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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국독립 위해 헌신한 선조들 오래기억 해주길"

    [인천 이야기] "조국독립 위해 헌신한 선조들 오래기억 해주길"

    ​강화 3.18만세운동 주역 황도문, 오영섭 선생 후손 만나다▲황도문선생 생가를 지키는 황경진 님​​​조롱을 박차고 나가야 진실로 좋은 새이며그물을 떨치고 나가야 예사스런 물고기가 아니리충은 반드시 효에서 비롯되니그대여 자식 기다리는 어머니를 생각 하소서강화도의 김주경이 감방의 김구 선생에게 보낸 시, 백범일지 중에서 -청년 김구에 반한 김주경, 그에게 전 재산 걸어백범 김구 선생은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에게 경고 하고자 일본인 헌병을 습격하고 인천의 교도소에 수감된다. 재판부 앞에서 당차게 소신을 밝힌 청년의 기개에 감탄한 강화도의 김주경은 일면식도 없는 김구선생을 위해 전 재산을 건다. 구명운동 실패 후 김주경은 위의 시를 전하며 우선 탈출 할 것을 청하고, 탈옥에 성공한 김구 선생은 김주경을 만나러 오지만 행방을 찾지 못한다. 이에 김구 선생은 석 달 동안 강화도에 머무르며 김주경의 아들을 비롯한 동네 어린이들을 가르친다.▲해방후 강화를 방문한 김구선생 [강화뉴스제공]해방 후, 김구 선생은 어려운 시절 대가를 바라지 않고 아낌없이 베푼 이들을 다시 만나기 위해 강화를 방문한다. 강화사람들은 합일학교 운동장에 모여 김구 선생을 연호했다. 김구 선생은 강화사람들을 위해 ‘홍익인간’ 휘호를 써서 전달하고, 이 액자는 현재까지 합일초등학교에 전해진다.엄혹했던 식민지 시절, 일신의 안락 대신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한 길을 선택했던 무명의 민초들이 있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안타깝게도 기록으로 남겨지지 않은 선조들의 거룩한 피땀눈물을 알지 못한다.▲​백범 김구의 휘호(홍익인간) [합일초 제공]​의인 김주경의 행적 역시 백범일지에 수록된 것이 전부. 귀국 후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김구 선생이 우선적으로 방문했을 만큼 조국독립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노력한 강화사람들의 활약은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몽골군, 청군, 미군, 프랑스군, 일본군…. 오랜 세월 외세의 침략 때 마다 맨주먹으로 삶터를 지켜왔던 강화사람들의 DNA에는 어떠한 시련과 고난도 반드시 극복해 내겠다는 강인한 정신이 전승되고 있다. 곡절 깊은 강화도에서 나고 자라 조국의 독립을 외쳤던 강화 만세운동 주역들은 그 후로 어떻게 살았을까? 후손을 만나 전해지지 않은 이야기 한 자락을 물었다.강화 3.18만세운동 신호탄 쏜 황도문 선생 손자 황경진 님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신산한 삶과 대비되는 친일파 후손들의 ‘부와 권세’는 우리 현대사의 부끄러운 민낯이다. 강화 3.18만세운동의 제안자였던 황도문 선생의 손자 황경진님도 평생 고향을 지킨 친근한 촌로였다.“할아버지에 관해 아는 게 많지 않아요. 훌륭한 분이셨다고 동네 어르신들이 얘기 해주셔서 그런가보다 했지, 할머니나 아버지께서 말씀 해주신 게 없어요. 할아버지께서 길상면 초대면장이셨는데,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에게 끌려가서 비극을 겪으셨대요. 슬픔이 워낙 컸기 때문이었는지, 집안 어른들은 할아버지에 대하여 거의 언급 하지 않으셨죠. 2001년에 김대중 대통령 재임 중에 건국포장 추서를 받지만, 이 역시 먼 친척이 올린 거 에요. 여기가 독립운동가 황도문 선생의 생가라고 해서 학생들이 자주 오더라고요. 할아버지에 대해 아는 게 많으면 어린 학생들에게 이야기도 해주고 할 텐데, 안타깝죠.”▲​황도문 선생​서울의 3.1독립만세운동에 참가했던 연희전문 2학년 황도문 선생은 독립선언서와 독립신문을 품에 숨겨 고향으로 돌아온다. 선생이 나고 자란 선두리는 정미의병의 자취가 남아 있는 동네. 마을에는 정미의병부대가 일본군과 치열하게 전투를 벌인 후, 일본군 30여 명의 다리를 잘라 방죽에 던져버렸다는 일화가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황도문 선생은 남달리 영특하고 의기가 있는 소년이었다. 선생이 다니던 선두교회 신자들은 소년을 넓은 세상으로 보내기로 결의하고, 배제학당 진학을 추천한다. 고향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유학을 떠난 황도문 선생은 배제학당 졸업 후 연희전문 재학 중에 3.1만세운동에 동참한 것이다. 고향에 돌아온 황도문 선생은 유봉진 선생을 찾아가 서울의 상황을 전하며 강화에서도 만세운동을 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유봉진 선생의 길직교회와 황도문 선생의 선두교회를 중심으로 길상결사대가 결성 되고, 3월 18일 강화장날 대규모 만세운동이 벌어진다.▲​​황도문 선생 생가​이후, 황도문 선생은 강화도를 무사히 빠져나가, 강원도 산골에서 3년간 숨어 지낸다. 1922년 이후에는 덕적도의 합일학교 교사로 봉직하며 학생들에게 애국의식을 고취 시켰고, 상해 임시정부의 군자금 모금운동을 전개하였다고 전해진다.“덕적도 합일학교 재직 당시 학생들을 데리고 마리산으로 수학여행을 간 일화를 당시 학생이었던 어르신에게 들은 적이 있어요. 어느 봄날, 할아버지께서 학생들과 마리산 등반을 하셨나 봐요. 할아버지는 참성단에서 단군할아버지와 고조선의 역사에 대해 설명을 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선창 하셨답니다. 그 광경을 누군가 고발했다면 일경에 잡혀갈 상황이었죠. 목 놓아 만세를 외치는 모습에 감명을 받은 학생들도 목이 터져라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답니다.”이토록 민족의 동량이 될 학생들을 육성하는데 사력을 다했던 황도문 선생이지만, 다른 독립 운동가들이 그러했듯이 가족들을 제대로 돌보는 가장은 아니었다고 한다.“선두리는 땅이 비옥합니다. 농사가 잘 되는 옥토여서 제가 자랄 때는 살림이 괜찮았죠. 하지만 일제 강점기 시절의 아버지와 작은아버지들은 몹시 힘들게 지내셨나 봐요. 원래 큰일 하는 분들이 가정을 살필 겨를이 없잖아요. 할아버지께서 임시정부 군자금 마련하려고 개성에서 홍삼을 구해 와서 배편으로 중국에 보내는 일을 하셨지만 식구들은 누추한 집에서 살았답니다.”▲선두교회 삼일운동기념비에서 황경진 님​마지막으로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서 3.1운동 100주년에 대한 소회를 물었다.“할아버지를 존경 하지만 먹고 살기 바빠 자꾸 잊게 되네요. 3.1운동 100주년이라고 하는데, 제가 근사한 말도 할 줄 몰라요. 그래도 이렇게 잊지 않고 할아버지에 대해 물어봐주는 분들이 계시는 게 고맙죠. 모쪼록 많은 국민들이 오랫동안 할아버지에 관하여 기억 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예수교도 8인조사건’ 주동자 오영섭 선생의 손자 오교창 원장“소아(小我)를 버리고 대아(大我)에 살며 합일(合一)정신으로 뭉쳐나가자”서슬 퍼런 일제강점기 시절, 일제의 회유와 탄압으로 폐교 직전까지 내몰렸던 합일학교는 최상현 선생의 전 재산 기부와 오영섭 교장의 열성적인 교육활동으로 독립전쟁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는 민족학교로 거듭났다. 최상현 선생의 12만평 토지 기증으로 합일초등학교는 일제의 압박에도 든든하게 버틸 수 있었지만, 선생은 폐렴으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게 된다.▲​1930년 제1회 전강화 육상대회때 최상현 교장 대회사 모습 [합일초 제공]​합일학교 이사장 오합라 여사는 남편 최상현 선생의 의지를 실천하고자 남동생 오영섭을 교장으로 발탁한다. 오영섭 선생은 민족의식이 누구보다 투철한 ‘요시찰 인물’이었다.“3.1운동 당시 할아버지는 보성고보 학생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고향으로 돌아와서 조봉암, 조구원, 고제몽 등 8명의 청년들과 만세시위를 주도하였죠. ‘예수교도 8인조’로 불린 비밀결사대는 전국의 만세시위소식을 전하기 위해 밤마다 강화 전 지역에 벽보와 일제에 대한 경고문을 붙이다가 전원 검거됩니다. 할아버지 약관 18세의 나이로 일경에 체포되어, 보안법 위반 죄목으로 태형 60대의 형벌을 받습니다. 이후 상해로 건너간 할아버지는 강화진위대 대장이었던 이동휘 선생을 만나 배일사상을 전수받은 후 상해대한군관학교에 들어갑니다. 하지만 이시영 선생으로부터 ‘너는 아직 청소년이므로 공부에 힘써 후학을 양성하라’는 요청을 받고 일본대학 사범부에 입학하게 되지요. 합일학교 교장으로서 구국교육운동에 힘쓴 이유도 이러한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오영섭 선생 [오치과 제공]​작은할아버지, 아버지에 이어 3대째 강화읍에서 치과의원을 운영 중인 오교창 원장에게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물었다.“저희 집이 합일초등학교 바로 앞이었어요. 1975년에 돌아가실 때까지 할아버지를 뵈러 온 손님들로 북적거렸죠. 양조장으로 막걸리 받으러 가는 심부름은 제 담당이었어요. 할아버지는 엄격하고 강직한 분이셨어요. 주변에서 독립유공자 신청을 권유하면 독립운동 하느라 어렵게 사는 사람이 널렸는데, 일제강점기시대에 교장까지 했던 내가 이만큼 잘 살았으면 됐다며 한사코 거절하셨어요. 손자 된 입장에서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최근에 독립유공자 신청을 했는데, 선정이 안 되었어요. 후손으로서 아쉽지만 공적조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일가친척들이 할아버지의 일생을 다시 한 번 돌아보며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외국에 있는 친척들까지도 이렇게 훌륭한 분의 핏줄이라는 것에 자부심이 생긴다며 연락을 주셨어요. 조국을 위해 온몸을 다해 싸웠던 십대 소년의 용기와 실천이 가장 큰 훈장이 아닐까 싶어요.” 피를 따라 흐르는 기개. 오 원장의 부친 오태식 원장 역시 강화 시민사회를 이끌어 가는 큰어른이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닮아 공동체 의식이 투철하셨습니다. 거창하지 않지만 제가 시민운동에 참여하게 된 까닭도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영향 때문입니다. 1945년에 작은할아버지께서 강화읍에 치과의원을 개업 하신 이후로, 아버지는 1951년에 오치과의원을 세우셨죠. 저는 1994년부터 아버지와 병원을 공동운영했는데요, 처음 몇 년은 참 힘들었어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평판에 누가 될까봐 조심스럽더라고요. 작은 몸집이지만 카리스마 넘치셨던 아버지를 무척 존경했습니다. 돌아가신 후 거의 일 년은 느닷없이 눈물이 나서 운전을 못할 지경이었으니까요.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저의 영원한 롤모델이십니다.”▲​역대 오치과 원장 (좌로부터 1대 오명섭, 2대 오태식, 3대 오교창 원장) [오치과 제공]​마지막으로 오교창 원장이 생각하는 3.1운동정신의 현재적 의미를 물었다.“아베총리의 억지주장은 들을 때마다 황당하잖아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은 과연 무엇인가 근원적인 의문이 들거든요. 가치관에 혼란이 올 때마다 중심을 잡아주는 본보기를 찾게 되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분연히 떨치고 일어난 조상들의 의로운 항거는 현재에도 좋은 교훈이 되는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소아(小我)를 버리고 대아(大我)에 살며 합일(合一)정신으로 뭉쳐라’는 할아버지의 가르침을 최선을 다해 계승하며 살겠습니다.” 글 김세라 I-View 객원기자, 사진 나윤아 자유사진가, 오치과의원, 강화뉴스, 합일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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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19.02.27 (수)
  • 인천 46곳에 여의도 크기 공원 조성 등

