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이야기

[인천 이야기] "조국독립 위해 헌신한 선조들 오래기억 해주길"

발간일 2019.02.27 (수) 15:46


강화 3.18만세운동 주역 황도문, 오영섭 선생 후손 만나다


▲황도문선생 생가를 지키는 황경진 님


조롱을 박차고 나가야 진실로 좋은 새이며

그물을 떨치고 나가야 예사스런 물고기가 아니리

충은 반드시 효에서 비롯되니

그대여 자식 기다리는 어머니를 생각 하소서


강화도의 김주경이 감방의 김구 선생에게 보낸 시, 백범일지 중에서 -




청년 김구에 반한 김주경, 그에게 전 재산 걸어


백범 김구 선생은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에게 경고 하고자 일본인 헌병을 습격하고 인천의 교도소에 수감된다. 재판부 앞에서 당차게 소신을 밝힌 청년의 기개에 감탄한 강화도의 김주경은 일면식도 없는 김구선생을 위해 전 재산을 건다. 


구명운동 실패 후 김주경은 위의 시를 전하며 우선 탈출 할 것을 청하고, 탈옥에 성공한 김구 선생은 김주경을 만나러 오지만 행방을 찾지 못한다. 이에 김구 선생은 석 달 동안 강화도에 머무르며 김주경의 아들을 비롯한 동네 어린이들을 가르친다.


▲해방후 강화를 방문한 김구선생 [강화뉴스제공]


해방 후, 김구 선생은 어려운 시절 대가를 바라지 않고 아낌없이 베푼 이들을 다시 만나기 위해 강화를 방문한다. 강화사람들은 합일학교 운동장에 모여 김구 선생을 연호했다. 김구 선생은 강화사람들을 위해 ‘홍익인간’ 휘호를 써서 전달하고, 이 액자는 현재까지 합일초등학교에 전해진다.


엄혹했던 식민지 시절, 일신의 안락 대신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한 길을 선택했던 무명의 민초들이 있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안타깝게도 기록으로 남겨지지 않은 선조들의 거룩한 피땀눈물을 알지 못한다.


​백범 김구의 휘호(홍익인간) [합일초 제공]


의인 김주경의 행적 역시 백범일지에 수록된 것이 전부. 귀국 후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김구 선생이 우선적으로 방문했을 만큼 조국독립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노력한 강화사람들의 활약은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몽골군, 청군, 미군, 프랑스군, 일본군…. 오랜 세월 외세의 침략 때 마다 맨주먹으로 삶터를 지켜왔던 강화사람들의 DNA에는 어떠한 시련과 고난도 반드시 극복해 내겠다는 강인한 정신이 전승되고 있다. 


곡절 깊은 강화도에서 나고 자라 조국의 독립을 외쳤던 강화 만세운동 주역들은 그 후로 어떻게 살았을까? 후손을 만나 전해지지 않은 이야기 한 자락을 물었다.




강화 3.18만세운동 신호탄 쏜 황도문 선생 손자 황경진 님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신산한 삶과 대비되는 친일파 후손들의 ‘부와 권세’는 우리 현대사의 부끄러운 민낯이다. 강화 3.18만세운동의 제안자였던 황도문 선생의 손자 황경진님도 평생 고향을 지킨 친근한 촌로였다.


“할아버지에 관해 아는 게 많지 않아요. 훌륭한 분이셨다고 동네 어르신들이 얘기 해주셔서 그런가보다 했지, 할머니나 아버지께서 말씀 해주신 게 없어요. 할아버지께서 길상면 초대면장이셨는데,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에게 끌려가서 비극을 겪으셨대요. 슬픔이 워낙 컸기 때문이었는지, 집안 어른들은 할아버지에 대하여 거의 언급 하지 않으셨죠. 2001년에 김대중 대통령 재임 중에 건국포장 추서를 받지만, 이 역시 먼 친척이 올린 거 에요. 여기가 독립운동가 황도문 선생의 생가라고 해서 학생들이 자주 오더라고요. 할아버지에 대해 아는 게 많으면 어린 학생들에게 이야기도 해주고 할 텐데, 안타깝죠.”


