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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평 맛집 주인은 ‘르 코르동블루 출신’

    [인터뷰] 부평 맛집 주인은 ‘르 코르동블루 출신’

    더 히든 키친, 피터 리 포레 셰프인천 부평에 요즘 한창 떠오르는 그야말로 ‘핫(hot)한’ 식당이 있다. 한적한 주택가 골목에 숨어 있어 쉽게 눈에 띠지 않는 이곳. 그래서 이름도 '더 히든 키친(The Hidden Kitchen)'이다. 이름이 참 절묘하다 싶게 잘 어울리는 이곳의 오너 쉐프인 피터 리 포레스(PETER LEE FORRES) 셰프를 만나 그의 직업과 삶에 대한 얘기를 들어보았다.   ▲ '더 히든 키친(The Hidden Kitchen)의 피터 리 포레스((PETER LEE FORRES)셰프  더 히든 키친(THE HIDDEN KITCHEN) 인천 부평구 부평구청 인근 주택가에 위치한 “THE HIDDEN KITCHEN”. 간판이름 그대로 숨어있는 작은 식당이다. 주택가에 브런치 레스토랑이라니. 그것도 좁은 골목에 숨어있는 식당이라는 얘기를 듣고 반신반의하며 찾아간 곳엔 의외로 깔끔하고 소박한 멋을 풍기는 식당이 자리하고 있다. 채 10평이 안 되는 공간에 2평정도 크기의 오픈형 주방. 5~6개의 테이블이 고작인 이 작은 식당이 브런치와 파스타, 리소토 등으로 블로그와 인스타그램 등의 SNS에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바로 그 맛집이다. 오전시간엔 아메리칸 스타일의 브런치 메뉴를 선보이고, 점심시간엔 파스타와 리소토 등의 이탈리안 음식을 내놓는다. SNS상에서 많은 호평을 받은 애피타이저 메뉴인 미니버거 3형제는 앙증맞은 사이즈의 수제버거로, 늦게 가면 재료가 동나 맛을 못보고 온다는 인기메뉴다.   타고난 셰프 더 히든 키친의 셰프는 피터 리 포레스(PETER LEE FORRES).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요리학교인 르꼬르동블루 출신의 미국인이다. 그러나 그는 순수미술을 전공하던 미술학도였다. 그런데 다양한 미술을 접하던 예술학도가 어떻게 셰프가 된 걸까? 그는 단순히 요리학교만 거쳐 셰프가 된 케이스가 아니다. 그의 요리경력은 무려 26년. 미국 시카고에서 나고 자란 그는 어린 시절부터 요리와 친숙한 환경에서 자랐다. 17년간 식당을 해온 부모님 곁에서 자연스레 요리를 익혔고, 시카고, 브로드웨이 등 미국 여러 지역의 식당에서 일한 경력이 있다. 한국에서도 식당을 열기 전 이태원, 강남 등지의 여러 식당에서 일을 했다. Peter 셰프의 전문 분야는 프랑스 요리이지만, 더 히든 키친에선 미국식, 유럽식 가릴 것 없이 모두 맛볼 수 있다. 음식 맛도 좋은데다 그의 미적 감각이 돋보이는 푸드 스타일링은 보는 이는 눈도 즐겁게 한다.   ​​​​  Peter 셰프는 요리에 대한 열정이 남다르다. 그의 식당 앞에 놓인 안내용 배너에는 그가 매일 아침 파스타면을 반죽하고, 치즈를 거르고 소스를 직접 만드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는 문구가 쓰여 있다. 음식의 재료를 모두 직접 만들어 사용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손도 많이 가고 보관도 쉽지 않은 수제 생면을 고집하는 이유는 건강한 음식을 제공하고픈 그의 음식에 대한 남다른 철학 때문이다. 좋은 음식을 함께 나누고 싶고, 정성이 담뿍 담긴 음식을 기분 좋게 대접하고 싶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쉐프의 이런 마음을 느껴서인지 이 작은 식당을 찾는 발길은 나날이 늘어가고 있다.   이웃으로 맺은 인연이 평생의 반려자로 피터 셰프의 아내는 한국인이다. 2008년 시카고의 한 아파트에서 만났다는 이 부부는 지금도 꿀이 뚝뚝 떨어질 만큼 달콤한 사이를 자랑한다. 전화로도 스스럼없이 다정하게 사랑한다는 말을 속삭이고 서로를 끔찍이도 챙긴다. 아내가 어학연수를 위해 시카고에 머물 때, 같은 아파트의 이웃으로 처음 만났다는 피터 셰프와 그의 아내는 화장지로 맺어진 인연이다. 어느 폭풍우 치던 날 다 떨어진 화장지를 대신 쇼핑해 준 것이 인연이 돼 연인이 되었다는 이들. 1년쯤 사귀다 아내가 한국의 대기업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을 때, 아내가 ‘나와 결혼을 안 할 거면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라고 선언해 결혼을 결심하고 함께 한국으로 오게 됐다. 너무나 사랑하는 아내, 아들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평일 오후에는 식당 영업도 하지 않는 그를 보며 사랑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 위력을 가졌는지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제주 그리고 인천 피터 셰프 부부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신접살림을 차렸던 곳은 바로 제주다. 약 2년간 제주에 사는 동안 피터의 직업은 셰프가 아니라 영어선생님이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며 즐거운 추억도 많았지만, 요리를 좋아해 오랫동안 셰프로 살아왔던 피터는 자신의 꿈을 놓을 수 없었다. 그렇게 2년간의 제주살이를 접고 피터 부부는 2013년 인천 부평으로 이주 했다. 부평은 피터의 아내가 자란 곳이기도 하고 그녀의 가족들이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처음 인천 부평에서 살던 아파트 주민들이 아주 친절하게 잘 대해줘 별다른 어려움도 없었으며 인천에 대한 인상이 너무 좋았다고 말하는 피터 셰프. 또한 그의 식당이 자리한 주택가의 이웃들도 좋은 분들이라 가끔 차를 가져오는 손님들로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을 때면 먼저 자리를 내어줄 만큼 배려심이 많다며 이웃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언젠가 은퇴를 하게 되면 교외에 작은 양 목장을 운영하고 싶다는 피터 셰프. 치즈가 가득한 커다란 저장고를 갖추고 좋은 와인을 마시면서 그림도 계속 그리고 싶다는 피터 셰프의 꿈 이야기를 들으며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소박하지만 따뜻한 그의 꿈이 꼭 실현되기를 바라며, 앞으로도 그의 건승을 기대해본다. <더 히든 키친> 주소: 인천광역시 부평구 신트리로22번길 15-14 (인천광역시 부평구 부평동 885-5) 전화: 032-272-7276 원고출처 : 인천시 영문소식지 ‘Incheon Now’(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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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18.03.12 (월)
  • 선일문구사