    [인천뉴스] 인천 46곳에 여의도 크기 공원 조성 등

    ​인천광역시 공원 확충 종합계획 발표인천시가 올해부터 2022년까지 20년 이상 장기미집행 도시계획시설 지역을 매입해 46곳에 여의도 크기의 공원을 조성한다. 인천시는 시민단체 및 전문가, 군·​구 등과 민관합동 토론회를 갖고 ‘인천광역시 공원 확충 종합계획’을 확정 발표했다.인천 시민들의 휴식과 여가 공간을 위한 공원 확충 요구가 지속되어 왔으나 시는 장기간 재정 여건 등으로 신규 공원 조성에 어려움을 겪어왔다.인천시 전체 공원면적은 총 43.3㎢이며 1인당 도시공원 면적은 11.2㎡로 현재 특․광역시 중 가장 넓다. 이어 대전 10.3㎡, 울산 9.4㎡로 뒤를 이었다.그러나 산업단지·매립지·발전소 등 각종 환경유해 시설이 도심 내에 위치해 있어, 미세먼지 저감 등 대기 질 개선을 위해 공원 등의 녹지공간의 확충이 여전히 절실한 상황이다.인천시는 이번에 장기미집행 공원시설에 대한 보상 및 조성 계획을 구체적으로 마련해, 전국적으로 해묵은 과제인 ‘장기미집행 부지’ 문제를 그 어떤 지역보다 선제적으로 해결할 기반을 마련했다. 지금까지 인천시는 해당 현안을 주제로 한 전문가 토론회와 7차례에 걸친 민관협의회를 개최하는 등 시민들의 의견을 반영하기 위해 노력했다.1999년 헌번재판소의 판결에 따른 ‘장기미집행 지정부지 일몰제’로, 인천지역 공원 중 인천시 공원면적의 약 17%인 7.23㎢가 2020년 자동실효 대상이다. 이번에 인천시는 이 중 개발제한구역과 국․공유지, 재정비 지역 등 4.32㎢를 제외하고 여의도 면적에 해당하는 총 46개소, 2.91㎢를 공원조성 대상지*로 최종 선정하였다.* 재정사업 43개소 2.34㎢, 민간특례사업 3개소 0.57㎢​ ▲장기미집행과 숲​인천시는 해당 대상지에 대한 보상과 공원 조성을 위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는 5,641억원 상당의 재원을 지방채(채권 제외) 발행 등 다양한 방식으로 조달할 계획이다.  도시 숲 사업은 정부의 생활 SOC 사업 공모를 통해 상당 규모의 국비를 확보하였으며, 금년부터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행할 계획이다.이번 계획은 민선 7기 인천시의 역점 시책 중 하나인 “더불어 잘사는 균형발전” 정책의 일환이다. 인천시는 지난해부터 ①원도심 균형발전방안 ②내항재개발 마스터플랜 ③도심 군부대 통합 재배치 협약 체결 등의 도시 균형발전 사업을 순차적으로 시행해 왔다.계란 껍데기에 신선도 확인… 산란일자 표시 인천시 보건환경연구원이 신선한 계란의 공급을 위해 안전성 기준과 규격을 신설하고 산란일자를 표시하는 등 검사를 강화한다.올해부터는 물로 세척한 계란과 한번이라도 냉장한 계란은 0~10℃에서 냉장으로 보관․유통하는 것이 의무화된다. 계란을 물로 세척하는 경우 깨끗한 물(100~200 ppm 차아염소산나트륨을 함유하거나 더 살균효력이 있는 방법)로 세척하고, 100~200ppm 차아염소산나트륨이나 그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으로 살균해야 한다.지난 23일부터는 계란 껍데기에 기존에 표시하던 생산자 고유번호와 사육환경 번호 뿐만 아니라 신선도 확인을 위한 산란일자도 새로이 표시해야 한다.이와 같이 계란에 대한 사항이 신설되고 변경될 뿐만 아니라 더욱 안전한 계란 유통을 위해 기존에 실시하던 이물질·부패란, 잔류물질 및 살모넬라 검사 이외에 식중독균 1종(대장균)을 추가하는 등 지난해에 비해 안전성 검사를 강화할 예정이다.2018년에 보건환경연구원에서는 관내 산란계 농장 15개소 및 메추리농장 4개소의 생산란에 대하여 미생물검사 49건, 잔류물질검사(살충제 33종·항생제 46종) 245건을 실시한 결과 모두 적합하였다. 또한 관내 61곳에서 유통되는 계란을 수거하여 잔류물질(살충제 33종·항생제 38종) 549건을 검사한 결과 1건의 계란에서 부적합되어 관할 지자체 등에 통보 조치하는 등 지속적인 안전관리를 실시하고 있다. 인천시 보건환경연구원 관계자는 “양계농가에서는 닭 진드기가 많이 발생하는 하절기에 살충제 사용을 주의해주시고, 반드시 닭에 사용이 허가된 항생제·항생물질을 사용해주시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옹진군 진두항 ‘국가어항’으로 지정인천시는 지난 26일(화)에 옹진군 영흥면 진두항이 ‘국가어항’으로 새롭게 지정된다고 밝혔다.진두항은 1986년 2월 지방어항(관리청 : 인천광역시)으로 지정되었으며, 해양수산부에서 국가어항 지정 타당성 조사 등을 거쳐 개발 잠재력이 있는 국가어항 후보지로 선정되었으나 지연돼왔다.해양수산부는 2018년 ‘국가어항 지정 및 해제 합리화방안 연구’를 통해 어선 대형화, 어장 환경 및 어항 이용여건 변화 등을 반영한 어항 지정기준을 새롭게 마련하고 인천시와의 협의를 거쳐 진두항 국가어항 신규 지정을 결정했다.진두항은 수도권에서 접근성이 좋아 최근 낚시 명소로 각광받고 있는 곳으로, 낚시레저 전용부두, 친수시설과 주차장 등을 조성하여 해양 관광 거점어항으로 육성할 계획이다. 또한, 어업인들이 이용하는 어선 부두와 관광객 이용 공간을 분리하여 어업인들의 안전하고 편리한 조업 활동도 지원할 예정이다. 이번 진두항이 국가어항으로 신규 지정됨에 따라 ‘진두항 기본계획 수립’에 의해 3년간 489억원이 투입돼 부족한 접안시설 등 확충과 어선의 접·​이안 이용 및 안전성이 개선될 예정이다.특히, 수산기능 시설 뿐만 아니라 친수·​조경·​주차장을 배치하고 레저보트부두 인근을 어항관광구역으로 설정함으로서 이용자 및 관광객의 편의를 도모하여 수도권 내 수산물 판매 및 관광·​레저 중심어항으로 개발된다.한국차문화협회 제52회 동계연수회 성료인천을 중심으로 많은 차문화행사를 개최하는 (사)한국차문화협회(이사장 최소연)의 ‘제52회 동계연수회’가 지난 23~24일 경북 문경 STX리조트에서 열렸다.이번 연수회에선 한국차문화대학원 16기 졸업작품 ‘세책례(洗冊禮)’와 인성차문화예절지도사 자격증 수여, 특강이 진행됐다. 김경자 회원 등 13명이 1급 자격증을, 44명이 인천차문화예절지도사 2급자격증, 36명이 인성차문화예절지도사 3급 자격증을 각각 받았다.▲(사)한국차문화협회 이사장 최소연특강주제는 정조의 개혁정신과 화성 건설(김준혁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 조선 왕조의 문화와 생활(이왕무 경기대 사학과 교수), 우울증과 불면증 극복하기(강승걸 가천대 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등이었다.최소연 한국차문화협회 이사장은 “앞으로도 무형문화재 규방다례의 보존과 계승 발전을 위하여 더욱 정진하고, 전통문화 전승자로서의 책임감을 갖자”며 “우리 협회의 차문화 정신과 규방다례를 널리 보급, 확산시켜 나아가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말했다.▲한국차문화대학원 제16기 졸업작품 발표회 ‘세책례(洗冊禮)’​​이날 행사엔 전국 27개 지부(일본 교토지부 포함) 회원 400여명이 전통한복을 입고 참석했으며 고윤환 문경시장이 참석해 인사말을 했다.지금까지 수료한 인성차문화예절지도사는 연인원 4000여 명에 달하며 전국 26개 지부와 해외의 교토지부에서 회원 3만여 명이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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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19.02.25 (월)
  • 용유도 항일투쟁조직 ‘혈성단’, 아시나요?

