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인터뷰] 강화 철책선을 캔버스에 담은 '이 화가'

발간일 2019.09.03 (화) 16:19


볼음도에 둥지 튼, 민중미술화가 박진화


▲민중미술화가 박진화


최근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의사요한’에는 CRPS(복합부위 통증 증후군)라는 질환의 환자가 등장한다. 바람만 스쳐도 죽을 것 같은 고통을 일으키는 CRPS는 아주 미세한 자극에도 극심한 통증을 느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글쓰기와 그림은 그리움의 다른 표현이라는 예술가를 만났다. 예술의 신비화 안에 둥지를 친 ‘화가’란 명칭을 버리고 ‘그림’을 택한 그는 차라리 ‘구도자’란 말이 어울렸다. 초월적 에너지만으로도 갈채를 받는 예술적 영감에 안주하지 않고,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모든 고통을 온 몸으로 느끼는 박진화 작가의 감각은 흡사 CRPS을 연상케 했다. 민족의 아픔을 그리는 화가, 박진화 작가를 만나러 볼음도로 떠났다.


“고향은 전남 장흥입니다. 읍에서 40리 떨어진 바닷가 마을의 작은 시골학교를 다녔습니다. 읍내 사생대회에서 있을 때 마다 학교 대표로 참가했는데, 매번 입상을 못했어요. 하루는 사생대회 수상작 전시회를 갔습니다. 내 그림이 매번 탈락하는 까닭을 모르겠더라고요. 그림을 포기 했는데, 중학교 때 미술선생님이 미술반을 권유하셨어요. 그때부터 미친 듯이 그림만 그렸습니다. 영혼이 그림 안으로 들어가 버린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가 고3때 미대 진학을 결심했죠. 제대로 된 지도 한번 받은 적 없었습니다. 고등학교 선배 중에 화실 운영하는 분이 계셔서, 거기에서 먹고 자면서 곁눈질 한 게 다였죠. 그렇게 홍대 서양화과에 입학합니다.”


박진화 작가 작업실


대학교 4학년 때 광주항쟁을 겪은 박진화 작가는 현실과 동떨어진 추상미술로 향했던 시선을 거두고 자아성찰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반영적인 진보미술을 택한다.


“한동안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어요. 83년 말에 뭘 해야 할지 몰라 넋 놓고 있었죠. 선배가 술만 먹고 있는 저를 데리고 한 스님께 데려 갔습니다. 거기에서 스님께 정신 차리라고 호되게 야단을 맞았습니다. 다리에 힘이 풀려 걷지 못할 정도였어요. 그때부터 다시 치열하게 그림을 그렸죠.”


1985년 7월. 군사독재에 저항하는 의미로 개최됐던 <한국미술, 20대의 힘전>의 개막식을 앞두고 경찰이 들이 닥쳤다. 출품작은 압수되고, 몇몇 작품은 훼손 되었다. 그 전시에 참가했던 박진화는 단지 그림을 그렸다는 이유로 구속 된다.



박진화 작가는 세상과 역사의 눈으로 그려야 한다는 결벽증에 가까운 태도로 ‘이 시대의 광기’의 발현과 같은 작품들을 탄생 시켰다. 첫 개인전은 호평을 받았고, 여세를 몰아 3년 후 두 번째 전시회를 개최한다.


“이게 무슨 민중미술이냐고 난리가 났었죠. 너, 이상한 곳으로 가 버렸다며 등을 돌린 이들도 있었습니다. 저도 충격을 받았죠. ‘화가’를 포기하고 그림을 그리자 다짐했습니다. 초심으로 돌아가서 연필부터 다시 시작했습니다. 1년 반 동안 혹독하게 연필로 드로잉만 했습니다.”


고군분투 끝에 정착한 강화에서의 첫해. 박진화 작가는 생계를 위해 마련한 화실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틈틈이 강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철책과 마주했다.


작업실 방문객들에게 작품 설명을 하는 박진화 작가​


“그림이 마냥 좋아서 그리는 사람은 아닙니다. 내 나름대로 막연한 의무감 같은 것이 있었죠. 강화도에서 만난 철책을 통해 우리 민족의 아픔은 무엇으로부터 기인한 것일까 질문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민통선 인근 대산리에 작업실을 차리고 매일 철책 근방을 서성거렸죠. 우리는 저쪽을 모르고 저쪽은 우리를 모르는데, 저쪽과 우리를 모두 아는 제 3의 무엇이 있지 않을까? 불통의 경계 지점인 철책에서 민족, 분단, 통일, 이런 무거운 고민을 떠올리며 철책위의 반가사유상과, 철책에 걸린 도깨비를 그리게 됩니다.”


