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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썰물뒤 갯벌은 조개 캐는 사람들로 북적

    [웹툰 · 갤러리] 썰물뒤 갯벌은 조개 캐는 사람들로 북적

     인천, 그림이 되다 – 인천 잠진도  서해 바다에 168개의 섬을 가지고 있는 항구의 도시 인천. 그 수많은 섬들 중 하나인 ‘잠진도’. 총 면적 0.08㎢로 섬의 크기가 매우 작아 “밀물 때 물이 차오르면 섬이 잠길 듯 말 듯 한다” 고 해서 ‘잠진도’라는 이름을 붙였다.‘잠진도’는 섬 아닌 섬 이다. 영종도 남서쪽 아주 가까이에 위치하다 보니 영종도와 잠진도 사이에는 연륙도로가 만들어져 있어 언제든지 갈 수 있는 섬 이다.잠진도는 작은 섬 이지만 낙조가 아름답기로 유명해 사진촬영을 위해 찾는 사람들도 많고, 썰물 뒤에 갯벌에서 조개를 캐는 사람들도 많아, 항상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또 관광지로 유명한 무의도 • 실미도를 가기 위해선 반드시 잠진도 선착장을 거쳐가야 한다. 잠진도 선착장에서 무의도까지는 약 5분 거리로 가깝지만, 썰물 때면 수심이 얕아져 여객선 운항이 어려워 미리 배 시간을 잘 알아보고 방문해야 한다.  현재 2018년 완공을 목표로 잠진도~ 무의도까지 연륙교 건설이 한창 이다. 연륙교가 완성되면 작고 소박한 잠진도 선착장과 무의도행 페리는 추억 속에 남게 될 것이다. 글· 사진 정빛나 한국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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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18.01.29 (월)
  • 50~60년대 대중음악 빛냈던 스타들 배출

    [외고 · 칼럼] 50~60년대 대중음악 빛냈던 스타들 배출

    인천, 노래, 그리고 음악인⑩ 부평, 그리고 부평의 음악공간 (전편) 인천광역시를 대표하는 명소들을 떠올리며 해당 장소의 간략한 역사와 그 곳을 소재로 탄생했던 여러 대중가요들, 그리고 관련된 인천 출신, 혹은 인천을 근거로 활약했던 뮤지션들의 알려진, 또는 숨은 이야기들을 함께 엮어본다. ▲ 미군무대 ‘부평’은 지금은 인천광역시 내의 하나의 행정구역이자 그 해당 주변지역을 통칭하는 의미로 당연히 인식되어 있지만, 실제 이 지역이 인천의 행정구역 범위로 귀속된 것은 아직 80년도 채 되지 않았음을 지금의 인천의 젊은이들은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만큼 현재 ‘부평구’로 불리는 곳의 행정구역상 범위는 한반도의 역사 속에서 매우 변화무쌍하게 바뀌어갔고, 이를 우리는 이 지역의 역사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미군부대와 부평산업단지 조성후 경제력 향상부평 지역은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곳임을 현재 서구에 위치한 가현산 북쪽에서 140여 기의 고인돌 군의 발견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후 삼한 시대에는 마한의 영역이었던 이 지역은 삼국시대에는 처음엔 백제의 영토로, 고구려가 한강 이남으로 내려온 후에는 주부토군(主夫吐郡)이라는 행정구역으로 각각 편입되었다. 그리고 553년 신라가 한강 유역을 점령한 후부터 신라의 영토가 되어 경덕왕 때 장제군(長堤郡)으로 불렸다. 고려시대에는 현재의 부평구와 계양구, 경기도 부천시 일대가 수주(樹州)로 불렸으며, 충선왕 2년인 1313년에 이르러서야 현재의 이름인 부평(富平)이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호칭에 들어갔다. 