    [그때 그 시절] 용유도 항일투쟁조직 ‘혈성단’, 아시나요?

    ​조명원 주축으로 조종서, 최봉학 등이 모여 결성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의 주권은 일본에 넘어갔다. 일제강점기 35년 동안 많은 억압 속에서도 많은 독립단체가 생겼고 목숨을 걸고 나라를 찾기 위한 몸부림이 있었다. 인천 용유지역 ‘혈성단’은 항일투쟁조직체였다. 어떤 목적으로 결성되었고 어떤 독립운동을 펼쳤으며, 만세운동에 참여한 인물 등 구체적인 내용이 남는 민족단체다.​▲혈성단을 조직한 조종서​​​19세 조명원, 혈성단을 조직하다19세... 고3의 나이로 부모님 품에서 안락하게 공부만 할 나이다. 기미년 (1919년), 그의 나이 19세였다. 서울 배재학당에 재학중이던 용유도 (現 인천시 중구 용유동) 조명원 청년은 서울 기미 3.1독립선언식에 참석한다.1919년 3월24일 귀향, 동네 청년 21세 조종서, 23세 최봉학, 21세 문무년에게 3.1운동 소식을 전한다. 용유도에서도 만세운동을 결의하고 자신의 집에 모여 ‘혈성단’을 조직한다. 네 명의 피 끓는 청춘은 비밀 항일 투쟁조직체 신서 1통을 작성한 후 피로 서명한다.3월 27일 비밀리에 만세운동을 준비하다인천시내에서 광목천을 구입하고 대형태극기를 만든 후, ‘혈성단 주모자 조명원, 조종서, 문무년, 최봉학’ 이라는 이름을 크게 쓴 후, ‘조선운동을 거사할 것이니 28일 관청리 광장에 모이라’라는 격문을 작성한다. 80여 통의 격문을, 거사 바로 전날인 27일 어둠을 틈타 각 가정에 전달했다. 남북동, 거잠포, 을왕동, 덕교동 가정 중 문자해독이 가능한 가정만 비밀리에 배포를 마치고 을왕동 늘목에서 거사에 쓸 태극기를 밤새 만든다.을왕리 늘목 23세 유웅렬의 집 사랑채에는 밤새 불빛이 꺼지지 않았다. 사랑채에서는 30세 이기복 씨와 네 명의 청년들이 시위 당일에 흔들 태극기를 밤새 만들었다. 그렇게 모든 준비는 끝났다.관청리 광장에서 울려 퍼지던 만세! 만세! 만세!을왕리 관청말(현재 용유동복지센터 자리)에는 새벽부터 광목천으로 제작된 대형 태극기가 게양된다. 대나무 죽창에 메달린 태극기는 관청리 광장 중앙에 자랑스럽게 나부꼈다. 38세 오기섭, 24세 구길서가 덕교동 주민을 이끌고 광장으로 갔다. 남북동은 32세 김윤배, 32세 윤치방이 주민을 이끌었다. 주민 150여명은 독립선언식을 거행하며 ‘대한독립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을왕동 35세 이난의와 23세 유웅렬이 많은 주민을 이끌고 합세했다.▲혈성단을 조직한 최봉학혈성단원 조명원, 조종서, 문무현, 최봉학이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며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했다. 시위대들은 북을 치고 주민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용유 전 지역을 돌며 대한독립의 당위성을 알렸다.그후 매년 울리는 “대한독립만세”용유지역 만세운동은 타 지역 만세운동과 달리 기미년 이후 해마다 지속되었다. 용유도는 풍년풍어를 기원하던 도선제를 매해 지내며 만세운동을 이어갔다. 오성산 정상에 설치된 봉화대에 봉화를 올리며 밤새 “대한독립만세”를 외쳐 하늘에 고하고 세계만방에 전했다. 선조의 항일투사 넋을 소중히 잇는 후손역사는 기록되어야 이어질 수 있다. 일본에 항거하다 투옥되고 갖가지 수난을 겪은 용유면 11명의 항일투사의 이야기가 아직도 남아있는 이유는 후손들의 노력 때문이다.▲나수영 전 용유면장(좌), 서병구 3.1운동보존위원회장​(우)​▲나수영 전 용유면장이 모은 사진 뒤에는 당시 함께 한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이 적혀있다.​나수영(91세, 전 용유면장) 어르신은 용유면장을 지냈다. 용유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의 기록을 남기지 않으면 사라질 수 있겠다는 역사의식에서 그는 독립운동을 기리는 비석을 세우기로 마음먹는다. 그가 면장일 당시 각 부락에 연락을 취해 기념비석사업에 협조를 구했다. 1982년 ‘용유면 삼일독립만세기념 공적비 건립 추진위원회’를 만들고 1983년 3월1일 제막식을 목표로 모금활동을 시작했다.“어떤 집은 1.000원도 내고 어떤 집은 250만원도 냈어. 부족한 돈은 내가 땅을 팔아서 댔지. 그런데도 부족한 돈은 비석을 의뢰한 ‘충남석재’사장이 냈지. 땅을 팔아가면서라도 역사적 사실을 남기고 싶었어.”나수영 전 용유면장은 지역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대대손손에게 알리고 싶었단다.​​1983년 3월 28일 용유중학교 교정에서 제막식이 열렸다. 유족가족 대표로 조병국 씨가 참여했다.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했던 조명원, 조종서 씨는 자신의 고택을 시에 기증한 ‘조병수 가옥’으로 유명한 조 씨 집안이다.) 사비를 털어 기금을 조성한 나수영 전 면장, 후대 면장인 김대열 씨, 부족한 돈을 받지 않고 비석을 세워준 백완기 충남석재 사장도 제막식에 참여해 자리를 빛냈다. 만세운동이 있었던 관청리 광장에 비석을 세우고, 바로 옆 용유중학교 교정에서 제막식을 했다.그후 추모비석은 지대가 낮아 장마 때마다 비석은 물에 잠기는 수모를 겪는다. 본체 1기 만 덩그러니 있던 그곳에 2017년 9월 12일 비석 1기가 더 추가 건립되고 추모공간이 새롭게 태어났다. 추모벽을 설치하고 화강석 계단을 설치하고 기념비와 추모비의 위치도 변경했다.▲왼쪽부터 서병구 3.1운동 보존위원회장, 나수영 전 면장, 이광만 영종1동 주민자치위원장​​“사람들은 왜 노인회에서 자비를 내가면서 그렇게 항일운동기념에 신경을 쓰냐고 묻지. 우리 용유 노인들은, 내 생전에 지역의 역사적 사건을 알리고 후세에게 항일운동 정신을 알리고 싶은 마음뿐이야. 지역에 대한 애향심, 그게 있어야 지역이 발전하고 귀한 인물들이 나올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거야.” 나수영 전 면장의 뒤를 이어 ‘3.1운동 보존위원회’ 회장을 역임 중인 서병구 노인회장은 말한다.요즘 젊은이들은 나이든 기성세대를 ‘꼰대’라며 무시한다. 그러나 노인들은 젊은 세대들에게 잊어서는 안 될 정신을 잇기 위해 사비를 털어가며, 잠을 설쳐가며 동분서주하고 있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이현주 I-view기자 o700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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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19.02.25 (월)
  • 개발의 그늘에 숨죽이다 생기 넘치는 마을로

