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이야기

[인천 이야기] 강화 초등학생들, 독립만세운동 선봉에 서다!

발간일 2019.01.02 (수) 17:38


3.1운동 정신 계승한 강화·합일초등학교를 찾아

2019년은 이 땅에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해다. 폭압적인 일제의 식민지배하에 지식인, 학생, 노동자. 농민, 자영업자 등 각계각층이 폭넓게 참가했던 3.1운동은 일제하의 독립운동사에서 커다란 분수령이었고, 1920년대 다양한 사회운동의 전개와 항일단체 결성에 밑바탕이 되었다.


▲합일학교 교사 조구원이 작성한 강화공립보통학교 학생 삼일운동 기사
(매일신보 1919-03-16일자)


▲합일학교 교사 조구원이 작성한 강화공립보통학교 학생 삼일운동 기사
(매일신보 1919-03-16일자) 확대본


서울의 만세소식을 접한 강화 사람들은 3월 18일 강화읍장날 2만 여명(일본경찰이 작성한 보고서에 의함)이 운집한 가운데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일으킨다. 이는 지방단위로는 경상남도 진주와 더불어 가장 큰 규모의 항쟁이었다.

 

강화는 예로부터 외세침략에 저항한 고장이다. 특히 구한말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요호 사건 등 민족의 위기를 겪은 강화사람들은 ‘일동 일교운동’ 즉 ‘마을마다 교회 하나 학교 하나 세우기 운동’을 진행했다. 그 결과 불과 2년 만에 강화도 전체에 사립학교가 72개 설립됐고, 그 중 32개가 감리교 계통 학교였다.

 

인구 6만의 지방 소읍에 이렇게 많은 학교가 건설 될 만큼 강화사람들의 민족의식과 교육열은 높았다. 강화에 만세운동의 횃불이 타오를 수 있었던 것도 어린 학생들에게 독립열망을 가르친 교육기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천에서 가장 오래된 강화초등학교


1898년 4월 1일 강화성내을종공립소학교로 개교한 강화초등학교는 인천에서 가장 오래된 공립초등학교다.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을 앞두고 강화읍 만세시위의 진원지이자, 불굴의 독립운동가인 죽산 조봉암선생의 모교인 강화초등학교를 방문했다.


▲강화초 학교전경


“개교 120주년을 맞이하여 강화초등학교 역사를 정리 하였습니다. 강화지역 사학자들의 도움으로 1896년 2월 10일, 공립소학교 교원배치현황에 정지석이란 선생님의 발령장을 찾게 되었는데요, 이는 근대학교의 형성과 관련된 중요한 자료입니다. 2019년에는 1896년 개교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확정 지으려 합니다.”


강화초등학교 김성환 교장에 따르면, 1910년 3월 12일, 강화읍의 중심가에 위치한 강화공립보통학교 상급생들이 수업을 거부하고 한 교실에 모였다. 학생들은 칠판에 태극기를 그린 후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란 교사들은 혹시나 경찰에 의해 학생들이 다칠까봐 해산을 권유한다. 다음날인 13일은 강화읍 장날. 큰 장을 앞두고 경찰당국은 만일의 소요를 대비하며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강화초 - 일제강점기 졸업식

▲강화초 - 1909년 졸업증서


정오가 되자 강화공립보통학교 여학생 80여명이 ‘대한독립만세’를 목 놓아 부르짖었다. 학교 옆에 열린 시장까지 또렷하게 들릴 만큼 우렁찼다. 경계 중이던 순사들이 출동하여 만세시위 주동자를 체포하였다. 12~13일, 양일간 강화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주도한 독립만세운동에 관한 정보는 조선총독부에까지 보고 될 만큼 큰일이었다.


이 사실은 인근 합일학교 교사였던 매일신보기자 조구원의 보도로 널리 퍼졌다. 3.18 강화읍장터 만세운동의 포문을 연 10대 청소년들의 당찬 외침이었다.