마침내 조선시대에 들어와 이 지역은 ‘부평도호부’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이때의 행정구역은 현재의 부평구, 계양구, 서구 지역은 물론 경기도 부천시, 서울특별시 구로구와 강서구의 일부지역까지 들어갈 만큼 넓었다. 구한말인 고종 32년(1895년)에 부평군으로 개칭된 후, 일제강점기에 와서 부평은 오히려 ‘부천군’의 일부인 부내면으로 그 급이 축소되었다가 1940년 부내면(현재의 서구, 부평구 범위)이 인천부로 편입된 후 마침내 인천의 한 부분이 되었다. 해방 이후엔 1968년 ‘인천시 북구’로 개명되었고, 1988년 서구 지역이 북구에서 분리된 후 20세기 이후부터 부천군이나 김포군의 일부로 속했던 계양면이 대신 북구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계양 지역이 1995년 계양구로 분리되면서 현재의 3개 행정구역으로서의 분할이 완료되었다.  ▲ 부평 에스컴 시티- 1948년 11월의 부평 애스컴 부대 모습 사실 부평이 인천으로 다시 편입되는 데에는 1930년대 일제의 병기 제조 공장이었던 ‘미쓰비시’ 기업의 공장의 설립이 큰 영향을 주었다. 징용을 피하고자 많은 사람들이 이 공장에서 일을 했고, 공장의 가동과 인구 유입으로 부평의 경제력은 상승했다. 하지만 해방 이후에 일제 자본이 빠져나간 후, 그 자리를 캠프 마켓(Camp Market)을 비롯한 미군 부대들이 차지했다. 미군은 부평의 일제 군수산업 단지들을 자신들의 부대 공간으로 활용했고, 제24지원 사령부(Army Service Command 24)가 주둔하면서 부대 주변 지역(부평 1동-산곡동 지역)은 에스컴(ASCOM)으로 불리게 되었다. 미군기지 존재의 여파로 인해 서비스업이 증가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빈곤한 지역으로 불리던 이곳이 다시 인천 산업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은 1970년대 부평산업단지가 조성된 후부터였다. 특히 자동차 산업의 발달로 이 지역에 자동차 제조 공장이 들어서게 되면서 부평의 경제력은 더욱 성장하게 되었다. 에스컴(ASCOM) 주변에 구축된 미군 클럽들앞에서 잠시 언급했던 제24지원 사령부, 다시 말해서 미군 군수지원 사령부의 역할을 했던 에스컴(ASCOM)은 1950~60년대 인천 및 대한민국의 대중음악 역사의 형성에 나름 중요한 기여를 했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한국의 해방 이후 대중음악 역사의 초기 과정은 트로트의 시대를 넘어 재즈(Jazz), 스탠다드 팝(Standard Pop), 로큰롤(Rock ‘n’ Roll) 등 서양의 대중음악을 모방하면서 한국적으로 변형해온 과정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그리고 당시 그 과정이 일어나던 핵심 공간은 미군들을 통해 해외의 최신음악이 가장 빠르게 한국에 전파되던 미군 부대들이었다.  ▲ 부평에스컴 서울의 용산과 이태원, 그리고 다른 지방들도 마찬가지였지만, 미군 부대가 있는 곳에는 항상 미군을 상대로 한 각종 부대산업이 생겨나게 마련이었고, 부대 주변은 클럽(미군 대상 유흥업소) 등 상업지구들이 번성했다. 특히 에스컴이 위치했던 현재 부평구 산곡동 일대 역시 영내에 20개 가까운 미군 클럽들이 존재했다, 그 곳에서 당대의 인천 출신 대중음악인들은 생계와 활동 무대를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었다. 부대 영내에서 연주할 자격을 오디션으로 부여받은 연주자들과 가수들은 에스컴 주변의 ‘삼릉’(앞서 설명한 일본 기업 미쓰비시 기업의 한자 ‘三菱’를 한국식으로 읽은 발음이다.)을 근거지로 생활을 하며 미군들이 좋아하는 해외의 유행음악들을 카피하여 클럽에서 연주했다. 