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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천의 개항 - 창문 너머, 시간 속으로

    [인천 이야기] 인천의 개항 - 창문 너머, 시간 속으로

    ​인천개항 136주년 개항의 창(窓)​문(門)은 사적인 공간과 바깥세상을 잇는 통로다. 문으로는 사람과 물건이 드나들고, 창(窓)으로는 공기와 햇빛이 넘나든다. 그 사이로 시간도 흐른다. 문은 그 시대의 역사와 삶의 이야기를 거울처럼 비춘다. 시간의 층이 켜켜이 쌓인 개항장 일대를 걷다 보면, 자꾸만 창문 쪽을 올려다보게 된다. 사라져가는 옛 풍경을 만나는 것이 반가워서, 오래되고 낡은 창문 너머에 누가 살까 궁금해서, 굳게 닫힌 창 안에 어떤 사연이 잠들어 있을까 상상하느라.​ ​​▲대불호텔 전시관에서 바라보는 개항장. 개항장 일대, 창을 통해 바라보는 세상은 끝없이 열려 있다. 그 너머로 긴긴 시간을 가로지르면, 내일 새로운 역사에 닿는다.​​1883년 2월 8일, 제물포항이 열리면서 세상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신문물이 쏟아지고 파란 눈의 사람들과 중국인, 일본인이 몰려들었다. 힘으로 밀어붙인 개항이었다. 바다 건너온 사람들이 산 좋고 물 좋은 응봉산 자락에 터를 잡으면서, 조선인들은 배다리 주변으로 떠밀려야 했다. 그들 나라 양식의 건축물이 이 땅에 세워졌다. 일제 강점기 이후에는 일본식과 일본 의양풍(儀洋風) 건축물이 여기저기 솟아났다. 그렇게 조용하던 바닷가 마을은 ‘그들만의 세상’이 됐다.​​개항장 거리를 걷다 보면 1899년에 지은 ‘옛 일본 제1은행 인천지점(현 인천개항박물관)’을 만난다. 차가운 쇠창살이 박힌 창문 너머로 지난 시간을 떠올린다. 이곳은 이 일대 ‘옛 일본 제18은행 인천지점(현 근대건축전시관)’ ‘옛 일본 제58은행 인천지점(현 중구외식업지부 건물)’과 함께 조선의 경제를 쥐락펴락했다. 이들 근대 금융기관은 일본 상인들의 상권을 지원하는 업무를 하고, 일본 영사관의 금고 역할을 했다. 본관과 함께 세워진 창고형 금고 건물에는 단단한 장대석을 위아래로 잇댄 작은 창이 나 있다. 쇠창살이 격자로 나 있어 개미 한 마리 빠져나갈 틈도 없어 보인다. 이 철통같은 보안 속에서 우리 것을 빼앗아 그들 탐욕을 채웠으리라. 오늘, 쇠창살 사이로 비추는 햇살이 그날의 상처를 어루만진다.​​ ​▲(좌) 옛 일본우선주식회사(현 인천아트플랫폼 사무소), (우)옛 일본 제1은행 인천지점​.옛 일본우선주식회사는 노란색 타일로 마감됐으나,1888년 건립 당시 적벽돌 건물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옛 일본 제1은행 인천지점은 1899년에 지은 의양풍 건축물로, 화강암을 견고하게 쌓아올린 외벽에 장대석을 대어 창을 냈다. 이들 조적식(組積式) 건축물은 하중을 분산시키기 위해, 수직성을 강조하는 긴 창문을 둔 것이 특징이다.​​​▲옛 일본 제58은행 인천지점 2층 내부. 1층은 현재 중구외식업지부 건물로 쓰이고, 2층은 오랜 세월 비어 있다. 외부 벽체와 기둥, 수직 창 등이 옛 모습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다.​​아프지만, 기억해야 하는 역사다. ‘옛 일본 제58은행 인천지점’은 개항기 근대 건축물 중에서도 옛 창문의 모습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다. 이곳은 1892년 일본 오사카에 본점을 둔 제58은행 인천지점으로 문을 열었다. 프랑스풍의 절충주의 양식의 건축물로 2층 발코니에 채광을 고려한 창인 인 도머(Dormer)가 나 있다. 좁다란 나무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 닫힌 문을 열면, 예상치 못한 풍경이 펼쳐진다. 정면을 중심으로 좌우에 3개씩 난 수직 창으로 햇살이 가득 쏟아진다. 이 창문 너머로 변함없이, 신록이 돋아나는 아침이 열리고 낙엽 지는 오후가 펼쳐졌을 것이다. 오랜 세월 단절된 공간이지만, 창은 여전히 바깥세상과 소통하고 있었다.​​ ▲옛 닛센해운(日鮮海運) 빌딩. 장식주의적 요소와 모더니즘적 요소가 결합된, 1930년대 근대건축 양식이 인상적이다.​​건축물은 흘러간 시간을 기억하게 한다. 건물을 지은 자재로 그 시대의 환경을 헤아리고, 축조 기술로 그 시절의 문화와 사회상을 떠올릴 수 있다. 1930년대 개항장에는 ‘옛 닛센해운(日鮮海運) 빌딩(현 선광미술관)’과 같은 대형 건물이 세워졌다. 1932년경 지은 것으로, 인천에 남아 있는 4층 규모의 유일한 근대건축물이다. 철근과 콘크리트 등 상당히 비싼 재료로 수직으로 쌓아올렸는데, 이는 이 일대가 경제의 중심지로 땅값이 높았을 것이라 추측하게 한다. 이 건축물의 가장 큰 특징은 장식주의적 요소와 모더니즘적 요소의 결합이다. 초기 개항기 건축물에서 볼 수 있던 고전주의적 성향의 1층 문과 규칙적으로 네모반듯하게 난 2, 3, 4층의 창문이 대비를 이루며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개항장 일대, 창을 통해 바라보는 세상은 끝없이 열려 있다. 닫힌 문일지라도 그 너머 긴긴 시간을 가로지르면, 내일 새로운 역사에 닿는다. 저마다 시간을 품은 창이 건네는 이야기에 가만히 귀 기울인다. ‘아픈 역사를 뒤로하고, 내일을 열어가는 건 우리의 몫’이라고 속삭이는 듯하다.​​▲(좌) 옛 공화춘(현 짜장면 박물관)짜장면을 처음 판매한 중국요릿집 공화춘. 1층에 4개, 2층에 8개의 창문이 있는데, 1층 출입문과 창호에는 결원아치를, 2층 창문에는 평아치를 두었다.(가운데) 옛 인천부청사(현 중구청)대표적인 모더니즘 건축물로, 수평의 긴 띠창, 커튼월(Curtain Wall) 기법의 유리창 등에서 모더니즘 양식이 강하게 표현됐다. 사진은 정문 옆에 난 원형 창으로, ‘옥스아이(Ox Eye)’라고도 불린다.(우) 옛 청국영사관 회의청1910년 세운 건축물로 1970년대 이후 40년 넘게 비어 있다, 최근 문화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주출입문은 6개의 접이문이며, 좌우측에 각각 3개의 창문이 달렸다. 붉은 창문살이 아름답다.​원고출처 : 인천시 시정소식지 <굿모닝인천> http://goodmorning.incheon.go.kr/index.do굿모닝인천 모바일북 http://www.mgoodmorningincheon.co.kr/글 정경숙 굿모닝인천 편집장│사진 류창현 포토디렉터│도움말 손장원 인천재능대학교 실내건축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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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19.02.08 (금)
  • 기사식당, 그 맛의 기록

