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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울동네 맛고수.19화

    [웹툰 · 갤러리] 울동네 맛고수.1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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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18.05.30 (수)
  • 부평 신촌, ‘알만한 동네’로 불린 이유?

    [외고 · 칼럼] 부평 신촌, ‘알만한 동네’로 불린 이유?

    ​숨어있는 부평이야기 - ‘양공주’에 대한 해명직업의 성격상 부평에서 오랫동안 거주하신 분들을 만나 부평에 옛 이야기를 듣는 일들이 많다. 몇 해 전 부평3동에서 아주머니 한 분을 만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아주머니 고향은 부산이었는데 결혼을 하면서 부평에 올라왔다고 했다. 결혼 전 고향 친구에게 ‘부평 신촌’에 사는 남자와 결혼한다는 이야기를 하자 친구는 ‘알만한 동네’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당시 아주머니는 친구가 말한 ‘알만한 동네’가 무슨 뜻인지 몰랐다고 한다. 결혼 후 시댁에 인사를 드리러 왔더니 골목마다 노란 머리로 염색한 여자들이 미군과 아무렇지 않게 팔짱을 끼고 다니는 모습을 보고 그제야 어떤 의미인지 알았다고 한다.밤이 더 활기찼던 '부평 신촌'부평3동을 사람들은 ‘신촌’이라고 부른다. 언제부터 불러지기 시작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이름에서 유추해 본다면 ‘새롭게 생긴 마을’이라는 뜻일 것이다. 아주머니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신촌’은 기지촌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촌’을 ‘양공주 동네’ 혹은 ‘양색시 동네’라고 부르기도 했다. 미군부대 정문과 마주하고 있었던 탓에 자연스럽게 기지촌이 형성되었을 것이다.‘신촌’은 여러모로 여타 마을과 다른 모습을 보였다. 영어간판을 올린 클럽들이 즐비하였고 밤새 팝음악이 문밖으로 흘러나왔다. 야간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었지만 ‘신촌’은 오히려 밤에 더 활기를 띠었다. 마을에 있는 미용실에는 아침마다 머리손질을 하려는 여성들이 길게 줄을 섰고, 동네 청년들과 미군들의 살벌한 주먹다짐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남녀가 유별했던 시절이었음에도 미군의 팔짱을 끼고 다니는 ‘양공주’의 모습과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들이 골목을 뛰어다니며 노는 모습은 이곳의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아마도 이런 모습으로 인해 아주머니의 친구는 신촌을 ‘알만한 동네’라 했을 것이다. ▲ 부평 '신촌'의 골목 영어로 된 클럽 간판이 눈에 띤다. (사진제공 팀노리스)‘양공주’가 될 수 밖에 없었던...전쟁은 모두에게 아픔을 남기지만 특히 여자와 아이들에게는 더욱 가혹하였다. 전쟁으로 인해 부모와 남편을 잃은 여자들은 하루아침에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되었다. 당시 여성들은 한국사회의 뿌리박힌 남아선호사상에 의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경우가 많았는데 이러한 여성들이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전쟁 직후 극심한 사회혼란으로 남성들도 구직이 어려웠던 판에 여성들은 오죽했을까? 결국 가진 것이라고는 ‘몸뚱어리’ 밖에 없었던 여성들은 스스로 ‘양공주’가 될 수밖에 없었다.​ ​​※ 기지촌 여성의 실태조사(1966년 아시아여성연구소)​ ​​전쟁 후 극심한 혼란 속에서도 여성의 ‘순결’은 여전히 지켜야 할 최고의 가치였으며, 이를 지키지 못한 여성들에 대해서는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의 비난과 멸시가 따랐다. 그리고 그녀들을 바라보는 못마땅한(?) 시선은 50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별반 달라진 것이 없는 듯 하다. ▲ 애스컴 부대로 들어가는 여성들 (부평역사박물관 소장)​​산업전사, 안보전사‘알만한 동네’라는 비아냥을 듣는 ‘신촌’이었지만 그 당시 ‘신촌’은 우리나라에서 달러를 많이 벌어들이는 곳 중 하나였다. 평택과 부산, 동두천, 왜관 등 당시 기지촌이 있었던 곳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국경제가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던 시절 기지촌 경제의 위력은 대단했다.중앙 대학교 이나영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1964년 한국의 외화수입이 1억 달러에 불과하던 시절, 미군 전용 홀에서 벌어들인 돈이 970만 달러에 이른다. 외화수입 총액의 10%에 가까운 금액이다. 달러를 벌어들이기 위해 정부는 기지촌을 육성하기 시작했고 ‘양공주’들은 첨단에 내세워졌다.1964년 정부는 기지촌 클럽 주인들의 모임인 한국관광시설협회의 설립을 허가하였다. 당시 클럽은 미군과 ‘양공주’의 성매매가 이루어지는 주 무대였다. 정부는 클럽에 면세주류를 제공하고 시설자금을 보조하는 등 파격적인 혜택을 줬을 뿐 아니라 업주들에게 해외 기지촌을 견학시켜주기도 했다.‘양공주’들에게는 어떠했는가? 원자재 없이 외화를 벌어들이는 산업전사이자 미군을 붙들어두는 안보전사라며 그대들이야말로 참된 애국자라고 추켜세우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녀들의 현실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정기적으로 성병 검진을 받아야 했는데 이는 그녀들의 건강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미군에게 깨끗하고 안전한 성을 제공하기 위함이었다. 행여 성병에 걸리면 일명 ‘몽키하우스’에 격리 수용되어 고통스런 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반면 성병에 걸린 미군들은 외출금지 등의 어떠한 제제도 없었다. ​​▲ ‘양공주’는 일주일에 두 번 성병검진을 받아야 했다. 검진을 통해 이상이 없으면 확인도장을 찍어주는데이것은 일종의 ‘영업허가증’이나 마찬가지였다.‘양공주’는 미군의 폭력과 학대로 고통 받기도 했다. 1969년 5월 13일 ‘신촌’에서 미군의 학대에 못 이겨 한 여성이 자살을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실을 안 동료 여성들과 ‘신촌’의 마을사람들은 자살한 여성의 상여를 메고 미군부대 정문으로 몰려 가 학대를 한 미군을 내놓으라며 시위를 하였다. 미헌병 50명과 한국 경찰 30명이 출동할 만큼 대규모의 시위였다. (동아일보, 1969.05.14.)‘신촌’에서 미군에 의해 희생된 ‘양공주’의 이야기는 신문기사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산업전사’ ‘안보전사’로 추켜세워졌던 ‘양공주’들은 현실에서는 전혀 대우받지 못한 처참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 부평에 있었던 병원 (부평역사박물관 소장) V.D는 venereal disease의 약자로 성병을 뜻한다.그녀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미국은 닉슨독트린에 따라 1971년 3월 7사단과 3개 공군 전투부대 등 주한미군 6만 2천명 중 2만 여명의 철군을 단행했다. 이에 따라 부평 애스컴 부대의 규모는 대폭 축소되었고 이제 더 이상 ‘신촌’은 ‘양공주 동네’가 아니었다.그 많은 ‘양공주’는 어디로 갔을까? 그리고 그녀들은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2015년 평택의 한 복지단체 도움으로 부평에서 ‘양공주’ 생활을 했던 (이제는 할머니가 된) 여성을 만났다. 할머니의 말에 따르면 부평에서 미군이 철수 한 뒤 ‘양공주’들은 또 다른 기지촌을 찾아 떠났다고 한다. 특히 평택으로 많이 내려왔는데 할머니도 그 때 이곳으로 왔다.할머니는 미군과의 사이에서 아들 한 명을 낳았다. 아이 아빠는 미국으로 돌아가 연락이 두절된 상태였다. 이후 혼자 아이를 키우며 생활하였는데 그리 행복한 시간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경제적인 부분도 어려웠지만 아이 역시 남들과 다른 피부색으로 ‘튀기’라 놀림 받는 등 어려움이 많았다. 중학생이 된 아들이 어느 날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자신을 멀리 입양 보내 달라고 부탁을 했다. 할머니는 가슴이 무너져 내렸지만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도 그것이 나을 것 같은 생각에 받아들이기로 했다.아이는 그렇게 미국으로 갔고 몇 해 전 딱 한 번 할머니를 만나러 왔을 뿐 이후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다만 아주 가끔 밤 12시가 넘어 걸려오는 전화가 있는데 “여보세요”라는 말을 하면 아무 말 없이 끊어버리는 것을 할머니는 아들일 것으로 믿고 있었다.몇 해 전 아들이 한국에 왔을 때 할머니의 전화번호를 건네주며 나중에 이 번호로 전화를 걸었을 때 받지 않으면 엄마가 이 세상에 없는 걸로 알고 있으라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다정해야 할 모자지간인데 이렇듯 슬픈 방법으로 서로의 생사를 확인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양공주’를 하며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하였건만 지금은 남처럼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동생들이 왜 자신을 모른 척하는지 이유를 들은 건 아니지만 누나가 이런 일을 한 것이 가족들한테 부끄러워 그런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다.가족도 없는 할머니는 그나마 이렇게 임대아파트라도 하나 건질 수 있었던 것이 미군 덕분이라 했다. 학교도 다니지 못했던 자신이 무슨 수로 돈을 벌어 집 하나를 장만하겠냐며...나이가 들어 더 이상 ‘양공주’가 될 수 없는 여성들은 생활고와 함께 외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돈을 벌어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졌건만 가족들과 함께하는 ‘양공주’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산업전사라며 혹은 안보전사라며 추켜세웠던 정부는 어떤가? 가장 밑바닥에서 이 사회를 떠받치고 있었던 그녀들은 가족들에게도 정부에게도 외면 받는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대한민국이 ‘양공주’에게 기대어 산 것은 아닐까?이 글을 쓰면서 ‘양공주’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못내 불편했다. 아마도 기지촌 여성들을 직접 만나는 과정에서 절박했던 그들의 상황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2015년에 부평 ‘신촌’을 주제로 한 기획전시를 담당하였는데 이런 불편한 마음은 그 때도 있었다. 그래서 ‘양공주’라는 대신 ‘미군위안부’라는 단어를 선택하였다. 정부문서에도 기지촌 여성을 ‘위안부 여성’이라 지칭하였고, 과거의 신문기사를 통해서도 보편적으로 그녀들을 위안부 여성이라 칭하고 있음을 확인하였기 때문이다.​  ▲ 미군과 ‘양공주’ (부평역사박물관 소장) ‘양공주’에게 성공은 미군과 결혼하여 미국으로 건너가는 것이었다.그것만이 가난과 냉혹한 현실을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전시 개막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무실로 전화가 왔다. ‘미군위안부’라는 단어가 영 거북하다는 민원인의 전화였다. 민원인의 말에 따르면 ‘양공주’들은 스스로 그 길을 선택한 것인데 ‘일본군 위안부’와 같은 선에서 이해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녀들을 향해 단단히 닫혀버린 사회의 문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전술하였듯이 한국정부는 국가의 경제와 안보를 위해 기지촌 운영에 적극 가담하였다. 그녀들을 통해 많은 금액의 달러를 벌었고 미군 주둔에 따른 안보도 보장받았다. ‘양공주’를 통해 직접 돈을 번 것은 아니더라도 당시 대한민국은 그 돈으로 건물을 짓고 도로를 건설하고 비교적 안전한 시간을 보냈으니 대한민국이라는 사회 전체가 ‘양공주’에게 기대어 산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녀들을 ‘양공주’라 부르며 조롱할 자격이 있는가?글· 사진 김정아 부평역사박물관 총괄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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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18.05.28 (월)
  • 폐업한 중국집, 예술반점으로 재탄생