​황도문 선생


서울의 3.1독립만세운동에 참가했던 연희전문 2학년 황도문 선생은 독립선언서와 독립신문을 품에 숨겨 고향으로 돌아온다. 선생이 나고 자란 선두리는 정미의병의 자취가 남아 있는 동네. 마을에는 정미의병부대가 일본군과 치열하게 전투를 벌인 후, 일본군 30여 명의 다리를 잘라 방죽에 던져버렸다는 일화가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황도문 선생은 남달리 영특하고 의기가 있는 소년이었다. 선생이 다니던 선두교회 신자들은 소년을 넓은 세상으로 보내기로 결의하고, 배제학당 진학을 추천한다. 고향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유학을 떠난 황도문 선생은 배제학당 졸업 후 연희전문 재학 중에 3.1만세운동에 동참한 것이다. 


고향에 돌아온 황도문 선생은 유봉진 선생을 찾아가 서울의 상황을 전하며 강화에서도 만세운동을 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유봉진 선생의 길직교회와 황도문 선생의 선두교회를 중심으로 길상결사대가 결성 되고, 3월 18일 강화장날 대규모 만세운동이 벌어진다.


​황도문 선생 생가


이후, 황도문 선생은 강화도를 무사히 빠져나가, 강원도 산골에서 3년간 숨어 지낸다. 1922년 이후에는 덕적도의 합일학교 교사로 봉직하며 학생들에게 애국의식을 고취 시켰고, 상해 임시정부의 군자금 모금운동을 전개하였다고 전해진다.


“덕적도 합일학교 재직 당시 학생들을 데리고 마리산으로 수학여행을 간 일화를 당시 학생이었던 어르신에게 들은 적이 있어요. 어느 봄날, 할아버지께서 학생들과 마리산 등반을 하셨나 봐요. 할아버지는 참성단에서 단군할아버지와 고조선의 역사에 대해 설명을 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선창 하셨답니다. 그 광경을 누군가 고발했다면 일경에 잡혀갈 상황이었죠. 목 놓아 만세를 외치는 모습에 감명을 받은 학생들도 목이 터져라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답니다.”


이토록 민족의 동량이 될 학생들을 육성하는데 사력을 다했던 황도문 선생이지만, 다른 독립 운동가들이 그러했듯이 가족들을 제대로 돌보는 가장은 아니었다고 한다.


“선두리는 땅이 비옥합니다. 농사가 잘 되는 옥토여서 제가 자랄 때는 살림이 괜찮았죠. 하지만 일제 강점기 시절의 아버지와 작은아버지들은 몹시 힘들게 지내셨나 봐요. 원래 큰일 하는 분들이 가정을 살필 겨를이 없잖아요. 할아버지께서 임시정부 군자금 마련하려고 개성에서 홍삼을 구해 와서 배편으로 중국에 보내는 일을 하셨지만 식구들은 누추한 집에서 살았답니다.”


▲선두교회 삼일운동기념비에서 황경진 님


마지막으로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서 3.1운동 100주년에 대한 소회를 물었다.


“할아버지를 존경 하지만 먹고 살기 바빠 자꾸 잊게 되네요. 3.1운동 100주년이라고 하는데, 제가 근사한 말도 할 줄 몰라요. 그래도 이렇게 잊지 않고 할아버지에 대해 물어봐주는 분들이 계시는 게 고맙죠. 모쪼록 많은 국민들이 오랫동안 할아버지에 관하여 기억 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예수교도 8인조사건’ 주동자 오영섭 선생의 손자 오교창 원장


“소아(小我)를 버리고 대아(大我)에 살며 합일(合一)정신으로 뭉쳐나가자”


서슬 퍼런 일제강점기 시절, 일제의 회유와 탄압으로 폐교 직전까지 내몰렸던 합일학교는 최상현 선생의 전 재산 기부와 오영섭 교장의 열성적인 교육활동으로 독립전쟁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는 민족학교로 거듭났다. 


최상현 선생의 12만평 토지 기증으로 합일초등학교는 일제의 압박에도 든든하게 버틸 수 있었지만, 선생은 폐렴으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게 된다.


​1930년 제1회 전강화 육상대회때 최상현 교장 대회사 모습 [합일초 제공]


합일학교 이사장 오합라 여사는 남편 최상현 선생의 의지를 실천하고자 남동생 오영섭을 교장으로 발탁한다. 오영섭 선생은 민족의식이 누구보다 투철한 ‘요시찰 인물’이었다.