    [인천 맛] 기사식당, 그 맛의 기록

    ​테이스티 로드 기사식당 탐미록맛집을 속속들이 꿰고 있는 기사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곳. 돼지불백, 된장찌개… 특별할 것 없는 메뉴들이 ‘기사식당’이란 이름과 만나면 기대감이 배가 된다.개성으로 양념하고 정성으로 차려내는 맛의 기록, 인천 기사식당 탐미록.골목기사식당당황하지 않는 손님은 단골 인증. 자리 잡고 앉는 순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푸짐한 한 상이 차려진다. 매일 바뀌는 ‘오늘의 메뉴’는 딱 하나. 제철 맞은 재료와 그날그날 날씨 등을 고려한 베테랑 주인장의 선택은 늘 옳다. 미역국과 해장국, 각종 찌개 등 집밥의 정성과 푸근함을 맛볼 수 있는 곳.○ 영업시간   오전 7시~오후 7시 30분○ ​주 메뉴    매일 바뀐다. 1인당 5,000원  ○ ​주소   미추홀구 인주대로 305-5청학기사식당두툼한 생선살 야무지게 발라 흰 쌀밥 위에 올려 한입 크게 먹는 맛이란. 국민 생선 고등어, 삼치, 갈치를 부담 없는 가격에 맛볼 수 있다. 주인장 특제 소스에 듬뿍 찍어 먹는 생돈가스는 계절을 가리지 않고 팔리는 효자 메뉴. 공깃밥 하나를 통째로 얹어주는 통 큰 인심은 덤이다.○ ​영업시간  오전 5시~오후 10시 ○ ​주 메뉴  생돈가스·생선 구이 7,500원 ○ ​주소   연수구 용담로 46○ ​문의   032-812-0057복개천기사식당복개천에 있어 이름도 복개천기사식당. 메뉴도 맛도 가게 이름만큼이나 정직하고 정갈하다. 질 좋은 돼지고기에 갖은 양념 두루 볶아내는 제육볶음은 가게의 대표 메뉴. 상추에 싸서 먹지 않고 고기와 함께 밥에 비벼 먹는 것이 이색적이다. ‘싸고 배부르고 맛있게’가 이 집만의 영업 전략.○ ​영업시간   오전 8시 30분~오후 11시○ ​주 메뉴   제육볶음 7,000원, 순두부찌개·된장찌개 5,000원○ ​주소   부평구 평천로 146-1벌말기사부페자리에 앉기 전 밥값 먼저 계산하면 그때부터 시작이다. 제육볶음, 닭볶음탕, 뼈해장국, 삼계탕 등 요일별로 달라지는 메인 메뉴만도 푸짐한데, 갖가지 사이드 메뉴와 밑반찬, 후식까지 눈치 볼 것 없이 한번에 OK. 인천과 서울, 김포를 아우르는 위치 덕에 찾는 이들도 메뉴만큼이나 다양한 곳에서 온다.○ ​영업시간   오전 9시~오후 8시○ ​주 메뉴   뷔페 1인당 7,000원   ○ ​주소   계양구 벌말로573번길 3○ ​문의   032-543-4050 황허장기사식당메뉴에 대한 선입견을 깨부순 중국 음식 전문 기사식당. 짜장면과 짬뽕은 기본, 새우를 주재료로 한 다양한 메뉴를 맛볼 수 있다. ‘불맛’ 나는 소스와 쫄깃한 면발, 아삭한 오이가 환상적인 궁합을 이루는 짜장면이 최고 인기 메뉴. ‘회전’이 중요한 기사식당인 탓에 탕수육과 같은 요리 메뉴는 없다.○ ​영업시간   오전 10시~오후 10시○ ​주 메뉴   짜장면 4,000원, 짬뽕 5,000원○ ​주소   동구 동산로 28○ ​문의   032-777-0820원고출처 : 인천시 시정소식지 <굿모닝인천> http://goodmorning.incheon.go.kr/index.do굿모닝인천 모바일북 http://www.mgoodmorningincheon.co.kr/사진 최준근 자유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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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19.02.07 (목)
  • 골목 공방에서, 삶을 연주하다

    [탐방] 골목 공방에서, 삶을 연주하다

    ​사람과 공간 ② 문병식 현악 공방공간은 곧 사람을 의미한다. 숨 쉬고 머무는 자리마다 살아온 시간과 삶을 대하는 태도, 생각이 스며든다.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의 ‘아주 사적인 공간’에 들어가, 그 안에 숨겨진 또 다른 인천을 본다. 그 두 번째로, 계산동 상가 골목에 있는 문병식(50) 현악기장의 공방을 찾았다. 그가 처음 나무를 만져 악기를 만든 건, 30여 년 전 도시 변두리의 공장에서다.▲동고동락하는 고양이 깨순이, 깨미와 함께.그의 음악에 귀 기울이는 청중들이 있는, 행복한 연주회.​공장에서 골목까지계산동 상가 골목, 불빛이 부옇게 번지는 창 너머로 한 남자가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다. 그 흔한 간판도 없다. 문을 열고 들어가 나무 먼지를 뒤집어쓰고 천장에 매달린 악기들을 보고 나서야, 이곳이 현악기 제작 공방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우아한 클래식 음악의 진원지치고는 안타까울 만큼 좁고 누추하다. 작업 테이블 하나로 꽉 차는 13㎡의 공간. 벽면에는 주인조차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공구가 빼곡히 채워져 있다. 문턱 하나를 넘으니, 악기 원자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나무를 다루는 기계가 곳곳에 있다. 생명력 없이 쌓여 있는 나무판이 한 사람의 손길을 거쳐, 악기로 소리로 다시 태어난다니 그저 놀랍다.문병식(50) 현악기장은 30여 년 긴 세월 나무를 만지며 살아왔다. 그간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지나고 보니 아득히 먼 일처럼 느껴진다. 그가 만든 악기를 품에 안고 행복해 하던 사람들 덕에 고생이 낙이 된 시간이었다.열일곱 고등학교 시절, 기술 시간에 서툰 솜씨로 처음 만돌린을 완성했다. 형편이 여의치 않아 현악이라곤 들어본 적도 없지만, 우아한 곡선이 흐르는 몸체에서 나오는 악기 소리에 마음을 빼앗겼다. 학교를 졸업하고 그는 먹고살 길을 찾아 인천으로 왔다. ‘바이올린 제작자 구함’. 어느 날 골목 담벼락에 붙은 구인 광고가 시선에 들어왔다. 그렇게 악기를 만드는 삶이 운명처럼 시작됐다. ‘진짜 소리’를 찾는 여정목재를 들여오는 항만을 품은 인천은, 일찍이 삼익악기와 영창악기 등 대형 악기업체들이 자리 잡으면서 악기 산업이 발달했다. 한 작은 공장에 들어가 바이올린 몰드를 만드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해 뜨기 전부터 저물기까지 나무를 자르고 깎고 붙이는 일을 했다. 선배들에게 맞아가면서 꿋꿋이 기술을 배웠지만 성에 안 찼다. 미국에서 들어온 바이올린 제작 원서를 구해 그림만 보고 따라 하다, 학창 시절 영어 선생님을 찾아가 우리말로 번역하며 어렵사리 공부했다.그의 거친 손이 바이올린 몸체를 다듬느라 분주하다. ‘포항으로 보낼 자식’이라고 했다. 가격과 상관없이 아이를 낳는 심정으로 모든 악기를 만든다. “악기는 거짓말을 안 합니다.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따라 소리가 달라지지요. 누군가에게 마지막 악기가 될 수 있다는 심정으로 모든 공정에 혼신의 힘을 쏟습니다.”오로지 사람의 손으로 나무를 깎고 다듬고 조립해 소리를 완성하는 일이다. 하면 할수록 알면 알수록 어렵다. “생에 처음 악기를 완성하고,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때는 제가 너무 교만했습니다.” 악기 제작 주문이 들어오는 순간부터, 자고 나면 머리가 하얗게 셀 만큼 힘든 과정이 이어진다. 30여 년 경력 현악기장의 ‘진짜 소리’를 찾는 여정은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악기는 거짓말을 안 합니다.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따라 소리가 달라지지요. 30여 년 경력 현악기장의 ‘진짜 소리’를 찾는 여정은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누군가의 삶을 연주하는 일골목 어귀 작고 초라한 공방이지만, 여기까지 오기 결코 쉽지 않았다. 1990년대 초반 그는 다니던 공장을 그만두고 경인교대 앞에 6㎡짜리 지하 공방을 처음 열었다. 서울 낙원상가에서 나무판을 사다 악기로 만들어 팔았는데, 솜씨가 좋다고 소문나면서 찾는 사람이 늘었다. 그러다 1997년 대한민국에 불어닥친 IMF 외환위기에 휩쓸렸다. 중국으로 건너가 4년간 악기 기술자로 밤낮으로 일하고 다시 한국으로 왔다. 작전동에서 165㎡ 2층 규모에 실용음악 학원까지 갖춘 번듯한 악기점을 냈다. 좋은 시절은 길지 않았다. “바다는 메워도 사람의 욕심은 못 채운다”라고 했다. 사업을 무리하게 확장하다 결국 부도를 맞았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세상 풍파에 쫓기다 여기 안착했어요. 비로소 제 집으로 온 것 같습니다. 비록 세를 내고 있지만, 언제든 나를 품어주는 공간이잖아요.”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는 집보다 여기서 먹고 자고 하는 일이 더 많다. 이 안에선 몸이 고되도 마음은 편하다.​“내가 만든 악기로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면….”그 언젠가 누군가의 삶을 아름답게 연주할 악기가, 그의 손에서 만들어진다.​콧대 높은 클래식 음악계에서 공장 출신이라는 이력으로, 그는 외롭고 고단한 길을 걸어왔다. 하지만 힘들었던 일보다 그래도 뿌듯했던 기억이 더 많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힘들었던 한 여대생은 그가 수리비만 받고 만들어 준 악기로 꿈을 이뤄 음악 선생님이 됐다. 한 여중생은 그가 건네준 악기로 예고, 예대에 들어가 현악기의 본고장인 이탈리아 크레모나(Cremona)에서 현악기 제작자의 길을 걷고 있다.“제가 만든 악기로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면, 이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가요.” 나무 먼지가 부유하는 공방 천장에는 주인을 찾는 악기들이 도열해 있다. 그 언젠가 누군가의 삶을 아름답게 연주할 날을 기다리는….원고출처 : 인천시 시정소식지 <굿모닝인천> http://goodmorning.incheon.go.kr/index.do굿모닝인천 모바일북 http://www.mgoodmorningincheon.co.kr/글 정경숙 굿모닝인천 편집장│사진 류창현 포토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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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19.02.07 (목)
  • 길 위의, ‘혼밥’ 한 그릇