음악적으로는 1950년대에는 영내의 장교급 이상의 클럽에서는 7~8명 규모의 스윙 재즈 밴드들부터 15인조 풀 오케스트라의 형태로 재즈나 스탠다드 등을 연주했다. 반면, 영외의 (밴드가 아닌 음반을 트는) 클럽들에서는 하사관이나 일반 사병들은 컨트리와 로큰롤의 유행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 결과 1960년대로 넘어오면서는 로큰롤 연주를 위한 4~6인 밴드 형태로 바뀌어갔다.  ▲ 부평에스컴 비록 1970년대로 접어들어 미국의 한반도 내 미군 규모 축소 계획을 실행하면서 에스컴의 시설들이 왜관에 있는 캠프 캐롤(Camp Carol)로 이동했고, 그에 따라 에스컴의 클럽들은 점점 사라져갔다. 하지만 적어도 50-6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토양이 형성되는 데 있어서 이후 주류 가요계로 넘어와 유명해진 수많은 뮤지션들이 꽤 많이 에스컴 미군 클럽 활동을 거쳤다는 것은 중요하다. 실제로 한국 최초로 해외시장에서 음반을 낸 걸그룹 김시스터스, 리나박, 패티김, 한명숙과 같은 여가수들도, 한국 록 음악의 역사에서 중요한 이름으로 기록되는 신중현, 김홍탁 등도 다 초기에는 서울과 부평의 미군부대를 통해 자신들의 역량을 드러냈다. 결국 그들이 데뷔 당시 미군 클럽들에서 쌓은 음악적 내공이 나중에 그들의 활동에서 빛을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에스컴의 어두운 부분 투영했던 노래 <빨간 사과>에스컴을 기반으로 한 미군 클럽 문화는 한국 대중음악의 발전에는 자양분이 되었지만, 그 반대편에서는 ‘기지촌’이라는 공간의 형성 속에서 미군들과 외국인들을 상대하며 생계를 꾸려나갔던, 당시에는 ‘양공주’란 호칭으로도 불렸던 ‘유흥업 종사여성’들의 애환과 슬픔도 존재했다. 이들이 상대한 미군들은 팁으로 달러보다는 주로 그들이 부대에서 받은 비누나 치약, 껌, 캐러멜, 말보로 담배, 초콜릿 등의 미제 생필품들을 건네주었다. 결국 그들은 이 물건들을 신포시장이나 중앙동의 양키시장에 내다 팔면서 생계를 이어갔다고 한다.  힘겹게 삶을 이어나갔지만 그와 동시에 주변의 멸시도 함께 받아야 했던 이들의 삶은 사실 직설적으로 노래로 다뤄진 적은 별로 없다. 검열이 존재해서이기도 하겠지만, 직설적 묘사 역시 대중의 입장에선 불편했을 수도 있었을 테니까. 그러나 인천에서 오랜 세월 생활하면서 꾸준히 음악 활동을 해왔던 뮤지션 정유천이 작곡한 노래 <빨간 사과>는 그가 1980년대 활동했던 밴드 자유인(분명히 밴드 음반임에도 음반사의 의도에 의해 보컬리스트 이종만을 앞세워 ‘이종만과 자유인’의 이름으로 발표됨)의 음반에도 담겨있고, 또한 1991년 그가 솔로로 발표한 정규앨범 ‘하나 뿐인 지구’에도 다른 버전으로 수록되었다. 이 곡의 가사를 쓴 사람은 역시 어린 시절부터 에스컴 주변에서 성장해온 최종욱이라는 인물인데, 그는 밴드 자유인의 멤버들과 함께 음악을 했던 친구였으나 안타깝게 요절하면서 그의 노랫말들을 음악으로 만들자는 의도로 밴드가 데뷔 앨범을 준비했었던 것이다. 노래 가사는 매우 덤덤하면서도 유흥업 종사여성의 애환의 감정이 은유적으로 잘 드러나고 있다.  “그렇게 바라다 보지 말아요/공연히 자꾸만 수줍어요/해를 닮아 빨간 뜨거운 사과래요/어제는 하루종일 비가 내리고/난 옛날에 고향을 생각했어요/푸른 들판과 맑은 햇살 속/사랑하는 친구와 어머니/처음에는 나도 푸른 저 푸른 하늘을 닮았었는데/세월은 어느 사이 운명처럼/바람 속에 하나씩 빨갛게 물이 들어/어디론가 훌쩍 떠나가고/오늘은 이렇게 노란레몬과/나란히 기대고 서 있어요.” (정유천, <빨간 사과> 가사)  이 가사 속 ‘노란 레몬’은 바로 미군들을 상징한다. 비록 그와 정유천은 에스컴에서 직접 연주했던 세대보다 한 세대 늦게 음악인의 길로 출발했지만, 부평의 실질적 토박이로서 부평의 미군 부대 문화의 단면을 잘 드러낸 곡을 남겼다고 생각한다. (후편에서는 뮤지션 정유천에 대한 이야기와 부평역 주변의 공간들에 대한 이야기, 관련 노래들을 알아보겠다.)  글  김성환 음악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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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18.01.29 (월)
