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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식당' 보다 더 맛있는 이집트경양식 ‘돈가스’

    [인천 이야기] '강식당' 보다 더 맛있는 이집트경양식 ‘돈가스’

    돌아온 신포동 명물, 옛 명성 그대로​80년대, 껌 좀 씹었던 인천 젊은이었다면 나팔바지 흩날리며 신포동을 누볐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 신포동은 ‘모든 것은 신포동으로 통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전성기를 누렸다. 그곳에는 조금 사는 사람들이 ‘최애처(最愛處)’ 외식장소였던 경양식집도 여러 개가 있었다. 그중 하나였던 이집트경양식집은 아무나 근접할 수 없었던 경양식집의 지존이었다.   지금 신포동은 추억 소환 중 지금은 쇠락한 구도시가 된 신포동은 80년대 서울 명동을 뺨치는 번화한 동네였다. 인일여고, 인성여고, 인천여고, 송도 중고, 제물포고 등 학교가 밀집된 신포동 거리는 젊은 학생들로 북적였다. ‘신포동 워킹코스(동인천~신포동 경동사거리~애관극장 골목)’에는 항상 젊은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방과 후 학생들은 ‘뉴욕빵집’과 ‘크라운빵집’에서 삼삼오오 미팅을 했고, 그들의 아버지들은 ‘곰다방’에서 시간을 죽이기도 했다. 밤이 되면 여러 개의 고고장과 디스코텍의 네온사인이 뿜어내는 불빛으로 불야성을 이뤘다. ‘쌍쌍’, ‘바덴바덴’, ‘국일관’, ‘우산속’, ‘팽고팽고’ 등 유명한 클럽에서 놀다 새벽에 쏟아져 나온 사람들은 동인천 광장의 벤치를 자신의 침대삼아 눈을 붙이곤 했다. 신포동 지하상가는 사람에 치여 걸음을 떼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신포동에는 여러 곳의 경양식집이 있었다. ‘응답하라 1988’에 나오는 경양식집 역시 신포동 한 경양식집을 배경으로 찍었다. ‘이집트경양식’은 80년대 동인천의 명물이었다. 당시 예식까지 치러질 정도로 규모가 큰 경양식집이었고 좀 산다는 집의 외식장소로 손색이 없던 곳이었다. 신포동에 있던 학교들이 다른 곳으로 이전하고 주안과 연수동, 부평, 구월동이 주거지로 부상하면서 신포동은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고 이집트경양식집은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 한진규 대표 옛것은 추억을 소환한다. 인천사람들의 스토리가 담겨있는 이집트경양식집이 다시 부활해 옛 추억을 되살리고 있다. 한진규(34세) 대표는 청년 사업가다. 수봉공원 앞 ‘불티나 돈가스’ 창업자이자, 동인천 ‘메카’ 경양식집 사장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돈가스를 먹으며 자랐다. 한진규 대표는 대학 졸업 후 교회에서 운영하는 카페를 운영했다. 커피 외 부수적으로 돈가스를 판매했다. 커피보다 돈가스가 더 잘 나갈 정도로 돈가스가 소문이 났다. 장사가 끝난 후 원데이 레슨을 배우고 야간 학원을 다니면서 돈가스에 매진했다. 아버지에게서 배운 전통 레시피에 배운 것을 접목해서 돈가스가 점점 업그레이드가 되었다. 28세에 시작한 교회카페를 2년 만에 접고 150만원으로 제물포지하상가에서 자신만의 돈가스집을 차렸다. 블로거들의 입소문을 타고 그의 작은 돈가스집은 유명세를 탔다.  바삭한 돈가스 속에 육즙 뿜뿜 그의 돈가스 맛은 외식계의 거손이라 불리는 장진우 대표 귀에 들어갔고 장진우 대표와 손잡고 동인천의 옛길을 살리는 프로젝트 일환으로 ‘이집트경양식’을 재탄생 시켰다. ‘이집트’ 자리에 옛 추억 그대로의 테이블과 의자, 벽지, 샹들리에 등의 소품을 살려 옛 ‘이집트경양식’ 그대로를 재현했다. 다시 이집트경양식을 열었다는 소식은 손님들의 입소문을 탔다. 과거 엄마 아빠 손에 이끌려 돈가스를 맛보았던 중년층에서부터 노년층, 젊은층에 이르기까지 이집트경양식 맛에 홀릭했다.   “망치로 두들겨 얇고 넓게 피는 방식이 아니라, 고기는 두툼하게하고 튀김옷은 얇게 해서 고기의 육질을 살리는 것이 저희 돈가스의 특징입니다. 또한 매콤한 소스를 개발, 돈가스가 느끼하지 않도록 돕고 있지요.” 이곳 소스 맛에 손님들 ‘엄지척’ “이집의 돈가스는 소스가 매콤해서 전혀 느끼하지 않습니다.” 라고 오애란(연수동) 씨는 말한다. “주문이 들어가면 그때 돈가스 옷을 입힌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그런지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해서 최고의 돈가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윤다정(논현동) 씨는 이 돈가스 맛을 잊을 수 없어 이곳에 자주 들러 식사를 한단다. 한 대표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있는 이곳을 누가 수십억의 권리금을 준대도 넘기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루는 70대 어르신이 찾아오셨어요. 갑자기 돈가스를 드시다가 우시는 거예요. 사연을 들어보니 아이들과 부인과 함께 이곳에서 과거에 돈가스를 먹었던 기억이 떠올랐다는 겁니다. 이혼을 하면서 30년간의 기억을 잃고 살았는데 돈가스 한 조각에 자신의 과거가 떠올랐답니다. 그 노인이 썰고 있는 것은 돈가스가 아니라 단란했던 과거를 썰고 있다는 생각에 저 역시 같이 울었던 기억이 있네요.” 과거와 현재를 잇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아 이집트경양식을 살린 것이 자신의 사명같다는 주인장에게 꿈을 물었다. “나중에 5평정도 되는 작은 식당을 차리고 싶어요. 테이블 한 두 개 정도만 놓고 제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는 손님과 수다를 떨며 행복하게 장사하고 싶어요.” 장사가 잘되면 권리금을 받고 넘기고 여러 개의 분점을 내는 욕심 가득한 장사꾼이 판치는 세상에 한 대표의 소박한 꿈이 별빛처럼 빛난다. 이현주 I-view기자 o700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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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18.02.05 (월)
  • 송도사는 외국인들은 왜 이곳에 모일까?

    [인천 이야기] 송도사는 외국인들은 왜 이곳에 모일까?