    [인천 이야기] 스승에서 제자로 주인 이어진 '문구점 사연'

    ​강화읍에서 가장 오래된 선일문구사​ 학교를 졸업한지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이맘때가 되면 긴장과 설렘이 공존한다. 해마다  3월에는 새로운 교실, 담임 선생님, 친구들을 만날 준비에 늘 설레었다. 개학 전날, 엄마 손 잡고 방문한 문구점은 붐볐다. 표지에 유럽의 성 사진이 담겨있던 노트, 흔들면 심이 나오는 샤프, 스위치를 누르면 지우개 통이 튀어나온 자동 필통은 모든 어린이들의 워너비 아이템이었다. 참새 방앗간 들르듯 매일 하굣길에 ‘신상’구경하러 출근 도장을 찍었던 ‘문방구’가 사라지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1990년대 무려 3만여 곳에 달하던 문구점은 2016년 3월 말 기준 9918곳으로 급감했다. 변해가는 소비패턴과 대형마트에 밀려 문을 닫는 문구점이 늘고 있는 가운데, 50년 전통의 문구점이 있어 눈길을 끈다. 강화읍에서 가장 오래된 ‘선일문구사’다.    1대 주인은 강화고등학교 1회 졸업생 이영성 교장50년 된 상점이라고 하니, 가업을 잇는 가게가 아닐까 짐작 했다. 놀랍게도 이 문구점은 3대째 스승에서 제자로 이어지고 있다. 어떤 사연일까?​“선일문구사 1대 주인은 강화고등학교 1회 졸업생인 이영성 교장선생님입니다. 선일이라는 이름은 ‘선함이 제일이다’는 뜻을 담아 이 교장선생님께서 지으셨습니다. 교장선생님께서는 8명의 자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강화고등학교 8회 졸업생인 제자 강도운 선생님께 선일문구사를 물려주셨습니다. 저는 강화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선일문구사로 취직하여 17년간 점원으로 일하다가 1997년에 인수하였습니다. 올해로 21년 되었네요.”    선일문구사 3대 사장인 최병철씨는 조상 대대로 강화사람이다. 땅 한 평 없어 나무를 해다가 근근이 살던 어려운 가정 형편에 대학 진학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제자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된 은사님의 권유로 시작한 점원 생활. 당초 문구점 일을 오래 할 마음은 없었지만 하루하루 최선을 다했다. 성실한 문구점 청년의 삶의 태도에 감화 받은 서울 아가씨가 강화로 시집을 왔다. 부부는 선일문구사를 인수하였고, 전통을 이어받았다는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IMF시절 가게를 물려받고 1년 동안 자리 잡기 위해 열심히 일을 했어요. 그런데 98년에 강화읍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 진거에요. 대홍수로 가게 안까지 1미터 가량 물이 차올랐어요. 새로 장만한 상품이 다 망가졌죠. 손해액은 당시 금액으로 500만원이 넘었어요. 읍에 전셋집을 구할 만큼 큰 금액이었습니다.”  예전엔 개학, 어린이날, 크리스마스땐 꼬마 손님들로 줄서지우개 하나, 연필 한 개, 개별 단가는 얼마 안 되지만 가짓수가 많은 문구점. 제조사마다 금액이 다르고 손님들이 찾는 물품의 종류도 다양하며 마진율도 높지 않아 운영이 쉽지 않다. 컴퓨터의 발달로 필기도구를 찾는 이도 줄어들고, 몇 년 전부터 시행되고 있는 학습준비물 제도로 인하여 새 학기 용품을 장만하는 학생들도 거의 없다. 개학, 어린이날, 크리스마스 전에는 식사도 못 챙길 정도로 꼬마 손님들이 줄을 섰지만, 그것도 옛말이다. 대신 근처 사무실에서 사무용품을 사러 오는 단골들이 있어 그나마 현상 유지가 가능하다.    “강화군 책자에 1960년 대 강화거리 사진이 실렸는데, 제가 제출한 겁니다. 어느 날 80대 서양 노인이 이 골목을 이리 저리 기웃 거리더라고요. 무슨 일인지 여쭈었어요. 옛날에는 고려산에 미군기지가 있었거든요. 할아버지는 그곳에서 재직했던 미군이셨죠. 노인이 되어서 젊은 시절 근무했던 강화도를 방문하셨더라고요. 1960년대에 강화도 미군기지에 있으면서 찍었던 흑백사진을 꺼내며 사진 속 장소를 찾으셨어요. 서로 말은 안 통했지만 봉지 커피 한잔 타드리고, 안내 해드렸죠. 그랬더니 고국으로 돌아가서 고맙다며 본인이 찍은 60년대 사진들을 CD로 제작해서 보낸 거여요. 강화대교 건설 전에 보트 타고 오가는 사람들, 민둥산인 고려산, 뽑기 하는 아이들, 소방관들이 사용한 리어카, 이런 사진을 강화군청에 제공했어요.”    ▲선일문구사 3대 사장인 최병철씨와 그의 부인군 생활을 제외하고는 강화를 떠나본 적 없는 강화토박이. 최병렬씨는 본인을 강화 지킴이라고 스스럼없이 소개 할 만큼 강화사랑이 각별하다. 고등학교 때 강화사를 탐독할 만큼 강화 역사에 관심이 많아 문화재 하나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다 했던가. 지역 어르신들도 잘 모르는 강화의 구석구석을 누비며 독학으로 향토사를 연구 하는 남다른 애향심의 소유자에게 돈으로도 구할 수 없는 귀한 역사 자료가 주어 진 것은 우연한 사건이 아닐 것이다. 강화읍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으로 예쁘게 단장된 골목을 여전히 지키고 있는 선일문구사. 어디선가 누구에게 필요한 물건은 반드시 제공하는 동네 문구점이 지치지 않고 꾸준하게 작은 가게의 힘을 보여주면 좋겠다. 파이팅.  글 김세라 'i-View' 기자, 사진 선일문구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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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18.03.14 (수)
  • 울동네 맛고수.9화

