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이야기

[인천 이야기] 금광채굴로 부를 일군 '영종도 부자'

발간일 2018.03.05 (월) 14:05

영종도 '99칸 고택'과 ‘은골’ ‘금골’ 이야기

영종도 지명에는 재미있는 유래가 숨어있다. ‘당골’은 당굿을 하던 곳, ‘잔다리’는 작은 다리가 있던 장소, ‘도장간’은 병든 말을 도살하던 곳 등 지역의 이름 속에는 과거 그곳이 어떤 장소인지 짐작할 수 있다. 영종도에는 ‘은골’과 ‘금골’로 불려지는 지명이 있다. 한때 금광과 은광이 있었으며, 금광채굴로 큰 부자가 되었다는 김달현 생가에 얽힌 이야기가 내려오고 있다.

 



▲ 99칸 저택으로 알려진 영종도 운서동 고택
 

 
 

금광이 있던 영종도
영종도는 오래전부터 시작된 도시개발로 구옥을 찾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촌부들이 살았던 슬레이트 지붕의 구옥은 헐고, 보상 받은 돈으로 번듯한 2층 벽돌집을 올렸다. 이처럼 영종도 주민들이 살았던 가옥의 형태를 찾기 힘든 가운데 보물처럼 근엄한 자태를 품고 99칸의 고택이 아직도 남아 있어 놀라움을 안겨준다.
원룸촌과 다가구촌으로 바뀌어 버린 운서동 끝자락에 위풍당당 고랫등 기와집이 백운산자락을 지키고 있다. 영종도 원주민들은 이곳을 99칸 집으로 부른다.(실질적으로 99칸인지는 확인이 안된 상태). 이집 문패에는 김흥선이라는 주인장의 이름이 새겨져있다. 하지만 김흥선 씨는 현재 노환으로 아들과 함께 기거하고 이곳에는 과거 쇠경을 받고 일하던 최정심, 성기환 씨 부부가 집을 돌보고 있다.
섬에서 99칸 집을 갖기란 쉬운 일은 아니었으리라. 450평 대지에 대문을 두 곳으로 내고 잘 꾸며진 정원까지 갖춘 고택에는 무슨 사연이 숨겨져 있을까. 이 집은 옛날 영종도에 한때 있었던 금맥과 연관이 있었다.
작년 8월 영종도 한 마을에서 4m 땅꺼짐현상(씽크홀)이 생겼다. 현장조사 결과 구청과 공단은 주민들의 의견과 과거 자료를 토대로 당시 광물을 채취하기 위해 만든 무허가 광산인 것으로 추정했다. 주택 주변에 1930년대 초반 광물 채취가 진행되던 광산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했다. 영종도 곳곳에는 과거 금광채굴로 인한 땅꺼짐 현상이 간혹 발견된다.

 






 

금골, 은골의 유래
영종도에는 은골과 동강이라는 지명이 있다. ‘은골’은 은이 많이 생산된 지역이다. '동강마을'은 영종서 제일 먼저 금맥을 찾은 곳이라는 소문나면서 통광(通꾀뚫을통,鑛광물광)이라는 말로 동네를 칭하다가 변음 되어 지금의 동강마을로 불리고 있다. 이 동강마을은 당시 '금골'이라고 하고 '은골'과 구분하여 동네를 칭하다가 '은골'만 남아 지금까지 쓰여졌고 '금골'은 '통광'에 묻혀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과거 영종도는 금과 은이 많이 채광되었다.
영종도 과거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긴 故 정진백 씨 블로그에는 다음과 같은 추억이 담겨 있다.
'100여 평 미만의 논과 밭, 또는 개울 등을 파고 광물을 캐는 사람들의 모습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다. 어떤 기구를 통하여 낯선 사람이 동네를 배회하고 금맥을 찾아 헤매고. 금맥을 찾으면 땅파기 작업이 한 달을 두고 이어지며 끝나면 또 다시 다른 장소로 이동하고 그 파헤친 장소에는 물이 고여 작은 호수가 되다. 날이 가물면 거기에 고여 있는 물을 퍼내 말라 있거나 늦게까지 이앙하지 못한 모를 이앙하고 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곳에서 더울 때면 친구들과 멱도 감았던 기억이 있다.'
 