  • 겨울은 추워야 하고, 빙어·송어는 잡아야 제맛

    [인천 이야기] 겨울은 추워야 하고, 빙어·송어는 잡아야 제맛

     겨울 이색체험 강화 빙어, 송어 축제 현장​북극발 강추위가 매섭다. 일주일 넘게 계속 되는 한파가 움츠려 들게 하지만, 겨울에만 누릴 수 있는 매혹적인 풍경과 경험을 놓칠 수는 없다. 동장군의 기세에 눌려 야외활동이 엄두가 나지 않았던 ‘방콕족’의 발걸음을 이끈 겨울왕국이 있다. 겨울축제의 대명사, 빙어축제와 송어축제다. 냉수성 어종은 이른 시간에 잘 잡힌다. 당일치기로 낚시를 즐기려면 이동시간이 길지 않은 지역이 좋다. 최근 몇 년 사이 수도권에서 자동차로 1시간 남짓 거리의 강화도 빙어, 송어 축제가 겨울 여행의 핫 플레이스로 뜨는 이유다.강화에서 가장 오래된 빙어축제 – 황청저수지 ‘호수의 요정’이라는 예쁜 별명을 가지고 있는 빙어(氷魚)는 ‘동어(凍魚)’라고도 할 정도로 추운 곳을 좋아한다. 빙어란 이름은 조선말 실학자인 서유구가 ‘동지가 지난 후 얼음에 구멍을 내어 잡고, 입추가 지나면 푸른색이 점점 사라지기 시작하다가 얼음이 녹으면 잘 보이지 않는다.’하여 ‘빙어’라 부른 것에서 유래 되었다.​빙어는 몸도 가늘고 입도 조그만 해서 바늘도 작은 것을 사용한다. 미끼는 구더기를 쓴다. 미끼가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채비(바늘, 미끼, 줄, 찌)를 살짝 들었다가 다시 내려주는 유인동작을 계속 해야 하는데, 이것을 ‘고패질’이라고 부른다. 올해로 12년이 된 황청저수지 빙어축제는 강화 얼음축제의 원조다. 2만평이 넘는 넓은 저수지 위에 수상 방갈로와 잔교좌대가 설치되어 있다. 얼음 위를 자유롭게 다닐 수는 없다. 세월호 참사 이후에도 크고 작은 인재는 여전하다. 안전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강화군에서는 얼음 두께 30cm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얼음 입장을 허락하지 않고 있다. 축제 참가자들에게 이와 관련한 의견을 물었다. 아쉽다는 대답도 있었지만, 어린자녀를 대동한 대부분의 부모들은 안전관련 규제가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어 안심이 된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두 번째 방문이라는 한 가족에게 빙어축제의 즐거움에 관하여 물었다.“송도에서 아침 일찍 출발했어요. 5살 아들과 작년에도 왔었는데 아이가 더 좋아 하더라고요. 빙어낚시는 초보자들도 손쉽게 할 수 있어 부담이 없어요. 거창한 낚시 장비 없어도 이곳에 와서 다 준비가 가능 하니 편리하더라고요. 시설도 잘 되어 있고, 얼음썰매장과 아이들 체험거리들도 있어서 겨울철 가족 여행지로 적격입니다.”꽝꽝 얼어붙은 얼음 위를 달리는 썰매는 요즘 어린이들에게 생소한 놀이다. 인터넷 게임에 익숙한 어린이들에게 얼음지치기는 쉽지 않은 미션일 것이다. 아빠, 엄마의 출동 타이밍, 부모와 자녀들이 몸으로 부딪히는 특별한 시간이다.손맛을 못 봤다고 속상해 할 필요는 없다. 빙어 뜰채잡기 체험도 준비 되어 있다. 잡은 빙어를 식당으로 가져가면 약간의 수고료를 받고 빙어튀김을 해준다. 바삭바삭한 빙어 튀김 맛이 궁금했다. 생선가스와 비슷했다.축제 관계자에게 빙어낚시의 꿀팁을 물었다. 얼음구멍을 내기 위해 끌창도 사용 하지만, 드릴로 뚫는 게 더 좋다. 