    [웹툰 · 갤러리] 울동네 맛고수.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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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18.03.14 (수)
  • 김구 선생 어머니가 옥바라지 하던 ‘내동 골목’

    [인천 이야기] 김구 선생 어머니가 옥바라지 하던 ‘내동 골목’

    인천에 새겨진 백범 김구선생 흔적 한국 독립운동의 거목이자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백범 김구선생(1876.8~1949.6). 김구 선생은 인천과 오랜 역사적 인연을 맺고 있다. 인천문화관광해설사들은 인천시민은 물론 인천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인천의 관광지 소개는 물론 그 장소에 담긴 역사적 이야기를 들려주며 인천관광문화를 알리는 첨병역할을 한다. 인천문화관광해설사들은 더 많이 인천을 알고 공부하고자 작은동아리를 운영하고 있다.​ ▲ 제물포 선착장. 한중문화관에서 아트플랫폼까지 이어지는 자리다.​​  인천 감리서→ 객주골목 등 김구 흔적 체험 3월 인천문화관광해설사회 내에 인천문화관광해설사문학동아리(이하 인문동)에서는 첫 답사지로 김구선생의 백범일지에 나타난 인천의 독립운동 현장을 찾았다. 답사는 지난 3월 12일 진행했다. 올해 첫 답사장소로 백범 김구가 인천에 남긴 독립운동 장소가 선택된 이유는 2019년이 3.1운동과 상해임시정부 100주년을 맞는 시기로 올 1년간을 인천내 독립운동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다. 상반기는 상해임시정부의 상징적인 인물이며 인천과도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백범 김구 선생님의 발자취를 찾아 가는 여정을 선택했다. ‘인문동’에서는 ‘백범일지’를 분석해 가며 백범 김구선생의 인천에서의 행적을 찾아 그 의미를 되새기기로 했다. ‘인문동’ 회원들은 한중문화관에서 모여 100여년 전 김구가 걸었던 길을 다시 밟으로 그의 독립운동의 역사를 되새겼다.   ▲ 세창양행 옆 창고제물포구의 형성과 선착장 건설, 쏟아져 들어오는 근대문물,인천을 대표하는 건축물들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비교하며백범 선생님이 처음 황해도에서 인천 감리서 감옥으로 오실 당시 보셨던인천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1883년 개항 직후 촬영된 제물포 일대의 모습이다. 앞쪽에 올망졸망 이어진 초가와는대조적으로 각국 조계에 서양식 건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산 정상에 세창양행 자택이 자태를 뽐내고 있다.▲ 감리서 삼문길​개항의 중심이었던 감리서와 백범 선생님이 수감되었던 감옥을 현장에서 확인해 가며,당시 백범 선생님의 부친께서 심문받으러 나오는 아들을 내려다보시던내리 마루에서 감옥과 접해 있던 도로 변의 문과 삼문의 역할을 추측해 보았다.​▲ 재판소장 사택에서 보이는 감리서로 통하는 돌계단​​​백범 선생님의 어머님 곽낙원 여사가 옥바라지를 위해 일을 하셨던객주집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가 없지만,현재 객주집 건물들이 남아있는 내리교회 옆 골목을 지나근대문물의 통로로 보부상들의 출입이 잦았던용동 초기 축현역을 바라보며 오늘의 답사를 마쳤다.​▲ 객주 이순영의 집 월아천​▲ 감리서에서 한국인 부두까지▲ 어시장이 있었던 칼국수 골목 ​​ 인문동은 한중문화관에서 시작하여 김구선생의 독립운동과 관련있는 세창양행 창고(현재 중앙동상가 쪽), 개항의 중심이었던 감리서가 있었던 장소와 재판소장 사택에서 감리서로 통하는 돌계단(내동 83번지), 백범 선생의 어머님 곽낙원 여사가 머물며 옥바라지를 했던 골목과 객주집 일대(내동일대) 감리서에서부터 한국인들이 어업을 하고 어선이 들어오던 부두(신생동 일대), 어시장이 있던 칼국수 골목(신포동 일대) 등을 다니며 백범 김구 선생의 독립을 위한 고단했던 그의 자취를 느끼며 체험했다.   현덕 ‘남생이’, 김중미 ‘괭이부리마을 아이들’ 등 현장답사 한편 인천문화관광해설사회 교육부에서는 2017년부터 인천을 소재로 한 근대문학작품 속에 나타난 그 당시의 장소를 찾아 떠나는 문학답사 동아리를 만들어 활동해 왔다. 현덕의 작품 ‘남생이’에서는 작품의 배경이 되는 호두형 포구를 보았고, 작가가 살았던 화평동과 부두노동자들의 노동 현장이었던 염부두를 찾아 작품 속에 표현된 부두 주변이 현재 어떤 모습으로 남아있는지 그 흔적을 찾아보았다. 김중미 작가의 ‘괭이부리마을 아이들’에서는 작품 속의 배경이 되는 만석동 9번지 일대와 작품 속에 표현된 부두와 철로가 있었던 만석동 43번지 일대. 옛 외국인 묘지 부근에서 숙희 자매의 엄마가 사고로 죽은 아버지의 위로금으로 비디오 가게를 차렸던 인천역까지 함께 걸으며 작품속 주인공들의 당시의 고통과 생각을 상상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강경애 작가의 ‘인간문제’ 작품 속에 나타난 배경은 우리나라 노동의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는 여행이었다. 한국인들이 살았던 답동 5번지와 정미소 선미공들이 흰 수건을 쓰고 새벽에 노동현장인 정미소로 출근하던 긴담모퉁이 길을 희미하게 비추어주던 전신주, 하루 노동을 마치고 끼니를 때우던 주막이 있던 거리와 하역부두노동자들의 대투쟁이 있었던 축항 창고들, 여주인공이 노동자로 일하고 있던 동양방적의 안과 밖의 모습, 동양방적 여공들이 소풍이라며 줄을 지어 걸어가던 월미도 길을 당시의 흔적을 찾아가며 걸었다. 글, 사진 장회숙 인천문화관광해설사회 교육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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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18.03.14 (수)
  • 130년전 호텔로 떠나는 '타임슬립 여행'