    [인천인의 삶] 길 위의, ‘혼밥’ 한 그릇

    ​우리 이웃 기사식당 이야기기사식당, 길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배고픔과 고단함을 달래는 곳. 안마, 세차 등 그들만의 ‘우대’ 서비스가 있던 시절도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식당의 풍경도 바뀌어, 이제 삼삼오오 모여 정겹게 식사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가족을 위해 ‘혼밥(혼자 먹는 밥)’ 하는 우리 아버지들이 있다. ▲때론 뜨끈한 밥 한 그릇이, 오늘도 열심히 살아갈 힘을 준다.24시간 열린 식당택시 기사가 분주한 도심 한가운데를 달려 기사식당에 들어선다. 해가 중천에 걸리고 나서야 겨우 먹는 첫 끼. 뜨끈한 밥 한 그릇이 오늘도 살아갈 힘을 준다. 부평구 십정동 십정사거리 근처에  있는 ‘까치기사식당’은 간판을 내건 지 30여 년 됐다. 이 일대는 일명 십정동 기사식당 촌으로 불렸다. 택시 기사는 물론이고 수인산업도로를 따라 인천과 수원을 오가는 대형 화물차 기사들이 자주 찾았다. 20년 전까지만 해도 기사식당이 10여 곳 넘게 몰려 있었다.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이곳 하나만 남았다.정경래(50) 씨는 어머니 한재숙(78) 어르신과 함께 20년째 식당을 꾸려가고 있다. 외삼촌이 운영하던 9㎡ 남짓한 작은 가게를 물려받아 145㎡ 2층 규모로 키웠다. 그동안 수많은 기사들이 이 안에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랬다. 24시간 교대로 근무하는 기사들을 위해, 기사식당의 문도 24시간 열어놓았다.어머니는 거리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건강을 위해, 영양가 높은 굴로 음식을 만들었다. 기사들에게 시간은 곧 돈이다. 요리 시간이 오래 걸리는 뚝배기 대신 철판에 볶아내는 요리법을 개발했다. 칼칼하게 입안에 착 감기는 감칠맛도 그만이다. 그 맛이 그리워, 이미 오래전 운전대를 놓은 사람들도 여전히 이 집을 드나든다.​▲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의 한 끼를 위해, 어머니는 오늘도 어제처럼 묵묵히 밥 짓고​ 음식을 만든다.​휴게소이자 사랑방기사에게 기사식당은 단순히 밥집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들에게 이곳은 몇 시간 거리를 달려온 지친 몸을 뉘는 휴게소이자 동료들과 어울리는 사랑방이다. 15년 전에는 이 식당 한편에 운전대를 놓고 잠시 눈을 붙일 수 있는 온돌방이 있었다. 피로를 풀어주는 안마기가 있고 세차를 해주기도 했다. 지금 기사들을 위한 ‘우대’ 서비스는 밥을 듬뿍 퍼주고 식사 값을 깎아주는 정도다. 식당의 풍경도 많이 바뀌었다. 혼자 오는 사람보다 삼삼오오 모여 정겹게 식사하는 사람이 더 많다. 맛집을 속속들이 꿰고 있는 기사들에게 인정받은 식당이라고 소문나면서 일반 손님의 발걸음도 늘었다. 기사들도 단골 기사식당을 찾아다닐 만큼 여유롭지 않다.​“택시가 너무 많아져 벌이가 예전 같지 않다고들 하세요. 먹고살아야 하니 몸 생각 안 하고 운전대를 잡는 분들이 많아요. 하루 300km 이상, 인천에서 부산 못 미치는 거리를 매일 달리는 분도 있어요. 얼마나 힘들겠어요.” 외삼촌이 주인이던 시절부터 식당에 드나들던 정경래 씨는 형, 아버지뻘의 기사들이 남 같지 않다.홍재창(54) 씨는 스물여섯 살부터 택시 운전대를 잡았다. 1990년대 초반 포니 택시로 시작해 회사 차를 16년, 개인택시를 12년 몰았다. 기본요금이 750원이던 때, 하루 네다섯 시간 정도 달려도 사납금을 거뜬히 채울 수 있었다. 열심히만 하면 먹고살 만한 시절이었다. 지금은 대중교통수단이 좋아지고 경쟁이 심해져서, 회사 택시 기사들이 사납금만 빠근히 채우는 날이 수두룩하다. “돈을 벌기 위해 교대 없이 하루 종일 일하는 기사들을 많이 봤어요. 건강이 나빠지고 병으로 저 세상으로 간 동료들의 소식을 접할 때면 마음이 무겁습니다.”​아버지, 다시 길을 나서다 한 칸짜리 택시 안이 생활의 터전인 사람들. 인천에만 택시 기사는 1만4,000여 명이다. 저마다 가장이라는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운전대를 잡는 사람들이다. 기사식당은 그들이 잠시나마 시동을 끄고 한숨 돌릴 수 있는 곳이다. 그 안에서 따듯한 한 끼 식사로 든든히 속을 채우고 지친 하루를 위로받는다. “이제야 철이 들었어요. 일을 더 해야 했어. 난 빵점짜리 아빠예요.”​▲택시 기사 홍재창 씨. 가족을 위해 ‘혼밥’ 하는 아버지. 삶의 무게를 짊어진 그의 뒷모습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홍 씨는 초등학교 5학년, 중학교 3학년 두 딸을 둔 아버지다. 사정이 어려워져서 10년 탄 개인택시를 팔고 회사 택시를 몰던 때가 있었다. 보증금 300만원에 30만원짜리 월세에 살다 다시 일어났다. 그때부터 술 담배를 끊고 좋아하던 축구 심판 일도 멀리했다. ‘운동장에 있던 시간에 운전대를 잡았더라면 지금 가족이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열심히 일한 자신을 위한 작은 즐거움조차 사치라며, 아버지는 자책한다.홀로 밥을 먹던 택시 기사가 기운을 차리고 다시 길을 나선다. 또 어느 길로 달려갈 것인가. 고단함이 묻어나는 그의 뒷모습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삶의 한가운데를 달리는 사람의 또 다른 한 끼를 위해, 기사식당의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인다.​​<까치기사식당>부평구 백범로 526Ⓣ 032-426-0613원고출처 : 인천시 시정소식지 <굿모닝인천> http://goodmorning.incheon.go.kr/index.do굿모닝인천 모바일북 http://www.mgoodmorningincheon.co.kr/글 정경숙 굿모닝인천 편집장│사진 류창현 포토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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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19.02.07 (목)
  • 국가대표 수영선수, 수영용품 멀티숍 소상공인으로…

