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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광채굴로 부를 일군 '영종도 부자'

    [인천 이야기] 금광채굴로 부를 일군 '영종도 부자'

    영종도 '99칸 고택'과 ‘은골’ ‘금골’ 이야기영종도 지명에는 재미있는 유래가 숨어있다. ‘당골’은 당굿을 하던 곳, ‘잔다리’는 작은 다리가 있던 장소, ‘도장간’은 병든 말을 도살하던 곳 등 지역의 이름 속에는 과거 그곳이 어떤 장소인지 짐작할 수 있다. 영종도에는 ‘은골’과 ‘금골’로 불려지는 지명이 있다. 한때 금광과 은광이 있었으며, 금광채굴로 큰 부자가 되었다는 김달현 생가에 얽힌 이야기가 내려오고 있다.  ▲ 99칸 저택으로 알려진 영종도 운서동 고택    금광이 있던 영종도 영종도는 오래전부터 시작된 도시개발로 구옥을 찾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촌부들이 살았던 슬레이트 지붕의 구옥은 헐고, 보상 받은 돈으로 번듯한 2층 벽돌집을 올렸다. 이처럼 영종도 주민들이 살았던 가옥의 형태를 찾기 힘든 가운데 보물처럼 근엄한 자태를 품고 99칸의 고택이 아직도 남아 있어 놀라움을 안겨준다. 원룸촌과 다가구촌으로 바뀌어 버린 운서동 끝자락에 위풍당당 고랫등 기와집이 백운산자락을 지키고 있다. 영종도 원주민들은 이곳을 99칸 집으로 부른다.(실질적으로 99칸인지는 확인이 안된 상태). 이집 문패에는 김흥선이라는 주인장의 이름이 새겨져있다. 하지만 김흥선 씨는 현재 노환으로 아들과 함께 기거하고 이곳에는 과거 쇠경을 받고 일하던 최정심, 성기환 씨 부부가 집을 돌보고 있다. 섬에서 99칸 집을 갖기란 쉬운 일은 아니었으리라. 450평 대지에 대문을 두 곳으로 내고 잘 꾸며진 정원까지 갖춘 고택에는 무슨 사연이 숨겨져 있을까. 이 집은 옛날 영종도에 한때 있었던 금맥과 연관이 있었다. 작년 8월 영종도 한 마을에서 4m 땅꺼짐현상(씽크홀)이 생겼다. 현장조사 결과 구청과 공단은 주민들의 의견과 과거 자료를 토대로 당시 광물을 채취하기 위해 만든 무허가 광산인 것으로 추정했다. 주택 주변에 1930년대 초반 광물 채취가 진행되던 광산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했다. 영종도 곳곳에는 과거 금광채굴로 인한 땅꺼짐 현상이 간혹 발견된다.    금골, 은골의 유래 영종도에는 은골과 동강이라는 지명이 있다. ‘은골’은 은이 많이 생산된 지역이다. '동강마을'은 영종서 제일 먼저 금맥을 찾은 곳이라는 소문나면서 통광(通꾀뚫을통,鑛광물광)이라는 말로 동네를 칭하다가 변음 되어 지금의 동강마을로 불리고 있다. 이 동강마을은 당시 '금골'이라고 하고 '은골'과 구분하여 동네를 칭하다가 '은골'만 남아 지금까지 쓰여졌고 '금골'은 '통광'에 묻혀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과거 영종도는 금과 은이 많이 채광되었다. 영종도 과거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긴 故 정진백 씨 블로그에는 다음과 같은 추억이 담겨 있다. '100여 평 미만의 논과 밭, 또는 개울 등을 파고 광물을 캐는 사람들의 모습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다. 어떤 기구를 통하여 낯선 사람이 동네를 배회하고 금맥을 찾아 헤매고. 금맥을 찾으면 땅파기 작업이 한 달을 두고 이어지며 끝나면 또 다시 다른 장소로 이동하고 그 파헤친 장소에는 물이 고여 작은 호수가 되다. 날이 가물면 거기에 고여 있는 물을 퍼내 말라 있거나 늦게까지 이앙하지 못한 모를 이앙하고 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곳에서 더울 때면 친구들과 멱도 감았던 기억이 있다.'     금맥캐던 채광업자들 갑부됐다는 소문 파다 일제시대 때 시작한 광물찾기 사업은 광복이후에도 이어졌으며 1950년대 들어서도 계속 금맥 찾기가 실패하면서 일확천금을 기대하던 금광업자들은 서서히 파산하거나 영종을 떠났다. 한국전쟁이 끝난 1954년부터 정부의 피난민 정착사업으로 뚝막이사업(간척지 막기)이 전개되면서 다수 채광인력이 이곳으로 흡수되었고 채광사업은 1960년대 중반쯤 사라졌다. 영종도에는 금과 은이 많이 채광되었으며 1919년 김성근이라는 사람이 처음 지금의 동강마을 주변에서 금맥을 발견, 80만여 평의 광산권을 얻어 금을 캐기 시작하였으며 채굴 작업을 하는 족족 성공하여 순식간에 갑부가 되었다. 이 소문이 꼬리를 물고 퍼져나가자, 일본인과 김종현, 김달현, 함창희(동림산업) 등이 광권을 뒤따라 얻어 섬 전체 지역에서 채광하여 부자가 되었고 북한지역 사람들을 포함, 전국 광산 노동자들이 모여들어 한 때는 2만 명의 인구가 상주하는 큰 섬이 되었다.     할 일 없어 놀기만 하던 동네어른들은 그곳에 품팔이를 다녔고 금이나 은이 들어있는 돌을 모아 재래적인 방법으로 금과 은을 가려내는 작업을 하곤 했다. 나중에 작업이 끝난 후 판 곳에서 돈을 벌었다, 허탕을 쳐서 망했다는 등 소문이 따랐다. 지금 그 웅덩이 흔적은 남아 일부는 농업용수를 담는 간이 저수지로 쓰이고 일부는 다시 메워 논으로 쓰이고 있다. 방치된 저수지에서 어린아이들이 멱을 감다가 익사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파낸 흙더미를 모아둔 곳을 광산이들 용어로 ‘버력탕’이라고 칭한다. 그 ‘버력’의 뜻은 광물성분이 섞이지 않은 작업과정의 잔재물인 파낸 흙, 그 광물잽이들이 찾지 못한 허탕진 잡석을 의미한다. 쓸모없으니 버리라는 뜻과 허탕쳤다는 말이 합성된 우리말 변형이 아닐까 생각된다.   금광채굴과 고택 기록에 나와 있는 김달현 금광채굴업자가 바로 99칸 고택의 주인이다. 지금은 아들 김흥선(85세) 씨의 집이다. 김달현 씨는 금광의 노다지로 부를 일궜다. 노다지를 일본에 수출해 많은 부를 축적했고 그의 아들 김흥선 씨는 부흥염전으로 그 부를 이어갔다. 옛 부자들은 혼자 잘 먹고 잘 살지는 않았단다. 김흥선 씨는 못 사는 동네사람들을 많이 도와주었다. 김흥선 씨 부인 양정일 씨는 어렵게 사는 사람들 집 앞에 몰래 쌀을 갖다놓는 선행을 베풀기도 했다.  고택을 지키고 있는 성기환, 최정심 부부는 과거 이 고택의 추수시절을 잊지 않고 있다.  ▲ 벼력탕. 파낸 흙더미를 모아둔 곳을 이르는 광산 용어   “논만 8천600평 농사를 지었어요. 가을철이면 벼만 300가마 수확했지요. 지금은 공원자리가 된 저 곳에 창고가 있었는데 그득하게 쌓여 문이 안 닫힐 정도였지요.” 두 부부는 이곳에서 50년 이상을 살았다. 그들이 생각하는 그 고택은 아마도 90년 이상이 된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85세 김흥선 씨가 그곳에서 태어났고 아버지 김달현 씨가 면장을 하면서 집을 지었단다. “당시 일본에서 목재를 가져와서 지었다고 들었습니다. 그곳에서 태어난 김흥선 씨가 이집에 대한 애착이 많이 있어요. 그의 아들이 아버지 명을 받고 보수를 계속하고 있어서 이렇게 집이 유지가 되고 있지요.” 고택의 내부는 중부지방의 전형적인 가옥형태인 ‘ㄷ’자 형태를 보인다. 여러 개의 거실을 거치면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방이 나온다. 사랑채와 바깥채만 해도 방이 여럿이다. 세련된 내부 조명과 화장실 변기, 욕실, 손잡이를 통해 아주 오래된 고택은 아닌 듯싶다. 한편 집주인 김흥선 씨는 세상을 뜨기 전 이집을 구청에 넘겨 문화재로 지정받을 예정이란다. 영종도 구석구석에는 재미있는 지명과 함께 영종도의 역사적 장소가 보물처럼 숨어 있다. *참고한 블로그: 중구청 공무원이었던 故 정진백 씨 블로그 이현주 I-view기자 o700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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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18.03.05 (월)
  • 인천~ KTX 광명역 셔틀버스 운행 등