    [탐방] 130년전 호텔로 떠나는 '타임슬립 여행'

    ​국내 최초 대불호텔 전시관 변신, 4월 6일 오픈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로 알려진 대불호텔이 전시관으로 변신하여 4월 6일 오픈한다. 대불호텔은 인천개항장 거리에 일본인 사업가 호리 일가가 1887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건설한 빨간 벽돌로 지은 서양식 3층 건물이었다. 처음에는 2층 규모의 일본식 목조가옥이었다. 호텔에는 당시로서는 신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서양식 침실과 식당, 피아노 등을 갖추고 본격적으로 서양인들을 손님으로 맞아 영업을 했다. 당시 대불호텔에 드나들었던 유명인사들로는 선교사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영국인 탐험가 새비지-랜도어 등이 이곳에 투숙하고 기록을 남겼다. 대불호텔의 전성기였다.  대불호텔은 1899년 경인철도가 개통하면서 극심한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쇠락한 뒤 중국요리집으로 바뀌었지만 결국 1987년 철거된 뒤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 오픈을 앞두고 있는 대불호텔 전시관중구는 터만 남아있던 한국 최초의 호텔인 대불호텔을 지난 2년간 공사를 통해 복원했다. 대불호텔 터를 사들였던 한 사업자가 공사 중 호텔 건물 잔해를 발견했고, 문화재청의 보전 권고로 옛 모습을 되찾게 된 것이다.  1층에 마련된 제1전시실의 명칭은 ‘개항과 대불호텔’로 관람객들이 지나가면 센서가 작동해 옛날 대불호텔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영상으로 만든 맵핑영상을 볼 수 있다. 대불호텔의 시작부터 중화루 이야기, 호텔에 숙박했던 외국 유명인사들의 기록 등 다양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또 1층 전시실 일부 바닥은 지하에 보존되어 있는 옛날 호텔의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유리로 꾸몄다. ▲대불호텔은 영업이 악화된 뒤 중국 요리집인 중화루로 바뀌었다. 1950년대~이후(인천개항박물관)​​▲옛 대불호텔 및 중화루 건물, 1970년대 (인천개항박물관)​​▲개항장-본정통과-대불호텔,1896 (인천개항박물관)​​▲ 1900년대 호텔 객실로 꾸며진 전시관 내부 2층 전시실은 ‘근대 호텔과 신문물’로 1900년대 초 호텔에서 사용했던 고풍스런 침대, 침대시트, 이불부터 가구, 장신구 등을 재현해 놓고 있다. 그 외에도 당대에 운영됐던 손탁호텔, 반도호텔, 철도호텔 등에 대한 소개내용을 함께 볼 수 있다. 2층 전시실에서는 옛날 호텔시절 있었던 발코니를 그대로 재현했다. 발코니에서는 인천 개항장거리는 물론 차이나타운의 모습도 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옛날 대불호텔 기록에는 3층에 대한 내용은 없다. 구는 근대 서양식 호텔 대부분이 숙박시설이라는 본래 기능외에도 연회장, 살롱 등 다양한 사교활동이 이뤄졌다는 것에 근거해 3층을 연회장으로 꾸몄다. 대불호텔에 피아노가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이곳에는 백년이 넘는 오르간을 놓아 클래식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 다. 중구 학예사의 말에 따르면 당시 피아노라는 말이 지금 우리가 쓰는 피아노가 아닌 오르간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고 말한다. 대불호텔 전시관은 3월30일부터 일반에게 공개하고 정식 오픈일은 4월 6일로 예정되어 있다. 전시관은 대불호텔 터에 제1관(지상 3층)과 1960∼1970년대 중구 생활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제2관(지하 1층·지상 2층)으로 조성했다. 입장료 1천원. 글 이용남 ‘i-View’편집위원, 사진 서은미 자유사진가, 중구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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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18.03.14 (수)
  • “무관 배출하며 위기때마다 나라 지켜”

    [인천 이야기] “무관 배출하며 위기때마다 나라 지켜”