    글로벌 문화 꽃피우는 ‘더 신더 바(The Cinder Bar)’이제 국제도시 송도는 ‘세계 속에 송도, 송도 속에 세계’를 품으며 글로벌 도시로 비상 중이다. 다양한 국적을 가진 사람들과 다채로운 문화가 함께 어우러져 새로운 퓨전문화가 창조되는 공간 송도. 그 안에 작은 세계를 담고 있는 사랑방이 있다. 주점 ‘더 신더 바(이하, 신더바)’이다. 이미 송도에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들 사이에서는 입소문이 자자한 핫 플레이스다.    뉴질랜드에서 인천으로 마침표를 찍다 ‘신더바’를 3년째 운영하는 워렌 씨(41세)는 뉴질랜드 타우랑가(Tauranga)가 고향이다. 2001년 고향친구와 함께 지구촌모험을 위해 선택한 곳이 한국의 인천이었다. 그들은 긴 시간 비행기를 타고 인천에 와서 뉴질랜드에서 경험하지 못한 색다르고 이색적인 한국문화를 탐험하고 체험하면서 인천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되었다. 게다가 2002년 한국에서 열린 월드컵은 그들의 인생에 뜨거운 열정을 리필해주는 즐거운 추억을 선사했고 인천과의 인연이 더욱 깊어졌다. 함께 동고동락(同苦同樂)하며 한국 모험을 시작한 친구는 2년여 동안의 여정을 마치고 고향 뉴질랜드로 돌아갔다. 혼자 남은 워렌 씨는 인천에 거주하면서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과 마음과 정을 나누고 문화도 나누면서 친구가 되었고, 그때 만난 한국인 여자와 결혼까지 골인하는 행운을 얻었다. “내가 경험한 인천은 사람뿐 아니라 많은 매력을 지닌 도시입니다. 강화, 자월도, 영종도, 덕적도, 을왕리, 월미도 등 여러 곳을 구경 다니면서 환상적이고 멋진 곳이라고 생각했어요.” 그중에서도 그가 선택한 송도국제도시는 외국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만큼 살기 좋은 곳이지만 서로 만나고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하다는 아쉬움을 갖게 되었다. “외국인들에게 고향을 느낄 수 있는 바(bar)를 만들고 싶었어요.” 워렌 씨가 송도에 주점을 차린 이유다. 손님들이 일을 마치고 퇴근해서 홀로 남은 시간에 옆 사람과 술잔을 기울이며 서로 이야기하고 허물없이 소통할 수 있는 사랑방이 필요했던 것이다. “인천에 살고 있는 외국인들이 멀리 이태원까지 가지 않아도 가까운 곳에서 가볍게 술 한 잔하면서 대화하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좋잖아요. 외롭지 않고 고향친구들을 만난 것처럼 힐링되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어요.”  작은 글로벌이 모인 사랑방 같은 선술집 신더바는 입소문을 타면서 외국인뿐 아니라 한국인 단골들도 많다. 호기심과 영어로 대화하기 위해 찾아오는 손님들이 이곳의 문화에 익숙해지고, 외국인들과 친구가 되면서 새로운 문화를 만나는 장소가 되었다. “여기서 외국인과 소통하고 친구로 사귀면서 영어로 대화하세요. 비싼 영어회화학원 다니지 마세요. 처음에는 서툴러도 괜찮아요.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다보면 좋아지거든요.” 한국말을 또박또박 유창하게 구사하는 워렌 씨는 인천짠물답게 돈 안들이고 영어회화 하는 방법을 살짝 귀 뜸하며 빙그레 웃는다.  “신더바는 벽난로를 의미하는 이름입니다. 벽난로처럼 친절함과 따뜻함과 아늑함을 주고 싶은 공간이거든요. 아지트 같은 곳이지요.” 이 주점에서는 세계 여러 나라의 술과 음악과 주인장의 손맛을 담은 칵테일 및 간단한 안주를 다양하게 맛볼 수 있다. 최근에는 tvn에서 영어를 어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에듀 예능프로그램 ‘나의 영어 사춘기’촬영차 배우 황신혜와 가수 휘성이 1일 알바생으로 체험하면서 더 유명세를 타고 있다. ​ 최근에는 이곳을 찾는 손님 층도 다양해지고 있다. 동네주민부터 인근에 위치한 채드윅국제학교 교사들, 인천대 외국인교환학생들, 호텔을 이용하는 투숙객은 물론 델타, 멕시코, 영국, 하와이, 미국항공 등에서 일하는 파일럿과 관계자들이 아지트 삼아 주인장에게 얼굴도장도 찍고 소식도 전하면서 참새와 방앗간처럼 꼭 다녀가는 곳이 되었다.‘친절한 미남 사장님’으로 통하는 워렌 대표는 단골을 만드는 비법을 이렇게 말한다. “손님들의 얼굴과 이름을 다 기억해 주는 것이지요.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친절입니다.”라며 “신더바 페이스북을 보면 다양한 이벤트가 있어요. 참고하고 오시면 더 즐거울 거예요. 한 번 놀러오세요!” 주점 사장답게 가게 홍보도 잊지 않는다. 신더바 : 월~토 오후 4시 30분~오전 3시(손님이 가고 싶을 때까지) 위 치 : 인천시 연수구 컨벤시아대로 42번길8, 코오롱더프라우1단지102동 박영희 I-View기자 pyh60610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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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18.02.07 (수)
  • 커피로 그리는 인천萬畵