    [인천뉴스] 인천~ KTX 광명역 셔틀버스 운행 등

     인천에서 광명역까지 운행하는 셔틀버스가 개통됐다. 인천광역시는 3월 5일 인천에서 광명역으로 운행하는 셔틀버스 개통에 따라 관계자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시승행사를 가졌다. 운행을 개시한 셔틀버스는 3개 노선이며, 버스 16대를 투입하여 노선별 1일 평균 35회 운행하게 된다. ⇒ 6780번 (부평역↔모래내시장역↔만수역↔남동구청↔KTX 광명역) ⇒ 6790번 (원인재역↔인천터미널↔선수촌사거리↔서창도서관↔서창이편한세상↔KTX 광명역) ⇒ 6800번 (청라국제도시역↔한화꿈에그린↔한일베라체↔힐데스하임↔ 가정(루원시티역)↔영아다방↔부평경찰서↔KTX 광명역) 기존 인천에서 광명역(KTX)으로 가는 방법은 대중교통을 통한 접근성이 용이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여러 차례 환승 및 오랜 시간으로 인천시민들의 노선신설에 대한 욕구가 끊임없이 증가하여 인천시에서는 타시도와 수차례 협의를 통하여 운송업체를 선정하여 9개월의 우여곡절 끝에 운행을 개시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또한 광명역에서는 사당행 셔틀버스가 10분 간격으로 운행하고 있어, 이를 이용하면 서울까지의 접근성 또한 좋아질 수 있으며, 지방에서 KTX를 이용하여 인천 관광의 거점으로 빠르게 이동할 수도 있어, 지방이용객들의 인천 접근성도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노선별 환승 노선현황> ⇒ 6780번 (부평역 출발) : 인천도시철도1호선, 시내버스 (1, 1A, 11, 12) ⇒ 6790번 (원인재역 출발) : 인천도시철도1호선, 수인선, 시내버스 (522, 522A, 908, 909, 304) ⇒ 6800번 (청라국제도시역 출발) : 공항철도, GRT, 시내버스 (40, 42-2, 46, 202)  3월부터 지역공동체 일자리사업 본격화 인천시는 오는 3월부터 취업 취약계층의 생계안정과 취업기회 제공을 위해 2018년 지역공동체 일자리 사업을 본격 시행한다. 이번 일자리사업에는 3월부터 6월까지 4개월간 일자리창출 직업상담사 자전거 수리 센터, 중소기업 연계 공동작업장 등 68개 사업장에서 총 319명이 참여하게 된다. 근로조건은 65세 미만 주 30시간, 65세 이상 주 15시간이며 임금은 올해 최저임금수준인 시간당 7,530원이다. 2018년은 지역의 특성·기술·공간 등을 활용해 주민이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일자리사업으로 정체성 확립 및 지속가능한 일자리 모델 발굴과 취업교육지원, 기술 습득 및 민간취업 연계 강화를 통한 생산적 일자리 창출을 목표로 하고 있다. 사회적경제과 관계자는“지역공동체 일자리 사업을 통해 고용취약계층에게 안정적인 일자리 제공과 생활안정에 기여하고 지속가능한 소득증대로 연결될 수 있도록 적극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서구 왕길동에 단지조성 공사 착수 인천시는 서구 왕길동 일원에 524,510㎡ 규모에 달하는 단지를 조성하는 기반시설 공사를 2월 28일 착수했다. 이번에 착수되는 공사는 단지조성과 기반시설 분야다. 주거용지가 273,439㎡(52.1%), 상업용지가 11,909㎡(2.3%), 도로, 공원, 학교, 문화시설, 사회복지시설 등 기반시설용지 239,162㎡(45.6%)를 조성한다. 사업시행자(조합)가 단지 조성 및 기반시설 공사비로 약 682억 원 투입하여 2021년 5월 준공을 목표로 추진된다. 사업시행자(조합) 관계자는 “사업구역 내 문화·복지시설, 공공청사·학교 등 지역 내 부족한 기반시설을 조성해 지역복지 향상과 원주민이 재정착 여건을 최대한 마련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시 관계자는“검단3구역은 인천도시철도2호선 왕길역과 제2외곽순환도로 검단·양촌IC와 가까워 서울 서부지역의 주택수요와 검단산단 등 인근 공업지역의 인구를 상당 부분 수용하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며,“공사 착수를 통해 약 2조원의 경제적 파급효과와 약 3천명의 신규일자리 창출 효과로 지역경제 활성화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전망된다”고 말했다. 깨끗한 수돗물 공급 노후 옥내급수관 개량 지원 인천시 상수도사업본부는 올해 1억5천만 원의 예산을 투입해 시민들에게 깨끗한 수돗물을 공급하는‘노후 옥내급수관 개량지원 사업’을 시행한다. 이번 사업은 그동안 송·배수관 위주의 노후관로 교체를 우선 시행하였으나 깨끗하고 안전한 수돗물을 원하는 시민요구 증대로 수도급수조례 개정을 통해 추진하게 되었다. 지원대상은 1994년 이전 건축물의 옥내 급수관으로 널리 사용됐던 아연도강관을 교체 또는 갱생하고자 하는 건물이며, 수돗물 수질검사 결과 수질기준을 초과하는 경우 아연도 강관 이외의 관도 지원할 계획이다. 공사비 지원은 예산 범위 내에서 지급하며 단독주택 및 공동주택(세대당)은 최대 100만원까지 지원하며, 공동주택의 경우 공용급수관과 세대급수관을 구분하여 지원 신청 시 공용급수관은 세대당 최대 20만원, 세대급수관은 최대 80만원까지 지원 가능하고, 사회복지시설은 최대 150만원까지 지원한다. 시는 올해 첫 사업으로 1억5천만 원을 확보하였고 3월부터 예산 소진시까지 연중 신청을 받아 대상자를 선정하여 지원할 계획이며, 향후 신청 세대 증가 및 개량 효과 등을 고려하여 추가 예산 확보를 통해 사업을 확대할 계획이다. ‘상자텃밭’1,000세트 분양합니다 인천시가 올해 상자텃밭 1000세트를 분양한다. 인천시 농업기술센터는 3월 12~19일 인천시와 농업기술센터 홈페이지를 통해 상자텃밭 분양 신청을 선착순으로 받는다.    재배용 배양토와 상추모종을 함께 주는 상자텃밭은 가구당 2세트까지 분양받을 수 있으며 세트당 자부담금은 5천원이다. 시는 다음달 7일 오전 11시 인천시청 운동장에서 ‘상자텃밭 나눔행사’를 열고 분양을 신청한 시민들에게 상자텃밭 세트를 나눠준다. 상자텃밭 나눔행사는 도시농업 주제관, 도시농업 체험관 운영 등 부대행사도 함께 진행되고 행사에 앞서 오전 10시부터 텃밭 재배요령 교육이 진행된다. 상자텃밭 분양과 관련한 문의는 인천시 농업기술센터 도시농업팀(☎440-6938~40)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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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18.03.05 (월)
  • 울동네 맛고수.8화