    [인천 이야기] 개발의 그늘에 숨죽이다 생기 넘치는 마을로

    ​만부마을, 도시재생 뉴딜사업으로 재생(再生)에 탄력1972년, 인천의 철거민 이주 정착지로 조성된 인천시 남동구 만수동 1번지 일원에 위치한 만부마을은 열악한 주거환경과 물리적, 사회적으로 어려운 상태였다.낙후된 환경 탓에 집값은 저렴해 가난한 철거민과 이주민들이 주먹구구식으로 집을 짓고 이곳에 안착했다. 가난한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공동체를 이루어 빠듯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서로 내어줌과 채워줌을 나누던 시절이 있었다.세월이 흘러 경제력이 좋아진 사람들은 마을을 떠나기 시작했고 개발이 비켜가 방치된 풍경이 마을을 더욱 황량하게 만들었다.​▲1972년 도시개발과정에서 철거민 이주로 형성된 만부마을은 세월이 흐르며 열악한 주거환경으로 인해 물리적, 사회적 쇠퇴가 심각해졌다.​마을의 말을 듣다현 정부가 주요 정책으로 내세우고 있는 ‘도시재생 뉴딜사업’은 주거복지 실현과 도시 경쟁력 향상, 사회통합, 일자리 창출을 목표로 하는데, 인천시도 원도심 균형발전이 주요 정책 중 하나다. 개발에 소외되었던 만부마을은 지난 2018년 인천도시공사에서 추진하는 ‘생동감(생기 있는 동네 만들기 감동 프로젝트)마을’ 3호로 선정돼 펜스와 주차장 구역 개선, 마을게시판을 설치하여 도시재생의 초석을 다졌다.​▲​‘만부마을 커뮤니티센터’로 활용하던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도시재생 뉴딜사업의 거점이 될 '만부마을 도시재생지원센터'를 개소하였다.​ 같은 해 하반기, ‘도시재생 뉴딜사업’에 ‘우리동네살리기’ 사업 유형으로 ‘만滿(주민이 만족하는 집) 수守(삶의 문화를 함께 지키는 이웃) 무無(근심걱정 없는 생활) 강康(자연친화적이고 건강한 환경) 만부마을’로 선정되어 개발이 진행됐다.“2018년부터 2020년까지 3년 동안 지원을 받게 되는데, 현대식으로 뒤엎는 신도시 개발이 아닌 기존 자원을 활용하여 더 나은 환경을 조성하려는 취지예요. 마을에 현재 664가구 1200여 명이 거주하고 있어요. 평균연령이 70~80대인 노쇠한 마을이죠. 그나마도 빌라가 들어서면서 젊은층이 들어왔지만 마을 활동에 나서는 사람은 없어요. 마을 발전을 위해 마을에 대해 세심하게 알고 있는 주민이 중추적인 역할을 맡아야하는데 마땅한 인력이 없어 결국 제가 7년 동안 주민대표로 활동하고 있어요.”만부마을 주민협의체 양순식 대표는 지난 2018년 10월 26일 마을축제와 함께 출범을 알린 ‘만부마을 도시재생지원센터’ 주요 업무를 돕고 있다. 센터장은 신중진 성균관대 건축학과 교수가 맡았다. 센터는 ‘만부마을 커뮤니티센터’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도시재생 뉴딜사업의 거점으로 이용하고 있다.▲7년 째 만부마을 개발에 전력을 쏟는 만부마을 주민협의체 양순식 대표​만부마을 도시재생 뉴딜사업의 주요 계획은 아래와 같다.마을변화에 대응 가능한 인프라 구축, 취약계층 주거 지원, 커뮤니티 형성, 거주환경의 편의성 향상 커뮤니티 형성 등 네 가지 전략을 세워 ▲공영주차장, 주민공동이용시설, 생활가로, 안전마을 골목길 조성 ▲영구임대주택, 행복주택, 게스트하우스 설립 및 집수리 지원 ▲사랑방, 창업인큐베이팅 개설 ▲만부마을 도시재생지원센터 운영을 통한 역량 강화 등 지속적으로 실현가능한 세부적인 사업을 구상하고 있다. 주민이 주인되는 만부마을유익한 정책이라도 주민들의 자발적 참여와 협조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관(官)의 물리적 지원도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이에 만부마을 주민들은 주민 중심의 마을 협치 체계 구축을 위한 자생 주민조직을 설립하고자 지속적인 교육을 받으며 주민이 주인이 되는 공동체 중심 협력관계망을 형성하고 있다. “탄탄한 마을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주민들의 참여와 역량이 갖춰져야 해요. 체계적인 관리를 위해 마을을 열네 개 구역으로 나누어 구역별 장(長)을 선출했어요. 구역장들과 일주일에 1회 회의를 개최해 구역별 이야기를 나누고, 뉴딜사업 진행 경과에 대하여 보고를 해요. 주민이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주민회의를 작년까지만 해도 매주 진행했는데 환경적인 이유로 현재는 월례회로 개최하여 누구나 참석해 의견을 내고 궁금한 건 묻고, 들을 수 있도록 열어두고 있어요. 지원금으로 마을을 정비하는 일이기에 간혹 의혹과 불만을 품는 주민도 있는데 월례회나 주민 역량강화 교육, 소규모 취미활동 모임에 참석한 주민들은 절대 불만이 없어요. 제가 월급을 받거나, 지원금을 잘못 사용하고 있을까봐 구청에 문의하는 분도 계셨는데 이러한 잡음이 부담돼 월급은커녕 활동비 일절 받지 않아요. 오히려 사비를 들이면 들였지 말이에요.”​​▲2018년 인천도시공사에서 추진하는 ‘생동감(생기 있는 동네 만들기 감동 프로젝트)마을’ 3호로 선정돼 펜스와 주차장 구역 개선, 마을게시판을 설치하여 도시재생의 초석을 다졌다.​ 마을은 공동체를 이루는 상생의 공간으로 존중과 협동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주민 간의 갈등만 고조되게 된다. 양순식 대표는 개발을 두고 반대하는 입장 또한 존중하므로 억울한 입장에 처해도 대화를 통해 오해를 풀고 주민 간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꾸준히 배워 주민들과 나누려 한다.“주민들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서는 개개인의 마인드 개선이 중요해요. 마을의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주민을 단련시키는 과정과 자립심을 키우는 역량강화 교육이 이루어져야 해요. 마을에서 도시재생대학을 운영하며 기초과정, 중간과정, 심화과정 교육을 제공해요. 교육을 마치면 마을활동가로 활동할 수 있고, 본인이 습득한 내용을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죠. 그동안 마을 개발사업을 추진하면서 사람이 변화되는 게 보여요. 주민 스스로가 변하다보니 마을 전체에 활기가 넘쳐요. 전부가 변화되길 바라는 건 욕심이지만, 꾸준히 전달하고 ‘함께’를 유도하면 자연스럽게 참여율이 높아지며 삶이 윤택해질 거라 믿어요.”​ ▲​주민의 역량을 키우고 단합을 위해 도시재생대학 운영을 비롯하여 바리스타, 꽃차 만들기, 천연염색, 바느질, 캘리그라피 교육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취미를 공유하기도 한다. (만부마을 제공)​  ​▲​​도시재생만부마을주민협의체 - 글을 지어 캘리그라피로 작품을 만들어 센터의 한쪽 벽면을 장식해놓았다.​​  만부마을 주민들은 만부마을 도시재생지원센터 개소 이후 매월 1회 마을소식지를 발간하여 서로의 안부를 나누고 있다. 또한 바리스타, 꽃차 만들기, 천연염색, 바느질 교육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취미를 공유하고, 마을사업으로 벌어들인 수익금으로 노인들에게 끼니를 제공하는 선행을 펼쳐 훈훈한 감동을 선사했다.“지원이 끝나도 마을의 지속가능한 자생적 기반 구축을 위해 ‘만부마을 마을관리협동조합’을 준비해왔고 곧 인가를 받을 예정이에요. 사회적 협동조합 체제로 운영하여 일자리 창출과 마을의 자립심을 강화시켜나가는 것이 목표예요. 그동안 만부마을이 개발에서 소외되며 사람들의 인식에 부정적인 측면이 많았는데 그러한 인식이 사업을 진행하며 서서히 희석되어 가고 있어요. 앞으로 더 많은 콘텐츠를 만들어 재미있는 마을, 가고 싶은 마을로 조성하고 싶은 바람입니다. 주민들이 노력하면 이루어지지 않을까요.”주민 중심, 주민 주도의 만부마을이 특화된 장소성을 발현시켜 도시재생 뉴딜사업 전형으로 서 자리매김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글·사진 이수인 I-View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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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19.02.25 (월)
  • 독립운동가 ‘유완무, 심영택, 심혁성’ 아시나요?