    [인터뷰] 커피로 그리는 인천萬畵

    ‘터키시 커피’의 정열인생, 카페 ‘콩브레’ 이언주 사장​    ​ ‘커·그·인(커피로 그리는 인천만화)’이 이번 주로 100회를 돌파했다. 인천 ‘만인보(萬人譜)’라는 콘셉트로 매주 인천관련 인물을 한사람씩 소개해왔으니, 꼭 100주 동안 100번째 사람을 인터뷰한 셈이다. 인천인의 삶을 일일이 찾아가 듣고 글로 조명하고 그 느낌을 더듬어 커피그림으로 그려내는 과정은 기자에게도, 인터뷰이(interviewee)에게도 가슴 뭉클한 힐링의 경험이었다. ‘커그인100회’의 의미를 자축하기 위해 나름대로 인물선정에 공을 들인 끝에, 기자는 ‘콩브레’ 카페 이언주 사장(47세)과 만날 수 있었다. 사실 처음 그녀의 이야기에 솔깃했던 이유는 ‘커그인100회’와 딱 맞아 떨어지는 ‘커피’이야기, 그것도 인천에서는 맛보기 힘든 ‘터키시 커피’와 버무려졌을 인생역정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터키시 커피’로 말문을 연 그녀의 삶 이야기는 물밑에 몸통을 감춘 거대공룡 같았다.  인류가 처음 마시던 투박한 원시방식인 ‘터키시 커피’ “커피의 맛과 향미를 더욱 고급스럽고 세련되게 만들기 위해 과학적이고도 복잡한 추출과정을 거치는 게 현대 스페셜티커피시대의 트렌드죠. 거기에 비하면 ‘터키시 커피’는 인류가 처음 커피를 마시던 투박한 원시방식 그대로 커피를 내려요. 원두를 갈아 ‘체즈베’, 혹은 ‘이브릭’이라는 용기에 넣고 끓이는 거죠. 거품이 넘치면 식혔다 다시 끓이기를 반복해요. 그러면 마침내 생 날 것의 육중한 커피 맛이 캐러멜화 된 설탕의 달콤함과 어우러져, 깊고 거칠면서도 아득한 풍미의 ‘터키시 커피’가 완성되는 거죠.” 금요일 오후 4시, 인천만수동 만수북초등학교 건너편에 자리한 카페 ‘콩브레’는 손님들로 가득했다. 버너 위에 체즈베를 올려놓으며 이언주 사장이 씩씩한 톤으로 설명을 이어간다. 작고 여린 몸에서 응축된 내공이 느껴진다. “‘터키시 커피’의 또 다른 미덕은 ‘기다림의 미학’이죠. 되풀이해 끓인 후에도 커피가루가 바닥에 가라앉기를 기다려 천천히 잔에 따르고, 가루가 입안으로 딸려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조심 음미하듯 마셔야해요. 다 마신 후에는 컵을 접시에 그대로 엎어 뒀다가 적당히 굳을 때를 기다려 흘러내린 커피자국으로 점을 치는 게 터키사람들 전통이죠. ‘콩브레’에서는 이스탄불원두는 물론이고 용기들도 터키에서 공수해온 것들을 사용해요.”   서울 답십리에서 태어나 종로구 옥인동(현 통인동), 종묘돌담 밑에서 소꿉놀이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단다. 아버지가 인쇄소를 운영하신 까닭에 오빠와 두 여동생까지, 4남매는 집안에 굴러다니는 온갖 활자들과 식자로 일찌감치 한글을 마스터 했다. 과외선생이었던 어머니의 관심은 항상 다른 애들 우선이었지만, 어린 이사장은 오빠가 동네 아이들에게 딱지를 잃고 오면 쫒아가 회수해오곤 했을 정도로 소문난 억척이었다. “답십리초등학교, 동대문여중, 휘경여고를 다녔어요. 중학교 때까지는 1등에 반장과 전교부회장을 도맡았는데, 고등학교 올라가니 상황이 역전되더라고요. 첫 시험에서 20등을 했어요. 전교도 아닌 반에서. 생전 처음 받아본 낯선 성적표에 충격을 받은 어머니는 ‘우리 애가 이럴 리 없다’며 교무실로 찾아가 따질 정도였죠. 다른 아이들이 학원에 과외까지 받고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어요. 중간고사 25등, 다시 기말고사 30등까지 밀렸죠. 희한한 건 모의고사점수는 항상 6~8등을 유지했어요. 문제는 수학이었죠. ‘수포자(수학포기자)’였던 저 땜에 수학선생님이 교장실로 불려간 일도 있었어요. 덕분에 저는 또 수학선생님의 모진 ‘갈굼’을 견뎌야 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죠. 그래도 ‘국어성적’만큼은 독보적이었어요. 교지에 ‘롱펠로우’시평을 게재해, 국어를 가르치셨던 시인 오태환 선생님께 문예반 권유를 받기도 했죠.” 그런 그녀가 휘경여고명물로 학창시절 최고인기를 구가할 수 있었던 건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단다. 하나는 3년 내내 통기타를 둘러멘 채 등교할 정도로 만인이 인정하는 기타리스트였고, 또 다른 하나는 교내 TV방송국 카메라맨으로 맹활약한 덕분이다.  천재시인 ‘김영승’ 때문에 인천과 인연 “인터넷강의와 실시간 방송수업을 위해 1986년 교내에 TV방송국이 만들어지면서 카메라를 담당했어요. 당시 휘경여고 핸드볼팀이 전국적으로 유명했는데, 저는 수업도 빼먹고 경기를 촬영하러 미남 체육선생님과 경기장 순회를 다니곤 해 학우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죠. 각종 행사 때도 제가 카메라를 메고 지나가면 교장선생님조차 자세가 경직되곤 하셨어요.” 그렇게 화려하게 여고시절을 마친 그녀가 인천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89년 인하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면서부터다. 그녀가 하필 인하대학교, 그것도 철학과를 선택한 것은, 엉뚱하게도 천재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인천출신 ‘김영승시인’때문이란다. “아버지는 밥상머리에서 오빠와 저에게 매일아침 신문사설을 읽히셨어요. 그런데 한번은 제가 읽은 사설에, 한 시인의 시집이 너무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판매금지’를 당했다는 이야기가 실린 거예요. 바로 ‘김영승시인’의 ‘반성’이라는 시집이었죠. 그 내용이 너무 궁금해 책이 회수되기 전에, 그 길로 종로서적에 나가 문제의 시집을 샀어요. 시집 어느 부분이 외설이라는 건지는 지금까지도 의문이지만, 문장 하나하나가 엄청난 충격과 감동으로 다가왔죠. 나도 이런 시인이 되기로 마음먹었어요. 그리고는 ‘김영승시인’이 인천출신이고 철학을 전공했다는 이유만으로 뒤도 안돌아보고 인천행을 결심했죠.”   인하대시절은 그녀의 끼를 마음껏 발산했던 황금기였다. 들어가자마자 단번에 과대표와 과학생 회장을 꿰찬 것이다. 운동권학생회장으로 독재타도와 민주화데모에 빠짐없이 앞장서면서도 4.5만점에 4.38이라는 경이로운 학점으로  전액 성적장학금을 놓치지 않은 그녀의 신화는 인하대가 개교한 이래 전무후무한 기록이란다. 그러나 무엇보다 진짜 횡재는 평생의 가시버시를 ‘캠퍼스커플’로 만난 것이다. “인하대에서 가장 시끄러운 여자와 제일 조용한 남자의 캠퍼스연애는 지금까지도 동기들 사이에서 회자될 정도로 최고의 사건이었어요. 도서관만 파고 살던 과 수석 남편의 우직한 대시에 미팅 한번 제대로 못해본 채, 졸업 이듬해 결혼이란 걸 하게 됐죠. 그리고는 대전으로 내려가 ‘파크랜드’라는 의류매장을 운영했어요. 바짓단 수선비를 아끼려고 매장창고에 공업용 미싱과 오버로크기계, 세탁소용 다리미를 들여놓고 수선 일까지 직접 했죠. 2년이 지나니까 미싱기술자가 되어있더라고요. 커튼이며, 파티션, 아기 옷까지 제가 직접 만들었죠.” 그러다 남편과 8박9일의 북경 배낭여행을 가게 되었는데, 우연히 둘러본 북경대학 캠퍼스에 홀라당 정신을 빼앗기고 말았단다. 마침 그곳에 유학 와있던 대학동기를 만나 유학경비며 생활비 등의 정보를 자세히 알아보고는, 돌아오자마자 매장을 정리하고 남편유학을 준비했다. 가게며 집, 자동차를 처분한 돈은 마침 화물운수회사 운영에 어려움을 겪던 시아버지께 모두 드리고, 단돈 300불만 손에 쥔 채 그 해 12월 북경으로 떠났다. 갓 돌 지난 딸아이도 함께였다. “1997년 1월부터 열혈극성 한국아줌마의 좌충우돌 북경생활이 시작되었어요. 자전거 타고 등교하는 남편에게 풀 빳빳이 먹인 한복을 입혀 보내는가하면, 중국어를 마스터하기 위해 중국드라마 시청은 기본이고, 동네 중국아줌마들과 친구가 되어 마작으로 날밤 지새우며 그녀들이 쓰는 말을 익혔죠. 북경 재중한국유치원 보조교사 일도 하고, 택시와 기사까지 대절해 한국주재원 아이들 논술과외도 뛰었어요. IMF가 터지면서는 우리 집이 한국유학생들 아지트가 되어 저녁마다 수제비 파티가 벌어지곤 했죠. 2년 뒤에는 한국식당 매니저로 취업해 홀, 주방까지 40명 중국직원들을 관리했어요. 아침마다 지시사항을 중국어로 작문해 조회연설을 했는데 6개월 지나니까 더 이상 작문이 필요 없어지더라고요. 돈이 어느 정도 모아지자 저도 공부를 해볼 요량으로 사표를 내고 잠깐 한국 들어왔다가, 이 때문에 고생하시는 친정아버지를 보고는 모은 돈을 인플랜트 비용으로 몽땅 쥐어드리고 돌아왔죠.” 다시 북경에서 과외선생도 하고 중국차 다도강사인 ‘다예사’로 활동하고 있는데, 대학동기 하나가 커피믹스 샘플 한 박스를 들고 찾아왔단다. 커피믹스와 에스프레소용 홀빈(whole bean)을 제조하는 경기도 이천의 ‘주식회사 이현’에서 ‘리오하우스’라는 브랜드로 중국진출을 모색 중인데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한때 중국에서 커피프랜차이 19호점까지 오픈 “제 인생이 처음 커피와 조우하게 된 순간이었죠. 중국매장에서 시판 중인 외국산 믹스커피를 종류별로 사와서는, 겉봉에 인쇄된 유통상들 주소와 연락처를 딴 다음, 일일이 전화를 돌렸어요. 그리고는 직접 ‘리오하우스 커피믹스’ 샘플을 들고 찾아가 몸으로 부딪쳤죠.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는 식이었어요. 그런데 딱 2달 뒤 거짓말처럼 주문이 밀려들기 시작하는 거예요. 자그마치 대형 컨테이너를 띄워야할 정도의 물량이었죠. 그러려면 중국내에 사무실을 가지고 정식 수입통관 허가를 받아야하는데 저는 그런 사실조차 까맣게 몰랐거든요. 납품기한은 다가오는데 난리가 난 거죠. 부랴부랴 수소문해 중국인 ‘고사장’이라는 사람을 소개받았어요. 얼마나 급했는지 고사장이 상해에서 아침에 북경으로 날아와서는 노발대발 화를 내는 거예요. LC(신용장)가 뭔지, BL(선하증권)이 뭔지, 위생국식품허가인 ‘중문표기사항’이 뭔지도 모르는 한국인 깡통주부 하나가 덜컥 대형 사고를 쳐놨으니 기가 막혔던 거죠.” 그렇게 고사장의 ‘꽌시(인맥)’덕에 번갯불에 콩 볶듯 얼떨결에 출발한 그녀의 커피사업은 중국 ‘옌사 백화점’ 매장에 최초로 한국커피를 대량 납품하는 것은 물론, 월마트 납품과 대형프랜차이즈 계약까지 일사천리로 뻗어나갔단다.   2003년 11월 북경에 ‘리오 커피하우스’ 1호 매장을 오픈하는 것을 기점으로, 2008년까지 상해, 연태, 천진 등지에 가맹점이 19호점까지 늘었다. “하지만 쉽게 흥한 것은 또 쉽게 물거품이 되더라고요. 시기가 너무 빨랐던 거죠. 영업에 시설, 교육과 배송까지 몸소 나서봤지만, 결국 두 손 들었어요. 남편 박사 따고 한국 들어간 뒤에도 저는 어린 딸과 중국에 남아, 회사 빚 모두 청산하고 마지막 가맹점까지 정리했죠. 그리고는 북경의 ‘리오하우스’를 ‘7080 라이브카페’로 간판을 바꿔달고 통기타가수들을 불러 모아 지인과 공동운영했어요. ‘치링빠링’이라고 지금까지 한국특파원들과 주재원들의 아지트노릇을 하는 곳이죠. 7080밴드에 세컨드기타주자로 합류해 활동하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부터예요. 밴드활동은 사업실패로 만신창이가 된 저를 치유해줬어요. 그것이 인연이 되어 자의반타의반으로 ‘실용음악학원운영’에까지 손을 댔죠. 뭐든 시작하면 몸을 던져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 탓에 음악학원은 북경의 명소로 커졌고, 사군자, 유화, 퀼트, 비누공예, 중국요리, 한국요리, 중국다도, 서예에 명리학 강의까지 진행하는 문화센터 ‘이플(소박하고 아름다운 소리라는 뜻의 순우리말)’로 확장되었어요. 나중에는 ‘이언주 커피아카데미’까지 열어 바리스타, 라떼아트, 로스팅을 가르쳤죠.”   조그만 카페에서 인생의 마지막 목표인 ‘시인’ 꿈꾸는 중 그녀의 커피아카데미가 유명세를 타자 한국의 유명프랜차이즈 ‘할리스커피’가 중국에 진출하면서 그녀를 스카우트해, ‘할리스중국지사’ 총경리(대표이사)를 맡겼단다. 기사 딸린 승용차에 개인 집무실까지, 최고대우였다. 그녀의 ‘리오하우스’시절 맺었던 탄탄한 인맥과 경험이 다시 빛을 발했으리란 건 불문가지다. “18년간의 북경생활을 접고 2013년 초 다시 인천으로 돌아온 것은 가족 때문이었어요. 고3인 딸아이의 대학진학문제도 걸려있고, 먼저 귀국해 인천대교수로 있던 남편과도 8년이나 떨어져 지냈거든요. 서강대철학과로 진학한 딸아이는 중국정부에서 주최하는 ‘세계대학생중국어대회’에서 아시아 1등을 차지해, 중국유학 장학금 일체와 졸업 후 한국주재중국은행에 취업예약이 되어있는 상태죠. 돌아보면 참 치열하게 살아왔던 것 같아요. 그런 제 자신이 너무 고맙고 대견해요. 이젠 평생 가슴 밑바닥에 밀어뒀던 시(詩)나 붙잡아 보려고요.”  아침에 강아지와 동네를 돌다 발견한, 조그맣고 아담한 빈 가게를 저녁에 덥석 계약해 카페 ‘콩브레’를 연 것이 1년쯤 전이란다. ‘콩브레’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소설 1장에 등장하는 마을이름이다. 과거의 시간을 떠올리는 첫 출발점인 것이다. 그녀는 이 조그만 카페에서 인생의 마지막 목표인 ‘시인’을 꿈꾸는 중이다. 2016년 ‘한국일보신춘문예’에서는 최종심까지 올랐고, 2017년 ‘문화일보신춘문예’에서는 ‘사과를 깎다가’라는 작품이 최종 3편에 오르기도 했다. 그녀의 또 다른 출발이 기대되는 이유다. 글. 커피그림 유사랑 I-View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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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18.02.07 (수)
  • 1980년대 달동네 전경

