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이야기

[인천 이야기] “이산가족 상봉 장면 돌려보던 아버지 생각나”

발간일 2018.05.09 (수) 15:55


실향민 3세대, 대룡시장 연안정육점 최성호 사장

한반도에 봄이 왔다. 역사적인 판문점 남북정상회담 이후 희망의 바람이 분다. ‘격강천리’라더니.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의 고향땅을 두 번 다시 밟지 못한 이들에게 이보다 더 반가운 소식이 있을까. 황해남도 연안군과 불과 1.8km 떨어진 교동도는 한국전쟁 당시 피난을 나온 실향민들에게는 제 2의 고향이다.


손에 잡힐 것 같은 북한땅 (교동도 인사리에서 1.8km)


분단의 아픔을 가슴에 묻고 살아온 반세기. 연백의 오일장을 닮은 대룡시장에는 두고 온 고향을 그리워하다 끝내 두 눈을 감지 못한 애처로운 사연들이 전해진다. 연백 출신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가업을 물려받은 연안정육점 최성호 사장의 사부곡(思父曲)도 그 중 하나다.




빈털터리 되어 교동에 들어와 노점하며 생계 이어


우리나라 3대 평야인 연백평야가 있는 연안군(옛 지명 연백군)은 해방 직후 인구가 20만 명이 넘는 고장이었다. 한국전쟁 전까지 남한 땅 이었던 연백은 곡창지대를 품고 있어 살림이 넉넉했다.

교동도 사람들은 배를 타고 나가야 하는 강화도 보다는 썰물 때 걸어서 바다를 건너갈 수 있는 연백을 수시로 들락날락 했다. 그래서 교동도는 생활수준이 높았던 연백문화권에 속하게 되었다. 지금도 교동사람들은 ‘~껴’로 끝나는 강화도 사투리를 사용하지 않는다. 본디 연백이 경기도였던 까닭에 억양은 표준어에 가깝다.
 




​ 연안정육점


연안정육점 최성호 사장의 본가는 ‘연백군 연안읍’이었다. 고향 어르신들의 증언에 따르면 버스정류장에 위치했던 본가는 말을 키워 타고 다닐 정도로 잘 살았다고 한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최 사장의 할아버지는 일가친척을 이끌고 교동도로 몸을 피한다.

“아이들까지 현금이 담긴 니쿠사쿠(배낭)를 맸데요. 인사리에 살던 지인이 빈방을 내주셔서 온 식구가 신세를 졌지요. 난리 통에 연백사람들은 교동 분들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전쟁이 끝날 기미가 안보이자 석모도로 가서 터를 잡았는데, 할아버지의 남동생이 삐라로 담배를 말아서 피우다가 걸려서 간첩으로 몰렸답니다. 전 재산을 주고 겨우 남동생을 빼낸 후 다시 일가가 교동도로 몸을 숨겼죠. 빈털터리가 되었으니 살길이 막막하여 노점을 열었습니다. 뒷골목에서 닭과 돼지를 잡았데요. 그게 연안정육점의 시작입니다.”
 


​ 피난민 시절 판자집의 흔적


휴전선이 그어지고, 코앞에 보이는 내 집으로 영영 돌아가지 못한 사람들. 황망한 현실에 넋을 놓고 싶어도 책임져야할 식솔들이 정신을 바짝 들게 했다. 연백사람들은 정부에서 나눠준 목재로 거처를 마련했다. 최사장의 할아버지도 현재 연안정육점 자리에 판잣집을 지었다. 최근에 가게를 리모델링을 했는데, 지붕을 뜯으니 그 시절의 흔적인 볏집이 오롯이 남아 있었다. 최 사장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숨결이 남아있는 대들보와 기둥을 최대한 보존하여 옛 모습을 살렸다.



작년 7월 80세에 돌아가신 최사장의 아버지 최덕권 옹


대룡시장의 대표 명장이었던 최덕권 옹은 연백사람답게 호탕한 대장부였다. 그런 아버지도 고향생각이 나면 눈시울이 붉어졌다. 최덕권 옹은 어린 아들을 데리고 화개산에 올라가 연안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 ​연안정육점 3대 사장 최성호 씨


“저기가 남산이고, 저 아래가 바로 우리 집이야. 남산에는 내 어머니, 그러니까 네 할머니 산소가 있어. 3분의 1 지점에 오래된 나무 한그루가 있거든. 그 나무 아래 모셨으니까, 통일이 되면 꼭 찾아야 한다.”