    [탐방] 폐업한 중국집, 예술반점으로 재탄생

    ​길림성의 변신, 이색 문화공간으로 주목서구 가좌동 가재울역 인근에 자리한 예술반점 길림성.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낡고 허름한 외관에 지나가는 누구도 시선을 주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올해 말 철거가 될 예정인 길림성은 이미 공간의 수명(壽命)이 다한 곳이다.40년 넘게 중국집으로 운영됐던 길림성은 철거를 앞두고 지난해 폐업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철거의 손길만을 기다리던 이곳에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낡은 빈 공간에 새로운 예술적 가치들이 채워지면서 이색적인 문화공간으로써 사람들의 눈길을 끌게 됐다. 철거를 앞둔 공간에 한 발 앞서 새 숨을 불어넣은 숨은 주역은 문화기획사 ‘프로젝트 코스모’ 소속의 이종범(27) 문화기획자. 앳된 얼굴에 풋풋한 청춘의 기운이 감도는 그의 첫인상은 길림성이라는 공간의 매력만큼이나 신선했다.​폐업한 중국집, 다시 쓰인 공간의 역사길림성의 내부는 세월의 흔적이 역력했다. 금이 간 벽 위에 군데군데 깨져나간 타일과 벗겨진 페인트가 음침하고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은은한 조명 아래 전시작품으로 채워진 큰 프레임으로 본 내부는 이내 곧 새로운 멋을 자아내는 문화공간으로 다가왔다. “원래의 상태에서 거의 손을 보지 않았어요. 곧 철거될 건물이기 때문에 보수공사에 돈을 쓰는 것이 의미가 없었죠. 크라우드 펀딩으로 마련된 250만원이라는 저비용 안에서 전시나 공연 등을 열 수 있을 정도로만 손을 봤어요.”이쯤 되니 길림성과의 인연이 궁금했다. “소속 회사에서 이 일대의 문화사업을 추진하다가 빈 공간의 길림성을 알게 됐어요. 건물주 분께서 어차피 비워있는 공간이니까 좋은 취지라면 얼마든지 써도 좋다며 공간을 내주셨어요.” 이로써 길림성은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 올 1월 개관한 이래로 현재까지 3번의 전시와 2번의 공연을 열며 이색적인 문화공간으로 주목받고 있다. ▲ 프로젝트 코스모’ 소속의 이종범 문화기획자​“대중적이면서 친숙한 문화공간을 만들고 싶었어요”그가 소속된 회사 ‘프로젝트 코스모’는 가좌동과 인연이 깊은 대표 덕분에 가좌동 일대의 문화사업을 주로 추진하고 있다. “인천에는 문화공간이 아직 부족한 것 같아요. 그중에서도 가좌동은 문화활동을 즐길 수 있는 기회가 특히 없더라고요. 그래서 이곳 일대에 대중적이면서 친숙한 문화공간을 만들고 싶었어요.” 40년 넘게 운영된 길림성을 기억하는 지역주민들에게는 이곳이 더욱 친근하다. 별도의 관람료도 없는 터라 누구나가 오가면서 문화적 여유를 즐길 수 있다.  ​주로 SNS을 통해 홍보를 하는 길림성의 관람객은 젊은 층이 대다수.“SNS를 보고 인천 각지에서 관람객들이 찾아오세요. 길림성을 보시러 서울 잠실에서 일부러 오신 분도 있고요.”그저 비워있는 문화공간일 뿐…그는 길림성을 어떠한 공간이라고 정확히 정의하지 않는다. “길림성은 그저 비워있는 공간일 뿐이에요. 전시든 공연이든 어떠한 문화활동도 벌일 수 있는 열린 공간이죠.” 대관은 재능과 가능성은 충분하지만 아직 기회를 갖지 못한 신진예술가들 이 주된 대상이다. 인천 내 아직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들에게 장르에 제한 없이 자유로운 활동을 벌일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서다.  ​​​문화적 유연성은 그의 기획에서도 자주 눈에 뛴다. 전시 리플릿을 중국집 이쑤시개 통에 담아주기도 하고 작가와의 만남을 가질 때는 다 같이 짜장면을 시켜먹으며 대화를 나눴단다. “귀한 시간을 내주시면서 길림성을 찾아주시는 분들께 천편일률적인 소재보다는 재밌고 색다른 소재로 보답하고 싶어요. 길림성이 그저 비워있는 공간이듯이 부담없이 찾아주셨으면 좋겠어요.”이종범 문화기획자와 프로젝트 코스모는 오는 9월에는 길림성 인근의 큰 규모의 폐공장을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시켜 선보일 예정이다. 길림성을 능가하는 큰 그림을 준비중인 그의 행보에 기대가 모아진다. ​현재 예술반점 길림성에서는 박해선 작가의 ‘크고 반짝이는 것들의 사이에서’의 전시가 오는 6일까지 진행되고 있다. 박해선 작가의 이번 전시는 가좌동 일대의 폐공장이나 건물들을 탐색하면서 발견한 사물에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보기 위한 시도다. ※ 예술반점 길림성 -주소 : 인천광역시 서구 장고개로 245 2층 -인스타그램 : https://www.instagram.com/project.cosmo -운영시간 : 오후 1시 ~ 오후 6시 (월요일 휴관)정해랑 I-view객원기자 marinboy5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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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18.05.30 (수)
  • “자유공원에서 ‘파도타기’ 어때?”