    [인터뷰] 국가대표 수영선수, 수영용품 멀티숍 소상공인으로…

    ​김은경 ‘수영하는 사람들 SDG’ 대표▲‘수영하는 사람들 SDG’ 김은경​ 대표​결혼해 아이 낳고 정신없이 살아오던 어느 날,문득 뒤를 돌아보았어요. 그런데 저만치에 지난날의 은경이가 보이는 겁니다. 물에서 자라고 꿈꾸던 그 은경이가 말이죠.시민 시장 - 김은경“내가 신고 싶은 것보다는 내 발에 꼭 맞는 걸 신어야 해요. 오리발은 옆에서 감싸주는 느낌이 있는 게 좋은 거예요.”인터뷰 도중 손님이 들어오자 반사적으로 일어선 그가 쉴 새 없이 말을 쏟아냈다. 손님을 향한 시선이 겨울 하늘의 별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인천 출신 전 국가대표 수영선수 김은경(44). ‘아시아의 인어’ 최윤희가 ‘뉴델리 아시안 게임’에서 따낸 금메달과 같은 ‘타이기록’을 가진 그는 이제 푸른 물살 대신 세상의 한가운데를 가르고 있었다. 수영용품 전문 매장 대표로, 멋진 여성 기업인을 꿈꾸는 소상공인으로.    ‘수영하는 사람들 SDG’ 대표인 김 씨가 영종도에 매장을 차린 이유는 어려서 시작한 수영인의 꿈을 이어가기 위해서다. “결혼해 아이 낳고 정신없이 살아오던 어느 날, 문득 뒤를 돌아보았어요. 그런데 저만치에 지난날의 은경이가 보이는 겁니다. 물에서 자라고 꿈꾸던 그 은경이가 말이죠.”수영을 처음 접한 것은 신광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체구가 작은 큰딸을 걱정했던 부모님이 그를 학교 수영부에 가입시켰다. 건강을 다지려고 시작한 운동이 국가대표란 타이틀로 이어질 줄은 아무도 몰랐다. 1년 만에 전국 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은경은 6학년이 되면서 최연소 상비군으로 성장한다.승승장구하던 은경에게 시련이 닥친 건 선화여중 2학년이 되던 해였다. 사춘기에 더해 슬럼프가 불쑥 찾아들었다. “메달은 계속 따는데 도무지 기록이 오르질 않는 거예요. 수영 도구를 모두 챙겨 집으로 돌아왔어요. 부모님께 더 이상 물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했지요.” 우리 딸 그동안 많이 힘들었구나. 그래,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렴. 엄마 아빠는 널 믿어. 어린 딸의 선택을 존중하는 부모님을 바라보며 고민하던 은경은 일주일 만에 주섬주섬 수영 가방을 챙겨 들었다.“자유형이던 주 종목을 개인 혼영으로 바꾸고 처음부터 다시 출발했어요.” 맹연습으로 위기를 극복했건만, 인화여고 1학년이 되던 해 은경은 또 하나의 시련에 맞닥뜨린다. 하루도 빠짐없이 딸을 수영장에 데려다주던 아버지가 갑작스레 쓰러진 것이다. “새벽이었어요. 운전하시던 아버지가 브레이크를 밟더니 ‘은경아, 아빠 더 이상은 못 갈 것 같아’ 하시는 거예요.” 그게 끝이었다. 혈압이 있던 아버지는 나흘 뒤 영원한 여행을 떠났다.여기서 주저앉는다면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아빠가 슬퍼할 것이었다. 물속에서 흘린 눈물들이 수면 위를 부유하던 그해 가을, 은경은 마침내 개인 혼영 국가대표로 발탁된다. 이후 선수 생활 동안 270여 개에 이르는 메달을 목에 걸었고 인천시청 소속 선수, 남부교육청 코치 등을 역임하다 2000년 결혼하며 전업주부의 길로 들어선다. 2013년 영종하늘도시에 정착하고 보니 외동아들도 부쩍 자라 있었다. “이제 나만의 길을 찾아야겠구나 생각하던 차였어요. 동네에서 수영 강사를 하고 있었는데 회원들이 수영용품 파는 가게가 없어 불편하다는 얘기를 한 기억이 떠올랐어요.” 말없이 수영인의 삶을 응원해 준 수영용품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것 같았다. 그렇게 운서동에 문을 연 게 ‘수영하는 사람들 SDG’다. 그의 가게엔 고품질이면서 가격이 저렴한 용품들이 즐비하다. 수영 전문가이다 보니 수영용품을 보는 식견이 탁월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고향은 어떤 곳일까.“인천은 글로벌 도시입니다. 개항 이래 나라 안팎에서 오신 많은 분들이 어우러져 살고 있잖아요. 내외국인 모두가 행복한 국제도시를 만드는 데 다 함께 손을 맞잡으면 좋겠습니다.”힘차게 물을 당겼던 그의 손길이 정성스레 수영용품을 매만졌다. 그가 골라주는 수영복을 입으면 왠지 국가대표가 된 기분일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원고출처 : 인천시 시정소식지 <굿모닝인천> http://goodmorning.incheon.go.kr/index.do굿모닝인천 모바일북 http://www.mgoodmorningincheon.co.kr/글·사진 김진국 본지 총괄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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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19.02.07 (목)
  • 술술~ 세계를 사로잡는 전통의 맛