뚫은 면이 미끈해야 애써 잡은 물고기를 놓치지 않는다. 또한 빙어는 밝은 곳을 좋아한다. 얼음 위에 쌓인 눈을 계속 치우는 까닭도 이와 같다. 얼음으로 빛이 통과해야 빙어가 몰린다. 그늘보다는 볕이 잘 드는 장소에서 빙어가 더 잘 잡힌다. 강화 빙어축제는 2월 24일까지 진행된다. 얼음 상태에 따라 일정은 변경될 수 있으니 미리 확인하자. (홈페이지 www.hcfestival.co.kr / 문의: 032-933-0105)​드라마 ‘월계수 양복점’이 선택한 강화송어축제 – 인산저수지​인산저수지는 2017년에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월계수 양복점’에 등장한 송어축제 촬영지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아침 일찍부터 월척을 꿈꾸는 사람들로 붐볐다. 할인을 받고 싶다면 사전에 소셜커머스에서 입장권을 구입하면 된다.풍광 좋은 저수지에서 낚시줄에 송어가 걸리기를 기다리고 있자니 일상에 지친 몸과 마음이 절로 녹아내린다. 세월을 낚았다는 강태공의 심정을 알 듯 말 듯 하다. 송어는 깨끗하게 흐르는 물에서만 사는 까다로운 냉수성 어종이다. 민물생선 중 가장 고급스러운 종류다. 직접 잡아 팔딱 팔딱 뛰는 송어를 사랑하는 이들과 나눠 먹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의욕은 넘치는데 송어가 안 걸린다. 낚시의 달인에게 송어 낚시의 정석을 물었다.  “송어는 떼로 몰려 다녀요. 장소 찾는 게 관건이죠. 먼저 미끼를 콩 알 크기로 뭉쳐서 바늘에 달아준 후, 줄을 바닥까지 내립니다. 이때 줄이 평평해야 합니다. 그리고 조금씩 올리면서 어느 수심층에 송어가 있는지 찾아요. 이걸 감으로 알아내는 게 초짜와 숙련자의 차이입니다.” 주최 측에서는 송어를 잡지 못한 초심자를 위해 다양한 행사를 계획 하였다. 송어를 걸고 벌어진 떠들썩한 이벤트. 치열한 경합 끝에 커다란 송어를 손에 넣은 참가자가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송어를 푸드코트로 가져가니 빛깔 고운 회와 지글지글 고소한 구이로 변신하여 돌아왔다. 송어 회 한 점 입에 넣었다. 씹히는 맛이 일품이다. 육즙 흐르는 송어구이도 먹어보았다. 입 안 가득 고소한 향이 퍼진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탄성을 자아낼 최고의 별미다. 고단백 저지방 식품인 송어는 맛 좋고 영양 만점인 겨울철 최고의 보양식이다.돌아오는 주말에 송어 잡이에 동참해보자. 송어축제는 2월 25일까지다.(홈페이지 www.insanry.com / 문의: 010-6664-4354) 베일 것 같은 칼바람에도 빙어, 송어축제의 열기는 뜨겁다. 이한치한, 겨울은 추워야 제 맛이다. 수평선너머 살랑살랑 봄기운이 고개를 내밀기 전에 겨울의 낭만을 만끽하자. 인증샷은 필수. 기억저장고에 담을 추억이 또 하나 늘었다.     글 김세라 ‘i-View’ 기자, 사진 나윤아 자유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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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18.01.31 (수)
  • 유행 이끌던 ‘모던 걸’ 들의 단골집

    [그때 그 시절] 유행 이끌던 ‘모던 걸’ 들의 단골집