    [그때 그 시절] 가난했지만 정겨움이 살아있던 열우물마을

    숨어있는 부평이야기- 부평 마지막 달동네  달동네. 누군가는 아련한 추억이 있는 정감 있는 이름으로, 누군가는 치열한 삶의 현장으로 기억한다. 달동네는 달빛 바로 아래 있는 동네라서, 혹은 방세를 달마다 지불하는 셋방이 많아서 달동네라고 불린다. TV 드라마 속에서 서민들이 거주하는 대표적인 공간으로 설정되기도 한다. 좁은 골목과 삐뚤빼뚤한 계단, 산을 오르듯 가파른 언덕, 담벼락을 마주한 이웃들, 이러한 달동네의 모습은 점점 자취를 감추고 있다. 인천 역시 마찬가지다. 철거민촌으로 시작한 달동네열우물마을이라고 불리는 부평 십정동에는 부평 마지막 달동네가 있다. 달동네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후반의 일이다. 원래 이곳은 마을 사람들이 무허가 묘지로 이용하던 야산과 포도밭 등이 있었다. 도화동, 율도, 숭의동, 주안동 등 각지에서 시행된 개발로 인하여 철거민들이 발생하였는데, 그 철거민들이 달동네로 이주해와 터를 잡았다. 철거와 이주의 역사가 공존하는 이곳은 인천 지역 철거민의 마지막 선택지이자, 최후의 보루였다.1970년대, 폐염된 주안염전 자리 위에 주안공단이 들어서며 달동네는 큰 변화를 맞이하였다. 공단 노동자들은 공단 인근의 값싼 주거지를 찾아 달동네로 모여들었다. 달동네는 공단의 배후 주거단지 역할을 하기 시작하였다.달동네에 주민들이 늘어나며 마을은 점차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주민들은 기존에 있던 방을 갈라 부엌을 만들고 골목 쪽으로 문을 달아서 셋방을 내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쪽방들이 세입자를 맞이하였다. 한편 주민들의 생활 여건은 열악한 편이었다. 대다수 사람들은 불안정한 고용 조건 하에 위험한 현장으로 내몰렸고, 소득 수준 또한 높지 않았다. 소위 힘 있는 사람이 없었기에 열악한 주거환경은 쉽게 개선되지 않았다.   마을공동체의 형성과 활동1986년 조사에 따르면, 열우물마을 달동네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어려움은 열악한 주거환경에서 파생한 문제와 일터에 나가있는 동안 자녀를 돌보는 문제였다고 한다. 활동가들은 우선적으로 달동네에 공부방과 놀이방을 설립하여 자녀 돌봄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주민들은 이때 설립된 해님공부방과 해님놀이방을 통칭하여 해님방이라 불렀다. 해님방에 아이를 맡긴 부모들은 함께 모여 달동네의 문제를 고민하고 개선해 나가기 위하여 노력했다.1989년, 십정동 지역 5개 주민사업단체(해님방, 열우물진료소, 인천사회운동연합 북부지부, 소성교회, 샘터교회)가 모여 서로의 사업을 교류하고 공동 사업을 추진해 나가기로 결의하였다. 이 모임은 열우물주민회로 변모하였다. 열우물주민회에서는 동네신문 열우물소식을 꾸준히 발간하고, 정월대보름 지신밟기와 열우물단오제 행사, 여성교실, 주민교실, 동네방역사업, 식목일 나무심기 행사 등 지역 실정에 맞는 활동을 펼쳐나갔다.    재개발과 벽화 마을의 아이러니한 공존 마을 공동체가 활성화되며 점차 마을 문제에 대한 개선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주거환경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었다. 여름이면 비가 새고, 겨울이면 수도가 터지곤 했다. 임시로 양철지붕을 달고 수도 배관을 꽁꽁 싸맬 뿐이었다. 인근 아파트에 둘러싸인 달동네는 외딴 섬과 같았다. 하지만 사업성 문제로 몇 번이나 재개발은 번복되었다. 말만 무성한 재개발로 인하여 집을 수선하는 문제는 뒷전이 되어버렸고 마을은 더욱 침체되어갔다.재개발이 멈춘 곳, 이곳에 공공미술그룹 ‘거리의 미술’이 벽화를 그리기 시작하였다. 1997년 해님공부방 벽화를 그린 것을 시작으로 2002년부터 2016년까지 ‘열우물길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낡은 마을에 희망을 물들여나갔다. 달동네는 ‘열우물벽화마을’이라고 하는 새로운 애칭이 생겼다.    부평 달동네의 마지막 순간2010년대 들어, 달동네는 영화, 드라마의 촬영지로 각광 받았다. 프레임 안의 풍경은 이곳에서 실제 벌어진 일을 찍는 것이 아니라 시나리오 속의 공간을 대체하기 위함이었다. 사람들 추억 속의 달동네, 혹은 어두컴컴한 동네를 재현하기 위하여 이곳에서 촬영이 이루어졌다. 응답하라 1988, 은밀하게 위대하게, 가면, 나쁜 녀석들 등이 이곳을 촬영지로 택했다. 이러한 재현의 효과는 사람들에게 추억을 불러일으켰고, 더불어 달동네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하지만 주민들에게 대중들의 관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거환경 개선이었다. 지난 2017년, 인천도시공사가 시행하는 ‘십정2구역 주거환경개선사업’이 본격화되며 달동네 주민들이 이주를 시작하였고, 현재 대다수의 주민이 이주를 완료하였다.곳곳에서 달동네를 기억하기 위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달동네 출신 가수는 ‘열우물길’이라고 하는 자작곡을 발표하였고, 달동네 ‘기억 공간’의 조성에 대한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상정중학교 사진동아리 아날로그에서는 열우물마을 사진집을 제작하고 있다. 인천도시공사에서는 백서를 제작하는 한편, 마을 공동체 공간 조성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부평역사박물관에서는 이주를 앞둔 달동네에 대한 학술조사 계획을 수립하고 2017년 한 해 동안 부지런히 자료를 수집하고 현장을 살폈다. 역사, 민속, 문화, 사진 분과로 나뉜 전문위원들이 사라져가는 마을의 마지막 순간을 고스란히 담아내었다. 마을에서 오래 활동한 분들이 전문위원으로 참여하여 더욱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 이 결과물은 열우물마을, 부평 십정동이라는 제목의 학술총서로 편찬되었다. 조사하며 수집한 생활사 자료를 토대로 특별기획전 부평 마지막 달동네, 열우물연가(2017.11.21.~2018.2.25.)을 개최 중에 있고, 열우물마을 달동네를 추억하는 토크콘서트를 개최한 바 있다.이렇듯, 각계에서 저마다의 방법으로 달동네를 기억하고자 한다. 이제 달동네라는 이름조차 추억 속으로 사라진다. 달동네의 추억이 스며있는 공간에 들어설 새로운 마을의 모습을 기대해본다.        글, 사진 손민환(부평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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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18.02.05 (월)
  • 송림시장