    [그때 그 시절] 술술~ 세계를 사로잡는 전통의 맛

    ​인천의 맛 전통주막걸리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국민 전통주다. 농사일에 지칠 때 한잔, 기쁠 때 한잔, 위로할 때 한잔…. 술지게미를 양식 삼아 어려운 시절을 넘기기도 했던 막걸리는 우리 민족에게는 술,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인천은 전통주의 역사가 깊다. 오랜 전통을 이어가는, 혹은 전통을 새로운 트렌드와 접목해 국제적으로 호평을 받는 술이 있다. 인천을 대표하는 전통주를 찾았다.​우리의 문화 콘텐츠, ‘막걸리’막걸리는 우리나라 각 지역 혹은 집안에서 쉽게 만들어 먹던 술로, 농부들의 갈증을 덜어주는 주류로, 서민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그러던 막걸리가 일제강점기인 1916년 ‘주세령’에 따라 개인이 술을 빚는 것이 금지되는 제한면허제가 시행됐다. 이때부터 집집마다 내려오던 다양한 가양주 문화는 법적인 테두리 속에서 양조장 중심의 술 문화로 바뀌게 됐다.▲온수양조장(옛 금풍양조장)에서는 일 제강점기 ‘금학 약주’라는 상표로 약주를 생산했었다. 당시 주소가 ‘강화도 길 상면 전등사 밑’으로 기재되어 있다.​​광복과 전쟁을 겪은 후 1960년대 우리 국민들은 다시 막걸리를 만들어 먹기 시작했는데, 쌀이 주원료였던 탓에 전후 식량 부족을 우려한 정부는 쌀로 술 빚는 것을 금지하는 양곡법을 시행한다. 이후 경제 성장으로 쌀의 공급에 문제가 없는 상황에 이르러서야 다시 쌀막걸리가 만들어지게 된다. 최근에는 막걸리가 저렴한 가격에 건강과 미용에도 효과가 있다는 점이 부각되면서 젊은 층의 관심을 끌고 있다. 막걸리가 살아 있는 발효 웰빙 음료로 인식되면서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이다. 어느새 막걸리는 단순한 술이 아닌 우리의 문화 콘텐츠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백 년 전통 그대로강화 온수양조장강화도 길상면에 위치한 온수양조장(옛 금풍양조장). 100여 년 된 목조 건물을 그 모습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도 대단하지만, 여전히 한결같은 전통방식으로 술을 빚고 있다는 사실이 더 경이롭다.“정확하게 언제 건물이 지어졌는지 모르지만, 길상초등학교 지을 때라고 들었으니까 아마 1919년쯤? 이 건물은 원래 처음부터 양조장으로 설계된 건물이래요.” 할아버지, 아버지에 이어 아들까지 4대에 걸쳐 온수양조장에서 가업으로 술을 빚고 있다는 주형국(60) 씨는 우리나라의 인삼막걸리가 온수양조장에서 시작된 술이라고 설명한다. “한국전쟁 이후 강화도에 상품 가치 있는 인삼 외에 팔고 남은 파삼이 많았지. 그때는 하도 삼 뿌리가 많아서 집집마다 반찬으로 무쳐 먹었는데, 그런 파삼을 구매해서 막걸리에 넣기 시작한 게 인삼막걸리의 시작이었어요.”그래서 지금도 가루가 아닌 진짜 인삼이 들어간 인삼막걸리를 찾는 사람은 온수양조장에서 생산된 인삼막걸리를 선택한다고. 현재 온수양조장에서는 강화쌀과 살아 있는 효모로 숙성해서 만든 ‘민족생막걸리’와 깔끔하고 깊은 맛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인삼막걸리’, ‘인삼동동주’를 생산하고 있다.​▲지금은 폐쇄된 공간이지만, 양조장 천장에는 옛날에 누룩을 만들던 틀과 술독의 흔적이 남아 있다.​​“예전에는 강화군 내 길상, 불은, 양도, 화도, 선원의 5개 면을 비롯해서 강화 북부 지역까지 하루 6,000ℓ(30드럼)를 공급할 정도로 영업이 활발했지요. 지금은 인력도 많이 줄고, 유통도 쉽지 않아 강화 인근에서만 주로 판매하고 있습니다. 아들 녀석이 뒤를 잇겠다고 해서 같이 운영하고 있는데, 요즘엔 생산기술 좋은 공장들이 많아서 우리같이 작은 규모는 아무래도 힘이 듭니다.”우리의 것을 지킬 수 있을 때까지 정직하게 지켜내겠다는 주 씨의 바람은 온수양조장이 멈추지 않는 것. 부드럽고 쌉싸름한 강화 인삼막걸리에는 그의 마음이 소박하게 담겨 있다.▲주형국 씨의 할아버지 주만석 씨가 사용하던 주정계(알코올 도수 측정계). ‘1923년 주만석’이라고 쓰인 글씨가 남아 있다.​​외국인의 입맛까지 유혹하다2018 대한민국 주류대상 ‘삼양춘’지난해 11월 28일 제6차 OECD 세계포럼 인천의 밤 공식 건배주로 선정된 ‘삼양춘’. 이날 세계인의 눈과 입맛을 사로잡은 삼양춘은 ‘송도향’의 강학모(58) 대표가 10여 년간 연구 끝에 선보인 술이다.강 대표가 처음부터 술 전문가는 아니었다. “금융 공기업 부장으로 있었는데, 스트레스가 너무 심했어요. 천천히 살고 싶다는 생각에 2008년 말 명퇴를 했습니다.”제2의 인생을 시작하면서 그가 선택한 것은 전통주였다. “어릴 적 어머니가 잔치 때마다 술을 빚었던 게 생각났어요. 술 빚는 솜씨가 좋았던 어머니께 지도를 받고 가양주연구소 등 전통주 교육기관의 도움도 받았습니다.”​​삼양춘은 ‘세 번 빚는다’는 의미의 ‘삼양’과 ‘술은 겨울에 빚어서 봄에 마셔야 맛있다’는 의미를 가진 ‘춘’이라는 한자를 조합해 만든 이름이다. 일반적인 술들이 한 번만 빚고 제품화되는 것과는 달리 삼양춘은 제조 과정이 복잡하고 기간도 오래 걸린다. 세 번을 빚고 70~100일 동안 숙성을 거친 프리미엄 발효주이기 때문에 일반 곡주와 달리 뒷맛이 깨끗하다. 원료로 인천 강화섬쌀, 전통 누룩, 물 세 가지만 사용하고 인공 첨가물은 전혀 쓰지 않는다. 이런 노력 끝에 삼양춘 약주는 ‘2018 대한민국 주류대상’에서 ‘베스트 오브 2018’을 수상했고, 삼양춘 탁주는 ‘대상’을 수상했다. 전통적인 방법과 정성으로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겠다는 그의 고집스러움이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쌀과 천연 전통 누룩을 곱게 체로 걸러 팔팔 끓은 물을 부어 수차례 반죽을 한다. 빚은 술은 항아리에서 발효와 저온 숙성의 기간을 거친다.​​​강화 온수양조장○ 위치  강화군 길상면 삼랑성길 8 ○ ​문의  032-937-7712송도향(삼양춘)○ ​위치  남동구 호구포로 50, 819-1호○ ​문의  032-851-8979인천 전통주 인삼동동주·인삼막걸리·민족 생막걸리진짜 인삼이 들어간 인삼막걸리를 찾는다면 온수리양조장에서 생산된 인삼막걸리를 선택해야 한다. 탄산도 적절히 느껴지고, 부담 없는 목 넘김은 그 전통 만큼이나 깊이와 무게감이 느껴진다.​삼양춘투명한 노란빛의 삼양춘 약주의 첫 맛은 달콤하며 끝 맛은 쌉싸름한 매력이 있다. 탁주는 뽀얀 빛깔에 강하지 않은 단맛과 천천히 올라오는 산미가 전체적인 술 맛의 조화를 이룬다.소성주소성은 인천의 옛 이름이다. 소성주는 부평에 있는 인천탁주합동제조장에서 만든다. 인천의 대세 막걸리인 소성주는 천연 탄산이 가득해 상쾌하고 청량하면서도, 부드럽고 담백한 맛이 일품이다.​찬우물막걸리강화 지역에서 유명한 약수인 ‘찬우물’을 사용한다. 지하 303m에서 끌어올린 암반수를 술 재료로 사용하고, 발효제로 누룩 대신 유산균을 사용한다. 청량감이 있고 뒤끝이 깨끗하다.▲찬우물막걸리​​송도‘월향’의 쌀막걸리는 ‘송도’라는 이름을 달았다. 송도 매장 내 소규모 양조장에서 직접 만든 수제 막걸리로, 달달한 맛으로 여성들에게 특히 인기가 많다.원고출처 : 인천시 시정소식지 <굿모닝인천> http://goodmorning.incheon.go.kr/index.do굿모닝인천 모바일북 http://www.mgoodmorningincheon.co.kr/글 김윤경 굿모닝인천 편집위원│사진 최준근 자유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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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19.02.07 (목)
  • 개항 136주년, 인천항의 미래

