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이야기

[인천 이야기] 강화 기독교인들, 3.18 만세운동 주도

발간일 2019.01.23 (수) 14:16


감리교인들 전국 소식 전하고, 만세운동 참여 독려

1919년 3월 18일 오후 2시, 강화읍 장터에는 긴장감이 가득하다. 이미 지난 장날 강화보통학교 학생들의 만세외침이 있었던 터라 일본 경찰은 만일의 사태에 만반의 대비를 하고 있었다.


백마를 탄 유봉진 선생이 ‘결사대장’이라고 쓴 태극기를 어깨에 두르고 등장하여 큰 종을 치며 군중을 모았다.

▲ 강화진위대 장교단 모습(가운데가 진위대장인 이동휘 선생) <강화중앙교회 전시실 사진>




강화군민, 다 함께 대한독립 외치다!


“강화는 예로부터 외세의 침탈에 맞서 싸웠던 고장이요! 오늘 강화군민이 다 함께 대한독립을 외침으로서 우리 민족이 죽지 않고 의연히 살아있음을 세계만방에 알립시다!” 향교 앞에서 연설을 마친 유봉진 선생은 시위대와 함께 군청으로 진출하였다. 


어느덧 모인 인파는 1만 명이 넘었다. 유봉진은 강화군수 이봉종에게 “만세를 부르지 않으면 군청을 파괴하겠다.”고 소리 치고, 이에 군수는 어쩔 수 없이 만세를 부르게 된다. 유봉진 선생은 흥분한 군중들을 달래며 끝까지 평화로운 시위를 이끌었고, 경찰은 시위대의 위세에 굴복하여 체포했던 주모자들을 모두 석방했다.

▲1920년 12월 28일 상해에서 초대 대통령 이승만 환영회. 이승만(가운데)의 곁에 카이젤 수염을 기른 국무총리 이동휘(왼쪽)와 내무부장 안창호(오른쪽) <강화중앙교회 전시실 사진>


3.18만세운동을 주도한 유봉진 선생은 대한제국 진위대 출신 군인으로서 1907년 일본군이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하려 하자 강화진위대장인 이동휘 선생의 지휘아래 일본군과 싸웠던 애국지사다. 대한제국 군대 해산 후, 유봉진 선생은 온수리 길직교회에서 권사로 활동 중이었다.


1919년 3월 5일, 서울대군중집회 이후 휴교령이 내려지면서 길상면 출신 연희전문학생인 황도문이 독립선언서와 독립신문을 품에 숨겨 유봉진 선생을 찾아왔다. 


황도문은 서울 상황을 설명하며 강화에서도 만세운동을 해야 한다고 제안하고, 유봉진 선생은 즉시 길직교회의 이진형 목사, 선두리교회 황유부 전도사 등 교회 지도자들을 만났다. 


3월 9일 예배를 핑계로 길지교회에 모인 교회 지도자들은 3월 18일 강화장날 대규모 만세운동을 결의한다. 지방단위로는 가장 큰 규모였던 역사적인 강화 3.18만세운동의 서막이 오르는 순간이다.

▲ 유봉진선생과 3.18만세운동 모습 <강화3.1독립만세운동 기념비 부조>


​강화중앙교회의 삼일독립만세운동기념비


강화는 고려시대 항몽투쟁으로부터 시작하여 병자호란, 근대화시기를 거치면서 민족적 위기상황을 가장 먼저 체험한 고장이었다. 이런 역사적 경험으로 인하여 강화 주민의 민족의식은 높았고, 1890년대 기독교(성공회와 감리교)선교도 민족주의 성격을 띠었다.


1893년 선교를 시작한 감리교는 양반 지식인 계층 인사들의 개종과 교회 설립으로 인하여 강화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고, 강화진위대장 이동휘 선생의 개종은 그 정점이 된다. 


‘강화의 바울’이라는 별명을 얻은 감리교도 이동휘 선생은 강화읍에 보창학교를 설립하고 ‘일동 일교운동’ 즉 ‘마을마다 교회 하나, 학교 하나씩 세우자’고 호소했다. 그 결과 강화에는 32개의 감리교계 학교가 개교하였고, 교회부속 사립학교에서는 민족주의 교육이 이뤄졌다. 




이동휘 선생 지휘로 강화진위대 병사들 항일투쟁


강화의 기독교는 1907년 정미의병운동을 거치면서 민족주의 성격이 더욱 강화 되었다. 이동휘 선생의 지휘로 대한제국 해산령을 거부한 강화진위대 병사들의 항일투쟁이 벌어졌고, 그 과정에서 강화읍교회(현 강화중앙교회) 김동수, 김영구, 김남수 3형제가 일진회의 밀고로 순국하게 된다. 이들 강화읍교회 3형제의 희생은 강화사람들에게 기독교를 민족운동의 거점으로 수용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 일제시대 강화읍교회 <강화중앙교회 전시실 사진>


3월 18일 강화읍 장날에 ‘2만 명 규모(일본경찰이 본국에 올린 보고서에 의함)’의 대규모 독립만세시위가 성공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던 것 역시 ‘결사대’로 불린 만세운동 지도자들의 치밀한 준비와 협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강화읍 만세시위를 주동했다가 체포된 유희철 선생의 경찰조서에 의하면 유봉진 선생을 포함한 만세운동 지도자 7인은 모두 감리교 교인이었다. 