    [웹툰 · 갤러리] 울동네 맛고수.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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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18.03.07 (수)
  • 알고 가면 더 편리한 ‘인천공항 제2여객터미널’

    [인천 이야기] 알고 가면 더 편리한 ‘인천공항 제2여객터미널’

    화물, 입출국 수속 단축 등 서비스 업그레이드2018년 1월 18일 오전 4시 11분께 첫 착륙 여객기인 필리핀 마닐라발 대한항공 KE624편을 시작으로 인천국제공항이 세계 선도 공항으로 도약하기 위한 ‘새로운 날개’인 제2여객터미널(이하 T2)을 공식 개장했다. 인천공항은 T2 개장을 계기로, 공항 이용객들에게 보다 편리하고 쾌적하고 안전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세계 5위 허브공항으로 도약하겠다는 방침이다.     여객운송 연 7200만 명, 화물 500t 처리 가능 인천국제공항 제2여객터미널이 지난 1월 18일 공식 개장하면서 인천공항이 국내공항 첫 복수 여객터미널 시대를 맞이했다. T2 프로젝트에는 약 5조 원이 투입됐는데, 그중 총 공사비만 2조 원에 달한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인공구조물인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의 ‘부르즈 할리파’의 총 공사비가 이보다 다소 적은 1조 7500억 원이므로 가히 그 규모가 짐작된다. 제2여객터미널 개장으로 인천국제공항은 여객 7천200만 명(T1 5천400만 명, T2 1천800만 명)과 화물 500만t(T1 450만t, T2 50만t)의 연간 처리용량을 갖췄다. 이는 세계 7위 수준이다(국제선 여객처리용량 기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인천국제공항공사는 T2 개장 이후 T2 확장 프로젝트에 착수하는데, 이 프로젝트가 완료되는 2023년 인천국제공항의 여객처리 능력은 연간 1억 명으로 늘어난다. 아시아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대규모 국제공항이 등장하는 것이다.     빨라지고 편리해진 세계적 공항서비스 T2는 화물 처리 시간과 입출국 수속의 시간을 단축하는 등 이용객의 편의성을 고려한다. 여기에 보안수준도 한 단계 업그레이드했다. 항공사 직원 도움을 최소화한 ‘셀프 출국’이 핵심인데, 출국장 중앙에 배치한 셀프존(SelfZone)이 도우미 역할을 한다. 제2터미널의 셀프존은 제1터미널보다 2배가량 크다. 이곳에 설치된 셀프 체크인 기계와 셀프 백드롭 기계를 이용해 직접 티켓을 발권하고 짐을 부칠 수 있다. 셀프 체크인 기계에서는 간단히 여권을 스캔하는 것만으로도 발권이 가능하다. 이어 발권한 티켓과 여권을 셀프 백드롭 기계에 인식시키면 기계가 열리고 이 기계에 짐을 놓으면 무게를 재고 짐의 꼬리표가 발급된다. 이 표를 붙이면 짐이 자동으로 처리된다. 특히, T2 동·서편 양쪽에 1개소씩 교통약자를 위한 전용 출국장인 패스트트랙이 마련돼 있다. 이용 대상은 T1과 동일하게 교통약자(보행상 장애인, 고령자, 임산부, 유·소아 등)와 사회적 기여자 등이다. 유·소아는 만 7세 미만, 고령자는 만 70세 이상이 대상이다. T2의 보안검색 구역에서는 승객들이 느꼈던 불편이 상당 부분 해소되고 있다. 기존 문형금속탐지기 대신 최신형 원형보안 검색기를 설치해 보안 검색 속도가 빨라진다.     공원속의 공항으로 더욱 쾌적하게 자연채광과 친환경적인 공간감을 느낄 수 있는 조경을 특징으로 하는 T2 중앙은 대규모의 천을 통해 자연채광과 윙(Wing) 단부에 크게 조성된 조경 지역에서는 여객들이 자연친화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대규모 실내 정원으로 여객에게 편안하고, 자연친화적인 휴식 공간을 제공한다.   ​   출국 수속을 마쳤는데 아직 비행 스케줄에 여유가 있다면 5층 중앙에 마련된 ‘홍보전망대’로 올라가 보자. 유리창 너머로 출국장 실내 및 활주로가 한눈에 들어온다. 공사는 이 공간을 전시·체험 위주의 콘텐츠로 꾸밀 예정이다. 인천공항의 발전 과정과 첨단기술을 대규모 작동 모형과 3D기술, AR(증강현실) 등을 이용해 관람할 수 있다. VR(가상현실)을 활용한 영상 투어도 마련된다. 특히 T1의 임시무대와 달리 T2에는 ‘그레이트홀(Great Hall)’을 조성해 정기 문화공연 등 상시 공연이 가능한 문화공간과 여객들이 앉아서 감상할 수 있는 계단식 관람석이 조성돼 있다.  출처 : 영문소식지 Incheon Now 1,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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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18.03.07 (수)
  • 마음 채울 빈 방 있습니다