    골목길 보물찾기- 옛 후루다 양품점​100여 년이 넘은 근대건축물로, 옛 후루다 양품점을 운영하던 곳이다. 후루다 양품점은 모자, 넥타이, 와이셔츠, 양산 등을 취급하던 상회로 1910년에 독보적인 양품점이었지만 1920년 내리에 우리나라 사람이 대동상점(현 대동문구)이 들어서면서 밀려나기 전까지 당시의 멋쟁이들이 드나 들던 상점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일본식 기와를 올린 합각지붕의 건물로 1층, 2층 사이에 눈썹지붕이 없고, 2층 창문을 오르내리 창으로, 외관은 서양 건축양식을 적용하여 지어졌다.  ​ 1994년 처음 문을 연 버텀라인은 전국에서 3번째로 오래된 음악클럽이며(1976년 올댓재즈, 1978년 야누스 순)이다.   ​  재즈와 음악을 좋아했던 허 대표는 버텀라인을 처음 손님으로 드나들다 인수하여 24년째 운영하고 있다. 버텀라인 이라는 상호는 1대 대표가 뉴욕의 버텀라인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버텀라인은 2007년부터 버텀라인 플레이라는 공연단체를 만들어 운영하며 음악을 하는 젊은이들이 무대에 서고 이곳을 추억하는 사람들이 와서 즐길수 있도록 하고 있다. 공연은 매주 금요일과 토요일에 진행한다.버텀라인은 100여 년이 넘은 건물이고 보수를 할 곳이 많지만 높은 천정으로 음악의 울림이 잘 전달되고 매주 금요일 늦은 저녁 9시에는 뮤지션들의 공연이 있어서 음악 애호가들이 즐겨찾는 장소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샹송을 좋아해서 샹송 연주가 있다는 톡을 받으면 연주를 감상하러 종종 찾는다. 허 대표는 언제까지 버텀라인을 운영할지는 모르나 당분간은 음악을 하는 친구들을 위한 공간으로 계속 지원을 할 예정이라며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주기를 바라고 있다.  ※ 옛 후루다 양품점(현 버텀라인)ㆍ건립년도 : 1900년대ㆍ구     조 : 목조와즙ㆍ연 면 적 : 362.84m, 지상2층  원고출처 : 골목길 숨은 보물찾기(2015년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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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18.01.31 (수)
  • “가난과 세상풍파 겪으며 인생 그림 배웠죠”

    [인터뷰] “가난과 세상풍파 겪으며 인생 그림 배웠죠”

    명노선 화백의 오뚜기 인생인생을 '새옹지마'라고 말한다. 흐렸다 맑아지는 자연섭리가 인간의 삶에도 들어맞는다. 인천토박이 명노선 화백 삶도 그렇다. 화가였던 그가 집을 나와 거리를 배회했다가 다시 일어서 아트페어운영위원장이 되기까지 굴곡진 사연이 눈물겹다.   소년, 누워진 배만 그리다명노선 씨의 인생을 얘기할 때 그림을 빼놓을 수는 없다. 논현초 교장선생님이던 부친을 따라 그는 논현동 사택에서 자랐다. 당시 완전 시골이었던 논현동은 그에게 많은 예술적 감흥을 주던 곳이었다. 사택 앞 큰 나무를 스케치북에 옮기길 좋아했고 송월동으로 이사한 후에는 자유공원과 인천바다를 화폭에 그렸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엄마가 돌아가신 후 집안은 기울기 시작했다. 7남매 중 막내였던 명 화백에게 엄마는 '그리움'이었다."그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제 삶은 텅 비어있어요. 우울감이 너무 커서 그 어떤 것을 해도 즐겁지 않았습니다.""바닷물이 빠진 바다에 배 한 척이 쓰러져 있는데 마치 내 삶과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쓰러진 배 한 척을 그려서 학교에 냈고 미술 선생님께 불려가서 엄청 혼난 기억이 있습니다. 왜 쓰러진 배만 그리냐고 말이죠." "소래포구는 제 유일한 놀이터였어요. 소래철교만 건너면 내 부족한 마음이 정리되지 않을까 싶어 철길을 걸었어요. 철교 끝에는 엄마가 살아있을 것 같았죠."소년의 그리움과 외로움은 그의 그림에 고스란히 그려졌다. "바닷물이 빠진 바다에 배 한 척이 쓰러져 있는데 마치 내 삶과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쓰러진 배 한 척을 그려서 학교에 냈고 미술 선생님께 불려가서 엄청 혼난 기억이 있습니다. 