    [인천 이야기] “자유공원에서 ‘파도타기’ 어때?”

    ​서핑 문화 공간 ‘서프 코드’뜨거운 여름이 바짝 앞당겨온 듯, 낮 기온이 20도를 웃도는 더운 날씨가 연일 계속되고 있다. 이상기온으로 올 여름은 더 덥고 일찍 시작된다는 기상예보 때문일까? 카페마다 다양한 맛의 얼음 빙수와 차가운 음료를 준비하며 손님을 맞는다. 하지만 눈으로만 바라봐도 시원함과 짜릿함으로 가슴이 뻥~뚫리는 곳이 있다. 바다감성의 서핑용품을 판매하는 ‘서프 코드’이다. ​​응봉산 자락에서 시작된 ‘서핑 문화’일명 ‘파도타기’라고 하는 ‘서핑’은 서프보드를 타고 파도의 경사진 면을 오르내리며 자연 그대로의 파도를 이용하고 즐기는 매력 만점의 스포츠이다. 하와이, 캘리포니아, 호주 등 사시사철 파도가 있는 지역에서 성행하는 스포츠였지만 이제는 서핑문화의 확산으로 세계 어느 해변에서나 즐길 수 있는 스포츠가 되었다.우리나라도 서핑을 즐길 수 있는 지역이 점점 늘고 있는 가운데 최근에는 강과 호수는 물론 바다가 아니어도 인공파도 또는 경사진 수면만 있으면 언제든지 서핑이 가능해졌다. 하지만 파도를 즐길 수 있는 서핑기구가 없다면 그림의 떡이다. 응봉산자락 자유공원을 오르는 중턱에 위치한 ‘서프 코드’는 다양하고 다채로운 서핑제품을 판매하는 상점이다. 이 공간 안으로 들어서면 한쪽 벽면에 세워진 다양한 길이의 길게 쭉 뻗은 보드가 눈을 사로잡는다. 눈으로만 즐겨도 날렵한 보드가 시원한 파도를 타고 내 안으로 밀려오는 듯 흥분과 설렘이 가슴 속으로 밀려든다.김인섭 대표(34, 중구 송학동)는 “5년 전에 율목동에서 가게를 시작했다가 그해 12월에 이곳으로 이전 하였습니다. SNS를 통해 가게를 홍보하면서 지금은 입소문으로 단골이 많이 생겼습니다.”라며 라이프스타일의 서핑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2013년부터 고교친구들과 함께 시작한 서핑관련 사업은 이제 서프보드를 직접 제작하는 기술까지 보유하게 되었다.“가게 오픈과 함께 서프보드를 연구하고 준비했습니다. 2년 전에는 친구가 호주에서 기술을 배워왔지요. 1년여 동안 기술과 공법을 적용하면서 수작업 공정을 거쳐 지난해부터 ‘블로윈드’라는 저희 브랜드를 달고 제품을 판매하고 있습니다.”미국가수 밥딜런의 노래 중에 ‘나에게 찾아오는 바람(blowing in the wind)'을 축약해 만든 ‘블로윈드’는 자체 개발한 서핑보드의 상품명이다. 또한 서퍼들이 사용하는 서핑전문화장품 브랜드 ‘위크엔드(WKND)’ 역시 이들이 개발한 제품이다. ​“서핑, 인천에서 세계로 가즈아~!”파도를 즐기는 서핑 뿐 아니라 라이프스타일까지 넘나드는 서핑문화 공간 ‘서프 코드’는 보드를 비롯해서 서핑수트, 썬 크림, 의류, 신발, 가방, 모자 등 머리부터 발끝까지 서핑에 필요한 제품을 원 스톱으로 구입할 수 있다. 특히, 자체개발한 서핑보드는 물론, 해외 유명브랜드의 보드와 서핑용품 및 서핑 감성을 담은 패션 아이템까지 다양한 서핑관련 문화용품들을 즐감할 수 있다. 무엇보다 구도심으로 사람의 발길이 뜸한 자유공원에 다소 생소하고 뜬금없는 바다감성을 담은 상점이지만 이미 SNS에서는 유명세를 타는 곳이다. 지역주민들에게는 그만큼 서핑문화의 매력을 일상생활 속에서 가깝게 접할 수 있으며, 도심에 거주하는 서퍼들에게는 쉽고 편하게 서핑용품을 구입할 수 있는 이색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김 대표는 “서핑은 장르가 많아요. 하지만 저희 가게를 통해 보드와 수트 등 클래식 서핑으로 정통 서핑의 색을 잃지 않는 핸드 셰이핑을 중심으로 보여주고 싶습니다. 또한, 우리나라에 없는 기술과 자재로 서퍼 기술을 배워나가면서 제품을 만들고 있어요. 현재 해외에서도 인터넷을 통해 저희제품을 판매하고 있는데 앞으로 더 많은 해외시장을 개척해서 판로를 넓혀나가고 싶습니다.”라며 바람을 말했다. 박영희 i-View기자 pyh60610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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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18.05.28 (월)
  • 커피로 그리는 인천萬畵