    [리뷰] 우주선을 닮은 ‘송림시장’ 이야기

    스페이스 빔 2017 기획프로젝트로 발간  인천의 오래된 시장이자 사람들의 추억이 머금은 장소인 송림시장의 이야기를 모은 ‘송림시장’ 책이 발간됐다. 이 책은 인천 동구 배다리마을에 기점을 둔 지역공동체문화공간 스페이스빔이 2017년도 기획프로젝트로 진행한 결과 자료집이다. 송림시장은 동구 송림동 67-10에 위치하고 있으며 1958년 개설되어 1971년 개축했으나 주변에 새로운 시장들이 생겨나면서 상권을 상실한 상태다. 도시 재개발 또는 재생의 논리와 계획 속에서 향후 그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 놓여있다. 이에 이번에 발간된 ‘송림시장’은 지난 역사와 변천사, 그 속에서 살아온 또는 살다간 분들이 이야기를 비롯한 그곳만의 남다른 가치와 특성, 현상 등을 살펴 기록으로 남김으로써 앞으로 이를 고려한 세심한 접근이 될 수 있도록 했다. 책은 송림시장 주변 공간의 역사부터 송림시장의 특이한 건축적 고찰, 건물 스케치 풍경, 오래된 간판들 등을 비롯해 송림시장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남성들만이 출입하는 공간을 취재했다. 시장 골목을 활기있게 만들고 삶을 꾸린 여성들의 이야기와는 달리 남자들만의 공간인 남탕, 이발소 등을 취재했고, 송림시장에 쓰임을 다한 모습, 어떠한 흐름에서 밀려난 모습, 찾는 사람이 거의 없는 모습, 본래의 목적을 잃은 모습 등도 담았다. 공허하고  정지된 공간의 모습을 한 시장이 너무 씁쓸하기도 하고 쓸쓸한 느낌이 든다.  책의 목차는 ▷송림시장 주변 공간의 역사(김현석) ▷송림시장의 건축적 고찰(오승예) ▷송림시장의 풍경(최세진) ▷정지된 시간(박종인) ▷간판들(박혜민) ▷남자들과 송림시장(김재민이) ▷그 다름 이야기(우수현) ▷올림포스호텔 67로 가 주시오(진나래) ▷송림시장 미니어처(임기웅)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스페이스 빔 2017 기획프로젝트> 배다리 도시학교_근대건축 & 생활문화 리서치결과보고 자료집 송림시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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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18.02.05 (월)
  • 울동네 맛고수.6

    [웹툰 · 갤러리] 울동네 맛고수.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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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18.02.07 (수)
  • 유심초, 이철호, 부평에서 음악을 잉태하다