    [외고 · 칼럼] 개항 136주년, 인천항의 미래

    ​칼럼-인천의 아침 몇 년 전 얘기다. ‘대호’(감독 박훈정)의 개봉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애관극장으로 달려갔다. 조선의 ‘범포수’를 영화는 과연 어떻게 구현했을까. 정말 궁금했다. 단 한 차례만 방아쇠를 당길 수 있는 화승총을 들고 호랑이를 찾아다니는 사내. 그렇게 깊은 산중에서 맞닥뜨린 맹수를 한 발의 총알로 쓰러뜨리지 못하면 자신이 죽어야 하는 운명을 지고 살아가는 ‘호랑이 사냥꾼’을 보고 싶었다. ‘칸 국제영화제’ 취재차 칸(Cannes)에 갔을 때 만났던 배우 최민식의 깊은 눈빛을 해후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역시 연기파 배우였다. 산군(山君)이라 불리는 ‘어마무시’한 호랑이와 대결하는 천만덕(최민식 분)의 눈동자는 ‘올드보이’(감독 박찬욱)의 그것 이상으로 이글거렸다. 자식과 새끼를 지키며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는 인간과 맹수의 목숨을 건 대결이 이야기 얼개였고, 일제가 조선을 삼킨 1925년대가 시대적 배경이었다. 감독이 바라보는 지점과는 별개로 관람 내내 병인양요(1866), 신미양요(1871) 때 외세에 맞서 싸운 범포수를 읽어내려고 애썼다. 문호 개방의 요구가 해일처럼 덮쳐오던 19세기, 온몸으로 외세를 막아낸 범포수들의 그 무섭도록 고독하고 치열한 삶을 말이다. 강화도에서 발발한 두 양요 때 범포수들이 화승총 한 자루로 서양 함대에 맞서 싸울 수 있었던 저력은 호랑이를 때려잡는 용맹함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범포수들의 장렬하고 숭고한 희생이 있었음에도 1883년 2월 8일(음력 1월 1일) 인천은 결국 ‘개항’을 한다.개항은 심각한 국권 침탈과 서구 신문물의 급속한 유입이란 성격을 띠고 있었다. 당시 국제 정세로 볼 때 역사적 필연이기도 했다. 중국은 군사력을 앞세운 영국과의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1842년, 일본은 최신예 함포를 탑재한 군함 구로후네(黑船)를 띄워 위협한 미국에 항복하며 1853년 각각 개항했던 터였다. 인천의 입장에서 개항은 위기이자 기회였다. 한적한 어촌이던 제물포 일대가 개항장으로 변모하며 여러 나라들이 속속 몰려들었고 인천을 나눠먹기 시작했다. 얼핏 보기에 국제 사회처럼 보였지만 인천은 일본 식민지 경영의 교두보였을 뿐이다. 대대로 살아온 생활 터전마저 빼앗겼다. 바닷가 풍광이 아름다운 제물포 일대를 조계지란 이름으로 외국인들이 차지하면서 인천 사람들은 홍예문 밖 동쪽으로 밀려 나가야 했다. 개항 직후 인천 지역 사회 상공업이 번창했다지만 결국 인천 사람들의 토지와 노동력을 수탈한 일본인들만의 잔치였다. 한국사 전반에서 우리나라의 근대화가 ‘인천의 희생’을 담보로 이뤄진 것이란 얘기가 나오는 것은 이런 연유에서다. 반면, 신문물의 급속한 유입과 함께 조선시대 이래 해양을 통한 대외 무역 중심지가 부산에서 인천으로 이동했고, 인천-서울 간 화물 수송이 활발해지며 화물 운송로가 해로에서 육로로 바뀌었다. 개항기, 대한제국을 근대 국가로 전환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주체가 인천항이다. 갑문 축조(1918), 1960년대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추진, 인천내항 도크 확장(1966~1975), 연안부두 축조(1973) 등을 통해 물류를 내보내고 들여오며 인천항은 우리나라 경제에 큰 축을 담당했다. 인천항을 품고 근현대사의 큰 줄기를 도도하게 흘러온 개항의 역사가 오는 2월 8일이면 136주년을 맞는다. 인천 시민과 인천시는 진지하게 고민 중이다. 어떻게 하면 개항장과 인천항을 아름답고 풍요로운 땅으로 만들어갈 수 있을까. 자유공원에 올라 인천항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는다. 겨울 바다가 말을 걸어온다.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게 있습니다. 당신이 지금 발 딛고 사는 땅은 후대로부터 잠시 빌려온 땅이란 사실입니다.’원고출처 : 인천시 시정소식지 <굿모닝인천> http://goodmorning.incheon.go.kr/index.do굿모닝인천 모바일북 http://www.mgoodmorningincheon.co.kr/글·사진 김진국 본지 총괄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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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19.02.07 (목)
  • 자유롭게 교류하고 편리하게 통하도록