    [인터뷰] 커피로 그리는 인천萬畵

    ​‘도시디자이너’ 유영이▲ 커피로 그린 도시디자이너 유영이​“조경이라고 하면 나무나 심고 돌 몇 개 가져다 정원을 꾸미는 일쯤으로 사람들은 흔히 알고 있어요. 하지만 조경은 훨씬 더 광범위하고 복잡한 메커니즘을 통해 도시를 총체적으로 디자인하는 종합예술이에요. 건축학이 점을 고민하는 학문이라면 조경학은 그 점과 점들을 잇는 선을 고민하고 나아가 도시전체의 면과 형태적, 심미적 조화를 고민하는 학문이죠. 조경을 필요로 하는 부지나 장소가 선정되면 그 공간의 역사적 의미, 그 공간을 품고 있는 도시의 특성과 지역주민들의 성향, 그 공간을 방문하게 될 이용객의 필요와 목적, 환경과의 인과관계 등을 면밀히 분석한 후 설계에 들어가요. 그리고는 회화, 조각, 산업디자인, 건축, 토목, 도시계획 등 여러 전문분야와의 협업을 통해 작품을 완성해나가는 고난도의 예술행위인 거죠. 조경은 특히 사람, 나무, 땅 등 살아있는 생명을 다루는 일이에요. 그 공간에 터 잡고 살아 왔거나 살아 갈 뭇 생명체들에 대한 이해와 존중 없이는 제대로 된 조경예술은 불가능하죠. 나무 한 그루 심는 것조차 주변 환경이나 건물의 용도, 모양, 색상 등에 어울리는 수종을 따져야하고, 계절에 따른 변화와 그 지역민들과의 생태적 친화성도 꼼꼼히 체크해야 가능해요. 중요한 것은 조경의 기본은 언제나 ‘사람’이어야 한다는 사실이에요. 따라서 조경예술가에게는 ‘인문학적 소양’이 무엇보다 우선되는 덕목이죠.”​​‘건축사진 한 장’에 빠져 조경으로 진로 바꾼 그녀서울대 조경학과를 나와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에서 전시기획을 공부하다 밀라노 공대로 유학, 전시디자인을 전공하고 돌아온 ‘도시디자이너’ 유영이(30세)씨를 만났다. 그녀는 밀라노엑스포 한국관 TF전문위원으로 3년간 활약하다, 2016년부터 인천문화재단 기획경영본부 기획홍보팀에서 일하고 있다. “인천 가좌동이 고향이에요. 아빠는 건설 플랜트설계사셨죠. 인천 최초맨션이라는 간석동 주공아파트에서 살았는데 어려서부터 설계도면 그리는 아빠모습이 너무 멋있는 거예요. 나도 크면 아빠처럼 건축가가 돼야겠다고 다짐했죠. 상인천초등학교를 다니다 5학년 2학기 때 부평 마장초등학교로 전학했어요. 미술대회 나갔다하면 상을 휩쓸곤 해, 예술중학교에 가고 싶었죠. 하지만 예체능 절대반대를 외치는 부모님 때문에 부평서여중으로 진학했어요.”중학교 때는 담임선생님 영향으로 과학과목에 빠져 살았단다. 과학부활동에 과학경시대회 학교대표로도 나갔다. 부개여고시절엔 인천교육청이 주관하는 과학영재프로그램에 생물영재로 뽑혀 주말마다 별도 수업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부개여고 1학년 때, 진로를 ‘조경’으로 바꾸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찾아왔다. 인터넷 서핑 중 우연히 본 건물사진 1장이 발단이었다. ▲ 밀라노 유학시절​ ​“브라질 건축가이자 조경가인 ‘에밀리오 암바쯔’가 설계한 ‘아크로스 후쿠오카’라는 일본 후쿠오카시청사 건물이었어요. 앞면은 건물인데 뒷면은 숲인, 특이한 건물디자인을 보는 순간, ‘앗, 이거다’하는 느낌과 함께 알 수 없는 뜨거움이 가슴 깊은 곳에서 훅 치솟는 거예요. 그때부터 조경예술에 빠져들었고, ‘환경과 조경’이라는 전문잡지까지 구독하기 시작했죠. 학교공부는 제쳐놓고 잡지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까지 외우다시피 독파하곤 했어요. 학교가 발칵 뒤집혔죠. 전교 1등이 진학지원서에 의대나 약대가 아니라, 엉뚱하게도 서울대조경과를 써냈으니 선생님들이 놀라신 건 당연했어요. 결국 엄마까지 학교로 불려가셨죠.”‘왜? 힘든 길을 자청 하려고 하느냐? 예쁜 옷 대신, 점퍼에 작업화를 신고 남자들 틈에서 먼지구덩이 현장을 누벼야하는 일이다. 더구나 넌 고소공포증까지 있지 않느냐?’ 평생 건설현장을 경험해 오신 아빠도 그녀의 결심을 돌려보려 애를 썼지만, 그녀의 고집은 완강했단다. 오히려 자신이 좋아하는 과학과 미술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분야가 조경이다,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갖게 되면 그게 바로 행복 아니겠냐며 부모를 설득했다.“두 달간 단식에 들어갔어요. 물론 집에서만 식사를 안 한 거죠. 그리고 날마다 조경이라는 학문에 대한 장점과 전망을 아빠에게 문자로 보냈어요.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결국 제가 이겼죠. ‘그래, 정 그렇게 하고 싶다면 한번 해봐라’, 그날 이후로 부모님은 최고의 응원군이 되어 주셨어요.”06학번으로 서울대 조경학과에 입학했다. 마음껏 조경학에 대한 지식들을 섭렵했고 그 학문의 매력에 깊이 빠져 들었다. 교수님들은 대부분 하버드나 펜실베니아대학 출신들이었다. 2학년 겨울방학 때 그녀도 펜실베니아대학으로 언어연수를 떠났다. 조경학과 강의실도 기웃거려 보고, 두 달간 미 동부의 거의 모든 공원을 둘러보는가하면, 펜실베니아대학 박물관의 조경가전시관에서는 인간의 움직임과 보폭에 천착해 징검다리 간격 하나까지 고민했다는 위대한 조경가 ‘로렌스 할프린(Lawrence Halprin)’의 작품모형과 철학에 큰 울림을 얻기도 했다.​ ▲ 밀라노 엑스포 TF팀​“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도전을 받은 건 한국출신 조경가 ‘Nyunny Kim’과의 만남이었어요. 우연히 어느 잡지에서 그녀의 인터뷰기사를 읽고 감명을 받아 다짜고짜 잡지사로 전화를 해 ‘Nyunny Kim’과의 연락을 타진한 적이 있는데, 마침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연결이 된 거예요. 뉴욕에서 극적으로 조우해, 미국조경회사 구경도 시켜주고 밥도 사주고, 많은 말씀과 큰 용기도 주셨어요.”3학년 2학기 땐 독일 베를린의 훔볼트대학에 교환학생으로 갔단다. 환경정책의 선진국인 독일은 도시 내의 다른 학교와도 자유롭게 학점교환이 가능해 훔볼트대학에서는 조경학 수업을 듣고, 베를린공대에서는 건축과 수업을 들었단다.“한번은 조경, 건축, 도시전공 학생들과의 영어토론수업이 있었는데, 16명 수강생 중 유일한 동양인이던 저는 토론내용에 너무 충격을 받았어요. 마치 대학원생들의 미학이나 작가철학론에 관한 토론처럼 들렸거든요. 지금은 우리도 건축학과(5년제)와 건축공학과(4년제)가 분리되면서 건축철학이나 미학, 역사학 등이 커리큘럼에 포함되었지만, 이미 그들에게 건축학은 사회전반에 대한 이해와 사람, 도시, 역사, 그리고 철학을 망라한 인문학이었던 거예요. 건축가는 단순히 건물 뿐 아니라, 삶을 디자인하고 거기에 영감을 불어넣는 예술가의 개념으로 그들은 이해하고 있더라고요. 펜실베니아에서의 경험이 제 사고의 폭을 넓혀 주었다면, 독일은 깊이를 깨닫게 해준 셈이죠.”이탈리아 유학, 밀라노엑스포 거친 도시디자인 전문가한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인류학, 사회학, 디자인, 미학 등 다른 과의 강의를 찾아듣기 시작했다. ‘플라잉 시티’라는 공공예술작가그룹에도 참여해 ‘도시 관련 아트’에 어시스턴트 작가로 활동도 했다. 전용석 작가의 배려와 지원 덕분이었다.“‘삼성리움’에서 보금자리 탐험이라는 전시를 했는데, 도시에서 버려진 부자재들을 이용해 4개의 방에 나 혼자만의 안식공간을 만드는 콘셉트였어요. 팔레트로 얼기설기 천장을 설치하고 위에서 조명을 비추어 은은한 숲 그늘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의 그림자를 연출하는 방식이었죠. 콘셉트드로잉부터 설치작업까지 제가 메인 아이디어를 제공했어요. 아이들이 무척 좋아하더라고요. 신세계 본점의 골드아카데미, 경기도 어린이박물관, 국립민속미술관에서도 다양한 전시활동을 하면서 도시디자인에 대한 실천적 고민에 눈뜨기 시작했죠.” ▲ 졸업작품 – 인천 3개 부두(화수, 북성, 만석) 재생프로젝트​마지막 학기엔 지리학과 수업을 들었단다. 당시 강사님이 인천발전연구원 소속이었는데, 그 인연으로 인천 차이나타운 개항장문화지구조성 타당성 조사 프로젝트에도 참여했다.“졸업작품은 고향 인천의 3개 부두인 ‘화수, 북성, 만석부두 재생프로젝트’로 정했어요. 1920년대까지 물류항으로 이름을 날리던 북성포구, 수도권 최대어시장으로 유명했던 화수부두, 수출입항으로 활발하던 만석부두가 1970년 인천항으로 중심축이 옮아가면서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잖아요. 이후 지금껏 개발 소외지역으로 방치되어 있는 실정이고요. 그 세 부두를 되살리기 위한 3개의 전략을 연구한 프로젝트였죠.”그렇게 서울대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도시와 예술을 접목하기 위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이어가기 위해 대전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으로 진학했다. 전시기획 전공이었다. 하지만 겨우 한 학기를 마치고 시련이 찾아왔다. 그동안 간헐적으로 그녀를 괴롭혀 오던 악성편두통이 부쩍 심해진 것이다. 팔다리에 힘이 빠져 쓰러지는 경우가 잦아지면서 휴학을 해야 했다. ▲ 밀라노 유학시절 작품 – 밀라노엑스포 한국관프로젝트 모형​“두려움과 절망에 사로잡혀 꼬박 두 달을 쉬었어요. 마냥 이렇게 지내다간 아주 폐인이 되어버릴 것만 같았죠. 무턱대고 예전부터 생각해왔던 밀라노유학에 도전했어요. 이탈리아어는 한 마디도 할 줄 모르면서 집에서 영어로 화상면접을 보고 밀라노공대로 날아갔죠. 이탈리아는 생각보다 신나는 곳이었어요. 교수강의를 녹음해 3번씩 되풀이해 들으며 일일이 노트에 필기를 했어요. 그렇게 매일 악전고투했는데도, 신기하게 밀라노에선 그 악마 같은 편두통이 단 한 차례도 찾아오지 않았죠.”그렇게 4년의 세월을 견뎌내고 공채로 코트라 밀라노 현지무역관 현지 전시전담직원으로 입사했다. 디자인 뿐 아니라, 전시, 물류, 바이어 등 행정업무까지 총괄하는 직책이었다. 3개월 동안 행사 3개를 정신없이 치르고 나니, 문득 한국이 못 견디게 그리웠다. 끝내 사표를 내고 귀국했다.“한국에 돌아오니 코트라 본사에서 밀라노엑스포 한국관 TF전문요원을 뽑는다는 소식이 들리는 거예요. 다시 지원해 합격했죠. 아버지뻘 되는 대기업부장님들로부터 ‘위원님’이라는 깍듯한 대접을 받는 게 어색했지만, 3년간 열정적으로 일에 매달린 끝에 성공적으로 엑스포를 마무리할 수 있었어요. 문화체육부장관님 표창까지 받았죠. 하지만, 엑스포 기간 동안 다시 발병된 편두통은 오른 쪽 팔을 마비시켜 버렸어요. 재활학과에서 운동치료를 시작한 지 꼬박 1개월 만에 500g 생수통 하나를 겨우 들어 올릴 수 있었죠. 하지만 너무나 감사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졌어요.” ▲ 밀라노 엑스포 TF팀겨우 건강을 되찾은 그녀는 2016년 인천문화재단 공채사원모집에 지원해 고향 인천으로 되돌아왔다. 병실에 누워있는 동안 ‘come sei fatta?’라고 묻던 교수의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단다. ‘너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라는 한 인간의 본질에 대한 그 물음의 답은 그녀 내면에 켜켜이 쌓여있던 고향 인천에 대한 추억과 경험으로 귀착되었던 셈이다. 언젠가, 어떤 식으로든 도시디자이너로 준비된 그녀의 경험과 지식이 자신을 만들어 낸 고향 인천을 위해 요긴하게 되쓰일 그날이 분명히 오리라 믿는다.글. 커피그림 유사랑 i-View 객원기자, youliebe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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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18.05.30 (수)
  • “청관은 화가로 꿈 키웠던 무대”

