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로 그리는 인천萬話 - 조은숙 시인
배다리 팔색조 미인, 조은숙 시인▲커피로 그린 조은숙 시인‘죽으면 썩어질 육신 맘껏 사용해라’가 가훈이었단다. 군산시내버스 기사 노릇으로 평생 가족들을 건사하고도, 은퇴 후까지 한시도 쉴 틈 없이 공사장 살수차며 덤프 등을 운전하고 계시는, 팔순 아버지의 좌우명이기도 하단다.그런 아버지가 짠해 ‘제발 그만 좀 편히 지내시라’ 역정도 내보지만 피는 역시 못 속이는 법인가 보다, 그 딸 역시도 일이 없으면 집안을 발칵 뒤집어 청소라도 해야 직성이 풀릴 정도로 몸을 가만 두지 않으니 말이다. 배우, 동화구연가, 작가 등 팔색조 매력 가득중앙아메리카의 작은 나라 엘살바도르 이민에서 돌아와 배다리에 다시 뿌리를 내린 조은숙 시인(50세) 이야기다. 사실 시인이라는 이름만으로 그녀의 정체성을 모두 설명하기엔 불가능하다. 배우, 동화구연가, 작가, 문학강사, 객원기자, DJ, 리포터 등 그녀의 팔색조 매력은 까도 까도 한이 없는 양파껍질 같다. 작년 연말에는 엘살바도르에서 찍어 온 사진과 글을 엮어 ‘맹그로브 숲의 아이들’이라는 사진집을 출간하기도 했다.▲배다리 시다락방 시낭송회에서“군산에서 2남1녀 중 맏딸로 태어났어요. 끼와 욕심이 남달랐던가 봐요. 풍문초등학교 시절부터 밴드부며 무용부, 합창단 등을 주름잡았거든요. 워낙 깔끔 떨고 다녀서인지 친구들은 제가 엄청 부잣집 딸인 줄 알았지만, 사실 우리 집 사정은 거의 고아원 수준이었어요. 폭탄사고로 사망하셨다는 큰아버지네 아들, 이혼으로 풍비박산이 되신 둘째 큰아버지의 다섯 아이들까지 총 9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우글우글 함께 살았으니까요. 논두렁에서 잡아온 개구리를 친구 필통 속에 몰래 넣어두어 교실을 아수라장으로 만들 정도로 소문난 장난꾸러기였지만, 혼자 있으면 까닭 모를 우울한 감정이 가슴속으로 스멀스멀 밀려들어 힘들어하곤 했어요. 너무 이른 나이에 삶의 고단함과 인생의 허무함을 눈치 채버린 탓이었을 거예요. 어쩌면 제 문학성의 8할은 그때 이미 싹튼 것이 아닐까 생각해요. 월명여중을 거쳐 군산여상 1학년 때는 꽃집에서 알바를 하면서도 학교방송부 아나운서를 했죠. 목소리가 예쁘다는 주위 칭찬을 자주 들었거든요. 매주 목요일 6시면 교내방송을 통해 ‘명상의 시간’을 진행했어요. 음악과 대본까지 직접 준비했죠. ‘청순한 옷 차림상’이란 걸 타기도 했어요. 언제나 바른 자세에 조용하면서도 자기의사 표현을 분명히 잘한다고 주는 상이래요.”고3때인 1985년 11월, 서울 성동구 화양동의 아남산업에 취업을 했단다. 중학교 수학여행 때 어린이 대공원을 방문해 엘리베이터를 처음 타보고 가슴 두근거렸던 그 서울에 입성한 것이다. 하지만 한창 서슬이 퍼렇던 5공화국의 위세 아래서, 사회에 첫발을 내딛은 초년생에게는 건대앞 화양시장을 둘러보는 게 거의 유일한 낙이었단다.▲연극 공연 후 응원 온 고교동창들과입사 1년차에 사내 방송실직원을 공채한다는 광고를 보고, 이건 내가 적격이라는 자신감에 지원서를 냈다. 이론시험과 필기시험, 목소리 테스트에 오디션까지 치른 끝에, 무려 6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당당히 합격할 수 있었단다. 고등학교시절 교내방송을 진행한 경험이 큰 도움이 된 것이다. 그렇게 아남 사내방송 아나운서로 멋지게 변신했다.“총무부 소속으로 회사 내 각종 안내방송부터 안전관리비디오 제작, 아침 8시~ 8시25분에 아남그룹 전반에 걸친 소식을 전하는 ‘아남뉴스’를 진행하고, 회사직원들이 신청한 엽서사연과 노래를 주 1회 음악방송을 통해 내보내는 일을 했어요. 