    [그때 그 시절] 독립운동가 ‘유완무, 심영택, 심혁성’ 아시나요?

    ​숨어있는 서구이야기 ④​ 인천 서구 항일독립운동가 인천광역시 서구는 서해안을 면하고 있어 과거 여러 개의 섬이 있었고, 복잡한 해안선을 따라 갯벌과 바닷물이 드나들었습니다. 하지만 간척사업, 경인고속도로 개통, 발전소 건립 등 빠른 속도로 산업화가 진행되었습니다. 다만 변치 않는 것은, 사라져버린 섬과 바다 위에도 새로운 마을이 생겨났고, 여전히 서구 사람들은 함께 어울려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선사시대 검단 고인돌부터 고려의 경서동 녹청자 가마터, 500여년 신현동을 지켜온 회화나무와 같은 서구 지역 곳곳에 숨어있는 보물 같은 이야기를 담아 전하고자 합니다.​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3·1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에서 일어난 최초의 대규모 민족독립운동으로 근대민족주의 운동의 시작으로도 평가된다.인천 서구지역에도 역시 대한독립을 위한 외침이 있었다. 1919년 3월 22일 마전리(현재 검단지역)에서 300여 명의 대규모 독립운동 시위가 있었고, 3월 24일에는 황어장에서 인천지역 최대의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나이·성별·계급·종교의 칸막이를 넘어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러한 3·1운동을 계승하여 국가의 대표 기구로 수립되었다. 국권 상실의 시기였음에도 조직적인 항일독립운동을 지휘했으며, 민주공화정을 정치체제로 확립하여 현재 대한민국의 뿌리가 되었다.대한민국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두 사건을 기념하고, 일제의 폭압적인 통치 속에서도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이어갔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인천 서구의 항일독립운동가들을 만나보자.유완무, 인천감리서에 수감된 김구의 탈출을 도모하고만주·러시아에서 독립운동과 국권회복을 위한 교육사업을 전개하다유완무(柳完茂; 1861~1909)는 지금의 인천 서구 시천동(당시 부평부 모월곶면 시천리) 진주 유씨 가문 출신이다. 시천리(始川里)는 ‘시내가 시작된 곳’이라는 뜻으로 옛말로는 ‘시시내’라고 불렸다. 시시내 진주 유씨 문중은 인천 서구의 명문가 중 하나로, 심남 유희진, 검여 유희강 등의 인물을 배출하기도 했다. 2014년 출간된 <서구사>에 수록된 진주 유씨 후손의 구술에 따르면 문중에서는 유완무를 ‘북간도 할아버지’,‘북간도 대부’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는 유완무가 일가를 데리고 북간도로 이주하여 독립운동을 이어갔기 때문이다.▲‘북여요선’ 서문 필사본(1903)​북간도 이주 전에는 치하포 사건으로 인천감리서에 수감 된 김구(당시 김창수)를 구출하기 위해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김구의 자력 탈출로 구출 작전은 실행하지 못했지만, 곧 두 사람은 한성에서 만나게 된다. 유완무는 김창수라는 이름 대신, 김구(金龜)라는 이름과 연하(蓮下)라는 호와 연상(蓮上)이라는 자를 지어주었다고 전한다.유완무는 북간도로 거점을 옮긴 이후에도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김노규가 집필한 간도의 영유권 및 한·청 국경문제를 다룬 책인 <북여요선> 간행을 돕고 직접 서문을 작성하기도 했다. 이 책의 서문을 통해 그의 민족의식과 국토의식을 확인할 수 있다.또한 만주와 러시아 일대에 독립운동 근거지를 개척했으며, 특히 블라디보스크에서 해외 최초 한글 신문인 <해조신문> 발행을 위해 장지연을 주필로 영입하기도 하였다. 이밖에도 국민교육기관 설립을 준비하는 등 국권회복운동에 힘썼다.2009년에 만주·러시아에서의 독립운동 공훈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심영택, 주비단(籌備團)을 결성하여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지원하다심영택(沈永澤; 1869~1949)은 인천 서구 당하동(당시 김포군 검단면 당하리) 광명마을 출신이다. 당하리는 당(堂)이 있는 마을인 원당 아래에 위치하여 붙은 이름이라고 하며, 광명마을은 제림산에서 비가 갠 뒤 마을을 바라보면 아침 햇살이 유난히 밝아 ‘광명(光明)’이라 불렸다는 설이 전해진다. 이밖에도 ‘괭맹이, 광메이, 텃골’ 등으로 불렸다.▲심영택 회갑 사진 및 건국훈장 애족장 - 서구사편찬위원회, ‘서구사-下’-심오섭 님심영택은 1920년 이규승·장응규·여준현 등과 서울 경신학교에서 주비단(籌備團)을 조직하고 초대 사령장을 맡았다. 주비단은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의 지속적인 전개를 위해 만들어진 비밀결사단체로, 독립군자금을 모집해 임시정부에 지원하고 독립을 위한 선전 활동을 했다.이후 임시정부가 발간하는 ‘독립신문’의 연길 지국장을 맡기도 했으며 해방 이후 1945년에 조직된 광복회에도 가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995년에 항일독립운동 공훈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심혁성, 황어장에서 군중을 이끌고 태극기를 휘두르며 만세 외쳐심혁성(沈爀誠; 1888~1958)은 인천 서구 오류동(당시 부천군 계양면 오류리) 출신이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천부는 축소되고 부평부와 인천의 일부가 통합되어 각 부의 한자씩 따서 부천군(副川郡)이라 이름 짓게 된 것이다. 따라서 심혁성의 본적지로 알려진 부천군은 본래 부평부이다. 독립만세운동이 펼쳐진 황어장은 ‘여지도서’에 따르면, 부평부 황어면에 속한다. 황어면에는 둑실리, 목상일, 역동, 간산리, 오류동, 이화촌, 노오지리, 선주지리, 장기리 등 9개의 동을 관할했다. 현재 인천 서구과 계양구 일부를 포괄하는 넓은 지역임을 알 수 있다.▲심혁성 서대문 형무소 수형 당시 사진 - 국사편찬위원회,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심혁성은 전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황어장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했다. 1919년 3월 24일 오후 2시경 황어장에서 300~600여 명의 군중을 규합하여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이끌었다. 하지만 심혁성이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는 과정에서 민중들의 저항이 있었고 곧 일본 경찰의 가혹한 탄압으로 이어졌다.이로 인해 부상자와 사망자가 속출하였다. 하지만 항의 시위와 만세운동은 사그라지지 않고 면사무소 습격 등으로 전개됐다. 이후 3월 28일에는 오류동에서 주민들이 만세운동을 벌이는 등 인근 지역에도 영향을 주었다.1990년에 3·1운동에 헌신한 공훈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100년 전 그날의 뜨거운 함성과 독립을 향한 희망으로 지금 우리는 그들이 꿈꾸던 자유로운 세상을 살고 있다. 온 겨레가 하나가 된 대한독립만세의 외침과 독립을 위해 모진 삶을 선택한 이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는 한 해가 되길 기원한다.이윤혜 인천서구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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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19.02.27 (수)
  • 3월 9일부터 택시 기본요금 3800 원