    [인천 이야기] 마음 채울 빈 방 있습니다

    Retro? Newtro! ③ 인천여관×루비살롱 때론 오래된 것이 더 새롭고 아름답다.인천은 과거와 미래가 조화로운 도시, 최초와 최고가 공존하는 도시다. 시간의 흔적을 온전히 보듬어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탄생시킨 공간으로 들어가 본다. 그 세 번째로, 골목 깊숙이 방 한 칸 내어 주고 지친 마음 어루만지는 ‘인천여관×루비살롱’을 찾았다.       삶이 고단할 때 ‘몸 누이러 오세요’ 중구 관동 후미진 골목, 낡고 오래된 여관의 문을 살며시 연다. 눅진하고 고단하지만 따스한 공기가 맴돈다. 호텔도 게스트하우스도 아닌, ‘여관’이란 이름에서 전해지는 남루하면서도 친근한 정서. 무수한 인생의 곡절과 사연이 쌓이고 쌓인 공간엔 지금,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주변에서 ‘미친놈’이라고 해요. 하하.” 돈이 되고 안 되고는 중요하지 않다.“돈은 서울에서 벌지만, 인천에서 쉬고, 살아가고 싶다”는 이규영 대표​​  이 건물은 1965년 처음 ‘인천여관’이라는 간판을 달았다. 1970년대 활동한 가수 이숙이 주인이었다. 미군부대 무대에서 데뷔한 그는 한창때 ‘눈이 내리네’ ‘우정’ 등의 노래를 부르며 이름을 떨쳤다. 1990년대에는 노부부가 여관을 넘겨받지만, 큰길가에 있는 번듯한 숙박업소와의 경쟁에 밀려 결국 문을 닫고 만다. 사람들이 떠나고 덩그러니 남은 공간은, 10년 후 고치고 다듬어져 ‘인천여관×루비살롱’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렇게 세월 따라 주인 따라 건물의 운명도 바뀌었다.“처음 이곳을 발견했을 때, 인천의 상징적인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골목 깊숙이 숨겨져 세상의 관심 밖에 있지만 의미 있는 공간이지요. 속도에 아랑곳 않고 낡고 오래된 것들이 나름의 이야기를 지켜가는, 이 도시와 닮았어요. 이름부터 ‘인천’여관이잖아요.” ‘인천여관×루비살롱’의 주인장 이규영(43) 씨는 이 동네에서 나고 자랐다. 서울에서 이름난 인디 레이블을 운영하고 있지만, 가속도 붙은 인생길에서 잠시 쉬었다 가는 안식처는 고향 인천이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유는 명확해요. ‘인천여관’이 여기 있으니까요.” 서울에 가보니 별게 없어 다시 동네로 왔다며, 그가 환하게 웃는다.       여유가 필요할 때 ‘마음 누이러 오세요’ 오래된 흑백 사진 같던 공간은, 이 순간 다채로운 빛으로 채워지고 있다. 혼자만의 사연이 깃든 비밀스러운 방은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이 됐다. 그 첫 번째로 음악 도시 인천의 이야기가 담긴 ‘비욘드 레코드(Beyond Record)’ 전이 열렸다. 전시를 기획한 고경표(36) 큐레이터는 6년 전 오석근 사진작가와 결혼하면서 인천과 연을 맺었다. 지역을 알기 위해 재즈클럽 ‘버텀라인’에 몸담으면서 자연스럽게 인천 음악사에 젖어들었다. 2년여에 걸쳐 전성기 때 인천에서 활동한 밴드와 옛 음악 공간을 찾아 정리하는 작업이 이어졌다. “1980년대 후반부터 관교동 일대에 머리 긴 오빠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어요. 서울보다 연습실 대여료가 싸면서도 접근성이 뛰어났기 때문이지요. 당시 시대상과 지역의 고유한 색깔을 엿볼 수 있어요.”현재 이곳엔 세 번째 전시 ‘춒먕횺백화점’ 전이 열리고 있다. 전시를 기획한 원종은 씨를 비롯해 6명의 개성 넘치는 작가들이 뜻을 모았다. 이미지적으로 예쁜 자음과 모음을 결합한 ‘춒먕횺’이란 이름에서 그 어떤 뜻이나 이념도 담고 있지 않다. 뜨개, 가죽, 패브릭 공예 등 예술과 일상의 벽을 넘나드는 작품이 전시장을 가득 메운다. 원 작가의 방은 한 땀 한 땀 뜨개를 이으며 마음의 평안에 이르는 만다라의 과정을 그렸다. 50여 년 시간이 고인 공간엔,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있다. 기다란 복도를 따라 이어진 좁은 방, 옛날식 타일을 투박하게 붙인 욕실은 이곳이 여관으로 살아온 세월을 보여준다. 오래되어 광택을 잃은 자개장과 낡은 책상 같은 소품은 재개발 지역에서 거둬들인 보물이다. 사라져간다고 해서 잊을 수는 없다. “버려진 물건을 다시 쓰는 행위 자체가, 지나온 상처를 어루만지고 새로운 안식을 찾아가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인천여관×루비살롱’에서 팟 캐스트 ‘부둣가 라디오’를 진행하는 배영수 씨​앞으로 인천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을 소개하고, 인천의 문화 정책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인천여관’에 새 생명을 불어넣은 이의중 작가그는 ‘결국 공간을 살리는 건 사람이다’라고 말한다.  골목 한편에서 ‘추억이 기다려요’ 오래된 골목, 그만큼 오래된 여관은 여전히 세상 사람들을 품에 안는다. 지나간 기억을 붙잡아 풀어놓은 이는 ‘건축재생공방’의 이의중(39) 작가, 그리고 동네 사람들이다. 단순히 낡은 건물을 다시 살리려 한 게 아니다. 자욱이 쌓인 먼지를 털어 본연의 가치를 찾아내고, 오늘 그리고 내일 더 빛나게 하려는 것이다. 그 한가운데는 사람이 있다. “공간을 되살리는 것보다, 앞으로 어떻게 지속 가능하게 하느냐가 중요해요. 이는 지역이 가지고 있는 힘, 바로 사람에 따라 좌우됩니다. 그런 면에서 이 대표는 지역에 대한 애정으로 여러 시도를 하며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이에요.”이 작가는 ‘인천여관’의 가치를 사람들이 채워가는 현실이 기쁘고, 또 앞으로 어떤 의미가 덧입혀질지 기대에 차있다. 그리고 더 이상 재생될 수 없는 한계점에 이르더라도 또 다른 형태의 의미를 찾으리라 믿는다. “그저 ‘여관’이었다면 쉽게 허물어졌겠지요. 하지만 사람들이 모여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은 공간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지금 이 시간을 깊게 새겨 놓으면, 내일 소중한 역사가 되겠지요.” 가난한 사람들이 하룻밤 따듯하게 묵어갈 수 있는 방을 내어주던 곳. 오늘 이 안엔, 차 한잔 추억 한 모금 그리운 이들이 저마다 속내를 내려놓고 잠시 숨을 고른다. ‘인천여관’에 오래도록 머무르고 싶다.출처 : 굿모닝인천글 정경숙 굿모닝인천 편집위원, 사진 류창현 포토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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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18.03.09 (금)
  • 건물에선 아직도 쌀 빻는 소리 들리는 듯…

    [그때 그 시절] 건물에선 아직도 쌀 빻는 소리 들리는 듯…

    골목길 숨은 보물찾기- 신흥동 리키타케 정미소와 굴뚝1910년대 후반 인천신사 동쪽 해안에 대한 매립공사가 시작되었다. 이로 인해 생성된 부지 위에 정미공장들이 건립되기 시작하여 1918년 가토오[加藤], 오쿠다[奥田] 정미소가, 1927년 스기노[彬野], 리키타케[力武] 정미소가 들어섰다. 리키타케 정미소는 원래 해안동(인천여상 서쪽)에 위치하고 있었고, 이 자리에는 리키타케 연탄공장이 있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1930년대 정미공장을 이곳으로 옮겼던 것으로 보인다.  붉은 벽돌을 사용한 조적형태의 건물로 1980년대까지 정미공장으로 사용되었고, 그 후 대한서림 창고 등을 거쳐 지금은 전자랜드 건물과 현대자동차 분체도장 공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서남쪽으로 높다란 벽돌 굴뚝이 남아 이곳이 정미공장이었음을 알려주는데 2014년 북쪽 건물 1동이 철거되는 등 노후화된 건물이 하나둘 철거되고 있다. 외관은 붉은 벽돌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내부는 용도에 맞게 변형되었다. 건물 자체로는 쓰임새가 떨어져 지속적으로 철거가 진행 중이다.   <신흥동 리키타케 정미소와 굴뚝> - 위치 : 인천광역시 중구 신흥동 1가 34번지 - 건립년도 : 1927년 - 형태 : 벽돌공장 및 굴뚝 원고출처 : 골목길 숨은 보물찾기(2015년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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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18.03.07 (수)
  • 커피로 그리는 인천萬畵