    [외고 · 칼럼] 유심초, 이철호, 부평에서 음악을 잉태하다

     인천, 노래, 그리고 음악인- ⑪ 부평 그리고 부평의 음악공간(후편)​ 인천광역시를 대표하는 명소들을 떠올리며 해당 장소의 간략한 역사와 그 곳을 소재로 탄생했던 여러 대중가요들, 그리고 관련된 인천 출신, 혹은 인천을 근거로 활약했던 뮤지션들의 알려진, 또는 숨은 이야기들을 함께 엮어본다. 부평을 조용히 지켜온 뮤지션 정유천과 클럽 ‘락캠프’지난 회 끝 부분에 언급된 노래 <빨간 사과>의 작곡자인 정유천은 원래 경기도 포천 태생이다. 아버지가 부평 에스컴 미군 부대의 제빵 공장에서 일하게 되면서 그는 9살 때 부평으로 이사했으며, 이후 이 지역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중 3때 처음 기타를 잡은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 후 아마추어 밴드를 결성해 인천의 고고클럽 무대에서 활동했다. 그는 1979년 해군 군악대 복무 시절 인연을 맺은 선임들을 따라 서울 낙원상가 주변의 클럽들을 중심으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대로 1985년 이종만 등과 함께 밴드 자유인을 결성해 음악계에 데뷔했다. 그러나 기획사와 그 주변 관계자들은 당시 정유천보다 지명도가 높았던 이종만의 솔로 앨범으로 이 음반을 홍보했다. 결국 이종만을 뺀 나머지 멤버들은 음반 발매 후 함께 활동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이에 창작에 대한 회의감을 느낀 그는 몇 년간 나이트클럽 밴드에서 연주하며 공식적인 음악 활동을 중단했다. ​▲ 정유천 1990년경 심기일전한 정유천은 활동을 재개하기 위해 다시 솔로 데모 테이프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솔로 데모 테이프를 동아기획 등 서너 곳에 보냈지만 계약을 맺지 못하다가 1집의 히트 이후 인기가 주춤했던 이종만과 재회했다. 이종만이 데모테이프를 현대음향에 전달해준 덕분에, 정유천은 포크 뮤지션 김두수와 함께 현대음향 레이블의 첫 전속 가수가 되었다. 회사의 지원을 받은 정유천은 이종만의 도움으로 알게 된 밴드 11월의 김효국, 훗날 드라마 작곡가로 유명해진 최경식 등 탁월한 세션 라인업의 도움으로 블루스 록에 기반을 둔 가요 음반을 완성했다. 그렇게 해서 1991년 5월 정유천의 정규 1집 「하나뿐인 지구」가 발매되었지만 소속사의 홍보 수완 부족으로 메이저 방송에는 거의 출연하지 못했다. 이에 대해 정유천은 2017년 5월 필자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DJ친목회 박병식 회장의 도움으로 지방 DJ들이 주도하는 음악 카페들을 돌면서 공연했던 것이 전부였다”고 밝혔다. ​​ 앨범 2장이 모두 실패한 후 정유천은 다시 유흥업소에서 연주하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했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에 대한 욕구가 여전히 존재했다. 그러던 1996년, 부평 마사회 로타리 부근 건물 2층에 유시제라는 인물이 운영한 ‘블루스 파크’라는 클럽이 생겼다. 정유천 역시 이전의 춤추는 나이트클럽과는 달리 맥주 바로 운영되면서 공연을 할 수 있는 곳은 처음 알게 되었고, 그 곳에서 ‘내추럴 푸드(Natural Food)’라는 자신의 팀을 짜서 저녁시간마다 1시간 씩 공연을 했다고 한다.그러나 블루스 파크가 1년 만에 영업이 어려워지면서 업종을 변경해야 하는 상황이 되자, 정유천은 자신이 스스로 새 클럽을 오픈하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인천에서 최초로 홍대스타일과 같은 포맷의 클럽 ‘락캠프’가 문을 열었다. 당시의 위치는 현재 부평 사거리(인천지하철 1호선 부평삼거리역 근방)에서 영업을 했다. 개업 초기에는 “현충일 빼고는 거의 1년 내내 영업을 했다.”고 할 만큼 인천의 로컬 밴드들부터 서울, 지방의 밴드들이 모두 이곳에 몰려들어 공연을 이어갔다. 락캠프는 2006~2010년에는 강화도로 들어가 카페 겸 공연장으로 운영을 했고, 2010년 부평구청역 근방에서 영업을 재개했다. 지금까지도 매주 토요일 공연을 이어오면서 인천의 중요한 음악 클럽으로서 그 위상을 지켜내고 있다. ▲ 락캠프에서 공연중인 뮤지션들  다른 부평 출신의 뮤지션들: 유심초, 이철호 전편에서 언급했던 에스컴(ASCOM) 시대 이후에도 부평 지역에서는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여러 뮤지션들이 탄생했다. 그 중 포크 음악계에서 1980년대 초반 큰 인기를 끌었던 듀오 유심초는 현재까지도 주류에서는 아니라도 꾸준히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팀이다. 유시형, 유의형 두 형제로 구성된 이 듀오는 인천 부평동에서 태어나 부평동초등학교, 동산중고교를 졸업한 인천의 토박이들이다. 두 사람은 서울로 대학을 다니던 시절에 듀엣을 결성해서 1975년 이종용과의 스플릿 앨범 [이종용의 너/유심초의 너와의 석별](<너>는 원래 유심초가 먼저 받은 곡이었는데 이종용이 부른 버전이 먼저 알려져 히트를 했다)로 데뷔했다. 1970년대 후반에는 군복무 관계로 잠시 활동을 쉬었지만, 이후 1980년대 초반 <사랑이여>,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리> 등의 히트로 포크계의 대표적 남성 듀오 중 한 팀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 유심초 또 한 명의 베테랑 뮤지션이 인천 토박이이자 현재 부평을 근거로 살고 있다. 1970년대 후반 <한동안 뜸했었지>로 데뷔하여 <장미>, <울고 싶어라>, <샴푸의 요정> 등을 히트시켰던 밴드이자 한국에서 펑키 사운드를 구사하는 밴드들의 역사 속에서 독보적인 그룹으로 인정받아온 밴드 사랑과 평화의 초대 보컬리스트이자 지금도 밴드를 이끌고 있는 이철호가 그 주인공이다. 비록 개인 사정으로 원년 멤버였음에도 데뷔 앨범에서 음반 녹음에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당시 공연 활동에서 그는 여전히 리드보컬이었다. 80년대에는 잠시 탈퇴했지만 5집 활동부터 다시 참여하면서 현재까지 그는 밴드의 프론트맨 역할을 멈추지 않고 있다. 특히 그는 한국 록 보컬리스트들 가운데 1970년대 당시에는 가장 흑인들의 펑키 리듬에 맞는 보컬 톤과 구사력을 가진 아티스트였다고 평가받고 있다. ▲ 이철희  부평역, 지하상가, 그 주변에 걸친 음악 공간들의 기억들 1973년 에스컴이 공식적으로 해체된 후, 부평 지역 사람들의 음악 문화 공간들은 주로 부평역부터 부평시장까지의 유흥가, 또는 부평역사를 기점으로 거미줄처럼 뻗어있는, 항간에선 한국에서 가장 출입구 수가 많음을 자랑(?)하는 부평역 지하상가를 중심으로 분포되었다. 일단 부평역 지하상가는 다른 인천의 여타 지하상가들이 그러했듯 10여 곳 이상의 음반점들이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었으며, 부평역 유흥가 속에는 여러 LP바, 음악 호프집이 1980년대부터 성업했다. 예를 들어 LP바로는 ‘매니아’라는 곳이 1990년대 젊은 음악 매니아들에 꽤 유명했고, 현재 부평역에서 부평시장으로 향하는 유흥가 한가운데에 위치했던 ‘호프호프’라는 대형 호프집에서는 영업시간 내내 헤비메탈 음악들이 계속 흘러나왔던 곳으로, 손님이 항상 빽빽하게 들어찼다고 한다. 당시 동인천과 달리 전문 음악감상실이 없었던 부평지역에서는 이런 곳이 그런 갈증을 푸는 곳 중 하나였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 음반의 시대에서 음악 파일의 시대로 이동하면서 지하상가 속 대부분의 음반점들은 사라졌지만, 1990년 개점했던 ‘소리그림’은 꾸준히 그 곳을 지키다가 2012년에 부평 시장 롯데 시네마가 있는 건물 1층으로 이사해 현재도 영업 중이다. 이 가게의 사장 채주병씨와 그의 음악 지인들을 주축으로 1990년대에는 ‘지음 음악회’라는 음악 감상회가 열리기도 했다.  ​ 그리고 지금은 비록 사라졌지만 인천 대중음악의 역사의 기록에서 잊지 않아야 할 장소가 한 곳 있다. 바로 2006년 부평역 유흥가 속에서 처음 문을 열었던 인디 레이블 사무실 겸 밴드들이 연주하는 클럽이었던 ‘루비살롱’이다. 이 클럽을 운영했고 현재는 루비 레코드로 이름을 바꿔 계속 레이블 운영을 이어가고 있는 이규영 대표는 홍대 앞 인디 신 초창기부터 활동을 시작했던 베테랑이다, 그는 노 브레인(No Brain)이 소속되어 있던 인디 레이블 ‘문화사기단’에서 ‘푸펑충’, ‘글로벌 코퍼레이션’ 등의 밴드를 조직, 활동했으며 밴드 락타이거스(Rock Tigers)의 창단 멤버이기도 했다. 그가 한동안 음악계를 떠났다가 2000년대 중반 원맨밴드 하이라이츠(Highlights)로 다시 돌아온 후, 자신의 활동을 위해 ‘루비살롱’이라는 자체 레이블을 설립했다. 그리고 작업실 겸 합주실로 구한 공간을 밴드들이 연주하는 클럽 공간으로 만든 것이 ‘클럽 루비살롱’이었다. 이 레이블과 클럽 무대를 통해서 우리는 국카스텐, 검정치마, 갤럭시 익스프레스 등 2010년대 한국 인디씬을 대표할 밴드들의 초창기 모습을 만날 수 있었으며, 비록 2011년으로 부평의 클럽은 문을 닫았지만, 루비살롱은 ‘루비레코드’라는 레이블로서 지금까지 12년 동안 멋진 인디 뮤지션들의 산실로 그 역할을 다 하고 있다. 그리고 지난 2017년 가을 이규영 대표는 인천 신포동의 폐업한 여관 터를 개조해 새로운 카페 겸 문화 공간 ‘인천여관X루비살롱’을 개점하면서 그의 열정을 새로운 버전으로 확장해 가고 있다.​▲ 인천여관 루비싸롱 인디 록의 강력한 루키 빛과 소음의 <부평 지하상가> 부평 지하상가에 대한 얘기를 위에서 언급하다보니, 가장 최근에 이 곳에 대한 노래를 만들어 [Sound of Incheon] 앨범 속에 수록한 한 밴드에 대해 마지막으로 언급해야 할 것 같다. ‘빛과 소음’이라고 자신들을 명명한 이 4인조 밴드는 2009년 처음 결성되어 인디 레이블 일렉트릭 뮤즈에 소속되어 2012년 해당 레이블 컴필레이션 앨범에서부터 첫 선을 보였다. 그리고 꾸준히 홍대를 기반으로 활동했고, 2015년에는 헬로루키에도 선발되기도 했다. 마침내 2017년 1월 첫 음반인 [Irregular]를 공개하면서 인디 록 팬들과 평단의 찬사를 받으며 2017년 인디 록계의 대표 신인 밴드로 떠오르고 있다. 이 밴드가 EP속의 <월미도 바이킹>에 이어 <부평지하상가>라는 노래를 발표하게 된 것은 멤버 중 보컬이자 기타를 맡고 있는 이태호가 부평 출신의 인천 토박이이기 때문이다. 해외 인디 씬에서 유행한 노이즈 록을 기반으로 사이키델릭이나 하드록, 서프록, 포스트록까지 포괄하는 이 밴드의 사운드 중 특히 포스트 펑크적인 노이즈 록을 추구한 이 노래의 가사에는 정말 부평에서 자라고 성장한 청춘의 감정들이 지하상가라는 소재를 바탕으로 잘 표현되어 있다. ▲ 인디 록의 강력한 루키 '빛과 소음'  “수줍게 웃고 있던 분수대의 약속들/길다란 몸통 같은 끝이 없는 길/반짝이는 별들의 거리를 지나가면/조그만 출구 끝에 너의 집에 놀러 가곤 했지/그 먼 끝엔 부평지하상가/이 동넨 원래 그랬어 부평지하상가/햇살이 한 줌 들지 않던 시절엔/어디든 갈 수 있던 지름길로 우린/오색빛깔 휘청이던 거리를 지나가네/조그만 빛을 찾아 헤매이면 우린 꿈을 꾸네” (빛과 소음, <부평 지하상가> 가사 중 일부)   글 · 사진 김성환 음악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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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18.02.05 (월)
  • 경제자유구역에 세계 최고 바이오·헬스단지 세운다