    [동네방네] 3월 9일부터 택시 기본요금 3800 원

    ​서비스 강화, 불법택시 신고 포상금제 강화인천 택시 기본요금이 다음달 9일부터 3천원에서 3천800원으로 인상된다.인천시는 다음 달 9일 오전 4시부터 일반 중형택시의 기본요금은 800원(17.8%) 오른 3천800원, 모범·대형 택시의 기본요금은 1천500원(11.2%) 오른 6천500원이 적용된다고 밝혔다.중형택시 거리요금은 100원당 144m에서 135m로, 시간 요금은 100원당 35초에서 33초로 조정됐다. 대형·모범택시 거리요금은 200원당 164m에서 151m로, 시간 요금은 200원당 39초에서 36초로 바뀌었다.시는 앞서 열린 택시정책위원회와 물가대책위원회에서 택시운임·요율 조정안을 심의한 결과 새 요금체제를 결정했다. 인천 택시 기본요금 인상은 2013년 12월 2천400원에서 3천원으로 인상된 뒤 5년여만이다.시는 요금이 대폭 오른 만큼 택시 서비스를 개선하기 위해 택시 서비스 개선방안을 담은 ‘씽씽 스마일 택시’ 정책을 향후 2년간 시행한다. 교통 민원 대상으로 지목된 법인·개인택시에 페널티를 주고 친절 택시에는 인센티브를 줘 교통 불편 신고를 줄인다.택시 경영서비스를 평가해 불친절 기사나 낮은 평가를 받은 업체에는 벌점을 부과하는 등의 시스템도 마련한다. 승차 거부나 부당 요금으로 3차례 단속된 택시는 퇴출하는 삼진아웃제나 불법 택시 신고 포상금제도 강화할 계획이다.택시 기사 처우 개선을 위해 올해 1월 28일 체결한 택시 노·사 상생협약서 준수 여부도 지속해서 모니터링한다. 협약에는 요금 인상 후 6개월간 납입 기준금 동결과 종사자 처우 개선 등의 내용이 담겼다.다음 달 9일부터 15일 동안 택시 1만4천여대의 미터기 수리와 주행 검사를 마쳐야 해 미터기에 따른 인상 요금 적용은 24일부터 가능할 것으로 시는 내다봤다.인천시 관계자는 "그전까지는 미터기 요금과 별도의 환산표에 따라 인상 요금을 정산해야 해 당분간 승객들의 불편이 있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조정 전·후 요금 안내구 분중형택시모범·대형택시현 행변 경현 행변 경기본요금(중형:2㎞,모범:3㎞)​3,000원​3,800원​5,000원​6,500원​이후 거리요금144m/100원135m/100원164m/200원​151m/200원​이후 시간요금35초/100원​33초/100원​39초/200원​36초/200원​심야 할증(00:00~04:00)​20%​20%​- - 시계외 할증20%​30%​- - 인상율(%)​-​17.80%​-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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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19.02.25 (월)
  • 원조 '팜므 파탈'로 스크린 누볐던  ‘도금봉’

    [외고 · 칼럼] 원조 '팜므 파탈'로 스크린 누볐던 ‘도금봉’

    ​‘대중일보’​ 다시 볼까? ⑧ 악극단 신천지와 항도극장 ‘대중일보’는 1945년 10월 7일 인천에서 창간되었고 한국전쟁의 발발로 1950년 6월 폐간된 신문으로 해방 직후 서울을 제외한 수도권지역에서 가장 먼저 창간된 한국어신문이다. ‘대중일보’에 대한 인천과 학계의 관심은 지대하지만 이러한 관심이 일부에 머물러서는 안 될 것이다. 자료가 중요한 것은 가장 오래되었다거나 다른 곳에 없어서가 아니라 그 자체를 보고 읽고 참고하고 생각하는 근간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여 그 첫 걸음으로 그간 잘 알려져 있지 않던 재미있고 인상적인 ‘대중일보’의 기사를 골라 다시 읽어보며 해방기의 시선으로 오늘의 인천을 생각하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악극단 신천지의 공연광고, ‘대중일보’, 1950.3.30.개항 이후 인천의 극장사 또는 공연문화가 대단했었다는 사실은 상식이다. 인천이 배출한 탁월한 배우, 연기자도 적지 않아 상당한 탐색과 조명도 있었다. 그러나 인지도에 비해 연구가 적은 배우가 ‘도금봉’이다. 도금봉(1930~2009)은 인천 출신으로 본명은 정옥순(鄭玉順)이고 해방 후 잠깐 동안 지일화(池一華)라는 예명을 쓰기도 했다. 간도 용정의 광명여중을 나왔다니 청소년 시기에는 이역에서 성장했고 해방 즈음에 귀국한 것으로 판단된다. 해방 후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악극단  대도회, 청춘부대, 창공, 신천지 등에서 활약했다고 한다. 특히 1948년 만들어진 악극단 청춘부대의 대표작은 지금도 제목만은 널리 회자되는 <나그네 설움>이다. <나그네 설움>은 청춘부대를 만든 이인근과 양석천의 합작 작품으로 한 남자가 일찍 집을 나가 광산에서 폭파사고를 당하여 차마 알아볼 수 없는 모습으로 돌아와 자녀를 만난다는 내용이다. 이때 지일화는 딸 역을 맡아서 주목할 만한 열연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악극단 신천지는 활동상이 그다지 남아있지 않지만 지일화가 신천지에서 활동했다는 회고만은 분명하다. 1950년 항도극장에는 악극단 신천지의 남실 작·연출, 성파 곡의 <누구의 죄냐>라는 작품과 ‘칠보부자 서울왔다’라는 2명의 캐릭터가 등장하는 이원철 구성의 코미디쇼를 공연하였다. 남실은 연출가로서 <춘향전> 등을 연출했으며 납북되었다는 회고가 남아있다. 음악을 맡은 성파와 코미디 구성을 담당한 이원철은 악극단 청춘부대에도 결합해 있었으니 복잡하지만 가까운 친분을 중심으로 이합집산을 계속하던 당시 극계의 관행을 감안할 때, 지일화도 무관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악극단 신천지의 일원으로 인천을 방문했을지는 알 수 없지만 도금봉과 유관한 극단의 이름을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반가운 일이다.지일화가 어떻게 도금봉으로 변화해 갔는가에 대해서는 그다지 추적할 수 있는 자료가 많지 않다. 다만 1957년에 조긍하 감독의 영화 <황진이>에서 주연을 맡으면서 도금봉으로 이름을 바꾸는데 황진이가 살았던 송도에서 ‘도(都)’를 가야금을 잘 탔다는 황진이의 예술에서 ‘금(琴)’을 가져왔고 영화계에 우뚝 선 봉우리가 되라는 뜻에서 ‘봉(峰)’을 넣은 것이라고 한다. 아름다우면서도 재능있고 매혹적인 ‘황진이’의 성격은 도금봉의 영화캐릭터와 깊은 연관을 맺으며 발전해 간다. 청순하고 정숙한 여성을 주동인물로 설정하고 주로 이에 반응하고 관심을 갖던 극계의 분위기 때문에 도금봉의 개성적인 역할과 연기는 대략 ‘요부’ 정도로 주변화되기도 했었지만 여배우로서 확고한 자기철학 없이는 해내기 어려운 다양하고 폭넓은 연기력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도금봉은 인지도나 출연작, 출신지로 환원되지 않는 예술가로서 새로이 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영화 데뷔 무렵의 도금봉, 신상옥 감독, 영화 <동심초>(1959)에서항도극장이 정확히 언제 개관했는가는 알 수 없다. 다만 1949년까지 대중일보에서 확인할 수 있는 극장은 애관, 인영, 문화관, 동방 정도였다. 항도극장은 1950년에 들어서면서 1월 1일 대규모 광고를 게재하였고 2월부터는 여러 극장과 나란히 상시적으로 공연정보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강남악극단, 건영클럽악극단, 신태양악극단 등 주로 악극 공연을 중심으로 공연되었고 황금좌 제2부라는 부칭을 붙인 동방예술좌의 <황진이>가 2월 17일부터 공연된다는 광고를 제법 크게 싣더니 18일과 19일에는 대규모 삽화광고까지 등장했다. ▲배복순 주연의 연극 <황진이>의 광고, ‘대중일보’, 1950.2.19.극장 분야의 후발주자로서 항도극장의 의욕적인 마케팅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실제로 이 시기의 극장광고를 살펴보면 보통 이미지광고는 영화가 국한되어 있었으나 이후 애관, 문화관 등 연극 공연에서도 삽화광고가 늘어난 것을 알 수 있다. 항도극장은 1957년 인천중앙장로교회에 매각되어 사라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윤진현(문학박사, 인문학연구실 오만가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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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19.02.27 (수)
  • 고령화 대비 '노인이 행복한' 인천 만든다