    [인터뷰] 커피로 그리는 인천萬畵

    지역실천예술 꽃피우는, ‘스페이스 빔’ 민운기 대표 ▲​ 커피로 그린 민운기 대표 말은 나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속담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미 태어나기도 전부터 우리민족의 머릿속 깊숙이 뿌리내린 ‘중앙우선주의’는 오랜 세월 의도적으로 잠재 학습되어온 ‘집단의식화 장치’로부터 기인한 혐의가 짙다. 씨족이 부족으로 다시 부족이 국가로 팽창을 거듭할수록, 사회진화론적 메카니즘은 중앙 집중화 논리를 일반국민들 뇌리에 이념화시키는 쪽으로 체계화되었다. 지방토호세력들의 불만과 반발을 무마하고 중앙통제기능을 강화하기 위한 중앙집권적 ‘지배논리’가 여전히 우리네 밑바닥 정서를 교묘하게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저의는, 단순히 중앙에 대한 동경과 입신양명의 권면일 뿐 아니라, 장차 ‘역성(易姓)의 씨앗’이 될지도 모를 뛰어난 지방인재들을 중앙으로 불러올려 눈앞에서 직접 관리하겠다는, 통치자의 정책적 계산이 복선으로 깔려있는 말이다. 이런 결과는 필연적으로 ‘서울동경(憧憬)’을 부채질하고 ‘지방경시(輕視)풍조’를 만연시켰다.  손재주가 있어 미술대회 휩쓸던 소년, 중학교때 인천 유학 드라마나 소설 속에서 ‘서울사람’은 언제나 허연 얼굴의 인텔리로, ‘지방사람’은 투박한 사투리에 어눌한 캐릭터로 등장하는 차별을 당연시하는 현실이 대표적 증거다. 전체국민 20%에 해당하는 1천만 명의 사람들이 남한면적 0.006%에 불과한 서울로 몰리는 기형적 구조의 가속화는 그때부터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중앙 집중화가 무의미해진 시대에 살고 있다. 각종 IT기술과 인터넷의 발전은, 이 나라는 물론이고 지구촌 끝까지 하나의 동시생활권으로 묶어버린 지 오래다. 중앙정부도 그 폐해를 뒤늦게 인지하고 ‘서울인구분산’이니, ‘지방 균형발전’정책을 목하 고민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오랜 세월 고착화되어온 중앙 집중의 고질이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는 것이다.     “중앙 집중화현상은 문화예술계에서 특히 두드러져요. 저 역시 대학원 졸업 때까지만 해도 중앙화단을 염두에 두고 작품 활동을 해왔으니까요. 인천이라는 수도권의 변방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을 보는 화단의 시선은, 중앙에서 밀려난 패잔병쯤으로 대하려는 경향이 강하거든요. 당연히 예술적 생태환경도 중앙에 비해 열악하고요. 인천에 정착하기로 한 그 순간부터, 지역예술의 흥을 돋우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단순히 사진이나 그림을 그리고 전시를 하는, 전통적이고 개인적인 예술창작방법론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예술활동가로 팔을 걷어붙이지 않고서는 어렵다고 느낀 거죠. 지역민의 삶과 환경이 함께 개선되지 않고서는, 지역예술생태환경의 발전도 요원할 테니까요.” 지난 토요일 오후, 대안미술문화 공간 ‘스페이스 빔’의 민운기 대표(52세)를 만났다. 공공예술프로젝트와 교육프로그램 등을 기획하고 진행하는 등, 지역민의 삶과 밀착된 다양한 실천예술과 네트워크운동을 활발히 모색해온 ‘스페이스 빔’은 현재 인천 동구 금창동 배다리마을에 위치해있다.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이 고향이에요. 어려서부터 손재주가 있어서 미술대회 나가면 상을 휩쓸곤 했죠. 도천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주천중학교 3학년 때 인천남중으로 전학을 왔어요. 영월군에는 농업고등학교뿐이어서, 인문계 고등학교진학을 위해 당시 누나들이 자취해 살던 인천으로 유학을 오게 된 거죠. 송도고등학교시절 미술선생님 눈에 띄어 미술반에 들었어요. 미대진학을 위해서는 미술학원을 다녀야 하는데, 전 형편상 주로 선배들이 그림을 봐주곤 했죠. 서울대미대를 지원했다가 보기 좋게 떨어졌어요. 재수시절엔 마침 선배가 미술학원을 차리는 바람에 거기서 청소알바를 하며 그림을 그렸죠. 그렇게 이듬해 서울대미대 서양화과에 들어갔어요.” 민주화운동 열기가 한창이던 1985년의 서울대캠퍼스는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었단다. 민 대표는 갈등했다. 운동권에도 휩쓸리지 못했고, 그렇다고 맘 편히 비운동권으로 머물 수도 없었다. 갓 스물의 대학 새내기한테는 모든 것이 혼란스러움 투성이였다. 당시에는 시대상황에 대한 분명한 인식도 부족했을 뿐 더러, 자신의 자발적 의지와는 상관없는 ‘휩쓸림’에 본능적 거부감이 일었던 탓이다. 어정쩡 데모대의 꽁무니를 따라다녀 보기도 했지만, 결국 그림에만 천착하기로 결심했다. 미친 듯이 그림을 그려댔다. 그렇다고 운동권 학우들에 대한 막연한 부채의식까지 떨쳐낸 건 아니었다.저 역시 처음에는 사물의 이미지를 캔버스로 옮겨 그리는 작업에만 몰두했어요. 폐드럼통이나 녹슬어 버려진 리어카의 지나간 흔적들을 유추해 현재의 모습 위에 겹치듯 덧그리는 작업에 치중했죠. 매순간 시간의 더께가 먼지처럼 쌓여가면서, 망가져 버려지기까지 이어져 왔을 한 사물의 생몰과정을 한눈에 보여주기 위한 시도였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그런 모든 작업들이 착시에 불과할 뿐이라는 회의가 들더라고요. 어떤 것을 묘사하든 그림이란 결국 캔버스와 물감일 뿐인데, 관객으로 하여금 거기 묘사된 사물과 동일한 것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일종의 속임수가 아닐까 허탈해졌던 거죠. 그래서 종이는 종이로 물감은 물감으로 인식하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특정 형상을 의도적으로 묘사하지 않는 비구상작업으로 전환했어요. 하지만 그 조차도 다시 한계에 부닥쳤어요. 