왜 쓰러진 배만 그리냐고 말이죠."     모두 다 떠나가다만들기를 좋아하던 명 화백은 어느 날 TV를 제작했다. 만든 TV와 안테나를 연결하기 위해 옥상에 올라갔다가 그만 옥상에서 떨어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그의 머리에 이상이 생겼고 이로 인해 건강도 나빠졌다. 당시 사귀던 첫사랑에게 그는 건강상 이유로 이별을 고한다. 생이별을 감수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첫사랑 여인은 충격으로 미국으로 건너간다.  미대에 진학한 명 화백은 졸업 후 입시미술학원을 차렸다. 13년 간 미술학원은 호황을 누렸다. 그러다 동업자의 배신으로 사업은 망하고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그는 길가로 내몰렸다. 집에 전화를 하려해도 10원짜리 동전이 없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지자 부인과의 오해도 생겼고 결국은 각자의 길을 선택했다. 이때부터 명 화백에게는 인생의 쓰디 쓴 맛이 찾아왔다. 막노동부터 보험회사, 명화 위작, 콩국수 배달까지 안 해본 일 없이 마구잡이로 일을 시작한다.어느 날 콩국수 배달 일을 할 때였다. 새벽에 일어나 콩국수와 콩 국물을 받아서 각 공급처에 배달하는 일은 새벽에 도착해야 당일 만든 국수와 국물을 받을 수 있었다. 제일 먼저 콩국수 재료를 받으려고 새벽 같이 나갔지만, 항상 1등을 놓치는 것이었다.  "도대체 나보다 더 부지런한 사람은 누굴까 궁금했습니다. 평상시 보다 더 서둘러 새벽 4시에 나갔는데 누군가 큰 트럭에 물건을 던지고 내려오더군요." 그는 그의 눈을 의심했단다. 두 다리가 잘린 남자가 시동을 걸더란다. 다리도 없는 사람이 자신보다 훨씬 많은 거래처를 뚫고 일등으로 물건을 가져가는 모습에 퍼뜩 생각이 스쳤다."좌절하지 않고 성실만하다면 나도 다시 일어설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 일을 계기로 그는 재개에 성공했다."당시 인터넷으로 공부를 하던 아이가 제게 전화를 걸어왔어요. 아빠, 인터넷이 안 돼….라고 말이죠. 2만원이 없어서 아이가 공부를 못한다고 들었을 때 얼마나 마음이 찢어지던지 그때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명 화백은 자꾸 입을 가리며 말한다. 치료시기를 놓쳐 빠진 치아가 부끄럽단다.사람에게서 다시 위안 받다우연히 남인천방송에 그의 사연이 소개되었고 그 방송을 본 첫사랑 여인과 연락이 닿아 지금은 다시 연락을 하게 되었다. 미국에서 큰 김치사업을 하면서 혼자 사는 옛 연인과 사랑이 다시 싹 트는 중이다. 그는 요즘 '만남'이라는 주제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바뀌는 게 인생이지요. 제가 갚아야 할 돈 대신 줬던 그림이 어떤 분에게 흘러들어갔고 그 분을 기 십년 지난 후 만나면서 많은 도움을 받고 있어요."명 화백에게 그림을 받았던 ‘우 선생’이라는 분은 키다리아저씨 같은 분이란다. 우연히 남인천방송에 그의 사연이 소개되었고 그 방송을 본 첫사랑 여인과 연락이 닿아 지금은 다시 연락을 하게 되었다. 미국에서 큰 김치사업을 하면서 혼자 사는 옛 연인과 사랑이 다시 싹 트는 중이다. "참 많은 일이 벌어졌지만 노력하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게 인생인 것 같습니다. 제가 젊어서 배고픔을 알았고 이젠 인생의 맛을 알게 되었어요."    개인전을 열고 화가로 등단한 한효순(72세) 씨는 "저에게 선생님은 은인이십니다. 미술시간이 제일 싫었던 제가 이렇게 화가로서 길을 걷게 해준 장본인이시죠. 