    [인천인의 삶] “청관은 화가로 꿈 키웠던 무대”

    ​차이나타운 삼국지거리 벽화 그린 김건배 화가 인천 차이나타운을 돌다보면 중국 고전소설 삼국지와 초한지의 주요 장면을 벽화로 그려놓은 그림을 볼 수 있다. 차이나타운 삼국지거리에는 이들 영웅호걸들의 전쟁장면과 책 속의 주요 모습 등이 섬세한 필치로 그려져 있다. 스토리로 엮어진 그림들을 하나하나 보다 보면 어느새 삼국지, 초한지를 빠른 속도로 읽은 느낌이 든다. 삼국지거리 벽화를 원화로 감상할 수 있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6월 3일까지 중구 한중문화관에서 열리는 ‘차이나타운 삼국지· 초한지 벽화 원화전’이다. 종이에 수채로 그려진 원화와 타일로 제작된 벽화를 비교 관람할 기회다. ▲ 김건배 화가​이 장엄하고 섬세한 필치의 벽화를 그린 화가는 누가일까. 삼국지 거리 벽화는 국내 유명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세계적인 수채화가로 알려진 김건배 화가(71)의 작품이다. 김 화가는 1980~90년대 중반까지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로 광고계의 독보적인 존재였다. 그는 7, 80년대 국내에 일러스트라는 용어조차도 낯설었을 때 일러스트레이터로 이름을 날렸고, 88올림픽때는 88올림픽 캘린더를 제작하기도 했다. ​▲ 차이나타운 삼국지거리의 벽화 원화(상), 김건배 화가의 스케치(하)그는 인천 화평동에서 태어나 송림동에서 자랐고 영화중학교와 선인고등학교를 거쳤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렸고, 그림에 푹 빠져 살았다. 음악 감상실, 대합실, 인물스케치, 초상화 작업 등의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교를 다녔다.학창시절 그의 그림 무대는 청관이었던 차이나타운이었다. 지금과 달리 60년대 차이나타운은 미술반 학생들이 좋아하는 그림 풍경들이 많았다. 개항기 시대 구석구석에 존재했던 옛 건축물, 일본과 중국 조계지 모습, 인천역 뒤 어시장 등 모두가 그림의 소재가 되었다. 전국 중고등학교 미술대회가 차이나타운에서 자주 열릴 정도였다. 청관은 그가 화가로써 꿈을 키운 무대였다.​ ▲ 차이나타운 삼국지· 초한지 벽화 원화전​김 화가가 삼국지거리에 벽화를 그린 것은 2004, 2005년 경이다. 고등학교 후배가 벽화작업을 맡았는데 벽화그림 사람을 못 찾아 미국에 있던 김 화백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자신을 키워준 인천에 봉사하고 기여하고 싶은 마음에 벽화작업을 수락했다. 2004년엔 삼국지 그림 90점, 2014년에는 초한지 50점을 그렸다.그는 벽화를 작업을 위해 삼국지와 초한지를 몇 번씩 다시 읽고 관련 자료를 일일이 찾아 그림의 요소가 될 만한 장면과 내용을 추렸다. 그림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작업이었다. 내용을 정리한 후 모델에게 그림에 맞는 포즈를 취하게 하고 이를 사진으로 촬영했다. 꼼꼼하고 까다로운 작업이었다. 김 화가는 그림 한 장 한 장에 정성과 열정을 쏟았다. 그의 수고와 노력으로 차이나타운 거리엔 중국적인 요소가 더 입혀졌고,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 하나를 더 추가했다. 사실 김 화가는 차이나타운 벽화 작업으로 인천에 이름을 알렸지만 인천보다는 서울과 미국에서 더 유명한 작가다. 그는 고교 졸업 후 서울의 광고대행사의 일러스트레이터이자 디자이너로 활동하며 클라이언트로부터 천재, 마법의 손으로 불렸고, 1995년 갑자기 미국으로 이민을 간 뒤로는는 순수회화인 수채화가로 삶을 살았다. 미국의 유명 아트페스티벌에서 수채화 대상 및 전체대상을 17회에 걸쳐 수상했다. 그가 그리는 투명수채화는 물감들을 차곡차곡 발라 겹치는 과정을 통해 색의 혼탁을 조절하여 인체의 이미지를 회화적으로 잘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 화가는 이번 원화전시 중에도 초한지를 만화로 엮는 작업을 병행하고 있다. 노트에 초한지를 만화로 틈틈이 그리고 있다. 그가 직접 그리고 색을 입히며, 내용을 넣고 있으며 책으로도 발간할 예정이다.“어린시절 추억이 묻어 있는 차이나타운에 벽화를 그리는 것은 감회 깊은 즐거운 작업이었습니다. 예술가는 대중들에게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마음의 양식을 제공하는 의무와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벽화작업도 이런 노력의 일환이었습니다.”글·사진 이용남 i-View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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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18.05.30 (수)
  • 소야도 갈 때  ‘종선’타지 않아도 된다