“물론 그때 보통학교 학생은 지금 초등학생보다는 나이가 있죠. 혼인한 학생도 있고 20대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조국 독립을 위해 어린학생들까지 나섰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강화 전역에 퍼집니다. 일제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죠. 이것은 다음 장이 열렸던 3월 18일 장날에 벌어진 만세시위에 직접적인 동기부여가 됩니다. 저렇게 어린 학생들도 목숨 걸고 싸우는데, 어른들이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선배들의 뜻깊은 항거를 기리기 위하여, 2019년 3월 12일과 13일에는 100년 전 강화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만세운동을 재현 할 예정입니다. 이를 통해 강화초등학교 어린이들이 3.1운동의 의의를 몸소 느껴보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독립의 역사 품은 많은 합일학교는 누가 다 폐교시켰을까? - 강화합일초등학교


현재 공립초등학교인 강화합일초등학교는 원래 선교사업 일환으로 1900년 잠두의숙에서 세운 사립학교였다. 합일학교에 이어 계명의숙, 보창학교(육영학원)가 연달아 개교할 만큼 강화의 근대교육 열기는 뜨거웠다. 


특히 상해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를 역임했던 이동휘 선생을 비롯한 강화의 지도자들은 근대교육을 통한 구국계몽운동에 힘썼다. 일제강점기 이후, 합일학교는 민족교육기관으로 거듭났고 3·1운동 당시 합일학교 졸업생들은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는 등 사회적인 책무를 다했다.


▲제7대 교장 최상현 선생



▲관보241호(1896년2월6일)강화소학교 교원발령(정지석)


▲1929년 졸업식사진(가운데 오른쪽이 최상현 선생)


“강화읍교회(현 강화중앙교회)에 합일학교가 있었듯이, 흥천교회에 흥천합일학교(현 양도초등학교), 덕적합일학교, 장봉합일학교, 월오제 합일학교 등이 있었어요. 당시 강화의 기독교는 감리교와 성공회가 있었는데, 감리교계 사립학교는 거의 합일학교라고 불렀죠. 기독교계를 포함하여 강화학파, 향교 등 곳곳에서 세운 사립학교가 72개였지만, 일제의 탄압에 의해 모두 문을 닫게 됩니다. 강화합일학교도 폐교 될 상황이었는데, 강화읍교회 권사이며 합일학교 교감이었던 최상현 선생이 전 재산인 18만평 토지를 기부 합니다. 그 돈으로 선생님들 월급도 주고, 학생들에게 교과서와 학용품을 사줬다고 해요. 교장으로 취임한 처남 오영섭 선생은 물론, 소식을 들은 졸업생들이 명예교사로 자원할 만큼 합일학교를 지키려는 지역사회의 열망은 뜨거웠죠. 어린이들을 민족의 동량으로 키우겠다는 애국계몽지사들의 열정이 있었기에 합일학교는 일제강점기 내내 민족교육기관으로 남아있게 됩니다.”


강화3.1운동기념사업회 이은용 이사장에 따르면, 최상현 선생의 업적은 이뿐이 아니다. 강화사에는 최상현 선생이 3.1운동 당시에도 만세운동을 앞두고 학생들을 인솔하여 시골 마을을 돌아다니며 참여를 독려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백범 김구의 휘호(홍익인간)


합일초등학교에서 발견한 독립운동 발자취는 또 있다. 합일초등학교 교장실에는 백범 김구 선생이 쓴 ‘弘益人間(홍익인간)’과 광복군총사령부의 참모장이었던 이범석 장군의 ‘危國育才(위국육재)’ 친필액자가 걸려 있다.


1946년 11월, 백범 김구 선생은 과거 자신의 구명 운동에 앞장 선 강화사람 김주경을 만나기 위해 강화도에 온다. 김주경의 집 인근 합일학교에서 ‘김구 선생 환영대회’가 열렸고, 백범 선생은 이 휘호를 합일학교에 남겼다.


▲이범석 장군의 휘호(위국육재)


이범석 장군의 ‘危國育才(위국육재)’ 휘호는 합일학교 출신 윤치문 교장이 학교 서고에서 발견한 것이다. 1984년부터 1988년까지 합일초 교장으로 재직한 윤치문 선생은, 본 휘호는 오영섭 교장과 가까웠던 이범석 장군이 강화도에 방문하여 남긴 것으로 전해 들었다고 밝혔다.


▲합일초 최상현 선생 동상

 

역사를 배운 다는 것은 과거 사실에 대한 지식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능력과 교훈을 얻는 것이다. 고사리 손에 태극기를 꼭 쥐고 스스로 나라의 주인임을 천명했던 강화의 어린학생들. 그 아름다운 용기는 100년이 지난 오늘까지 큰 울림을 준다. 



글 김세라 I-View 객원기자, 자료제공: 사)강화3.1운동기념사업회, 강화초등학교, 합일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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