     500년 역사 간직한 강화군 불은면 구씨 집성촌​ 일흔이 넘은 친정아버지는 여전히 케이블 채널에서 재방영 중인 농촌드라마 ‘전원일기’를 챙겨보신다. 1980년부터 2002년까지 MBC에서 방영했던 ‘전원일기’는 남녀노소 모두에게 사랑을 받았던 국민드라마였다. 압축 성장으로 인한 근대화 과정에서 ‘삶터’를 잃어버린 도시민의 DNA에도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 대는 실개천이 회 돌아가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저장되어 있다. 아파트 위주의 단절된 주거 환경 속에서 온갖 이웃 갈등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요즘, 복지 선진국에서 주목하는 ‘따뜻한 공동체’의 요소가 남아있는 강화의 농촌마을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그 중, 어머니의 품처럼 넉넉한 불은면 고능리는 올해로 500년이 된 능성 구씨 강화 종중의 집성촌이어서 눈길을 끈다.   ▲ 새로운 이웃에게 고추장 담그는 법 전수​​하는 어르신들  기묘사화에 연루된 후 1519년 강화도 불은면에 정착 나주지역의 토착성씨인 능성 구씨의 11대조는 기묘사화에 연루 되어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 1519년에 강화도 불은면 일대에 자리를 잡는다. 연산군 시절부터 각종 사화에 시달림을 당했던 능성 구씨 강화 종중 입향 시조는 후손들에게 ‘절대 벼슬길에 나가지 마라’는 유지를 남겼다. 이에 능양 구씨들은 중앙 정계 진출 보다는 개인 수양을 위한 학업에 정진하거나, 문과 대신 무과에만 응시를 한다. 그래서 능성 구씨는 나라에 위급한 일이 닥칠 때마다 목숨을 걸고 싸우는 무관들을 배출 했다. 잘 알려진 인물은 병자호란 당시 순절한 구원일 장군이다. 나라에 충절하면 3대가 가난하다고 했던가. 인조 실록에 의인으로 기록된 구원일 장군이지만, 초야에 묻혀 조용히 살아온 능양 구씨들의 살림은 넉넉하지 못했다. 제때 손질 하지 못해 초라해진 사당은 비교적 최근에 새 단장을 하였으니, 능양 구씨들의 검박한 성정을 짐작할 수 있다.   ​▲ 능양구씨 종친회장​​▲ 구원일 장군 사당​​​  “불은면에 구씨 집성촌이 다섯 쯤 됩니다. 그 중에도 우리 마을은 입향조 선산과 구원일 장군의 사당이 있는 으뜸 마을이지요. ‘고능리’ 명칭에서 예상되듯이, 우리 동네는 예로부터 ‘능골’이라고 했어요. 학계에 보고되지는 않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이곳이 태조 왕건과 그의 아버지 능이 있었던 자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강화사에 의하면, 고려 고종이 강화도로 천도하면서 태조 왕건과 그의 아버지 능을 강화로 이장했다고 하거든요. 두 번째 이장지가 선원면인건 확실한데, 첫 번째 장소는 정확하지가 않아요. 우리 마을에는 왕릉 앞 홍살문이 있었다는 ‘대문재’와, 왕실 원찰로 추정되는 ‘자은사터’가 전해오고 있어요. 또한 마을의 수호신 천년 넘은 은행나무가 자은사터 마당을 지키고 있지요. 부모 세대에는 밭을 갈다가 장개석 같은 왕릉 석물이 나오기도 했데요.”  1,000년 된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지켜주는 동네 능성 구씨 종친회장인 구예서 옹에 따르면, 고능리는 풍수지리상으로 고려 왕릉 자리의 특징을 전부 갖춘 배산임수 지형이다. 위협적이지 않고 아늑한 뒷산과 선녀가 와서 목욕하고 갔다는 선녀개울이 있는 ‘능골’은 지난 500년간 능성 고씨들의 소중한 보금자리였다. 충분한 일조량과 기름진 옥토. 양지 바른 마을에서 쑥쑥 자란 고능리의 농산물은 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마을 주변을 병풍처럼 두른 감나무에서 수확한 장준감(임금님 수랏상에 올랐다고 하는 강화의 특산품)은 당도가 높아 부르는 게 값이니, 풍수지리는 몰라도 고능리가 살기 좋은 고장이라는 것은 알 수 있다. ▲ 천년은행나무​​​​​▲ 무료 이발봉사​​​​  상숙이네, 자매네, 자춘네, 자완네, 동지네, 문성네, 할머네, 순자네. 8촌 이내의 가까운 친척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고능리 어르신들은 오늘도 일어나자마자 마을회관으로 향한다. 고능리 사람들은 매일 마을회관에 모여서 점심을 함께 나눠 먹는다. 오늘은 마침 ‘할아버지 이발의 날’. 몇 해 전 고능리로 이사 온 정대길씨는 본디 파주에서 이발소를 운영했다. 은퇴 후 살 곳을 찾다가 고능리를 선택한 정대길씨는 염려와 달리 이주민들을 환대해준 고능리 어르신들을 위해 한 달에 한 번씩 마을 회관에 무료 이발소를 연다. 할아버지들이 멋쟁이로 거듭나는 동안, 부엌에서 할머니들은 점심 준비에 한창이다. 오늘의 메뉴는 누룽지와 무나물. 삶은 무는 소화가 잘 되어서, 고능리 어르신들이 즐겨 드시는 반찬이다. 평생을 함께 했던 이웃들과 정을 나누는 기쁨이 있기에 30인분 마련도 웃음이 가득하다.   ▲ 점심준비하는 할머니들​​​​​  “양도면에서 시집왔어요. 아무것도 모르고 혼례를 치룬 후, 가마니만 짰어요. 그래도 이웃인 시어른들이 먼저 다독여 주어서 시집살이가 고단하지 않았죠. 신랑보다 시어른들이 더 좋았다니까요. 구씨 집성촌이지만, 우리 마을이 텃세가 없어요. 몇 집 있는 한씨, 외지에서 온 사람들 두루 두루 다 잘 지내요. 오늘도 인천에서 이사 온 옆집 사람에게 고추장 만드는걸 알려줬어요. 비법이랄 것은 없고. 전기밥솥에 엿을 고아서 단술 만들고, 엿기름, 소금, 고추 가루만 넣어요. 우리 집은 원래 장을 묵혀 먹거든요. 메주가루 넣고 묵히면 까맣게 되니까, 빛깔 나빠질까봐 안 넣죠.”   ▲ 장준감으로 만든 곶감 말랭이​  20년 묵힌 장, 가마솥과 아궁이, 밥을 주는 괘종시계. 세월을 거스르는 오래된 습관은 그대로여도, 새로운 사람들은 언제든 환영이다. 단오가 오면 1000살 넘은 아름드리 은행나무 가지에 그네를 매고, 그늘 아래에서 동네잔치를 여는 ‘따뜻한 농촌공동체’가 있어서 참 다행이다. 특히, 강퍅한 생활에 지쳐 마음의 고향이 필요한 도시인들에게는. 글 김세라 I-View 기자, 사진 나윤아 자유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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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18.03.12 (월)
  • 부평, 자동차 산업 메카