    [뉴스 속 뉴스] 경제자유구역에 세계 최고 바이오·헬스단지 세운다

    IFEZ 15주년 맞아, 5대 전략, 20개 실천 과제 추진​앞으로 글로벌 기업 120개가 추가로 유치되고 세계 최고·최대의 바이오·헬스 단지가 조성돼 IFEZ(인천경제자유구역)의 도약을 이끈다. 또 4차 산업혁명을 선도하는 융·복합 허브가 조성되고 50억원 규모의 글로벌 인재 육성 장학기금이 조성되는 등 인천지역의 우수인재를 글로벌 리더로 육성하는 방안이 본격화한다. IFEZ는 ‘글로벌 비즈니스 프런티어(Global Business Frontier)라는 비전 아래 △동북아 비즈니스 중심도시 △4차 산업 선도기지 △글로벌 교육도시 △문화·레저 허브 △스마트시티 등 5대 목표, 글로벌 기업 유치와 최고의 비즈니스 환경 조성 등 20개 과제를 추진한다. 이번에 발표된 IFEZ의 목표와 과제는 지난 15년간 IFEZ의 성과와 반성을 토대로 급변하는 미래 변화상에 대응하기 위한 것으로 앞으로 IFEZ 발전자문위원회와 전문가 등의 자문을 통해 세부 실행계획 로드맵 작성 등을 거쳐 오는 10월 15일 개청 15주년 기념일에 맞춰 확정, 선포된다.   1. 글로벌기업 120개 유치 등 동북아 비즈니스 중심 도시로 도약 IFEZ는 동북아 비즈니스 중심도시 구현을 위해 현재 80개 기업에서 추가로 120개의 글로벌 기업들을 유치하는데 박차를 가해 양질의 일자리 창출과 협력 기업의 투자를 이끌어낼 계획이다. 또 청라 하나금융타운 조성과 녹색환경금융도시 조성을 통한 녹색금융밸리 조성에 본격 나선다. 서부산업단지를 첨단산업단지로 고도화하고 수도권매립지를 글로벌 테마파크·리조트로 개발하는 한편, 강화도 남단을 인천공항과 연결하는 의료관광·레저·산업단지로 조성하는 등 이들 지역에 대한 경제자유구역 지정을 본격 추진한다. 이와함께 현재 15개인 국제기구를 50개로 늘려 유치하고 외국인 전담 진료소와 법률·세무 등의 전담 창구를 설치하는 등 국제기구 유치를 위한 최적의 입지를 조성할 계획이다. 또 제3연륙교 개통, 영종~강화 연도교 신설, 인천 지하철 1호선 연장, GTX-B 개통, 수도권 제2순환고속도로 개통, 인천국제여객터미널 준공 등을 통해 사통팔달의 입체적 교통 인프라를 구축하여 IFEZ와 원도심 간의 접근성을 획기적으로 개선, 경제자유구역 개발과 투자유치 효과가 인천 전역으로 확산토록 한다.   2. 바이오클러스터 확대 조성 등 4차산업 선도기지, IFEZ 4차산업 혁명에 적극적으로 대응, 송도 4·5·7공구와 인접한 11공구를 연계, 세계 최대·최고의 바이오·헬스케어 단지를 조성하고 송도에 메디컬타운 조성, 영종에 준 종합병원을 유치, 청라에 의료관광복합단지를 조성하는 등 미래형 의료복합타운도 만든다. 이와함께 송도국제도시에는 IT, BT, 메디컬 융복합, AI, 5G, IoT, 자율주행, 핵심소재부품 등 4차 산업혁명 핵심기술 기업을 중점 유치하고, 영종에는 항공정비(MRO)특화단지 및 일반항공산업단지 지정과 항공정비, 운항훈련센터, 항공부품 등 국내외 기업을 유치하며, 청라국제도시에는 로봇·드론·신에너지 기업을 집적화하고 인천하이테크파크에는 미래자동차 부품기업유치를 통해 4차 산업혁명을 선도하는 융·복합 허브를 조성한다.    3. 글로벌 리더 육성으로‘글로벌 교육도시’로 발돋움 세계가 주목하는 글로벌 교육도시로 도약하기 위해 교수아파트와 강의동 신축, 암스테르담 음악대학 등 세계 50위권 글로벌 대학 유치 등을 골자로 한 인천글로벌캠퍼스 2단계 사업을 적극 추진한다. 특히 차세대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 약 50억원 규모의 글로벌 인재 육성 연구기금과 장학금을 조성하고 인천글로벌캠퍼스와 채드윅 국제학교, 달튼외국인학교 등과 연계한 인천지역 초중고생들을 위한 특례 입학, 글로벌 캠퍼스 어학연수 프로그램 확장 운영 등에도 나선다. 이와함께 스텐포드대 스마트시티 연구소 등 해외 유수의 연구소 유치, 과학기술 단지 조성, IFEZ 산업혁신 포럼 운영 등을 통해 혁신을 창조하는 협력 플랫폼도 구축하여 교육·연구·산학협력의 시너지를 극대화한다.   4. 신쇼핑 허브 구축 등 통한 문화·레저 허브 전략 추진 파라다이스시티와 시저스 코리아 등 4곳의 복합리조트 집적화를 통해 지역경제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에 적극 나서고 송도 워터프런트, 청라 시티타워, 왕산마리나 관광시설 확충 등으로 해양 레저·관광 인프라를 조성하는 한편 올 상반기 착공 예정인 청라 신세계 스타필드와 송도의 롯데쇼핑몰과 신세계 복합쇼핑몰 등을 통한 신쇼핑 허브도 구축할 계획이다. 900개의 부스와 2,000명이 동시 수용 가능하고 국제회의시설이 갖춰진 송도컨벤시아 2단계 개관을 통해, ICT(정보통신기술)를 기반으로 한 스마트마이스 조성 등으로 융·복합 마이스(MICE) 산업을 육성하는 한편 아트센터인천 콘서트홀을 오는 10월 그랜드 오픈하고 IFEZ를 대표할 수 있는 세계적인 축제 발굴에도 박차를 가할 계획이다.   5. 편리하고 안전한 스마트 시티로의 도약 IFEZ를 인공지능, 빅데이터 등 4차 산업 기술을 적용한 첨단 미래형 스마트시티로 구축하고 특화모델 발굴과 브랜드화를 통해 IFEZ의 스마트시티 해외 수출을 적극 추진한다. 경관상세계획 수립과 특별계획구역 지정, 경관심의 강화, 경관향상 T/F팀 운영 등으로 IFEZ에 창의적이고 차별화된 건물이 들어서도록 적극 유도하고 태양광을 이용한 친환경 에너지 공원조성, 전기자동차 충전시설 확충 등을 통해 IFEZ를 자연과 사람이 조화로운 친환경 에너지 도시로 조성할 계획이다.  유정복 시장은“이미 선진국들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한 광역경제권을 추진, 도시 경쟁력을 크게 강화시켜나가고 있다”며 “이제 인천을 중심으로 하는‘동북아 비즈니스 중심도시’개념을 재정립해야 할 시점이며, 그 핵심동력이 바로 IFEZ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개청15주년, IFEZ의 목표와 과제 발표가 바로 미래 인천은 물론 대한민국의 성장을 위한 뼈대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라며“IFEZ가 앞으로 시민이 행복한 인천 주권시대를 열어가는 첨병이 되어 줄 것”을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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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18.02.07 (수)
  • 명절 가래떡, 좋은 쌀로 만들어야 맛있죠