뉴스기사며 방송 대본도 직접 쓰고 LP판을 찾아 노래를 틀고 노래내용과 가수를 설명하는 등, PD와 작가역할까지 일인 4역을 한 거죠. 그렇게 10년을 아남 사내방송실에서 보냈어요. 아마도 제 인생 중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을 거예요. 건국대와 세종대 앞 학사주점 ‘타박네’와 음악다방 ‘갈채’에서 DJ로 활동하기도 했어요. 거의 연예인 버금가는 인기를 누렸죠. DJ 뮤직박스 안으로 꽃이며 주스도 넣어주고, 일이 끝날 때면 남자들이 집까지 줄줄이 따라오고, 러브레터도 보따리씩 받았거든요. 입영전야가 되면 단체석은 거의 난동 수준으로 변했죠. 계속하다간 큰 사고가 터질 것 같아 결국 DJ알바를 접었어요. ‘아남 문예동아리’에 들어 시낭송회와 시화전을 열기도하고 총무와 회장직을 맡기도 했어요. 그 와중에도 꾸준히 시 쓰기를 이어온 덕에 1992년 9월 월간문예지 ‘한국시’로 등단도 했죠. ‘사랑노래로’ 외 4편의 시로 시인이라는 황송한 이름을 얻었는데, 여태 그 이름에 걸맞게 살고 있나 부끄럽고 부담스러운 것이 솔직한 심정이에요.”결혼하면서 자연스럽게 인천인으로 정착1990년 5월, 인하대 무역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이던 부평남자와 연애를 시작해, 6개월만인 그해 11월 결혼에 골인했다. 맞벌이를 이어오다, 큰아이 돌잔치를 끝으로 1994년 아남에서 퇴사했다. 가로수 등의 신문에 수필이 당선되고, 베비라유아복 공모전에 시가 당선되기도 했다. 그녀의 시는 한때 라디오CM송으로 만들어져 그녀의 목소리와 함께 FM전파를 타기도 했다. 그러던 그녀가 주말이면 내려오라는 인천의 시부모님 성화에 못 이겨, 아예 부평3동으로 이사를 오게 된 것이 인천사람으로 인천에 뿌리를 내리게 된 배경이란다.▲엘살바도르 바닷가 마을 아이들과“처음 인천생활은 너무 갑갑하고 외로웠어요. 하루하루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무기력증에 아이를 포대기에 둘러업고 무작정 집을 나와 거리를 배회하곤 했죠. 아는 사람 하나 없고 딱히 갈 곳도 몰라, 한번은 백운역 역전다방에 들어가 쌍화차를 시켰어요. 물도 고기도 없는 빈 수족관에 조화들이 꽂혀 있고, 할아버지 몇 분이서 벽에 걸린 TV만 쳐다보고 있더라고요. 쌍화차를 내온 마담이 내 얼굴을 빤히 보더니, ‘눈이 왜 그래?’하고 묻는 거예요. 새파란 새댁이 아이를 업고 이른 시간부터 혼자 다방에 와 앉아있으니 필경 무슨 사연이 있는 거라 짐작한 거죠. 대답도 못하고 탁자위에 놓인 쌍화차를 내려다보는데, 차 위에 동동 띄운 계란 노른자위가 너무 이쁜 거예요. 마치 깜깜한 우주 위에 떠있는 에너지 덩어리가 노랗게 빛을 발하는 느낌이었어요. 수저로 그걸 조심스레 떠먹으면서 ‘나는 지금 우주의 에너지를 먹는다’, ‘나는 이제 힘을 얻는다’ 속으로 계속 되네었죠. 그래서일까요? 신기하게도 정말 마음 저 깊은 곳으로부터 미세하지만 뜨거운 기운이 목구멍으로 치밀어 오르는 것 같더라고요.” 그날 이후 신기하게도 무기력증을 털어버린 그녀는 동장님 추천을 받아, ‘부평사람들’이라는 구정소식지 기자로 발탁되었다. 만 10년을 신나게 부평 구석구석을 누비며 사람들을 취재하고 기사를 썼다. 십정동 ‘작은 자 야학’에서 국어교사로 4년, 혜광학원 시각장애학교 교장선생님을 취재 갔다가 6년을 동화구연 특강강사로 봉사하기도 했다.“색동회 전국동화구연대회에 입상해, 색동회 소속 동화구연가로 20년간 활동 중이에요. 부평현대백화점, 신세계백화점 문화센터 강사를 역임했고, 여러 복지관과 유치원, 학교에서도 강의를 해왔어요. 연극과 인연을 맺은 것은 2003년이에요. ‘피어나 극단’의 이정환 대표 요청으로 연극공연 중간에 내레이션을 해주기로 했는데, 대본 리딩 도중 갑자기 내레이션을 날리고 연출자님이 아예 배우로 출연을 권하셨어요. 