무엇을 해도 그림은 캔버스라는 사각 틀을 벗어날 수 없다는 분명한 한계성이 너무 갑갑하게 느껴지는 거예요. 결국 거대한 종이를 바닥에 깔고 아예 캔버스 안으로 직접 들어가 온몸으로 느낌을 분출하는 퍼포먼스작업을 시도하기까지 했어요. 무언가 속에서 치받는 뜨거운 갈증들을 묘사할, 나만의 방법론에 골몰하던 시기였던 거죠.” 끝내 그가 캔버스의 사각 틀을 완전히 초월해버린 것은, 훗날 ‘스페이스 빔’을 이끌면서 지역과 세상이라는 캔버스를 마주하면서 부터란다. 대학 3학년 때 입대를 해 1990년 제대하고 복학했다. 이번에는 진로문제가 그를 괴롭혔다. 출구는 대학원이었다. 서울대 대학원으로 진학했다. “대학원시절 부터는 주된 관심이 제 내면세계에서 바깥세계로 옮아간 시기였어요. 무언가 제 속에 내재된 감정들을 타자에게 보여 주고자하는 욕망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 거죠. 계기는 외할머니의 죽음이었어요. 외할머니의 죽음으로 당신이 평생 품고 계시던 인생史도 함께 소멸되었다는 아쉬움이 오래도록 긴 여운으로 남더라고요, 그러다 내 어머니의 고된 삶까지 돌아보게 된 거죠. 평생을 농사일로 점철된 어머니의 삶을 주제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주름 깊은 어머니의 모습, 어머니의 손때가 묻은 호미며 낡은 고향집 등을 그려 ‘한 여인의 삶 그리고 노동’이라는 제목으로 개인전을 열었죠.” 척박한 인천예술판 토양쌓고자 다양한 전시 등 열어 대학원을 졸업하고 인천으로 돌아왔단다. 간석동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소래를 드나들며 개인전을 준비했다. 소래를 주제로 삼는 작가들이 대개 배를 그리거나 바다풍경을 그리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그는 달랐다. 1994년부터 1996년까지 도시문명과 자본의 유입으로 빠르게 변모해가는 소래사람들의 환경과 삶에 초점을 맞췄다. 낡은 어구며 풍어제, 다방모습 등을 전통 유화방식에서부터 탈회화적 양식까지 동원해 ‘소래마을’이라는 제목으로 1997년 보고서형식의 개인전을 열었다. 1999년에는 주변 인물들을 주제로 한 ‘사람들’, 2004년엔 각종 스티커와 홍보지의 문구들을 오려붙인, 도시인의 시각문화환경을 주제로 한 ‘채집’이란 전시회를 선보이기도 했다.    ▲ 어머니의 삶을 주제로 열었던 개인전 팸플릿 “그런 일련의 작업과정 중에 마주한 인천문화예술판의 척박함은 말할 수 없을 만큼 열악했어요. 전시공간과 정보교류 등의 부족으로 서울의존도가 절대적일 수밖에 없었고, 제작방식도 소재주의나 장르주의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있었죠. 이건 아니다싶어 인천만의 지역적 특성에 기초한 예술작업을 뿌리내리기 위해, 1995년 ‘지역미술연구모임’을 결성했어요. 그림을 왜 그려야하는가? 단순히 직업적 선택에 의한 반복행위로 그칠 것이 아니라, 사회를 인식하고 검증하는 수단으로까지 나아가야한다는 데 생각이 미친 거죠. 참여한 작가들과 매주 토요일 제 간석동화실에 모여 지역에 대한 이해와 현안을 공부하고, ‘아놀드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같은 미술사를 읽으며 토론도 했어요. 1997년 주안 신기사거리로 화실을 옮겨 ‘시각’이라는 미술전문 계간잡지를 발간하기 시작했고, 2010년부터는 격월로 바꿔 현재 92호까지 만들어오는 중이죠.” ‘인천미술협회’로부터 당시 ‘인천청년작가회’에서 주관해오던 ‘대한민국청년미술제’행사를 맡아 달라는 요청을 받고, ‘인천포스트’로 명칭을 바꿔 1999년, 2000년, 2001년까지 3년간 파격적인 방식과 방향으로 미술제를 운영하기도 했다.   ▲ 지역미술연구모임 회원들​   “미술제를 운명하면서 보람과 성과도 있었지만, 매번 기간이 너무 짧아 아쉬움과 갈증이 컸어요. 작은 전시라도 연중 이어갈 수 있어야, 지역미술판에 지속적으로 ‘화두’를 던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몇몇 회원들이 공동출자하여 구월동 인천문화예술회관 인근에 ‘스페이스 빔’이라는 대안미술문화 공간을 오픈했어요. 미술전시관과 자료실, 사무실로 공간을 나누고 각종 전시는 물론, 아동과 청소년들을 위한 대안미술교육프로그램을 운영했죠. 2003년 ‘이것도 미술이다’, 2004년 ‘미술관습격사건’, 2005년 ‘에듀아트페스티벌’, 2006년 ‘도시-락(樂)파티’등 교실에만 갇혀있던 청소년 미술교육의 새로운 대안을 제시했다고 자부해요. ‘티울’이라는 ‘인천미술교육연구모임’과 미술교육 대안교과서인 ‘시간문화교육프로그램’ 발간도 주도했죠.” 내고장을 아름답게 만드는 게 예술행위의 이유 ‘스페이스 빔’이 배다리로 이전한 것은 2007년 ‘도시환경연대회의(대표 이희환 박사)’와 연계해 인천지역탐사프로그램인 ‘도시유목’프로젝트를 실행하면서부터란다. 마을을 뭉텅 두 동강내는 ‘배다리관통도로’ 건설현장을 목격한 후 충격을 받아 ‘도로건설 중단운동’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마침 배다리에 수년째 비어있던 인천 소성주 막걸리공장건물을 임대해, 구월동의 ‘스페이스 빔’을 이전했다. 그리고 벌써 11년째 배다리지역을 지키며 지역문화예술운동을 이끌어 오고 있다.“그림은 이제 안 그리느냐? 주위에서 묻곤 해요. 꼭 캔버스 위에다만 그려야 그림인가요? 제가 되묻죠. 화가한테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지역사회를 조금이라도 더 살만한 세상으로 아름답게 바꾸려는 노력 역시 미술구현행위의 연장이에요. 계절마다 자연의 섭리가 한 폭의 산수화를 시시각각 부려놓듯, 답답한 사각 틀의 캔버스가 아니라 지역과 현실이라는 시공간의 캔버스 위에 하루하루 ‘삶’이라는 제목의 작품을 완성시켜나가는 중이죠.” 글. 커피그림  유사랑 I-View 객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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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18.03.07 (수)
  • 백만불짜리 야경이 있는 국가대표 공원