철책 입장에서 철책의 통증을 그렸다는 박진화 작가. 강화에서 비로소 그림의 내용을 채우게 된 박진화 작가는 분단을 비롯하여 우리 사회의 고통을 캔버스에 담았다.


“2017년에 제주도와 서울시립미술관에 전시됐던 ‘촛불’을 주제로 한 작품은 최근에 있었던 촛불혁명을 다룬 것이 아닙니다.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를 그린것이지요. 당시 뉴스를 통해 촛불시위를 접했는데, 거대한 움직임에 대한 징후를 느꼈습니다. 아내가 병원에 입원 중이어서 집회에 참가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어서 그림으로 그 물결에 동참했습니다. 엄청난 소란이 일어나는 에너지를 담고 싶었죠. 그리고 그 거대한 움직임은 결국 2016년 촛불로 완성 됩니다. 예술가는 역사가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논리적으로 입증하지는 못합니다. 그건 학자들의 몫이겠지요. 예술가는 저마다의 감각으로 조짐을 감지하고 형용할 뿐입니다.”


세월호를 주제로 한 연작​ ‘4월’


세월호를 주제로 한 ‘4월’ 연작을 그린 것도 같은 연유다.


“2014년에 동학혁명 12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에 참여했습니다. ‘무량화’라는 작품을 한창 그리던 와중에 붓이 멈추게 됩니다. 8월 출품을 앞두고 갈 길 바쁜데, 이게 맞는지 근본적인 고민을 하게 되었죠. 며칠 고심하다가 4월 15일 새벽에 다 지우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4월 16일에 그 사건이 벌어졌죠. 어른으로서 아이들에게 너무 미안하고, 마음이 아파서 도저히 그릴 수가 없었습니다. 마감일은 지켜야 했기 때문에, 심기일전 하며 그림을 마무리 했습니다. 그래서 동학혁명을 다룬 ‘무량화’에 그때의 심정이 겹치게 됩니다. ‘무량화’를 끝내고 나서도 세월호를 떨쳐 낼 수 없었습니다. 세월호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못했으니, 어쩌면 당연 한 거죠. 2014년 9월부터 연신 마니산에 올랐습니다. 그러다가 ‘4월’을 떠올리게 됩니다. 저는 원래 그림을 그릴 때 제목부터 정합니다. 말에도 형태가 있다는 거, 감이 오세요? 제목이 정해지면 그림의 반은 끝난 것입니다.”


4.3항쟁, 4.19혁명, 검푸른 깊은 바다로 어린 영혼들이 사라진 4월 16일.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했던 시인의 한탄처럼, 해마다 4월이 되면 몸이 먼저 통증을 기억한다. 지금 여기, 현재의 시간과 공간의 일원으로서 손에 쥐고 있는 붓에 어떤 책무가 주어졌는지를 쉼 없이 자문하는 박진화 작가. 북녘 땅이 지척인 대산리 철책 근방에서 평화통일의 상징 은행나무 섬 볼음도로 작업실을 옮긴 이후에도 화가로서 주어진 역할을 찾고 있다.


분단의 상징, 볼음도의 은행나무를 바라보는 박진화 작가​


마지막으로 박진화 작가에게 ‘그림’은 어떤 의미인지 물었다.


“궁극적으로 내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인간으로 태어나서 평생 사유해온 ‘그리움’을 유지하기 위함입니다. 각각 생각하는 ‘그리움’은 다르겠지요. 그림 하나 마무리 했더니, 강원도 산골에 살고 있는 어느 할머니 밥맛이 문득 좋아졌으면 하는 진심, 일종의 나비효과 같은 거요. 그 할머니가 평생 박진화란 사람도 모르고, 제 작품을 볼 수 없다 해도, 그릴 때 그런 염원을 담아요. 누군가의 행복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다는 바람을 담아 오늘도 저는 붓을 듭니다.”



글  김세라 I-View 객원기자, 사진 나윤아 자유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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