 철로가 있어 물자수송에도 용이했다. 또 조병창이 폭격에 취약시설이다 보니 전쟁을 계속하기 위해 식민지인 우리나라에 지하호를 만들어 무기를 보관하기 위해서였다.




잔재, 24개의 부평지하호(토굴)


부평지하호(토굴)는 모두 24곳이다. A구역인 산곡동 마을 토굴은 7개로 화랑농장 마을 인근에 자리한다. 이곳은 사유지여서 들어가 볼 수는 없다. B구역은 청운 유치원 인근 4곳인데 마을 사람들이 위험을 염려해 입구를 막아 놓은 상태다. C구역은 새우젓굴로 사용된 7곳이다. 어민들이 연안부두나 소래포구에서 가져온 새우젓을 보관하며 판매도 했던 곳이다. D구역은 6곳으로 군부대 내에 위치해 역시 볼 수 없다. 탐방은 C구역 7곳의 위치를 확인한 후 그 중 C6 지하호 내부를 들어가 보기로 했다.




10대 어린 학생들의 노역으로 지하호 건설


“작년까지 부평토굴이라는 명칭을 썼지만, 올해부터 명칭에 역사성을 담고자 부평토굴에서 부평지하호로 명칭을 변경했습니다.” 인평자동차고 옆 함봉산 입구에서 전문가의 해설을 들으며 C구역 지하호로 향했다.



C1, C2를 지나 Y자 형태인 C3 지하호를 지난다. 오솔길 따라 닿은 C4 지하호는 120미터 깊이로 새우젓을 보관했던 곳이다. 사유재산이 있었던 만큼 입구엔 문도 달려있다. C5 지하호는  깊이가 130미터라고 한다. C7은 작년까지 탐방했던 곳으로 깊이는 140미터이다. 이곳은 파여 진 모양이 한글 모음 ㅑ자 형태로 오른쪽을 향해 두 개의 가지 굴이 나 있다.


탐방 장소인 C6 지하호 입구. 공기가 시원하다. 손전등을 켜고 해설사를 따라 지하호 안으로 진입한다. 약 160미터 깊이다. 걷는 동안 해설사가 벽면에 뚫린 구멍 자국과 석회암 굴의 특성에 따라 생겨난 작은 종유석, 지하호 천장에 꽂혀 있는 나무쐐기를 보여준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이곳 지하호를 만든 이들은 모두 한국 사람, 그중에서도 10대 중학생들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징용됐던 어르신의 얘기를 들었는데, 그분은 그 어떤 얘기도 듣지 못한 채 강제로 기차를 타고 와 도착한 곳이 부평이었다고 해요. 이후 미쓰비시제강 쪽에 배치돼 부평남부역 방향 성모병원 인근에서 작업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하루는 짐을 싸라 해서 모였는데 그날이 바로 8월15일 이었다고 해요. 영문도 모른 채 부평역에 나와 사람들에 의해 해방된 걸 알고 집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이런 식으로 학생들이 강제 동원된 거죠.”


당시 조병창 내에는 굴 파는 곳을 체크하는 사무실이 따로 있었다고 한다. 각 공사마다 학생들을 배치해 굴을 파게 했는데, 기다란 정으로 구멍을 뚫어 그 안에 물을 넣고 물과 흙을 괴어 빼내면 일본군이 그곳에 다이너마이트를 넣고 터뜨려 돌을 깼다고 한다. 깨진 돌을 날라야 하는 것은 전부 학생들의 몫이었다. 


세월을 건너뛰어 지하호 끝에서 장제 동원된 당시 학생들을 떠올리며 탐사 참가자들이 잠시 묵념의 시간을 갖는다. 조명을 끄니 그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어두움에 두려운 마음이 생긴다. 당시 징용됐던 중학생들의 모습이 떠올라 가슴도 먹먹해진다. 




먹먹한 현장, 더 많은 시민이 찾아주길


류지현(산곡동.교사)씨는 “제가 사는 곳에 이런 곳이 있어 정말 놀라웠어요. 직접 보고 나니 그 당시 중학생들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또 100년도 안 됐는데 너무 쉽게 잊고 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아팠어요. 앞으로 우리 학생들에게도 이런 역사를 꼭 알리고 싶어요.”라는 소감을 내비쳤다. 


조사라(청천동)씨도 ”부평은 늘 평화롭다고만 생각했는데 아픈 현장을 직접 보니 가슴이 아려왔어요. 당시를 살아보진 않았지만, 일제의 야욕을 눈으로 봐 실감도 났고요. 우리가 현재의 삶에만 집중하며 너무 경계심 없이 살아오진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라고 말했다.


해설을 담당한 김규혁 팀장(부평문화원)은 ”일제는 조선인들이 받는 피해는 온전히 무시했죠. 사실 좋지 않은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탐방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이유는 이런 곳을 없애거나 모른 척 지나치기보단 학생들을 비롯한 시민에게 제대로 된 역사를 알리고, 이런 고통을 다시는 겪지 말자는 교훈의 장소로 만들고자 해서입니다. 향후 국가적인 차원에서 보존이 되면 좋겠고, 많은 시민들이 참여해 공감대가 형성되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전했다.


지하호에서 나오니 세상이 환하다. 지배체제는 오래전 끝났으나 어두운 잔재는 여전히 남아있다. 일본의 사과도 없었다. 그렇다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 아닌가. 발걸음이 무겁다.



< 부평지하호 필드워크 참여 안내 >

 ○ 일정 : 4월~11월, 매월 세 번째 금요일, 오전 10시

 ○ 비용 : 무료

 ○ 준비물 : 개인용 랜턴, 물, 등산화

 ○ 소요시간 : 약 1시간 30분

 ○ 신청문의 : 부평문화원 사무국 ☎ 032-505-9001



글·사진 김지숙 I-View 객원기자 jisuk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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