    [외고 · 칼럼] 자유롭게 교류하고 편리하게 통하도록

    ​살고 싶은 도시 ② 캐나다 토론토▲캐나다 토론토 - 온타리오호 북쪽 연안에 있는 캐나다 제1의 도시.면적 630㎢​, 인구 약 273만 명우리 시 민선 7기 시정 슬로건은 ‘살고 싶은 도시, 함께 만드는 인천’이다. 거창한 구호 대신 소박하지만 핵심이 담긴 메시지다. 시민 참여로 결정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 있다. 살고 싶은 도시의 기준은 무엇일까? 그 해답을 해외 선진 사례를 통해 알아보는 시간을 마련했다. 그 두 번째는 영국의 정치·경제 분석 기관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이 선정한 ‘2018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TOP 10’에 이름을 올린 캐나다 토론토다. 캐나다를 대표하는 매력 도시캐나다 동남부, 온타리오주에 위치한 토론토는 캐나다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이자 북미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다. 1998년 서로 나뉘어 있던 6개 지역이 합쳐져 현재의 토론토가 됐으며, 도시명은 ‘물속의 숲’ 또는 ‘풍요’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름에 걸맞게 토론토는 비옥한 토지를 바탕으로 예로부터 농업이 발달했고, 근대에 들어 캐나다와 미국 양국에 걸쳐 있는 오대호에 인접한 지형학적 이점을 살려 교역과 제조업 중심으로 발전했다. 최근에는 북미 경제의 중심지이자 금융과 문화·예술, 스포츠 분야, 미디어 산업의 성장으로 세계 글로벌 도시 중 하나로 불리며, 여러 도시 랭킹 조사에서도 살기 좋고 경쟁력 있는 도시 상위권에 꼽힌다.​토론토는 다양한 문화와 인종,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어우러져 엄청난 도시 다양성을 보여주는 매력적인 도시인 동시에, 다양한 박물관과 미술관, 과학관, 영화제와 축제 등 즐길 거리가 많은 신나는 도시다. 실제로 150개 이상의 소수 민족이 100여 개의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등 여러 문화가 조화롭게 융합되어 토론토만의 문화를 창출하고 있다. 경제적 측면에서도 토론토 증권거래소를 중심으로 금융 산업과 IT, 문화 산업이 지역 경제를 선도하고 있다. 범죄율이 낮아 안전한 삶을 누릴 수 있으며 다양한 교육 기관이 위치하고 있고 풍부한 녹지 공간을 통해 아름다운 경관과 편안한 쉼터를 제공받을 수 있다.시민 편의를 우선한 대중교통 시스템토론토가 살기 좋은 가장 큰 이유로는 편리한 대중교통 체계를 들 수 있다. 대중교통 체계를 중심으로 도시 공간이 조성된 친환경적 도시를 ‘트랜짓 시티’라 하는데, 토론토는 이의 대표적인 사례다. 토론토 대중교통 체계는 크게 버스, 지하철, 노면 전차로 나뉜다. 세 가지 시스템 모두 토론토 교통국이 운영을 책임지고 있다. 2018년 현재 4개의 지하철 노선과 69개의 역사, 약 150개의 버스 노선과 11개의 노면 전차 노선이 운영 중이다.​토론토 대중교통의 핵심은 버스로, 시내버스는 매일 24시간 운행되고 지하철이 다니지 않는 심야 시간대에는 이용자의 편리를 위해 낮 시간대와 다른 노선으로도 운행된다. 2013년부터는 굴절버스도 도입되어 운행 중에 있다. 토론토 지하철은 1954년부터 운행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캐나다 최초다. 4개의 지하철 노선은 도시를 동서와 남북으로 가로지르는데, 노선을 따라 20개가 넘는 미술 작품이 설치되어 있어 탑승객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한다. 현재 북미에서 운행 규모가 가장 큰 토론토 노면 전차 시스템의 대부분 노선은 이미 19세기부터 운행됐다. 주로 지하철 노선이 지나가지 않는 시내 구간과 오대호 인근 지역에서 운행되고 있으며, 보통 도로 중앙 차선을 노면 전차가 이용하고 그 옆 차선을 버스와 일반 차량이 이용한다.버스와 전차, 지하철을 자유롭게토론토 대중교통 체계의 가장 큰 장점은 3개의 서로 다른 시스템의 환승 과정에 있다. 대부분의 버스 노선과 노면 전차 노선은 지하철 역사와 연결되어 있어 환승이 매우 편리하다. 또한 토론토를 거쳐 광역권으로 연결되는 온타리오주 대중교통 체계인 ‘GO 트랜짓’ 역시 대부분 역사와 가깝다. 요금 체계에 있어서도 시 경계 내에서는 단일 요금제를 채택하고 있어 환승이 자유로우며, 13세 이하 아이들은 무료로 이용이 가능하다.이외에도 토론토 대중교통 체계가 우수한 이유는 장애인과 노인 등 취약한 승객을 위한 배려에 있다. 버스 대부분이 휠체어와 유모차, 카트 등의 탑승이 가능한 저상버스이고 자전거 거치대도 설치되어 있어 누구나 이용하기 쉽다. 지하철 역사의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에서도 휠체어 이용이 쉽고, 폭이 넓은 지하철 개찰구와 승강장 내 특수 가장자리 마크 표시 등 장애인을 위한 배려가 뛰어나다. 토론토는 2017년 미국 대중교통위원회가 선정하는 북미 최고의 대중교통상을 수상, 그 우수함을 증명했다.▲토론토를 거쳐 광역권으로 연결되는 온타리오주 대중교통 체계인 ‘GO 트랜짓’​​​토론토가 살기 좋은 도시인 이유를 하나로 단정할 수는 없다. 일반적으로 살기 좋은 도시란 일상생활에 있어 교육과 교통, 의료, 복지, 문화, 체육, 보육 등 다양한 사회 서비스가 잘 보급되고, 경제활동과 자아실현의 욕구가 쉽게 이루어지는 도시를 말한다. 토론토는 여러 요인 중에서 특히 다양한 대중교통 체계의 효과적인 운영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등을 통해 시민들에게 삶의 편리함을 제공하고 있다.인천시와 토론토는 최대 규모의 광역권에 속해 있는 대도시이며, 다양한 문화권이 융합되어 있는 도시라는 공통점을 가졌다. 지하철과 버스, 철도 등 인천 시내 대중교통 체계가 효율적인 연결과 지역 내 편리한 환승 시스템을 갖출 경우, 시민들의 생활은 더욱 효율적이고 편리해질 것이다. 동시에 다양한 배경을 가진 약자에 대한 배려가 추가되면 인천시는 살아보고 싶은 도시로, 더욱 매력적인 도시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원고출처 : 인천시 시정소식지 <굿모닝인천> http://goodmorning.incheon.go.kr/index.do굿모닝인천 모바일북 hhttp://www.mgoodmorningincheon.co.kr/글 이진희 국토연구원 책임연구원 │사진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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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19.02.07 (목)
  • 365일 쉬지 않는 등대처럼, 인천 바다는 우리가 지킵니다!

    [인천 이야기] 365일 쉬지 않는 등대처럼, 인천 바다는 우리가 지킵니다!