    [동네방네] 고령화 대비 '노인이 행복한' 인천 만든다

    ​기초연금 인상, 일자리급여 현실화 추진인천시가 올해 노인 분야 예산을 지난해보다 26% 증액된 9,277억2천만원으로 늘리고, 어르신이 다양한 사회활동을 하고 경제적 어려움 없이 행복한 노후를 보낼 수 있도록 지원 정책을 대폭 확대한다.​​▲실버 바리스타 등 인천시의 액티브 시니어​인천의 노인인구는 지난 해 기준 362,675명으로 이는 전체 인구(2,954,642명)의 12.3%인 수준으로, 인천은 특·광역시중 울산 다음으로 젊은 도시에 속한다.하지만 전체 인구의 14%를 차지하는 베이붐 세대(55년생~63년생)가 65세로 진입하는 2020년부터 인천시도 고령사회의 모습을 갖추게 되어 이에 대한 대비책이 필요하다.​※ 노인 인구 비율 전국(평균) : 14.8%※ 특·광역시 : 울산(10.7%) < 인천(12.3%) < 대전(12.7%) < 광주(12.8%) < 서울(14.4%) < 부산(17.1%) < 대구(14.7%)​ 이에, 시는 금년도 최우선 과제로 고령사회 대응을 위한 정책개발과 노인문제에 대한 선제적 대응을 위해 작년 12월부터 금년 7월말까지 ‘인천시 고령사회 대응을 위한 중장기 계획’을 수립 중에 있으며, 맞춤형 노인복지를 신속하게 추진하기 위해 조례 개정 및 계획 수립을 지난해 완료하고 올해 본격적으로 사업에 나선다.특히 어르신의 삶이 행복한 인천, 소외없이 누리는 맞춤형 노인복지와 걱정없는 노후를 위하여 시는 올해 기초연금을 인상하고, 사물인터넷 기반 어르신 안심안부서비스, 노인일자리 급여현실화 등의 사업을 새롭게 추진한다.▲​인천시 노인일자리 사업 - 워킹스쿨버스(좌), 북스타트 활동가(우)​​소득하위 어르신 대상 기초연금 인상 먼저, 기초연금 지급액을 올해 4월부터 기존 월 최대 25만원에서 소득하위 20% 어르신을 대상으로 월 최대 30만원으로 인상해 낮은 노후 소득으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어르신들을 우선 대상으로 복지를 확대한다. 이로 인해 약 7만 여명의 어르신이 혜택을 누릴 것으로 기대된다.아울러, 주민센터와 국민연금공단에서 신청을 받던 기초연금 신청을 복지로(www.bokjiro.go.kr)에 온라인으로 신청할 수 있도록 서비스를 확대하고, 기초연금 수급대상 어르신들의 이동통신요금이 지난해 7월부터 최대 1만1천원 감면 시행되고 있는 사실도 노인들에게 알렸다.사회서비스형 노인 일자리 급여 현실화올해 시는 노인일자리 창출 및 사회활동 지원사업을 통해 노인일자리를 전년 목표 대비 5,400여개 늘어난 32,719개 창출할 계획이다. 이에 투입될 총 사업비는 920억원으로 전년대비 203억원이 늘어나 역대 가장 큰 폭으로 증액됐다.▲​인천시 노인일자리사업 - 중구 ‘현미랑콩이랑’​​ 쌀과자 쇼핑백 작업장(영종)​특히 올해 처음으로 노인일자리 급여 현실화 추진사업의 일환으로 월 59만원과 주휴 및 월차수당을 별도로 지급하는 사회 서비스형 일자리를 신설하여 어르신들의 실질적 소득보충을 위한 노인일자리를 제공한다. 올해 시범사업으로 1,009개 일자리를 시작으로 매년 점차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사물인터넷(IoT) 기술기반 ‘어르신 안심안부서비스’시는 또 복지사각지대에 놓인 홀몸 어르신 돌봄을 위해 금년 상반기 중에 총 8,600명 어르신을 대상으로 쌍방향 영상통화와 온도·습도·동작 감지가 가능한 사물인터넷(IoT) 기술기반 어르신 안심안부서비스 사업을 시행할 계획이다.▲​​노인의 날 최장수 어르신에 장수지팡이 선물 - 120세 이화례 할머니(1899년생)이 서비스는 어르신의 움직임을 실시간 감지하고 위급 상황 발생시 119 통화 연결 시 어르신 주소가 자동 전송되는 동시에 독거노인돌보미(생활관리사)에게 119호출 문자가 전송되고, 어르신들이 일정시간 움직임이 없을 경우 경고 알림 문자 전송이 되는 등 바야흐로 IoT 어르신 안심안부서비스 구축체계를 갖추게 된다.안심안부서비스 사업을 통해 고독사 예방, 안전 확보, 말벗(독거노인돌보미) 제공으로 소외감과 우울감을 해소하는 등 노인의 삶의 질 개선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건강하고 활력있는 삶을 위한 노인복지관 개관어르신의 교양·취미생활 및 사회활동 참여 지원 등을 위하여 검단노인복지관(2019년 4월)과 강화군노인문화센터(2019년 6월) 2개소를 개관하여 어르신들의 건강하고 활력 있는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인프라를 확충하고, 노인 여가활동 지원 서비스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노인대학 활성화에도 주력할 계획이다.▲​노인종합문화회관 어르신 작품발표회 및 전시회 (2018.12.20​)또한, 미추홀구 관교 노인복지관과 서구 원당동 구립경로당 2개소를 금년 1월에 착공하여 2020년에 개관될 수 있도록 속도를 내고 있다.인천 시립요양원 건립 및 ‘효(孝)드림 복지카드’ 추진시는 또한 급속한 인구 고령화로 인한 치매, 중풍 등 중증 질환으로 고통받는 어르신들에게 편리하고 좋은 환경의 장기요양 서비스를 제공하고자 인천 도림동 일대에 지상 3층(건축면적 983㎡, 연면적 2,714㎡)의 ‘인천 시립요양원’을 건립한다.  이를 위하여, 시는 현재까지 공유재산관리계획승인(2018. 10월)을 거쳐 오는 3월에 지방재정투자심사를 앞두고 있으며, 2020년까지 총사업비 약 78억 원을 투입하여 140인 시설(요양 100인, 주야간 40인)이 건립될 수 있도록 박차를 가하고 있다.아울러 내년부터 75세 이상 저소득 어르신들의 삶의 질 개선을 위해 전국 최초로 시행되는 ‘효(孝) 드림 복지카드’를 제공하기 위해 현재 관련 조례 근거 마련에 전념을 다하고 있다. 이는 75세 이상 국민기초생활 수급자와 차상위자를 대상으로 매년 3만 명 이상의 연로한 소외계층이 도움을 받을 것으로 예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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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19.02.27 (수)
  • 1980년대 고급승용차 시장을 휩쓸다