 




 

금맥캐던 채광업자들 갑부됐다는 소문 파다
일제시대 때 시작한 광물찾기 사업은 광복이후에도 이어졌으며 1950년대 들어서도 계속 금맥 찾기가 실패하면서 일확천금을 기대하던 금광업자들은 서서히 파산하거나 영종을 떠났다. 한국전쟁이 끝난 1954년부터 정부의 피난민 정착사업으로 뚝막이사업(간척지 막기)이 전개되면서 다수 채광인력이 이곳으로 흡수되었고 채광사업은 1960년대 중반쯤 사라졌다.
영종도에는 금과 은이 많이 채광되었으며 1919년 김성근이라는 사람이 처음 지금의 동강마을 주변에서 금맥을 발견, 80만여 평의 광산권을 얻어 금을 캐기 시작하였으며 채굴 작업을 하는 족족 성공하여 순식간에 갑부가 되었다. 이 소문이 꼬리를 물고 퍼져나가자, 일본인과 김종현, 김달현, 함창희(동림산업) 등이 광권을 뒤따라 얻어 섬 전체 지역에서 채광하여 부자가 되었고 북한지역 사람들을 포함, 전국 광산 노동자들이 모여들어 한 때는 2만 명의 인구가 상주하는 큰 섬이 되었다.

 





 

 

할 일 없어 놀기만 하던 동네어른들은 그곳에 품팔이를 다녔고 금이나 은이 들어있는 돌을 모아 재래적인 방법으로 금과 은을 가려내는 작업을 하곤 했다. 나중에 작업이 끝난 후 판 곳에서 돈을 벌었다, 허탕을 쳐서 망했다는 등 소문이 따랐다. 지금 그 웅덩이 흔적은 남아 일부는 농업용수를 담는 간이 저수지로 쓰이고 일부는 다시 메워 논으로 쓰이고 있다.
방치된 저수지에서 어린아이들이 멱을 감다가 익사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파낸 흙더미를 모아둔 곳을 광산이들 용어로 ‘버력탕’이라고 칭한다. 그 ‘버력’의 뜻은 광물성분이 섞이지 않은 작업과정의 잔재물인 파낸 흙, 그 광물잽이들이 찾지 못한 허탕진 잡석을 의미한다. 쓸모없으니 버리라는 뜻과 허탕쳤다는 말이 합성된 우리말 변형이 아닐까 생각된다.
 

 

금광채굴과 고택
기록에 나와 있는 김달현 금광채굴업자가 바로 99칸 고택의 주인이다. 지금은 아들 김흥선(85세) 씨의 집이다. 김달현 씨는 금광의 노다지로 부를 일궜다. 노다지를 일본에 수출해 많은 부를 축적했고 그의 아들 김흥선 씨는 부흥염전으로 그 부를 이어갔다.
옛 부자들은 혼자 잘 먹고 잘 살지는 않았단다. 김흥선 씨는 못 사는 동네사람들을 많이 도와주었다. 김흥선 씨 부인 양정일 씨는 어렵게 사는 사람들 집 앞에 몰래 쌀을 갖다놓는 선행을 베풀기도 했다.  고택을 지키고 있는 성기환, 최정심 부부는 과거 이 고택의 추수시절을 잊지 않고 있다.

 



▲ 벼력탕. 파낸 흙더미를 모아둔 곳을 이르는 광산 용어



 

“논만 8천600평 농사를 지었어요. 가을철이면 벼만 300가마 수확했지요. 지금은 공원자리가 된 저 곳에 창고가 있었는데 그득하게 쌓여 문이 안 닫힐 정도였지요.”
두 부부는 이곳에서 50년 이상을 살았다. 그들이 생각하는 그 고택은 아마도 90년 이상이 된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85세 김흥선 씨가 그곳에서 태어났고 아버지 김달현 씨가 면장을 하면서 집을 지었단다.
“당시 일본에서 목재를 가져와서 지었다고 들었습니다. 그곳에서 태어난 김흥선 씨가 이집에 대한 애착이 많이 있어요. 그의 아들이 아버지 명을 받고 보수를 계속하고 있어서 이렇게 집이 유지가 되고 있지요.”
고택의 내부는 중부지방의 전형적인 가옥형태인 ‘ㄷ’자 형태를 보인다. 여러 개의 거실을 거치면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방이 나온다. 사랑채와 바깥채만 해도 방이 여럿이다. 세련된 내부 조명과 화장실 변기, 욕실, 손잡이를 통해 아주 오래된 고택은 아닌 듯싶다.
한편 집주인 김흥선 씨는 세상을 뜨기 전 이집을 구청에 넘겨 문화재로 지정받을 예정이란다.
영종도 구석구석에는 재미있는 지명과 함께 영종도의 역사적 장소가 보물처럼 숨어 있다.

*참고한 블로그: 중구청 공무원이었던 故 정진백 씨 블로그


이현주 I-view기자 o700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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