    [동네방네] 소야도 갈 때 ‘종선’타지 않아도 된다

    ​덕적소야교 완공…24시간 통행 가능 옹진군 덕적도와 소야도를 연결하는 다리가 건설되어 지난 5월 28일부터 통행을 시작했다. 덕적면의 본도인 덕적도와 자도인 소야도를 연결하는 덕적소야교 건설공사는 지난 2014년 11월에 착공하여 2018년 5월까지 약 3년 6개월간 진행되었다. ​​총 310억원의 사업비가 투입된 덕적소야교는 해상교량 650m, 접속도로 487m 등 총 연장 1천137m, 왕복 2차선(8.5m)으로 건설되었으며, 옹진군에서는 2001년 건설된 영흥대교를 시작으로 4번째로 건설된 해상교량이다. ▲ 2014년 10월 덕적면 소야도나루께 선착장​​​소야도는 정부의 소규모 학교 통폐합 정책에 따라 지난 1998년 덕적초등학교 소야분교가 폐교되면서 중·고생 10명은 물론 초등생 8명, 유치원생 2명 등 어린이들도 종선을 타고 덕적도로 통학하고 있다.태풍이나 풍랑, 짙은 안개 등 해상 날씨가 나빠지면 학생들은 학교를 가지 못하거나 등교했더라도 귀가하지 못하고 친척이나 친구 집에서 자야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유인도 중 덕적본도와 다리를 놓을 수 있는 곳은 코앞에 보이는 소야도 뿐이고 그나마 종선으로 3분이면 덕적도를 오갈 수 있어 본도를 제외하면 주민이 가장 많다. ▲ 2018년 05월 25일 덕적소야교 건설공사 개통식​덕적소야교의 개통으로 덕적도와 소야도간 교통 제약 없이 24시간 통행이 가능해져 마을간 생활권 통합과 교류활성화는 물론 정주환경개선과 지역경제가 활성화 될 것으로 기대된다. 또다리가 덕적도의 랜드마크로써 천혜의 자연경관을 활용한 관광명소로 지역발전의 시금석이 될 것으로 보인다. 조윤길 군수는 “불편한 교통여건에도 불구하고 찾아주신 내외 귀빈 여러분과 참석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전했다. ▲ 2013년 06월 28일 덕적면 소야도 등산로​이날 개통식은 조윤길 옹진군수, 옹진군의회 김성기 지역의원 및 덕적면 주민 등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통 축하를 위한 덕적 고등학교 학생들의 풍물놀이 공연을 시작으로 테이프 컷팅, 덕적소야교(연도교) 왕복 걷기, 준공비 제막식, 기념식수 등의 순서로 진행되었다.한편, 군 관계자는 "덕적소야교의 조기 개통을 요구하는 주민들의 의견이 수렴되어 5월28일(월) 자정부터 전면 개통하여 그동안 주민들의 통행 불편을 일시에 해소함은 물론 한 층 정주여건을 개선하게 됐다."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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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18.05.28 (월)
  • 경인고속도로 진출입로 전면 개통 등

    [인천뉴스] 경인고속도로 진출입로 전면 개통 등

    ​중국 텐진시 질병예방관리센터와 국제학술교류인천광역시 보건환경연구원은 지난 30일 중국 톈진시에서 톈진시 질병예방관리센터와 감염병 분야 제3회 국제학술교류회를 개최했다.​ ​​​인천시는 중국협력분야에서 실질적 대중국 진출 기반 조성을 위한 인-차이나 프로젝트를 발굴했으며, 이에 보건환경연구원은 상호 교류협력체계 강화 분야의‘재난형 신종감염병 예방을 위한 국제학술교류’를 추진했다. 2016년 중국 톈진시 질병예방관리센터와 MOU 체결 및 제 1회 국제학술교류를 실시한 이후 매년 양 지역에서 번갈아 개최하고 있으며, 올해는 중국 톈진시에서 제3회 국제학술교류회를 개최하였다.이번 국제학술교류회에서는 권문주 질병연구부장 등 실무자 6명 및 민간 학술자문교수 2명이 참석하여 인천시는‘잠복결핵 검사체계’,「인천 연안지역 감염성 바이러스 실태조사」에 대한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고, 톈진시에서는 「톈진시에서의 식품매개 질병 : 장염비브리오 조사 연구」,「곡류에서의 곰팡이독소 조사 및 LC-MS 검출방법 연구」및「사람 메타뉴모바이러스의 에피토프 백신 연구」에 대하여 발표하여 양 기관간의 연구결과를 공유하였다.그리고 인하대학교 열대의학교실 김동수 교수와 가천대길병원 감염내과 엄중식 교수가 민간 학술자문교수로 참석한 좌담회를 실시하여 양 도시에서의 이슈되는 감염병 발생 현황 및 대응 방안 등에 대해서 토론하였다.경인고속도로(인천대로) 진출입로 전면 개통작년 12월 1일 일반도로로 전환된 경인고속도로가 전환 6개월여 만에 진출입이 자유로운 구조로 개선되면서 명실상부한 일반도로로서 새롭게 재탄생됐다. 인천시는 지난 4월 30일 첫 번째로 개통한 주안산단 진출입로에 이어서 인하대, 방축, 석남 진출입로 등 7개 진출입로를 지난 5월30일 오후 5시부로 전면 개통한다.금번 진출입로 개통으로 총 10개소의 진출입로 중 인하대 진출로를 제외한 9개 진출입로가 개통됨으로서 사실상 인천대로 전구간에서 진출입이 자유롭게 됐다.인천광역시는 경인고속도로가 인천시 한복판을 관통하면서 도심단절과 소음, 먼지 등 시민불편을 야기했을 뿐 만 아니라 서울지향 중심의 도로로 우리시 내부 진출입이 불편했으나 이번 진출입로 개통으로 완전히 인천 중심의 도로로 전환됐다는데 의미가 크며, 인천 시민의 교통 편의 증진은 물론 경인고속도로 일반화사업 진행을 촉진하여 원도심 균형발전 및 지역개발 활성화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밝혔다.경인고속도로 일반화사업은 2024년까지 총 4천억원의 사업비를 투입하여경인고속도로를 공원과 문화가 어우러진 소통문화 공간으로 조성하는 인천시의 핵심사업으로서 내년부터는 방음벽과 옹벽을 철거하는 ‘도로개량공사’를 본격 추진하여 2021년까지 완료하고 공원 및 문화시설 등 공공시설도 2024년까지 조성할 계획이다.중국 모바일 결제 시스템‘알리페이 설명회’인천시와 인천관광공사는 지난 5월 29일 오후 3시 중국 관광객 결제 편의 제고를 위한 <알리페이 설명회>를 인천관광공사 회의실에서 개최했다. 금번 설명회는 방한 중국 관광객의 모바일 결제 비중이 지속적으로 확대 되는데 따른 것으로, 지역 내 호텔, 의료관광병원, 관광사업체 및 알리페이 코리아 관계자 등 3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알리페이는 중국 모바일 결제시장 1위의 결제시스템으로, 중국 내 5억2000만명, 전 세계 9억명 정도가 사용한다. 신용카드 보유나 환전의 불편함 없이 스마트폰 앱에서 QR코드 결제 방식으로 간편하게 결제가 가능함과 동시에, 매장정보를 애플리케이션에 노출시켜 중국관광객의 자연스러운 방문유도와 이로 인한 매출증대를 기대할 수 있다.시에서는 금번 설명회에 참석자 중 희망자를 대상으로 시범적 도입을 추진하며, 주요 관광지 등을 대상으로 점차적으로 확대해 나간다는 방침이다. 향후 매출증대 및 관광객 편리성 제고가 확인 되면 위챗페이 등 모바일 결제시스템의 다양화도 추진한다는 계획이다.바다의 날 기념 ‘함께 가꿔갈 바다…’ 행사인천시는 5월 31일 오전 10시 인천광역시 내항 8부두에서 제23회 바다의 날 기념식을 개최한다. 바다의 날은 1996년 바다와 해양산업의 중요성을 널리 알리고 해양수산인의 자긍심을 고취하기 위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다.올해는 바다의 날 기념식은 대한민국 최초, 아시아의 최대인 인천항 갑문이 있는 인천 내항 8부두에서 ‘함께 가꿔갈 바다, 함께 누려갈 바다’라는 주제로 개최한다.인천 내항은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해안에 외해와 격리된 수역을 만들어 문을 여닫는 방식으로 선박이 상시 입출항과 정박을 할 수 있도록 1918년에 축조된 항만시설로 올해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여 그 의미가 크다.이번 ‘제23회 바다의 날 기념식’은 정부부처 및 해양수산 관계자와 인천시민 등 2천여 명이 참석한다. 행사는 식전행사로 인천시립합창단 공연, 의장대와 서구 태권도 시범단의 축하공연이 진행된다.특히 인천주제관에서는 인천항에 대한 내항, 남항, 신항 등 역사와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여 앞으로 인천항이 대한민국 수도권 관문이며 동북아시아 해양관광의 메카로 거듭 성장하고 있는 모습을 선보일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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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18.05.30 (수)
  • 솟대, 우리민족의 정신적 메시지