엉겁결에 예술회관 소공연장에서 막을 올린 ‘아버지의 훈장(김학균극본)’이라는 연극에 어머니역으로 무대에 서게 된 거죠. 그 후 인천연극제 몇 작품을 더 하게 되었고, 2007년 3월에는 ‘울 밖에 핀 봉선화(오선근作)’라는 연극에서 신윤희라는 가수역할도 맡았어요.”아버지의 유산 ‘바지런DNA’로 지역활동가로 진화중그 작품을 끝으로, 2년 전 한국에서의 봉재사업을 접고 먼저 중미의 엘살바도르로 사업장을 옮긴 남편을 따라 중2, 초5학년인 아들 둘과 엘살바도르 이민을 떠났다. 낯설고 물 선 엘살바도르에서도 그녀의 탤런트 기질은 유감없이 빛을 발했다. 두 아이를 입학시키기 위해 방문한 교민학교에서 2주 만에 한글학교 교사로 발탁되었는가 하면, 6년 후에는 교감 직까지 떠맡게 되었단다. 엘살바도르 문화대학 ‘한국언어문화학과’에 입학해 학업도 병행했다.“300명 정도의 한국교민들이 사는데 현지인들과 다문화가정을 꾸린 경우가 많아요. 그런 까닭에 교민2세들이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전혀 몰라, 뿌리교육을 위해 교민학교의 역할은 아주 중요했죠. 엘살바도르는 우리나라 경상남북도를 합친 정도인데, 중미에서 제일 작은 나라예요. 커피와 화산의 나라죠. 이웃 온두라스와 축구 때문에 전쟁을 치른 것으로도 유명한데, 내전상태가 12년간이나 지속 돼 치안이 매우 불안정해요. 무장갱단들이 백주대낮에도 정부군과 총격전을 벌일 만큼 살벌한 나라죠. 코이카가 엘살바도르 국립대학교에 한국어 강좌를 한 학기 개설했다가,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되어 철수를 결정했을 정도예요. 총기류가 공공연히 유통되고 마약, 청소년 납치, 살해 등이 일상적인 곳이죠.”▲아들 고교졸업식그녀는 그 위험한 나라에서도 ‘이스랄 데 맨더스’라는 먼 바닷가 마을까지 찾아가, 썰물 때면 드러나는 맹그로브 숲에서 조개를 캐는 아이들을 위해 봉사활동을 펼치고 사진과 글을 언론에 기고해 지원을 호소하기도 했단다.2008년 7월 MBCW방송이 아동인권과 노동착취에 내몰린 ‘맹그로브 숲의 아이들’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내보내면서부터는, 네이버에 ‘엘살바도르 한글학교’라는 카페가 만들어지고 각지에서 독지가들의 후원을 이끌어내는 데에도 한 몫을 담당했단다. “후원이 늘어나 39명의 현지아이들을 지원할 수 있었고, 그 아이들 중 몇에게는 대학학비 보조를 제 개인적으로 해왔어요. 작년 8월까지 10년간의 지원이 모두 끝이 났죠. 저는 둘째 아이의 대학진학 때문에 2015년 7월 잠시 귀국했는데, 시어머니 병환이 심해지는 바람에 한국에 계속 남게 되었어요. 시어머니 병간호 틈틈이 숙명여대 대학원에 진학해 아동문화 콘텐츠학과를 마쳤죠. 2017년 시어머니께서 돌아가신 이후에는 ‘엘살바도르 사정이 더욱 위험해졌으니 들어올 생각 말라’는 남편의 만류에 결국 이곳 배다리에 집을 장만해 정착하게 되었어요.”그녀는 이제 인천 배다리사람으로 다시 눈부시게 진화 중이다. 작년 말에는 자신의 시로 아벨다락방에서 시낭송회를 열었는가하면 사진첩을 발간했고, 올해부터는 동구 화도진문화원에서 문예창작교실을 진행한다. 각종 단체와 학교에서 동화구연가로 지속적인 활동을 이어갈 뿐 아니라 몇 편의 연극무대에도 설 것이고 지역 활동가로도 보폭을 넓혀 갈 것이 자명하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바지런 DNA’가 그녀를 한시도 가만두지 않을 터이기에. 벌써부터 그녀의 팔색조 변신이 자못 기대된다.글. 커피그림 유사랑 i-View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