    ​당신이 잠든 사이에 인항파출소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잠자리에 드는 일상이 아닌, 모두가 잠든 고요한 밤에 오히려 더 치열하게 살아가는 우리 이웃들의 삶이 있다. 그것도 오로지 타인의 안전을 위해 팽팽한 긴장 속에서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인천 바다를 믿음직스럽게 지키는 해양경찰이다. 깊은 밤, 자신보다 이웃의 안전을 위해 현장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인항파출소의 해양경찰관들을 만났다.▲늦은 밤, 자신보다 이웃의 안전을 위해 현장에서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가는 해양경찰들​24시간 잠들지 못하는 해양경찰칠흑같이 어두운 밤, 레이더를 응시하는 눈은 잠시도 쉴 틈이 없다. 하늘과 바다의 구분이 쉽지 않을 만큼 깜깜한 바다 위를 18t급 신형 연안구조정은 빠른 속도로 미끄러져 가며 인천 앞바다를 샅샅이 살핀다. “레이더에 찍히는 물표의 크기와 동선, 이동 속도 등을 보면 어떤 배인지, 어떤 유형인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해양에서 사고가 발생하면 바다의 특성상 인명 피해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늘 긴장해야 합니다.” 선박 하나하나의 움직임에도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해양경찰의 연안구조정은 모두가 잠든 시각에도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늘 긴장 상태다. “야간 항해는 항상 신경 쓰이죠. 큰 배들은 정해진 바닷길로 다니면 되지만, 저희 연안구조정은 상황에 따라 항로를 변경해야 하기 때문에 정박 전까지는 절대로 긴장을 놓을 수 없습니다.” 해양경찰이 밤에도 쉬지 않고 일해야 시민들이 편안하게 잠을 자고, 일상을 이어갈 수 있다는 자부심에 오늘도 어둠 속에서 배를 몰고 있다는 백수현(32) 경장. 연안구조정의 하루는 쉼이 없다.​▲비상 경보등이 울리면 가장 먼저 몸이 반응한다. 야간에 울리는 경보등은 온몸의 세포를 더욱 긴장하게 만든다.​바다의 안전은 우리가 책임진다 팔미도에서 영종대교까지 148㎢를 관할하는 인항파출소는 인천에서도 가장 바쁜 해양경찰 파출소로 통한다. 하루 평균 1,100여 척의 선박이 출입하고, 연간 50만여 명의 행락객들로 각종 안전사고가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인항파출소 직원은 총 33명(해양경찰 29명, 의무경찰 4명). 넓은 해역을 담당하기에는 버거울 때도 있지만, 시민의 안전을 위해 묵묵히 자신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있다.▲실종자 수색은 구조정 밖에서 육안으로 진행해야 더욱 정확하다.​​국민의 안전을 위해 바다를 지키는 해양경찰은 24시간 대기하는 것이 일상이다. 어떤 사건이 발생할지 몰라 교대 근무를 하며 매일 출동을 기다린다. 야간에도 긴장을 늦출 수 없다.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서 신고가 들어오면 무조건 출동하는 해경. 3교대로 연중무휴 근무를 하는 인항파출소는 늘 해상 안전관리에 힘쓰고 있다. 1년 365일 밤새도록 인항파출소의 불은 꺼지는 경우가 없다. 이런 이유로 2017년에는 ‘해양경찰 우수파출소’로 선정되기도 했다.본능에 따라, 위험 속으로 뛰어들다“앗! 불이다.”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이 먼저 반응했다. 몸은 이미 부두에 정박 중인 선박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2018년 7월 23일 오전 8시 40분, 인항파출소 소장 최종대(54) 경감은 연안부두에 정박 중이던 선박 조타실에서 화재가 발생하자 직원들을 이끌고 화재 현장으로 달려갔다. 최 소장은 시커먼 연기와 불꽃이 솟아오르는 선박을 보고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소화 호스를 들고 배에 올라탔다. 이내 조타실 유리창을 깨고 화재를 진압하기 시작했고, 직원들도 최 소장을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많은 배들이 정박되어 있는 곳이라 자칫 큰 화재로 번질 수 있는 아찔한 상황이었지만, 다행히 불은 20분 만에 진화됐다. 최 소장은 이날 화재 진압 과정에서 화상을 입었으나 6명의 소중한 생명을 구해냈다.열아홉 어린 나이에 해양경찰의 길에 들어선 최 소장은 현장 근무에 잔뼈가 굵은 해양경찰 35년의 베테랑으로, 영종도 하늘바다파출소, 연평도파출소를 거쳐 현재 인항파출소 소장을 맡고 있다. “인항파출소가 관할 범위가 넓고 항상 사건·사고의 위험이 높은 지역에 위치해 있지만, 우리 해양경찰은 시민의 안전을 위해 늘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나’보다 ‘남’이 우선인 삶몇 년 전 응급 환자 이송을 위해 경비정을 타고 출동하다가 큰 사고를 당해 8개월 동안 병원 신세를 진 뒤 다시 해경으로 복귀한 전순열(48) 경위. 자신의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해야 하는 상황은 해양경찰로서 늘 직면한 현실이라고 말한다.“위험한 걸 알면서도 뛰어 들어갈 수밖에 없어요. 시민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업무이기 때문에 사고 현장에서 우리가 먼저 조치를 취해야 돼요.”그는 언제, 어떤 사고가 발생할지 모르고 위험한 상황에 노출되기도 하지만 바다를 지키는 일은 해양경찰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양경찰로서 남을 구조하는 일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한다.​ ​▲해경의 출동 시간은 생명과 직결되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신고를 받은 시간부터 배의 시동을 걸고 홋줄을 풀어 출발해 사건 현장에 도착하는 시간까지 수치로 정한 ‘출동시간 및 도착시간 목표관리제’를 시행하고 있다.​​“바다에 관한 이미지를 꼽으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휴양지나 밝은 느낌의 바다를 생각하는데, 저희 해양경찰들은 칠흑같이 어두운 바다를 먼저 떠올립니다. 우리에게 바다는 현실이거든요. 그만큼 바다는 위험한 곳이라는 겁니다.”수상 레저나 바다낚시 활동 시 안전에 대해 소홀히 하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깝다는 김데리사(48) 경위.“구명조끼 착용하시라고, 물때니 갯벌에서 나오시라고 계도해도 ‘나는 괜찮겠지’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안전에 대한 경각심을 인식하고 의식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자부심과 사명감으로 24시간 시민의 안전을 위해 바다를 지키는 해양경찰의 바람은 단 한 가지. 사고가 발생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 바다는 해양경찰이 지키겠습니다’라는 문구가 새삼 가슴에 깊게 남는 밤이다. 원고출처 : 인천시 시정소식지 <굿모닝인천> http://goodmorning.incheon.go.kr/index.do굿모닝인천 모바일북 http://www.mgoodmorningincheon.co.kr/글 김윤경 굿모닝인천 편집위원│사진 최준근 자유사진가

    기간없음
    작성일 2019.02.07 (목)
  • 백령도를 그리다, 삶을 그리다

    [외고 · 칼럼] 백령도를 그리다, 삶을 그리다

    ​내가 사랑하는 인천최정숙은 중구 송월동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인천에 살면서 아버지의 삶이 깃든 백령도를 그리고 있다. ▲푸른 새벽, 백령에서 / 100x40 acrylic누구나 어렸을 때에는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고, 그저 부모에 의해 선택된 운명으로 받아들이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제가 자식을 낳아 어미가 되고 1990년대 초부터 인천에서 지역 문화 운동을 하게 되면서, 자신의 정체성과 인천의 역사 문화를 깊이 사랑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저는 동화마을이 된 중구 송월동에서 태어나 응봉산 만국공원과 차이나타운. 그리고  만석동, 화수동 일대를 코흘리개 동무들과 뛰어다니며 자랐습니다. 어린 시절 걷던 옛길들과 골목 풍경은 아직도 어릴 적 모습으로 꿈속에서 살아납니다. 저의 부모님은 왜 송월동에 둥지를 틀게 되었을까요. 아버지의 고향은 서해 최북단, 북녘 땅이 더 가까운 백령도입니다. 한국전쟁 이후 1953년 정전이 되고 백령도는 황해도 장연군에서 남녘 땅으로 편입되어 섬에서 뭍으로 가는 뱃길이 생겼습니다.▲​북녘 월내도에 별이 /  95x63 acrylic​​▲​백령섬에서 새벽별 / 100x40 acrylic전쟁이 끝나자 이북에서 많은 피란민들이 인천으로 들어와 정착했습니다. 부모님도 자식들의 장래를 위해 1954년에 하인천역 근처 당시 연안부두와 가까운 송월동에 적산 가옥을 마련해 아버지 형제들까지 다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집에는 늘 백령도 친척을 비롯해 사람들로 넘쳐났습니다. 저는 풍랑으로 뱃길이 끊어지면 며칠씩 묵어가는 ‘백령도 최 면장집 셋째 딸’이었습니다.백령도에 처음 갔던 기억이 납니다. 대식구다 보니 어머니가 당시 다섯 살인 저를 백령도 할머니 댁에 잠시 맡겼습니다. 스무 시간 하루 꼬박 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건너가는데 어린 저에게는 그 깜깜하던 밤바다와 짙은 해무가 평생 잊을 수 없는 영상으로 가슴속에 남아 있습니다.  인생과 삶에서는 자기도 알 수 없는 계기가 오나 봅니다. 백령도 두무진을 첫 그림으로 그리면서 백령도를 가슴으로, 그리움으로 그립니다. 어린 시절 칠흑같이 깜깜한 여름밤, 할머니 댁 너른 마당 느티나무 아래 멍석을 펴고 동네 아이들과 누워 있을 때, 밤하늘에 무수히 박혀 있던 별들이 쏟아져 내렸습니다.▲​아버지의 바다 / 45.5x53 oil원고출처 : 인천시 시정소식지 <굿모닝인천> http://goodmorning.incheon.go.kr/index.do굿모닝인천 모바일북 http://www.mgoodmorningincheon.co.kr/글·그림 최정숙 화가·해반문화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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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19.02.07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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