3월 9일 길직교회 회합 이후 연희전문학생 황도문이 서울에서 가져온 ‘독립선언서’와 ‘국민회보’, ‘독립신문’, ‘독립가’ 등 유인물은 몇 몇 교회의 등사판을 이용하여 인쇄 되었는데, 교회의 여신도와 가족들이 보따리장수로 변장하여 이 유인물을 각 마을의 교회로 전달하였다.


▲ 선교 초기 강화의 기독교인 <강화중앙교회 전시실 사진>


한편 유봉진 선생은 강화 전역의 교회와 학교를 은밀히 돌면서 군민들에게 만세운동에 동참할 것을 독려 했다.


3월 18일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군중은 밤 11시 경 자진하여 해산하지만, 일본군은 19일 새벽에 인천수비대와 용산 일본군을 강화로 급파한다.


온수리는 일본군의 검거열풍에 맞서서 끝까지 만세시위를 펼쳐졌는데, 그 중 온수리 성공회교인들은 수요일 저녁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여 태극기를 높이 달고 독립만세를 부르는 의거를 일으킨다. 


일본군의 무력탄압에도 불구하고 온수리 만세운동 이후 항쟁의 불길은 강화 전역으로 번져갔다.

▲강화중앙교회 김동수, 김영구, 김남수 3형제 순국추모비


3월 21일~28일까지는 교동도에서도 만세운동이 활발하게 펼쳐졌는데 일본군의 발포로 교동도사람들이 총상을 입고 대거 잡혀가게 된다. 교동도의 만세운동은 ’매일신보‘에 의해 보도 되었는데, 강화본도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이 부속 도서로 확산되었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유봉진 선생은 3월 18일 이후 고려산에 잠복했다가 장봉도를 거쳐 마니산에 숨었으나, 일본경찰이 부모를 핍박하자 자수를 결심한다. 


유봉진 선생의 부인 조인애 여사 역시 남편을 도와 태극기를 운반하고 18일 부녀자들을 인솔하고 시위에 앞장서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연희전문학생 황도문, 상해 임시정부 군자금 모금운동 전개


연희전문학생 황도문은 일본경찰의 체포망을 피해 강화 탈출에 성공, 강원도 산골에서 3년간 숨어 지냈다. 1922년 이후에는 덕적도의 합일학교 교사로 봉직하며 학생들에게 애국의식을 고취 시켰고, 상해 임시정부의 군자금 모금운동을 전개하였다. 


3월 21일. 강화읍교회에서는 청년회 간부인 강화보통학교출신 21살 조봉암을 비롯하여 구연준, 김한영, 김영희, 주창일, 조구원, 고제몽, 오영섭 등이 모여 3차 만세시위를 준비한다. ‘예수교도 8인조’로 불린 비밀결사대는 전국의 만세시위소식을 강화사람들에게 전해주기 위해 강화 각 지역에 밤마다 벽보를 붙이고, 일제에 경고문을 붙이다가 전원 검거된다.


4월로 접어들면서 강화의 만세운동의 방식은 변했는데, 저녁과 야간시간을 이용하여 산정상이나 구릉에 봉화를 올리고 독립만세를 부르는 것이었다.

길직교회 터에 세워진 기념비


강화 전역의 산에서 전개한 횃불 야간시위는 교동도, 석모도, 장봉도는 물론 영종도, 영흥도, 덕적도 등 섬지방의 만세운동에도 영향을 끼쳤다.


“3.1운동이 터지자 교회 중심의 청년들이 그 운동의 선두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전 강화가 한 부락도 빼지 않고 독립만세를 불렀고 수천 명이 잡혀서 볼기를 맞았고 그 중 선도자 유봉진씨 외에 20여명은 서대문 감옥에서 1년으로 부터 5년 까지 고생살이를 했는데 나는 그중 1년 측에 들어서 난생 처음으로 감옥살이를 해보았습니다.” <나의 정치 백서, 조봉암> 


*참고자료: 자랑스러운 강화 3.1독립만세운동(박흥렬 저/강화군, 강화군광복회 발간)

강화3.1운동 100주년 기념준비 학술 심포지움 자료, 사)강화3.1운동기념사업회 도움


글 김세라 i-View 객원기자, 사진 나윤아 자유사진가, 강화중앙교회 제공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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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1-28 10:44:22.0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유봉진 선생은 대한제국 진위대 출신 군인으로서 1907년 일본군이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하려 하자 강화진위대장인 이동휘 선생의 지휘아래 일본군과 싸웠던 애국지사다" 이 부분은 좀 오해 소지가 있군요. 이 당시 이동휘선생은 직접 의병투쟁을 이끌지는 못했습니다. 어떤 사정이 있어 사전에 체포되었지요. 문장의 대체적인 뜻은 이해합니다만, 사실적인 측면은 정확하게 기록되는 것이 좋지요. 아무튼 깔금하게 잘 정리된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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