“3.1운동 당시 할아버지는 보성고보 학생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고향으로 돌아와서 조봉암, 조구원, 고제몽 등 8명의 청년들과 만세시위를 주도하였죠. ‘예수교도 8인조’로 불린 비밀결사대는 전국의 만세시위소식을 전하기 위해 밤마다 강화 전 지역에 벽보와 일제에 대한 경고문을 붙이다가 전원 검거됩니다. 할아버지 약관 18세의 나이로 일경에 체포되어, 보안법 위반 죄목으로 태형 60대의 형벌을 받습니다. 이후 상해로 건너간 할아버지는 강화진위대 대장이었던 이동휘 선생을 만나 배일사상을 전수받은 후 상해대한군관학교에 들어갑니다. 하지만 이시영 선생으로부터 ‘너는 아직 청소년이므로 공부에 힘써 후학을 양성하라’는 요청을 받고 일본대학 사범부에 입학하게 되지요. 합일학교 교장으로서 구국교육운동에 힘쓴 이유도 이러한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영섭 선생 [오치과 제공]


작은할아버지, 아버지에 이어 3대째 강화읍에서 치과의원을 운영 중인 오교창 원장에게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물었다.


“저희 집이 합일초등학교 바로 앞이었어요. 1975년에 돌아가실 때까지 할아버지를 뵈러 온 손님들로 북적거렸죠. 양조장으로 막걸리 받으러 가는 심부름은 제 담당이었어요. 할아버지는 엄격하고 강직한 분이셨어요. 주변에서 독립유공자 신청을 권유하면 독립운동 하느라 어렵게 사는 사람이 널렸는데, 일제강점기시대에 교장까지 했던 내가 이만큼 잘 살았으면 됐다며 한사코 거절하셨어요. 손자 된 입장에서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최근에 독립유공자 신청을 했는데, 선정이 안 되었어요. 후손으로서 아쉽지만 공적조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일가친척들이 할아버지의 일생을 다시 한 번 돌아보며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외국에 있는 친척들까지도 이렇게 훌륭한 분의 핏줄이라는 것에 자부심이 생긴다며 연락을 주셨어요. 조국을 위해 온몸을 다해 싸웠던 십대 소년의 용기와 실천이 가장 큰 훈장이 아닐까 싶어요.”

 

피를 따라 흐르는 기개. 오 원장의 부친 오태식 원장 역시 강화 시민사회를 이끌어 가는 큰어른이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닮아 공동체 의식이 투철하셨습니다. 거창하지 않지만 제가 시민운동에 참여하게 된 까닭도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영향 때문입니다. 1945년에 작은할아버지께서 강화읍에 치과의원을 개업 하신 이후로, 아버지는 1951년에 오치과의원을 세우셨죠. 저는 1994년부터 아버지와 병원을 공동운영했는데요, 처음 몇 년은 참 힘들었어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평판에 누가 될까봐 조심스럽더라고요. 작은 몸집이지만 카리스마 넘치셨던 아버지를 무척 존경했습니다. 돌아가신 후 거의 일 년은 느닷없이 눈물이 나서 운전을 못할 지경이었으니까요.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저의 영원한 롤모델이십니다.”


​역대 오치과 원장 (좌로부터 1대 오명섭, 2대 오태식, 3대 오교창 원장) [오치과 제공]


마지막으로 오교창 원장이 생각하는 3.1운동정신의 현재적 의미를 물었다.


“아베총리의 억지주장은 들을 때마다 황당하잖아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은 과연 무엇인가 근원적인 의문이 들거든요. 가치관에 혼란이 올 때마다 중심을 잡아주는 본보기를 찾게 되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분연히 떨치고 일어난 조상들의 의로운 항거는 현재에도 좋은 교훈이 되는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소아(小我)를 버리고 대아(大我)에 살며 합일(合一)정신으로 뭉쳐라’는 할아버지의 가르침을 최선을 다해 계승하며 살겠습니다.” 



글 김세라 I-View 객원기자, 사진 나윤아 자유사진가, 오치과의원, 강화뉴스, 합일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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