두 번의 남북정상회담과 이산가족 상봉이 있는 날이면, 365일 가게 문을 닫지 않던 아버지가 종일 TV앞에만 앉아계셨다. 이미 몇 차례 등장한 화면을 보고 또 보는 아버지. 입버릇처럼 북한이 밉다 하시면서, 싸우더라도 밥은 먹이는 거라며 대북 쌀 지원을 지지하셨다.

“고작 몇 달 사이인데. 이번 정상회담을 보셨더라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요. 분위기가 정말 달라졌잖아요.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예감 하셨나 봐요. 교동대교가 개통된 2014년 즈음, 느닷없이 가게를 팔아버리겠다고 호통을 치셨어요. 내심 제가 가게를 물려받길 바라셨던 거죠. 속 깊은 아내의 배려 덕분에, 서울 살이 정리하고 내려왔죠. 1년 동안 꼬박 아버지 곁에서 삼시 세끼를 먹고 잤습니다. 칼 다루는 것을 따로 배운 적은 없는데, 할아버지와 아버지 일하시는 것을 보며 자연스레 습득 했던 모양이에요. 일주일 만에 칼 쓰는 법을 익혔죠.”
 


​ ​3대째 이어진 솜씨


아버지와 아들은 급하고 괄괄한 성정이 똑 닮았다. 툭툭 내뱉는 말투 속에 담긴 부자의 정은 끈끈했다. 아버지가 즐겨 드셨던 이북음식을 먹을 때마다 아들은 가슴이 저민다. 온 가족이 모여 빚었던 꿩 만두, 냇가에서 잡은 민물고기를 돼지기름에 튀겼던 붕어튀김, 명절 마다 먹었던 팥소를 넣고 콩가루를 입힌 찹쌀떡. 그리고 국수…. 연백식 국수는 면 삶은 물 그대로 양념을 넣는 방식이다. 국수를 볼 때마다 형제보다 가까웠던 어려운 이웃들과 국수를 나눴던 부모님이 떠오른다.

“저만 해도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교동사람들과 격이 없어요. 연백사람이든 교동사람이든 모두 제 고향 친구들이죠. 하지만 부모님 세대는 문화가 많이 달라서 갈등이 존재 했어요. 이북출신들이 호불호가 분명해요. 불같아요. 그런데 속정은 얼마나 깊은지... 옛날에는 사거리에서 연백사람들끼리 멱살 잡고 자주 싸우셨어요. 낮에 코피 터지게 다투고, 저녁이면 술 한 잔 마시면서 서로 부둥켜안고 서럽게 울었죠. 울화병을 그렇게 풀었나 봐요. 옆집에 쌀 떨어지면, 뻔히 다 알거든. 지나가다는 척 하면서 쌀자루 툭 던져놓고 가버려요. 입에 발린 말은 아예 못하거든요. 이번 정상회담 보니까 김정은 위원장이 딱 그렇더라고요. 아버지가 말씀 하셨던 이북사람들의 화끈한 모습이 겹쳐졌어요. 실향민 2세대인 우리는 북한사람들의 성향을 잘 알거든요. 이제는 피난민들과 교동도 토박이들 사이에 괴리감이 없어요. 교동도는 진정한 남북 화합을 이룬 섬이죠. 이 땅에서 겪었던 시행착오는, 이후 남과 북이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데 중요한 단서가 될 것입니다.”
 


​ ​대룡시장 명장 ​ 최덕권옹


기질, 취향, 문화가 달라도, 기본적인 신뢰만 있다면 싸우고 화해하며 어울려 살 수 있다는 것을 삶으로 증명한 대룡시장 사람들. 비온 후 땅이 단단해 지듯, 얼어붙었던 남과 북도 새로운 내일을 만들어갈 동반자가 되었다. 한반도에 평화의 새싹이 돋았다.


글 김세라 I-View’ 객원기자. 사진 나윤아 자유사진가. 연안정육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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