    [인천 이야기] 명절 가래떡, 좋은 쌀로 만들어야 맛있죠

    32년 전통 강화읍 낙원떡집​ 골목이 사라지면서 덩달아 사라진 것들 많다고 한탄했던 어느 시인처럼, 달라진 일상 속에 되살리고 싶은 풍경이 있다. 어린 시절, 설이 돌아오면 어머니는 쌀통에서 푼 쌀을 ‘고무대야’에 담았다. 철없는 어린것들은 떡 방앗간 나들이가 좋았다. 떡 방앗간 안에는 ‘고무 대야’들이 가지런히 차례를 기다렸다. 기다림이 지루해질 즈음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흐물흐물한 가래떡을 양손에 쥐고 뜯어 먹던 떡 맛은 잊지 못할 정도다. 정겨운 옛 추억이 아쉬운 요즘, 민족의 명절 설날을 앞두고 32년 간 어머니의 손맛을 지키고 있는 떡집을 찾았다. 강화읍 중앙시장 인근의 ‘낙원떡집’이다.     80년대만 해도 명절엔 손님들로 문전성시 이른 아침, 설 명절이 바짝 다가오면 주인부부의 손길이 바쁘다. 가게 안은 떡 기계 돌아가는 소리만 들린다. 30년 넘게 호흡을 맞춰온 부부는 말을 하지 않아도 손발이 척척 맞는다. 부부의 능숙한 손끝에서 정갈하면서도 쫄깃한 절편이 탄생한다. “나는 목포, 아내는 해남 사람이에요. 학교 다닐 때 떡장사 하는 친구 따라 일을 배웠죠. 서울 올라와서 서교동의 친구 떡집에서 본격적으로 떡을 만들다가 창천동에서 풍년떡집을 했어요. 그때는 저녁 10시부터 일을 시작했어요. 매일 자는 둥 마는 둥 하며 떡을 만드는 데, 너무 힘들어서 더는 못하겠더라고요. 그러다가 1986년에 친구 조카가 강화읍 떡집을 소개 해줬어요. 3년만 하고 그만 두려 했는데, 파릇파릇한 30대에 와서 벌써 60대 중반이 되었네요.” 새벽 2시에 일어나야 아침 9시쯤 가게 문을 열 수 있는 고된 일과의 반복. 그나마 80년대 후반부터 기계가 보급 되어 일이 조금 수월해졌지만, 손으로 일일이 빚어야 하는 작업은 정성과 인내심이 없다면 못할 노릇이다.  “지금은 공원으로 바뀌었는데, 80년대까지만 해도 저 자리에 장이 섰죠. 강화읍에 활기가 넘치던 시절이었어요. 사람도 많았고 살림도 넉넉했죠. 시골 할머니들이 집에서 만든 떡을 장에 가져와서 팔았거든요. 떡골목이라고 불렀는데 거기에 가게를 열었어요. 떡이 없어서 못 팔 지경이었어요. 명절 앞두고는 손님들이 거짓말 안 보태고 100미터는 줄을 섰어요. 끼니도 못 챙겼다니까요. 손님들끼리 새치기 하지 말라고 싸우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허리 한번 제대로 못 펼 정도로 불티나게 팔렸던 그 때, 가게를 키우고 점원을 늘렸다면 큰돈을 모았을 것이다. 부부는 욕심 내지 않았다. 과욕은 화를 부른다는 삶의 지혜를 알고 있었다.  강화쌀로 만든 떡맛은 최고 세월이 흐르고 라이프 스타일이 바뀌었다. 떡집 보다는 베이커리를 찾는 사람이 더 많아졌다. 효율성과 편리성을 쫓아서 공장에서 생산된 제품을 판매하는 떡가게가 늘었다. 전날 필요한 떡을 주문하면 새벽에 박스로 배달되지만, 노년에 접어든 부부는 이 시스템에 동참하지 않는다. 인건비도 안 나온다는 푸념을 늘어놓으면서도, 오래 살려면 계속 움직여야 한다며 오늘도 쌀을 불린다. 강화군 양사면 조산리 방앗간의 쌀. 수익은 포기해도, 강화쌀 만큼은 포기 할 수 없다.  “비법이요? 별거 없어요. 쌀이랑 소금 좋은 거 쓰고, 이 동네가 물맛 좋기로 유명하니까. 물 깨끗한 게 다에요. 떡은 무조건 쌀이 좋아야 해요. 쌀 좋으면 다 맛있어요. 가끔 주부들이 묵은 쌀 아깝다고 가래떡 뽑는데, 그러지 마세요. 수분이 적어서 맛없어요. 떡에서 군내 나거든요. 가래떡일수록 맛있는 쌀로 해야죠.” 백설기, 인절미, 바람떡, 꿀떡, 약식, 시루떡, 절편, 가래떡... 어르신들이 ‘앙꼬모찌’라고 부르는 찹쌀떡까지. 소담스럽게 놓인 빛깔 고운 떡들을 보니 침이 고인다. 다 맛있지만, 그 중 ‘앙꼬모찌’와 바람떡이 가장 인기다.  떡에서 강화도의 맛이 떠올라 딸랑, 하고 가게 문이 울렸다. 젊은 여성과 인상 좋은 노부인이 들어오셨다. 모처럼 친정집에 놀러온 딸을 위해, 어머니는 ‘앙꼬모찌’ 한 상자를 주문한 것이다. 20년째 단골이라는 노부인께 낙원떡집을 자주 찾는 까닭을 물었다. “어릴 적 어머니가 빚어 주신 맛이에요. 먹다보면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나서 코끝이 시큰해요. 시집간 딸도 이집 떡 먹으면 고향인 강화도가 떠오른 데요. 그래서 딸이 올 때마다 손에 들려 보내고 있습니다.”   ‘앙꼬모찌’ 한 상자 가격이 궁금했다. 반말에 4만5천원. 하나하나 수작업이기 때문에 다량을 구입하려면 적어도 사흘 전에는 의뢰해야 된다. 물론 당일 소량 구매도 가능하다. 다만 일찍 품절 되니 유의하시길. 서울, 인천, 일산 등지에서 강화도 관광 왔다가 우연히 방문하여 떡 맛에 반한 손님들도 많다. 택배주문 요청이 제법 있지만, 방부제는 일체 첨가하지 않기에 정중히 거절하고 있다. 먹을거리의 안전성과 웰빙식품의 중요성이 높아지는 시대에, 묵묵히 자신의 위치에서 원칙을 고수하는 장인들이 고맙다. 처음 그 마음을 잊지 않는 우직한 낙원떡집 부부의 진심이 오래 오래 이어졌으면 좋겠다. 올해는 설 마중을 앞두고 사랑하는 가족들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며 가래떡을 준비해야겠다. (낙원떡집 전화: 032-933-0627) 글 김세라 ‘i-View’ 기자, 사진 나윤아 자유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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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18.02.07 (수)
  • 설명절 전후 3개 전통시장 고객한마당 이벤트

    [인천뉴스] 설명절 전후 3개 전통시장 고객한마당 이벤트

    인천시는 설 명절을 전후인 2월 8일 ~ 25일 기간동안 지역 내 3개 전통시장에서 설맞이 전통시장 고객한마당 특별 이벤트행사를 개최한다. 남구(주안동) 신기시장과 남부시장에서는 경품이벤트, 공연, 떡매치기, 돈치기, 윷놀이, 팽이치기, 투호놀이, 외국인 한복체험 등 다양한 고객행사를 계획하고 있다. 또한 석바위시장에서도 경품행사를 비롯한 캘리 퍼포먼스 등 고객 이벤트행사를 실시할 계획이다.  시에서는 전통시장 활성화를 위하여 설명절 전 전통시장 온누리상품권 특별할인 판매도 실시한다. 개인현금 구매시 1인기준 월50만원까지 10%할인된 가격으로 2. 14까지 시중 농협, 새마을금고, 신한은행 등에서 쉽게 구매할 수 있다.설 명절 ‘전통시장 특별 이벤트’ 미세먼지 민·관 대책위원회 구성 인천시는 쾌적한 대기환경 조성과 시민의 삶의 질 향상을 도모하고자 지난 2월 1일 미세먼지 민‧관 대책위원회 위원을 위촉 ‧ 구성하였다. 인천시 미세먼지 민‧관 대책위원회에서는 미세먼지 예방 및 저감 등 대기환경개선 종합계획의 수립 및 변경에 관한 사항과 공사장, 나대지, 도로 등 비산먼지 저감을 위한 사업비 지원, 새로운 시책개발을 위한 시민제안 등의 심사 ‧ 자문 역할을 맡는다. 위원으로는 대기환경정책, 대기오염관리, 환경공학, 의학(환경성질환), 행정학 등 전문가와 환경관련 시민활동가들은 포함한 총 15명으로 구성되었다.   인천시는 앞으로 대기오염 저감, 시민피해 방지 등을 위한 시책개발과 대기업무추진에 미세먼지 민‧관 대책위원의 자문을 받아 한층 더 충실한 업무추진으로 시민의 삶에 질 향상에 노력하고자 한다고 하였다. 한편, 인천시는 지난해 11월 쾌적한 대기환경 조성을 위하여 미세먼지 발생 예방 및 저감에 관한 사항을 규정하여 시민의 삶의 질 향상을 도모하고자‘인천광역시 미세먼지 예방 및 저감에 관한 조례’를 제정하였다.   ‘지역 산업맞춤형 일자리 창출사업’에 48억원 신청 인천시는 고용노동부의‘지역 산업맞춤형 일자리 창출사업’공모에 13개 사업 49억원의 예산을 신청했다.‘지역 산업맞춤형 일자리 창출사업’은 자치단체가 지역 및 산업의 고용 관련 비영리법인, 단체 등과 협력을 기반으로 해당 지역 특성에 적합한 사업을 발굴 제안하면 종합적으로 심사 선정하여 국비(기금)를 지원하는 사업이다.  인천시는 금번 공모사업에 산업단지 고용환경개선과 중소기업 일자리 살리기에 중점을 둔‘중소기업일자리 희망프로젝트’를 추진할 계획이다. 3개 혁신프로젝트사업인 ① 중소기업 일자리 만들기, ② 일하고 싶은 산업단지 만들기, ③ 마중물 상생일자리 만들기 사업을 추진하고, 2개 일반 공모사업과 기존 계속사업을 통해 특성화고 학생을 중심으로 맞춤형 취업지원 서비스와 산업단지 근로자 기숙사 지원, 경력단절 여성의 수출입 물류사무원 양성 등을 추진한다. 중소기업 일자리 만들기 관련해서는 인천시는 11개 산업단지가 있고 제조업 종사자 수가 24만명으로 대표적인 제조업 중심 도시이나 산업단지 노후화와 열악한 근무여건으로 일자리 미스매칭이 지속 발생하고 있다. 이에 뿌리산업 일자리희망센터를 통해 경력형성장려금 지급과 뿌리산업 기업체 환경개선 및 인식개선을 추진하는 뿌리산업 평생일자리사업, 학생·교수·기업체가 팀 프로젝트를 공동 수행함으로서 중소기업의 애로사항을 해결하고 참여 학생에겐 중소기업 체험 기회를 제공하며, 취업과 연계시키는 산학협력 청년희망이음사업 등을 추진한다. 일하고 싶은 산업단지 만들기 관련해서는 남동산업단지 교통불편 해소를 위해 근무시간 동안 렌터카를 통하여 산업단지 입주기업 근로자에게 교통서비스를 제공하는 산업단지 무빙콜(moving call)사업을 새롭게 시작하고, 기업 애로 사항을 수렴하고 기업컨설팅을 지원하는 산업단지 커뮤니티 불록톡 사업 등을 추진한다. 인천시는 2월중 고용노동부 심사를 거쳐 사업이 확정되면 고용노동부와 협약을 체결하고 3월부터 사업을 본격 추진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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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18.02.05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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