    [그때 그 시절] 부평, 자동차 산업 메카

    ​숨어있는 부평이야기 - 일본 자동차 부품공장부터 GM까지 ​자동차 산업의 시장 1903년, 고황황제 즉위 40주년을 기념하는 칭경식(稱慶式)에 사용할 자동차가 조선에 들어왔다. 이후 1910년대 황실이 아닌 민간에 극히 제한적으로 자동차가 공급되었고, 1920년대 시내버스와 택시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시간이 흘러 2017년 말 기준, 우리나라 자동차 등록 대수는 2천2백52만8천295대로 집계됐다. 인구 2.3명당 자동차 1대를 보유하고 있는 꼴이다. 대다수의 가정에서 자동차는 선택이 아닌 필수로 인식하고 있으며, 각 가정에서 2대 이상의 자동차를 보유한 경우도 더 이상 어색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의 메카를 뽑자면, 십중팔구 인천 사람들은 부평을 떠올릴 것이다. 일제강점기부터 지금까지 이어진 부평의 자동차 산업은 인천 지역의 사회・경제에 직간접적으로 큰 영향력을 끼쳐온 것은 물론,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 역사에서 한 축을 담당해왔다. 실제 부평과 자동차 산업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로 인식되어 왔다. 자동차 산업의 메카라 부를 정도로 말이다. ​▲국산자동차(國産自動車) 부평발조공장(富平發條工場) 도면(인천광역시립박물관 소장)​  일제강점기, 일본 자동차의 부품공장으로 일제강점기 부평에 자동차 부품 공장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당시 설립된 회사 이름이 ‘조선국산자동차(朝鮮國産自動車)’였기에 한국산 자동차를 만들었다고 오해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당시 일본 회사 소유의 ‘조선에 위치한’ 공장에 지나지 않았고, 식민지 현실에서 ‘국산’ 또한 한국산이 아닌 일본산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937년 7월 6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조선국산자동차(주) 관련 내용이 상세하다. 이 기사에 따르면 조선국산자동차(주)는 1937년 봄에 영업을 개시하였는데, 도쿄 가스전기공업(東京瓦斯電氣工業)(주)로부터 완성차 판매를 할당 받은 일종의 자동차 판매회사였다. 영업 개시 당시 200대의 판매할당을 받았으나, 같은 해 7월에는 할당량을 150대 늘렸다. 또한 도쿄 자동차제조(東京自動車製造)(주)의 소형자동차 쓰쿠바호(筑波呉)의 판매권을 획득하기도 하였다. 애초 조선국산자동차(주)는 완성차 판매회사였으나, 설립 초기부터 자동차 생산에 대한 의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7년 10월 26일자 『동아일보』 기사에서 조선국산자동차(주)는 창립초부터 제작에 목표를 갖고 있었고, 자동차 제작 공장 건설에 대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었다고 보도하였다. ▲새나라공업(주) 부평공장 자동차 조립 모습  조선국산자동차(주)가 부평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38년의 일이다. 1938년 2월, 조선국산자동차(주)는 부평역 부근에 20여만 평의 공장부지를 매수하였다. 한편 같은 해 4월 도쿄 자동차공업(주)와 조선국산자동차(주)의 합병 문제가 제기된다. 도쿄 자동차공업(주)는 1937년 4월 일본의 자동차공업(주)와 도쿄 가스전기공업(주)가 합병하여 출범한 회사로 군용 트럭을 위주로 제조하고 있었는데, 조선국산자동차(주)에서 매수한 부지에 승용차 제조 공장을 건립하고자 하였다. 1939년 두 회사의 합병이 이루어졌는데, 부평에는 당초 계획과 달리 자동차 완성품을 제작소가 아닌 자동차용 스프링 공장이 건립되었다. 지금의 산곡동 미산초등학교 자리다.​▲1960년대 신진자동차공업(주) 부평공장 내부 사진 한편 1941년 4월, 도쿄 자동차공업(주)는 디젤자동차 전용허가를 받고 디젤자동차공업(주)로 개칭하였다. 1943년 디젤자동차공업(주)는 공장과 사택을 건립하였다. 지금의 부평동 부평고등학교 일대다. 2014년 인천광역시립박물관에서 편찬한 보고서에 따르면, 조선국산자동차(주)와 디젤자동차(주)의 사택은 각각 15동, 10동 규모로 공장 인근에 만들어졌는데, 현재 조선국산자동차(주) 사택이 5동, 디젤자동차(주) 사택이 2동 남아있다고 한다.   해방 이후 지금까지 이어진 자동차 산업의 뿌리 1962년 8월, 새나라공업(주)이 조선국산자동차(주) 공장 부지에 현대식 자동차 조립공장을 설립하여 자동차를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당시 정치적 문제와 생산 공장의 문제로 인하여 설립된 다음해 7월에 문을 닫았다. 1965년 신진자동차공업(주)는 파산한 새나라공업(주)를 인수하여 일본 도요타와 기술 제휴를 체결하였다. 신진자동차공업(주)은 약 1백65만㎡의 규모의 자동차 제조공장을 세우고 코라나, 크라운, 퍼플리카 등의 승용차를 조립 생산하였다. 1972년에는 미국의 지엠(GM)과 공동으로 자본금을 출자하여 지엠코리아(GMK)를 설립하였는데, 석유파동 등으로 경기가 어려워졌다. 신진자동차공업(주)의 경영이 어려워지자 1976년 산업은행이 한국 측 지분을 인수하여 새한자동차(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 1970년대 새한자동차 광고지  1983년 대우그룹에서 재인수하며 대우자동차(주)로 거듭났다. 1992년 지엠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독자적인 개발과 생산을 이어가다가, 2002년 다시 GM과 양해각서를 체결하여 GM대우오토앤테크놀로지(주)를 출범하였다. 당시 부평공장은 대우인천자동차(주)로 분리되었다가 2005년 다시 인수합병되었다. 2011년 한국GM으로 사명을 바꾼 후, 한국GM의 부평공장이 되어 현재에 이른다.  한편 한국GM 홈페이지에서는 부평공장을 ‘한국GM의 본산(本山)’이라고 표현함과 동시에 ‘국내 최초의 현대식 자동차 공장’이라 명시하고 있다.   한국GM의 철수 문제와 지역 경제 최근 한국GM의 철수 문제가 언론의 일면을 장식하고 있다. 한국GM이 군산공장을 폐쇄하기로 결정한 가운데, 군산의 지역 경제가 휘청거릴 것이라는 위기감이 확산되고 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다른 지역의 공장 역시 폐쇄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한국GM의 최대 규모인 부평공장 역시 위기감에 휩싸였고, 지역 언론에서 이와 관련된 보도가 줄을 잇고 있다. 한 언론보도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부평공장에서 일하는 근로자와 1~3차 협력업체 등 관련 업체 종사자는 총 5만2천850명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부평구는 물론 인천시의 입장에서도 지역 경제에 커다란 영향을 기치고 있기에 시 차원의 대응을 모색해야 한다는 지적도 수차례 제기되고 있다. 지역 경제를 위한 현명한 해결책이 요구된다. 글, 사진 손민환 부평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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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18.03.12 (월)
  • 웨이보기자단 첫 미션 “인천을 홍보하라”