    [외고 · 칼럼] 1980년대 고급승용차 시장을 휩쓸다

    ​인천, 자동차의 시작 ④​ GM과 대우 미군이 폐차한 자동차를 고쳐타던 우리나라가 세계 6위의 완성차 생산국이 되기까지, 그 시작은 인천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수 차례 주인이 바뀌긴 했지만, 인천에 본사를 두고 있는 자동차회사가 있고, 인천에서 만들어진 자동차와 부품들이 전세계로 수출되고 있는 인천은 명실상부한 자동차산업의 도시다. 대한민국 자동차 산업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천의 흔적들을 소개해본다.   <편집자주> ​대한민국 자동차 시장을 석권했던 신진자동차의 몰락은 인천 자동차 산업에 있어 크나큰 변화를 불러왔다. 1970년대 인천 자동차 회사가 수 차례 이름이 바뀌게 되는 혼란이 그것이다.자고 일어나면 회사가 바뀌어 있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였다.신진자동차주식회사로 70년대 첫 시작을 열었던 인천지역 자동차회사는 2년 뒤 토요타의 기술협력이 일방적으로 끊어지며 GM과 손을 잡고 GM코리아로 바뀌었다.하지만 이 역시 판매부진으로 인한 경영난으로 한국 측 지분이 산업은행에 인수됐고, 76년 새한자동차라는 이름으로 다시금 개명을 한다.신진에서 GM코리아 그리고 새한까지.10년이면 강산이 한 번 바뀐다고 하지만 그 시간, 인천지역 자동차 회사는 3차례가 그 주인과 이름이 바뀌며 일대 혼란을 겪었다.그러던 1978년, 대우그룹이 산업은행의 한국 지분 50%를 인수하며 자동차산업에 뛰어들면서 본격적인 인천자동차 첫 부흥기의 시작, 대우자동차시대가 시작됐다.​▲1978년 산업은행으로부터 한국측 지분 50%를 인수한 대우그룹은 5년여의 협상을 거쳐 GM에게 경영권을 가져오는데 성공했다. 1983년 1월, 새한자동차는 대우자동차로 사명을 바꾸고 대우차 시대를 시작했다. [출처 = 네이버옛날신문, 매일경제 1982년 12월 9일자.]​​대우자동차 시대 개막1983년 1월, 회사 이름이 대우자동차로 바뀌고, 대우는 GM으로부터 경영 전반에 대한 주도권을 갖고 왔다.대우는 대우자동차라는 새로운 사명으로 출발함과 동시에 본격적으로 판매 라인업 정비에 나섰다. 50:50의 지분율과 GM으로부터의 핵심부품 도입 등은 같았지만, 대우자동차로 새출발한 인천자동차회사는 이전과 180도 달라지고 있었다.현대 포니에게 빼앗긴 소형차 시장을 되찾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신진자동차 시절부터 구축해 놓은 고급승용차 시장은 GM코리아 시절에도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대우는 GM코리아 시절 출시된 고급승용차 레코드를 주목했다. 레코드는 고급차 시장을 평정했던 신진 크라운 후속으로 출시돼 독일에서 전량 공수한 부품과 뛰어난 주행성능을 앞세워 고급 승용차 시장에서 새롭게 두각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대우는 소형차 시장보다 고급승용차 시장에 집중하기로 본격적으로 모델 세분화 작업에 돌입, 로얄 시리즈를 내놓는다. 이른바 80년대 고급승용차 시장을 주름잡고, 하나의 왕조라고 불렸던 ‘로얄’ 시리즈의 시작이다.​▲80대 고급브랜드의 시작, 대우 로얄 시리즈. 대우 로얄시리즈는 중형차부터 고급 대형차까지 아우르는 하나의 고급 브랜드였다. [사진 = 로얄 브랜드 최고급 차종 ‘로얄 임페리얼’]​ 고급브랜드의 시작, 로얄대우자동차의 로얄 시리즈는 하나의 차종이 아닌 중형차부터 고급 대형 승용차까지 하나의 브랜드화시킨 일종의 고급차 브랜드에 가까웠다.현대자동차의 고급브랜드인 ‘제네시스’ G시리즈와 같은 맥락이다.GM코리아 시절 첫 출시됐던 ‘레코드’는 같은 해 데뷔한 소형차 ‘시보레1700’과 달리 시장에 안착해 무난한 판매량을 보였다. 소형차 시장에서의 실패로 전체적인 시장점유율은 현대차에 밀렸지만, 고급 승용차 부분만큼은 어느정도 선방한 셈이다.대우자동차로 회사가 새롭게 출발하면서 ‘레코드’는 그동안의 단순한 라이센스 조립생산을 넘어 고급브랜드로 브랜드화가 시도됐다. 일전까지 ‘레코드 로얄’이던 이름은 ‘로얄(Royal)’이라는 브랜드로 개편됐다.대우자동차 출범 첫 해 5월, 최고급 차량 ‘로얄 살롱’이 출시됐고 다음 달에는 중형차로 ‘로얄 프린스’가 출시됐다. 뒤이어 8월에는 로얄 브랜드의 엔트리카 버전인 ‘로얄XQ’가 출시되는 등 브랜드 라인업을 갖춰나갔다. 엔트리카였던 로얄XQ와 주력 차종인 로얄 프린스, 고급형인 로얄 살롱과 로얄 샬롱 슈퍼 등으로 전열을 가다듬은 로얄 시리즈는 그야말로 1980년대 고급 승용차 시장을 휩쓸게 된다. 1980년대는 대우자동차의 고급차 독점 시대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였다.독일 오펠 등이 개발한 차체와 엔진, 대우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경쟁사의 상품군 등으로 80년대 후반까지 로얄 브랜드는 고급차를 상징하는 하나의 대명사이자, 대우자동차의 눈부신 성장을 상징했다.​ ​실패한 결혼, GM과 인천GM이 신진과의 합작계약을 통해 GM코리아로 한국시장에 진출했을 때부터, GM의 전략은 하나였다. 자신들의 부품을 수입해 한국에서는 단순히 조립생산을 하는 것.신진자동차 시절부터 그랬으니, 당연할 수도 있는 부분이었지만, 문제는 경쟁사들이었다.현대자동차가 자신들만의 고유모델을 개발하고 있었고, 기아자동차 역시 자체 엔진을 개발하는 등 당시 경쟁사들은 기술협력에만 의존하지 않았다.하지만, GM코리아 그리고 후신인 새한자동차에서는 단순한 조립생산과 판매라는 전략이 반복됐다. GM이 파견한 경영진은 한국에서의 부품생산을 통한 완제품, 즉 현지화된 모델을 생산하는 방식을 택하지 않았다.여기에 GM은 해마다 75만 달러의 경영지도료와 매출액의 3%에 해당하는 로열티를 꼬박꼬박 거둬들이며 자신들의 잇속 챙기기에 급급했다. 경영난으로 76년 산업은행 관리대상기업으로 전락해 회사명이 새한으로 바뀐 뒤에도 GM은 현지화에 큰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모든 의사결정이 GM이 파견된 경영진에 의해 이뤄졌기 때문이다.1978년, 대우그룹은 산업은행의 지분을 인수해 자동차산업에 뛰어들지만 GM과 맺은 합작계약으로 인해 경영 참여에서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대우가 본격적으로 경영 전면에 나선 것은 지분 인수 5년 뒤인 1982년 12월에서나 가능했다.자동차합작투자 계약이 수정되면서 1983년 1월, 새한자동차는 ‘대우자동차주식회사’로 이름이 바뀌며 대우자동차시대 개막을 알렸다.문제는 대우차는 회사 이름은 대우였지만, GM의 부품을 수입해 조립, 판매하는 전략만 계속할 수밖에 없는 종속회사였을 뿐이라는 비판이다.새로운 회사로 출범한 뒤에도 고유모델이나 독자엔진은 여전히 전무했기 때문이다.합작파트너인 GM이 대우의 기술개발을 사사건건 반대해 제대로 된 핵심부품과 차종 개발이 이뤄지지 않았다.이후 1992년, 대우가 GM이 갖고 있던 지분 50%을 완전히 인수할 때까지 기술개발을 둘러싼 GM과 대우의 대립은 계속됐고, 이는 두 회사의 결별 후에도 대우에게 독자노선을 위한 기술개발에 있어 경쟁사보다 뒤처지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GM과 인천의 첫 결혼은 그렇게 실패로 끝이 났다.​ 글 김상우 자유기고가, theexod@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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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19.02.25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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