    [외고 · 칼럼] 백만불짜리 야경이 있는 국가대표 공원

    인천 VS 세계 도시③ 송도 센트럴파크 VS 시카고 밀레니엄파크미국 시카고와 닮은 도시가 국내에 있다면 어디일까. 송도국제도시라고 말하면 많은 사람들이 갸웃하겠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닮은 구석이 꽤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두 도시는 계획도시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고 수변에 위치해 바람과 물의 도시라는 점도, 개성 넘치는 건축물이 많은 점도 닮았다. 도시 한복판에 공원이 있다는 점도 두 도시의 공통점이다.   ▲ 송도 센트럴파크▲ 시카고 밀레니엄파크​​ 수변에 위치한 도심 속 휴식 공간송도 센트럴파크는 인천 연수구 해안을 간척해 만든 인공 공원이다. 송도 개발 계획에 참여한 미국 게일 인터내셔널의 스탠 게일 회장이 뉴욕의 센트럴파크 같은 세계적 공원을 만들겠다는 취지로 조성했다. 송도 센트럴파크 면적은 약 37만m2로 축구장 면적의 52배, 여의도공원의 1.6배 규모다. 뉴욕 센트럴파크의 9분의 1, 시카고의 명소인 그랜트파크의 4분의 1에 불과하지만, 국내 도심 상업지구 한복판에 있는 공원치곤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다. 그랜트파크와 곧바로 연결된 밀레니엄파크는 규모가 약 10만m2로 송도 센트럴파크보다 아담하다. 동쪽으로 오대호 중 하나인 미시간호를 끼고 있는데 호수라 해도 규모가 남한 면적 절반에 달해 호숫가에 이르면 해변에 온 느낌이 든다. 바다 같은 호수가 가까이 있고 나머지 삼면이 고층 건물로 둘러싸인 공원이란 점은 자연스레 송도 센트럴파크를 연상시킨다. 1871년 큰 화재로 생긴 온갖 잔해를 처리하기 위해 미시간호를 매립한 토지 위에 만든 것이 그랜트파크인데, 이 공원을 지나는 기차의 차고지로 쓰이던 공간을 공원으로 조성하면서 밀레니엄파크가 만들어졌다. 이름처럼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아 2000년 준공될 예정이었으나 사업이 늦어지며 2004년 시민들에게 첫선을 보였다.   ▲ 송도 센트럴파크▲ 시카고 밀레니엄파크​​   <송도 센트럴파크> 준공 2009년 11월 투자 비용 1,200억원 규모 37만750m² 주요 시설 해수로, 트라이보울(복합 전시관), 조각정원, 초지원, 지하주차장<시카고 밀레니엄파크>준공 2004년 7월투자 비용 5,100억원규모 9만9,000m²주요 시설클라우드 게이트(AT&T플라자), 제이 프리츠커 파빌리온(공연장),크라운 파운틴(분수),매코믹 트리뷴 플라자 겸 아이스링크   야경은 단연 송도 센트럴파크가 으뜸 송도 센트럴파크를 처음 찾았다면, 특히 밤에 방문했다면 모두 외국에 온 것 같다는 말을 한다. 송도 센트럴파크의 풍광을 이국적으로 만드는 것은 단순히 공원 내부의 조경뿐만이 아니다. 송도에 밤이 찾아오면 서울에서도 보기 어려운 독특한 외관을 지닌 고층 건물들이, 바닷가의 탁 트인 공간 사이로 반짝이며 공원을 비춘다. 마천루와 여백의 조화가 그려내는 도심의 화려한 경관은 해외 유명 공원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밀레니엄파크와 송도 센트럴파크의 가장 큰 차이는 수로의 유무다. 국내 최초의 해수공원인 송도 센트럴파크에는 서해 바닷물을 끌어와 만든 1.8km 길이의 인공 수로가 있다. 공원이 수로를 중심으로 길쭉하게 뻗어 수로 양옆 산책로를 걸어 왕복하면 1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수상택시나 보트, 카약, 카누 등을 이용해 수로를 따라 공원의 경관을 즐길 수도 있다. 이 수로는 특히 공원의 야경을 드라마틱하게 바꿔놓는다. 마천루의 각양각색 조명과 수로에 비친 불빛,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석양 등 이 공원이 연출해내는 밤의 풍경은 인천이 자랑할 만한 백만불짜리 보석이다. 여름이라면 야간 운행하는 수상택시를 타고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일몰과 야경을 감상하는 것을 추천한다. 공원과 인접한 한옥 호텔, 한옥마을에서 공원을 조망하는 것도 괜찮다.   ▲ 트라이보울▲ 펜타포트락페스티벌​  음악과 문화가 숨 쉬는 공원 도시의 허파 역할을 하는 공원은 시민들이 모이는 문화예술의 공간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송도 센트럴파크의 대표적인 조형물인 트라이보울은 사발이 3개 이어진 듯한 모양의 건축물로 복합 전시관으로 쓰이고 있다. 얕은 인공연못 위에 자리해 마치 그릇이 물 위에 떠 있는 듯 이색적인 풍경을 만들어낸다. 밀레니엄파크도 예술적인 감각이 넘치는 조형물과 건축물로 유명하다. 콩 모양으로 생겨 ‘더 빈(The Bean)’이라 불리는 ‘클라우드 게이트(Cloud Gate)’는 이 공원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장소다. 15m 높이의 유리블록 탑 2개가 마주보고 있는 분수 광장 ‘크라운 파운틴(Crown Fountain)’도 여름이면 인산인해를 이룬다.   ▲ 크라운 파운틴​​​▲ 제이 프리츠커 파빌리온   문화 공연은 사시사철 열린다. 재즈와 블루스로 유명한 도시답게 밀레니엄파크에선 매년 6월 시카고블루스페스티벌이, 9월에는 시카고재즈페스티벌이 열린다. 밀레니엄파크에 조성된 대규모 야외 공연장 제이 프리츠커 파빌리온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다. 밀레니엄파크만큼 큰 공연장은 없지만 송도 센트럴파크에도 버스킹 공연장이 있어서 봄부터 가을에는 종종 공연을 즐길 수 있다. 이 공원에서 2km 정도 떨어진 달빛축제공원에선 매년 여름이면 국내 대표 록페스티벌인 펜타포트락페스티벌이 개최된다. 송도 센트럴파크는 10월에 열리는 송도불빛축제로도 유명하다. 인파에 치이는 것이 싫다면 봄날의 한적한 평일 밤에 공원을 찾는 것도 좋다. 송도 센트럴파크는 매일 밤 불빛축제를 열고 있으니까. 출처 : 굿모닝인천글 고경석 한국일보 산업부 기자, 사진 류창현 포토디렉터,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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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18.03.09 (금)
  • 내일 봄

    [웹툰 · 갤러리] 내일 봄

    화보, 2018 봄  ▲ 서구 승학고개   1월은 시간의 시작입니다. 3월은 계절의 출발입니다. 한 해의 실제적인 첫발은 춘삼월입니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각종 스포츠가 시즌 오픈open 됩니다. 봄은 스프링spring입니다. 개구리도 아이들도 그리고 들판도 마구 튀어 오릅니다. 삼라만상이 움츠림에서 벗어나 힘차게 신나게 활짝 깨어납니다.   ▲ 동구 인천창영초등학교​​▲ 남동구 인천대공원▲ 남동구 숭의동​▲ 남동구 소래습지생태공원​  봄 햇살은 산과 들에만 있지 않습니다. 후미진 골목의 나른한 빨래, 재래시장의 봄나물 바구니, 도심 농부의 작은 텃밭, 공원의 어르신 장기판 위에, 그리고 우리 모두의 얼굴에도 비슷하게 비칩니다. 이제 새봄의 기운이 인천의 새 하늘 새 땅 새 바다를 행복하게 북돋아 줄 것입니다, 인천은 봄, 내일은 봄. ▲ 중구 사동​​​▲ 동구 송림동​ ▲ 중구 송월동​ ▲ 계양구 계산시장​▲ 중구 자유공원​​▲ 남동구 승기천​​​출처 : 굿모닝인천사진· 글 유동현 굿모닝인천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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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18.03.09 (금)
  • 잘 키운 캐릭터, 열 유명인 안 부럽다