    [인천인의 삶] 솟대, 우리민족의 정신적 메시지

    ​솟대 아름 김숙경 작가솟대는 우리 민족의 상징이다. 전국 팔도에 걸쳐 분포해 있고 다양한 의미를 함축적으로 나타내는 문화유산이다. ‘솟아있는 대’라는 뜻에 서 솟대라고 불린다. 청동기 시대부터 전해져온 솟대는 받침목, 세움 대, 새로 이루어진 조형물이다. 단순해보일 수도 있는 이 조형물은 ‘희망의 전달자’라는 별칭으로 우리 삶에 깊숙이 자리 잡았다. 첫눈에 솟대의 매력에 사로잡혔다는 김숙경 작가는 우리문화인 솟대를 세상에 알리겠다는 일념 하에 솟대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민족 안에 ‘솟대’는 우리네 삶“솟대에는 공간을 이끄는 힘이 있어요. 오래전 삼한시대에 ‘소도’라는 치외법권지역이 있었어요. 소도를 나타내는 공간 에도 솟대가 있었죠. 솟대는 어떤 공간의 의미, 그 지역의 특성을 모두 함축적으로 표현해요. 민족 안에서 우리네 삶을 담아내며 이어진 문화인거죠.”솟대는 대체로 마을 어귀에 세워지며 풍농, 풍어를 기원하거나 기념비적인 의미로서 많이 세워진다. 지역과 목적에 따라 ‘솔대’, ‘별신대’, ‘화주대’ 등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하며 우리네 삶에 자리 잡고 있다. 김숙경 작가(54)가 솟대와 처음 연을 맺은 건 약 20여 년 전, 삼십대 중반의 일이다. “한눈에 반해버렸어요. 눈이 내리던 겨울이었는데, 첫눈에 편안함을 느꼈던 것 같아요. 당시 ‘솟대’의 존재도 모르던 때였는데 우연히 마주친 솟대에 매료당했죠. 그 자리에서 솟대를 구매해 집으로 갔어요. 그 솟대를 만드셨던 작가님 밑에서 솟대를 배우게 됐어요.”​ ​​​​김 작가의 손에서 나무는 한 마리 새가 된다. 희망을 가득 품 은 듯 고개를 들고 하늘을 향하는 새의 형상은 나무의 모양에 따라 달라진다. 솟대의 주재료는 나무. 돌을 깎아 만든 솟대도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대부분의 솟대의 재료는 나무다.“지금 냄새 좀 나죠? 느티나무냄새에요. 느티나무가 향이 진해서 역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전 나무냄새는 다 좋더라고요.” 김 작가는 조경사 아버지 덕에 어려서부터 나무와 함께 자랐다. 나무라는 재료에 익숙했던 것도 그녀가 솟대의 매력에 사로잡힌 이유 중 하나다.“친숙한 재료, 그 속에 담긴 메시지, 화려하지 않지만 단아하고 담백하게 표현된 모습까지 모두 우리 민족을 꼭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솟대에는 우리 민족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있어요.” 새를 다듬는 그녀의 손끝에 힘이 실린다.일제강점기 말살된 솟대, 다시 고개를 들다뿌리 깊은 문화였던 솟대가 모습을 감춘 것은 대한민국 역사의 암흑기, 일제강점기 때다. 문화말살정책에 의해 솟대 또한 그 자취를 감추게 된 것.“정신적 지주라고 할까요? 다양한 의미로서 솟대는 삶의 버팀목 혹은 희망이라고 볼 수 있어요. 오죽하면 솟대를 ‘희망의 전달자’라고 할까요. 그런 우리의 문화를 없애려던 것은 솟대가 그만큼 우리 삶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반증 이죠.” ​희망, 정성, 경축 등의 의식을 나타낼 때 쓰이는 솟대는 ‘희망의 전달자’, ‘희망의 안테나’와 같은 별칭으로 불린다. 이러한 솟대가 다시 세상에 고개를 든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저만해도 솟대를 삼십대에 돼서야 알게 됐잖아요. 인지도가 그만큼 낮았어요. 솟대라고 하면, 그게 뭐냐고 묻는 사람이 많아요. 전통방식으로 전수받은 작가들과 그들의 노력으로 점차 인지도가 올라가 현재에 이르렀죠.”그 사이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김숙경 작가는 한번도 솟대를 놓은 적이 없다. 힘든 와중에도 그녀는 솟대를 더욱 움켜 쥐었다.“단 한 번도 솟대가 쉬웠던 적이 없어요. 배우고 단련하며 작업해나가는 중에 어려운 일도 많았죠. 좌절의 순간에도 전 솟대를 통해 일어났어요. 실력을 더욱 키우려고 하고 새로운 도전을 하면서요. 솟대를 정말 사랑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요.”김 작가의 솟대 여정은 솟대의 역사와도 닮은 듯 보였다.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솟대솟대는 우리와 함께 살아왔다. 청동기 시대부터 이어진 역사 속에서 우리네 삶을 담아냈고, 그와 함께 복을 기원하고, 희망을 전달하며, 우리네 터전을 이끌어 왔다. 자취를 감추었던 솟대가 다시금 명맥을 찾은 지금, 김숙경 작가는 이제 전통방식의 솟대를 현대에 맞게 발전시킬 때라고 말한다. 단순히 전통솟대를 재현하는 것에서 그치면 과거에 머물러 있게 된다는 것.실제로 그녀는 나무 솟대에 나전, 옻칠 등 우리 전통공예를 접목시켜 작업하기도 하고 채화를 해 새로운 표현법을 개발하고 있다. 솟대의 쓰임도 마찬가지다. 장원급제를 기념하며 세운 솟대인 ‘화주대’의 경우 그 의미를 빌어 수험생에게 선물할 수 있도록 만들어 내는 등 현대생활에 맞게 재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 김숙경 작가의 설명이다.​ ​​​“조선시대 사람도 한국 사람이지만,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도 한국 사람이에요. 그사이에 생활양식이 많이 바뀌었죠. 양장을 입는다고 해서 제가 한국 사람이 아닌 것은 아니니까요. 우리 삶이 바뀐 만큼 전통도 그에 맞게 발전해야 해요. 그렇게 자연스럽게 녹아들어야 우리 문화로 다시금 거듭날 수 있다고 생각 해요. 문화는 우리와 함께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거니까요.”​​솟대박물관 세워 우리문화유산 알리고 싶다고개를 치켜든 새가 금방이라도 하늘로 날아오를 듯하다. 소망과 희망을 담은 솟대는 신앙이라기보다는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린 뿌리 깊은 문화다. 이 문화를 전파하기 위해 김 작가는 2년째 다양한 교육 및 체험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솟대를 알리고 있다. “전통과 현대를 잇고 우리 문화를 이끌어가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우리 생활에 녹아들 수 있는 콘텐츠를 개발하고 싶어요.” 성신여대 전통콘텐츠 대학원에서 솟대논문을 준비하고 있는 그녀. 전통과 현대를 잇는 콘텐 츠로 사람들에게 솟대의 비전을 선보이고 싶다고 말한다.“궁극적으로는 사람들이 솟대를 쉽게 접할 수 있는 솟대 박 물관을 세워 그 역사적 의미를 전파하는 것이 제 꿈이죠.”김숙경 작가는 17년간 솟대에 매진해 온 작가다. 세상에 솟대를 알리고 솟대의 미래를 제시하며 향토문화대전 여성가족부 장관상, 서울시 여성공예소전 서울시장상, 47회 대한민국공예품대전 입상, 2017년 목재의 날 표창장, 대한민국전승자협회 상품공모전 등 다수의 공모전에서 수상한 바 있다. 솟대란?솟대는 민족 안에서 살아온 전통 문화다. 농경시대 풍농, 풍어를 기원하는 목적으로 세워진 덕에 민간신앙으로 알려졌지만 경사를 알리는 목적, 지역의 색을 나타내는 목적 등으로 세워지기도 해 넓은 의미에서 문화적 가치를 띄고 있다. 청동기시대부터 이어진 솟대역사는 일제강점기 때 맥이 끊기기도 했지만 현대에 이르러 다시금 이어지게 되었다.원고출처 : 인천시 영문소식지 ‘Incheon Now’(5.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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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18.05.28 (월)
  • ‘학산문학’ 100호 발행