    [동네방네] 웨이보기자단 첫 미션 “인천을 홍보하라”

    인천시 3기 웨이보기자단 발대식 가져 “중국에 알리는 인천소식은 우리가 책임진다.” 인천시는 대 중국 온라인 홍보강화를 위해 운영중인 공식 SNS 채널 ‘웨이보’의 운영 활성화 방안의 일환으로 제3기 인천시 웨이보 기자단을 선발했다. 웨이보기자단은 인천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양한 현장을 취재하여 중국인들에게 인천의 생생한 모습을 전달한다.  이번에 모집한 웨이보기자단은 16명으로 ▷인천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있는 재한 중국인 ▷개인 계정의 웨이보 또는 블로그 운영 경험이 있는 사람 ▷현장 취재 및 정기회의, 워크숍 등 기자단 활동 참여가 가능한 사람들로 구성했다.올해로 3년째를 맞고 있는 웨이보 기자단은 그간 인천의 관광명소, 문화현장, 정책현장, 중국과 관련된 인천의 역사적 장소 등을 취재하여 웨이보에 포스팅하여 중국에 인천을 알리는 역할을 해왔다. 웨이보 기자들은 3년간 수십 건의 인천 관련 기사를 올렸다. 웨이보 기자단이 올린 기사중 ‘한 가을, 봄인듯한 송월동 동화마을 방문’ 기사는 가장 많은 조회수를 올렸다.  이번에 선정된 웨이보 기자단 3기에게는 인천시 블로그 기자단 위촉장 및 기자증을 발급하고 소셜미디어 관련 교육 및 사진, 동영상 편집 교육 등 실시, 채택된 기사에 대한 소정의 원고료 지급 및 월별 우수기자 선발, 워크숍 또는 팸투어 등 인천관광지, 명소 탐방 기회를 제공한다.  인천시 웨이보 기자단은 내국인이 생각하는 콘텐츠의 틀과 한계를 벗어나 재한 중국인의 시각으로 작성한 콘텐츠를 통한 다양성을 추구하고 다양한 주제를 통해 중국인에게 인천에 대한 이미지 정립과 인천 바로 알리기의 도구로 활용하며, SNS를 톷해 인천과 중국을 하나로 이어주는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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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18.03.12 (월)
  • ‘1인 방송콘텐츠 제작자’ 모여라 등

    [인천뉴스] ‘1인 방송콘텐츠 제작자’ 모여라 등

    ​  인천시는 (재)인천경제산업정보테크노파크에서 운영 중인 인천N방송에서 4차 산업혁명 시대 가장 유망한 일자리로 각광받고 있는 크리에이터가 되기 위한‘1인 방송콘텐츠 제작자 양성 및 MCN 실무과정’을 국비지원의 무료 교육으로 추진한다. (재)인천경제산업정보테크노파크는‘인천N방송’플랫폼을 기반으로 한 인천 특화 영상 콘텐츠 활성화 및 방송인력 양성을 위하여 고용노동부의‘지역·산업맞춤형 일자리 창출 지원사업’공모의 1인방송분야 전문인력 양성과정 제안에 선정되어 인천광역시 연수구와 컨소시엄으로 추진한다. 교육과정은 누구나 쉽게 제작 가능한 1인 영상을 다양한 채널을 통해 송출하여 막대한 수익을 창출하는 크리에이터의 성공 전략을 주로 다루게 되며, 1인 영상 제작자의 저작권 관리ㆍ콘텐츠 유통ㆍ광고 유치 등 사업 전반을 관리하는 MCN(Multi Channel Network) 실무 교육 및 관련 취·창업 사후지원과정이 포함되어 있어 올해 취·창업을 준비하는 구직자에게 희소식이 될 예정이다. 모집기간은 3월 12일(월)부터 4월 12일(목)까지 1달간이며 자세한 사항은 (재)인천경제산업정보테크노파크 홈페이지(www.ibitp.or.kr)를 통해 공지할 계획이다. 인천시 택시산업 발전 위한 상생협약 체결 인천광역시 택시산업 발전을 위해 인천광역시, 인천광역시개인택시운송사업조합, 한국스마트카드, 이비카드가 상호 협력 및 신뢰 구축, 카드결제 수수료 인하 등을 실현하기 위해 지난 9일 ‘인천광역시 택시산업 발전을 위한 상생 협약’을 체결했다.     이번 협약은 인천광역시가 여신전문금융업법 개정에 따른 택시 내 IC카드단말기의 신속한 교체와 시내 운행 택시들의 영업환경 개선, 예산절감을 목적으로 각 기관이 협의해온 결과다. 협약에 따라 인천광역시 내 개인택시 카드결제 수수료를 현행 1.9%에서 1.7%로 0.2%를 인하하며, 유지관리수수료는 올 해에는 일부 인하하고 내년부터 무상유지관리를 시행하는 것으로 약속했다. 이를 위해 인천광역시에서는 조합과 양 카드사에서 추진하는 카드결제 IC카드 단말기 장착사업의 조기시행을 위해 조합과 카드사 간 이해관계를 중재·조정하는 등 행정적 지원 및 부가가치 창출에 적극 힘쓸 방침이다. 인천광역시개인택시운송사업조합과 양 카드사는 안전한 카드결제서비스 제공을 위한 IC카드단말기 신속한 장착에 적극 협력하기로 했으며 발전적인 서비스 및 혜택을 제공하기 위하여 지속적으로 노력하기로 했다.   스카이 미디어아트 ‘달빛거리 송현야시장’에 떴다 인천시 동구 송현시장은 지난 8일‘달빛거리 송현야시장’스카이 미디어아트 점등식 행사를 개최했다. 이 사업은 송현시장의 주변 관광인프라 부족과 지속적인 고객 유입을 위해 구상한 사업으로 “스카이 미디어아트”는 다양한 그래픽 화면과 문자, 사진전송, 포토죤을 통한 화면 표출로 구성되어 야시장을 찾는 시민에게 새로운 야간 관광명소로 자리매김 할 것으로 보인다.     송현야시장은 행정안전부 야시장 공모사업에 인천 최초로 선정되어 전년도 6월에 개장하였으며 매주 금요일, 토요일 야시장이 열리고 있어 침체된 전통시장에 활력을 불어넣는 구심점을 마련한 바 있다. 한편, 2단계 사업은 송현시장 내 모든 구간에 20억 원의 예산을 들여 금년 중 스카이 미디어아트를 추가로 설치하여 다양한 볼거리, 즐길거리가 있는 인천의 대표시장으로 변모시킬 계획이다. 이날 행사는 유정복 인천광역시장과 안상수 국회의원, 이흥수 동구청장, 지역주민 등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송현야시장에 새로운 볼거리를 조성한 미디어아트 점등식을 축하하기 위한 자리로 송현시장 내 아케이드 상층부 80미터 구간에 LED전광판을 설치하여 전통시장 중 처음으로 불을 밝혔다.   ‘Go-Together, 같이가 잡(JOB)’프로젝트 추진 인천시와 인천대학교는 2018년 맞춤형 취업코칭제 프로그램인 ‘Go-Together, 같이가 잡(JOB)’프로젝트 사업을 추진한다. 맞춤형 취업코칭제 프로그램인‘Go-Together, 같이가 잡(JOB)’프로젝트 사업은 ▷블라인드 채용의 도입으로 특히 청년채용에서 직무 역량의 중요성이 대두됨에 따라 산업·직무에서의 요구 특성에 맞는 체계적인 취업준비가 필수적인 과제가 되었고, ▷성공적인 취업을 위에 진로·취업 준비도에 따른 맞춤 취업 전략 수립 및 직무중심 역량강화를 통한 취업성과 극대화 필요성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개인별 진로취업지원 서비스의 질적 제고를 위한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취업진로 지원체계 구축을 통한 취업지원의 필요성에 의해 추진하게 되었다. 주요 사업내용은 전· 현직 직무전문가와 함께하는‘산업·직무 특강’, 정확한 기업·채용 정보 제공을 위한‘기업·채용설명회’, 진로·취업준비도 점검을 위한‘개인취업상담’, 직무전문가와 함께하는‘직무그룹코칭’으로, 대상은 4학년 대학생 및 수료·졸업생, 프로그램 참여 희망자 등이다.     인천시와 인천대학교는 본 사업을 통해 개인별 진로·취업 준비도 및 직무 역량 진단을 통한 산업·기업의 요구에 적합한 직무역량 강화 및 체계적인 취업지원을 통한 청년취업을 현실화 하고, 직무특성 및 실제 근무 환경의 장단점을 파악함으로써 산업 및 채용시장 변화에 대한 적응력 강화 및 취업 경쟁력 제고에 도움을 주고자 한다. 2018년 맞춤형 취업코칭제 프로그램인‘Go-Together, 같이가 잡(JOB)’프로젝트 사업에 대한 문의사항은 인천대학교 취업경력개발원(032-835-9610) 및 인천대학교 홈페이지(inu.ac.kr/user/boardList.do?) 공지사항을 참고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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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18.03.12 (월)
  • 러일전쟁 승리의 전리품이었다