    [인천 이야기] 잘 키운 캐릭터, 열 유명인 안 부럽다

    브랜드- 인천시 캐릭터  카카오프렌즈, 이제는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캐릭터다. 유명세에 힘입어 21개의 오프라인 매장과 다양한 제휴사업을 펼치고 있다. 이렇듯 잘 만들고 잘 관리된 캐릭터는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한다. 유명인 모델을 내세우지 않고도 상품과 기업의 이미지를 제고할 수 있다. 지방자치단체들도 인지도와 친근감을 높이기 위해 캐릭터를 적극 개발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개발에 치중할 뿐 활용 전략과 체계적인 관리 부재로 지역민들조차 캐릭터의 존재를 모르는 경우가 많다. 해외 지자체 중 캐릭터를 모범적으로 활용하는 사례를 찾아 살펴보고, 최근 발표된 인천의 새 캐릭터 개발 과정과 활용 계획에 대해 알아본다.     구마모토의 부흥을 부른 ‘구마몬’ 2010년 3월 고속철도 개통을 앞두고 일본 구마모토현은 지역을 알릴 방법을 고심했다. 처음에는 로고 개발을 추진했으나, 캐릭터가 더 뛰어난 홍보수단이라는 프로모션 디렉터의 조언에 따라 방향을 바꿨다. 캐릭터 이름 구마몬은 곰을 의미하는 ‘구마’라는 단어가 지역 이름과 같은 점에 착안했고, 여기에 사람을 뜻하는 구마모토의 사투리 ‘몬’을 결합해 만들어졌다.     구마모토현은 캐릭터 ‘구마몬’을 철저히 의인화했다. 구마몬 홈페이지(www.kumamon-official.jp)에 따르면, 구마몬의 생일은 3월 12일, 성별은 수컷이 아닌 남자, 특기는 구마몬 체조와 서프라이즈를 발견해 알리는 일이다. 직업은 구마모토현의 영업부장이다. 구마몬은 재미있고 익살맞은 말투와 몸짓으로 방송에 출연하고 지역행사를 쫓아다닌다. 외부 일정이 없을 때는 사무실에서 방문객을 맞는다.     구마몬의 성공은 구마모토현의 위상을 높였고 관광객 증가와 캐릭터를 통한 상품 매출 증대라는 커다란 효과를 가져왔다. 일본 브랜드종합연구소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일본 47개 현 중에서 2011년 32위에 지나지 않았던 구마모토현의 인지도가 2014년 18위로 껑충 뛰어올랐다. 2015년 구마모토를 찾은 관광객은 2014년 대비 두 배로 증가했다. 구마몬 관련 상품의 매출도 2012년 2,935억원이던 것이 2016년 1조2,825억원으로 5년 만에 4배 이상 증가하는 등 지역 경제 활성화에 크게 기여했다. 구마몬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원인은 단순한 디자인, 스토리텔링에 기반한 실질적 활용, 상표 무료화 등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우선 검은 몸과 빨간 볼 등 디자인을 단순화해 어떤 상황에서도 적용할 수 있게 했다. 또, 여러 장소에 나타나 인간처럼 행동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사람들과 친근한 관계를 맺어 나갔다. 덧붙여 구마몬 디자인을 누구나 쓸 수 있도록 함으로써 주민들이 일상생활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하고 다양한 제휴사업도 가능토록 했다.  베를린의 상징이 된 ‘버디 베어’ 독일 베를린의 기차역과 중심가 어디에서나 마주치는 것이 있다. 앞발을 위로 바짝 쳐든 곰 모양의 조형물이다. 배에 지도를 그려놓은 곰도 있고, 만국기를 그려놓은 곰도 있다. ‘어린 곰’이라는 베를린 말에서 따 온 베를린의 상징 ‘버디 베어(Buddy Bear)’다.     베를린의 도시 문장에 들어가 있던 곰이 도시 이미지로 본격 활용되기 시작한 것은 2001년부터다. 독일 통일을 계기로 헤어리츠 박사 부부가 거리예술 행사로 기획한 것이 시초다. 2001년 6월 우정과 희망을 표현하기 위해 두 발을 들고 있는 곰을 기본으로 총 4가지 형태의 조형물 100여 개를 시내 곳곳에 설치했다. 2002년부터는 각국의 문화 그리고 종교 간의 관용과 이해를 증진하기 위해, 124개국의 작가들이 다양한 모습의 곰 조형물을 만들어 전 세계를 돌며 전시하는 유나이티드 버디 베어(United Buddy Bear, 국내명 ‘아름다운 버디 베어’) 행사가 개최되고 있다. 2005년 10월 서울 올림픽공원 평화의 광장에서 진행된 ‘아름다운 버디 베어’ 행사에서는 140여 개의 버디 베어 조형물 가운데 남한 버디 베어와 북한 버디 베어가 평화롭게 나란히 서있는 모습도 선을 보였다. 버디 베어는 독일인의 지혜로움과 우직한 성향을 반영한 도시 상징물로, 도시 마케팅의 첨병 역할을 하고 있다. 베를린의 손님맞이 캐릭터로 활약하고, 분단의 역사를 지닌 도시에서 탈피해 평화의 상징이 된 도시 이미지를 홍보한다. 또한 도시 곳곳에 서로 다른 모습의 곰 조형물을 설치해 방문객들에게 다양한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다.  인천의 새 캐릭터 ‘등대를 사랑하는 점박이물범 친구들’ 2017년 12월 28일 인천은 새로운 캐릭터인 ‘등대를 사랑하는 점박이물범 친구들’ 디자인을 발표했다. 2016년 11월 말부터 기존 상징물에 대한 타당성을 조사한 결과, 캐릭터 개발에 대한 시민들의 공감대가 높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후 시 상징물관리위원회, 시민들과 함께 캐릭터 후보군을 만들고 의견을 수렴해왔다. 그 결과 호감도, 적합성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등대와 점박이물범이 최종 후보로 선정된 것이다. 스토리텔링, 사실적 요소의 단순화, 의인화 및 형태 변화, 다양한 표정 변화 등 총 6개의 가이드라인에 따라 디자인 후보 안이 만들어졌다. 이에 대해 인천 시민뿐만 아니라 외지인과 외국인에게도 선호도를 묻는 과정을 거쳐 최종 디자인과 캐릭터별 스토리를 발표했다.     캐릭터 이름도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해 최종 확정했다. 등대의 이름은 ‘등대리’다. 대한민국 최초의 불빛인 팔미도 등대의 후손으로 인천의 길을 밝히는 든든한 지킴이다. 늘 뒷짐을 진 채 묵묵하지만,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드러내는 치명적인 순수함을 가지고 있다. 점박이물범 친구들 중 첫째는 ‘버미’다. 백령도를 주름잡다가 이제는 본토에 진출해 인천을 지키는, 호기심 많고 씩씩한 점박이물범이다. 둘째는 ‘애이니’다. 등대를 사랑하고 모자 수집과 수염 정리가 취미인, 애교 많고 사랑스러운 점박이물범이다. 셋째는 ‘꼬미’다. 키는 가장 작지만 운동은 가장 잘하는 장난꾸러기 꼬마다. 인천의 새로운 캐릭터 ‘등대를 사랑하는 점박이물범 친구들’은 시민과의 소통 도구이자 인천의 도시 이미지를 실체화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또한 누구나 자유롭게 캐릭터를 활용해 개개인의 스토리를 만들 수 있는 토대를 갖춰 캐릭터와 시민들 간의 정서적인 유대관계를 강화해나갈 계획이다. 인천의 캐릭터 마케팅은 이제 시작이다. ‘등대를 사랑하는 점박이물범 친구들’이 인천 시민들과 함께 호흡하고 성장해 구마모토현의 ‘구마몬’에 못지않게 사랑받는 캐릭터가 되길 기대해 본다. 출처 : 굿모닝인천글 이종선 인천시 브랜드전략팀장 , 사진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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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18.03.09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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