    [인천 이야기] ‘학산문학’ 100호 발행

    ​1991년 계간지로 창간, 인천 대표 문학지로 자리매김인천을 대표하는 문예지인 학산문학은 1991년 “이 시대에 있어서 문학이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는가?” 라는 자성적 물음을 바탕으로 태동하였다. 그리고 2018년 여름 100호 발간을 앞두고 있다.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많은 문예지가 나고 사라지는 것이 흔한 요즘에 학산문학 100호의 발간은 지난한 세월을 헤쳐온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학산문학은 인천시의 지원을 받아 인천문인협회가 발행을 담당하며, 인천문인협회장이 발행인이다.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던 기간까지 합하면 벌써 11년째가 되는 양진채 소설가(이하 양 편집주간)가 현재 5년째 학산문학의 편집주간을 맡고 있다. ​▲ 발행예정인 2018 여름 100호 표지​​재정 어려움에도 중단없이 발행하며 위상 지켜사실 학산문학은 재작년인 2016년 인천시의 지원 예산이 절반으로 삭감되었을 때 큰 어려움을 겪었다. 어떻게 그 시절을 어떻게 버텼냐는 질문에 양 편집주간은 이렇게 답한다. ”사실 많은 분들이 재정적 어려움이 심하자, 계간지 대신에 반년지로 발행하는 것에 대해서 진지하게 검토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편집주간이었던 저는 합본호는 안 된다는 원칙이 있었어요. 그래서 광고를 싣고 여러 방법으로 출판비용을 낮추는 등의 해결책을 강구했습니다. 온갖 인맥을 동원했음은 물론이고요. 인천문인협회 회원의 경우는 원고료 없이 청탁했고요, 여러 인맥을 통해 출판하면 광고를 실어주겠다는 등등의 약정으로 원고료 없이 글을 받아 싣는 각고의 노력이 있었습니다. 덕분에 학산문학은 창간 이후로 계속해서 위상을 지켜내며 발행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지금은 상황을 회복하여 학산문학에 실리는 모든 원고에 원고료가 지급되고 있지요.” ▲ 양진채 편집주간 학산문학은 정기구독을 하거나, 인터넷을 통해서 구입할 수 있다. 그리고 인천 각지의 도서관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 도서관의 경우 현재 인천의 큰 도서관 위주로 40~50군데 정도에 배포된다. 인천에 크고 작은 도서관이 모두 200여개가 넘는 것에 비하면 학산문학이 배포되는 도서관 수는 사실 아주 적은 실정이다. 여러 여건이 산재해 있지만, 앞으로 30군데 정도의 도서관에 학산문학을 더 배포할 계획이다. 올해 인터넷에서 잡지를 볼 수 있는 시스템 구축이 완료되면 더 많은 사람들이 보다 손쉽게 학산문학의 양질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수준 높은 다양한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는 계간 학산문학은 통권 48호부터 체계를 개편하였다. 각 호마다 <이 계절의 작가> 코너를 만들어서 한국 문학의 발전에 중심적인 역할을 해온 시인과 소설가를 집중 조명한다. 작가의 신작, 자선작, 연보, 작품론, 문학강연 등을 통해 한 작가의 생애와 작품, 문학관을 전 방위적으로 알 수 있도록 했다. 이렇게 <이 계절의 작가>에 선정되는 작가의 경우 그 호에 발행하는 학산문학의 표지가 되었을 정도로 비중 있게 다뤄진다.“학산문학에서 지난 2014년 여름호에 <이 계절의 시인>으로 송수권 시인(1940~2016, 1975년 <문학사상> ‘산문(山門)에 기대어’로 등단, 시인의 고향인 고흥군에서는 2015년부터 송수권문학상을 제정하여 시상함)을 모셨었어요. 그런데 학산문학에서 모신지 얼마 지나지 않아, 2016년 4월에 돌아가셨죠. 그래서인지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 ​최근 발행된 학산문학의 특집들또한 학산문학에서는 85호부터 기획특집과 연재를 기획하고 진행한다. 늘 문학의 흐름을 주시하고 있다가 이를 특집의 형태로 집중 조명한다. 2018년 봄 99호에서는 <공간을 읽다> 와 <베스트셀러로 시대를 읽다> 라는 기획특집으로 좋은 평가를 받은 바 있다. 2018년 여름 100호에서는 <한국문학의 다양성, 길을 묻다>라는 이름으로 현대 문학의 다양한 양상을 짚어볼 예정이다. 첫 번째로는 시에서 요즘 뜨겁게 논의가 되고 있는 짧은 형식의 시, 예를 들면 디카시, SNS 한줄시 등에 대해 살펴본다. 이러한 시의 새로운 경향이 어떤 호응을 얻고 있으며, 이것이 시의 또 다른 대안이 될 수 있는 지에 대해 알아본다.두 번째로 엽편소설(단편소설보다도 짧은 소설), 한 장 소설, 스마트 소설 등, 소설의 형식에서도 짧은 소설이 새로운 붐으로 등장하고 있는데, 이 역시 사회 현상과 흐름에 있어 어떤 지점에 있는지에 대해서 고찰한다. 세 번째로는 현실을 재현하는 소설적 문법의 변화에 대하여 살펴보며, 네 번째로는 문학의 무국적화에 대해서 알아본다. 인물 이름이 모호하거나, 장소가 무국적화 되는 등의 문학에서 국적의 다양화 경향이 발견되고 있는데, 이러한 문학적 흐름이 현대사회와 어떻게 맞물려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자책 시장이나 독립 출판처럼 출판사에 의존하지 않는 출판의 다양성을 현상 분석한다.유수의 문학상 후보작에도 학산문학도 당당히 이름 올려​100호까지 발간을 앞둔 지금까지 학산문학은 인천의 문학성을 대표하고 문학에 대한 다양성과 질적향상을 도모해 왔다. 그러면서도 지역문학의 완성이 곧 한국 문학의 완성이라는 사실을 늘 자각하고 있다. 학산문학은 인천문학작품 다시 읽기, 인천의 작고 문인 조명 등 인천지역 잡지로서의 면모를 잃지 않기 위해 다양한 모색을 해오면서도 지역 동인지적 성격을 벗어나, 중앙문학지로 발돋움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학산 문학은 매 호마다 인천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작가 40%와 그 외 타 지역 작가들의 작품을 60% 정도 싣는다. 편집위원도 인천문인협회 회원들로 한정 짓지 않고, 현재 한국 문단의 중요한 흐름을 짚어내고 있는 젊은 평론가들을 편집위원으로 영입하였다. 이렇게 수준 높은 작품을 싣고자 하는 노력을 인정받아 현재 이상문학상 등 유수의 문학상 후보작 검토 시 그 명단에 학산문학도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잡지사에서 어느 정도 원고료를 지급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실력 있는 작가에게 원고를 청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 학산문학이 중앙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는 잡지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이고요. 학산문학이 인천의 명예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학산문학 1호부터 100호까지​학산문학은 그 이름이 비단 인천 지역에만 머물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학산문학은 바로 이 곳, 여기만의 작품으로 세계적인 작품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문학적 실천으로 지역과 삶에 기여할 수 있음을 출발로 삼아, 한국 문학의 중심, 더 나아가 세계 문학의 중심에 가 닿기를 바란다. 학산문학은 이제 100호 발간에 즈음하여, 묵묵히 다음의 200호, 300호 발간을 위해 걸음을 내 딛는다.김경옥 i-View 객원 기자, expert4you@naver.com, 사진 학산문학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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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18.05.28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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