    [그때 그 시절] 러일전쟁 승리의 전리품이었다

    골목길 보물찾기 - 신흥초 러시아 군함 포탄과 돛대 신흥초등학교 교정에 가보면 본 건물과 운동장과 연결되어지는 중심 화단에 러시아 함대였던 바리야크호의 포탄과 돛대(mast)가 서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1883년 인천은 개항되었다. 개항 당시 인천으로 건너온 일본인들은 교육을 중시하여 근대적인 교육을 시행하였는데, 신흥초등학교의 교적부에 놀랍게도 1885년도 학생들의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1883년 개항과 함께 많은 수의 일본인들이 인천에 거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1884년 일본인 교육위한 아사히 소학교로 시작 신흥초등학교는 1884년 4월 1일 일본인들의 아사히 소학교로부터 시작되는 학교였다. 그들은 처음에 일본 사찰인 본원사의 승려들에게 교육을 위탁하였는데 일본인 거류민이 증가하자 1892년 일본 거류민회에서 전임교사를 초빙하여 심상고등소학교로 문을 열었다. 학생수가 많이 늘어나자 1898년 지금의 신흥초등학교 이 자리에 새로운 건물을 짓고 이전한다. 우리나라 학생들은 1890년도 이후에 근대교육을 받게 되는데, 이 자리에서 1885년 근대적인 초등 교육이 일본인들에 한해 시행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서구제국 중 하나를 이겼다는 자부심이 대단하였고, 자라나는 어린이에게도 호전성을 심어주기 위한 수단으로 학교 교정에 이렇게 러시아 함대 바리야크호에서 건져낸 포탄과 돛대를 전시했다. 물론 우리도 영화초등학교에서 목총 들고 제식훈련을 하기도 했다. 우리한테는 국가관을 심어주고 애국심을 키워준다는 의미로 일본에게는 호전적이고 침략을 부추킨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게 문제가 있을 수도 있겠으나 그렇게 그것을 보고 자란 일본인들은 제국주의 침략 수단으로 전락되었던 것이다. 개항장의 중심인 이곳에 자리한 일본인 학교, 그곳에 전시된 바리야크호의 포탄은 우리에게 개항 당시의 일본인들의 사고방식을 느낄수 있는 중요한 표식임에 틀림없다. 우리에게 문화재도 아닌 고철덩어리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남다른 의미를 주는 이 포탄은 지난 1904년 러일전쟁을 바라보는 시각도 일깨워 주고 있다. 지금 우리가 우호적으로 러시아와 교류하고 있으나 우리의 주권과 영토를 빼앗기 위한 그들의 싸움인 러일전쟁과 그 결과 희생되어진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표식이다.  <신흥초 러시아 군함 포탄과 돛대> ㆍ위 치 : 인천시 중구 제물량로 134 (답동 6번지) 신흥초등학교 교정 ㆍ설치연도 : 1905년 이후 원고출처 : 골목길 숨은 보물찾기(2015년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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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18.03.14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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