회원들에게 지도하는데 있어서 일률적이지 않고 각자 맞게 지도해주셔서 모두 실력이 일취월장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욕심내지 않고 순수하게 인생을 화폭에 풀어가고 싶어요."그에게 그림을 배우는 문하생들의 한결같은 이야기는 그가 틀에 얽매이지 않아서 배울 것이 많다고 말한다.개인전을 열고 화가로 등단한 한효순(72세) 씨는 "저에게 선생님은 은인이십니다. 미술시간이 제일 싫었던 제가 이렇게 화가로서 길을 걷게 해준 장본인이시죠. 회원들에게 지도하는데 있어서 일률적이지 않고 각자 맞게 지도해주셔서 모두 실력이 일취월장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한편 그에게 배운 문하생들은 '명 아트크루'라는 전시회를 해마다 열고 있다."제가 어려서 놓친 부분이 있어요. 뉘어져 있던 배는 바닷물이 들어오면 다시 똑바로 일어섭니다. 썰물이 있었다면 다시 밀물이 들어오는 게 인생입니다. 지금 힘들어도 좌절하지 마세요."지금 명화백의 그림 속 배는 누워 있는 것 없이 모두 세워져 있다. 쓸쓸하게 있던 한 척의 배 대신 여러 척의 배가 당당하게….*명노선 화백추계예대 졸업인천고 미술동문회장아트페어 운영위원장 역임현 인천미술협회 서양화 분과위원장이현주 I-VIEW기자 o700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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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18.01.29 (월)
  • 인천 개항장거리에 퍼진 달콤함의 향연

    [인천인의 삶] 인천 개항장거리에 퍼진 달콤함의 향연

    ​개항장 이색공간  ‘릴레밀레 수제 초콜릿점’​ 프랑스 영화 ‘초콜렛’에서 주인공이 만든 초콜릿은 이상한 마력을 발휘해 마을 사람들을 사랑과 정열에 빠져들게 한다. 위기를 맞은 연인들은 불타는 사랑속으로 다시 돌아가고, 노인들은 다시 활기를 찾아 뜨거운 사랑을 갈구하고, 불화가 끊이지 않던 이웃들은 다시 화해를 한다. 초콜릿의 유혹은 너무나 강력해 사람들은 초콜릿 없이는 살아가지 못하는 마법을 발휘한다. 초콜릿은 달콤함과 부드러움을 넘어 꿈과 행운을 상징하는 아이콘이기도 하다.  재료와 제조공정이 까다로운 수제 초콜릿신포동 개항장 거리를 걷다보면 수줍은 듯 가려진 알쏭달쏭한 가게를 만나게 된다. 가게의 외관은 대한민국을 개항으로 이끈 역사의 공간과 사뭇 잘 어울린다. 카페인지 공방인지 구분이 안갈 정도로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상호는 ‘ㄹㄹㅁㄹ’이다. 초성을 딴 이 가게의 정식이름은 릴레밀레(Lille mille)다. 덴마크어로 작은공방이라는 뜻이다. 이 초콜릿 가게는 수제전문점이다. 개항장 거리에 생긴 초콜릿 가게의 주인장이 궁금해진다. 이 집을 운영하는 쇼콜라티에(Chocolatier) 곽나현(29)씨다. 초콜릿을 좋아했던 그녀는 너무 맛있는 수제 초콜릿에 홀려 쇼콜라티에의 길을 걷게됐다.우리나라 초콜릿 1세대 쇼콜라티에에게 초콜릿 만드는 과정을 배운 후 곧바로 공방겸 초콜릿점을 차렸다.    수제 초콜릿은 일반 초콜릿과 달리 가격이 비싸다. 초콜릿 1구에 1천5백원~2천5백원 선이다. 마음대로 사먹기는 힘든 초콜릿이다. 수제초콜릿이 비싼데는 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곽나현 대표의 말에 의하면 수제초콜릿은 재료나 만드는 과정이 많아 사람의 수고가 많이 들어간다. 맛있는 초콜릿이 나오기가 쉽지 않다. 일단 재료 자체가 다 수입산이다. 우리나라는 수제초콜릿 시장이 조금씩 확장되고 있는 단계여서 아직은 재료를 다 수입한다. 초콜릿의 맛은 카카오버터와 카카오메스(덩어리)가 향, 맛, 품질을 좌우한다. 카카오버터는 환경, 온도에 민감하고 예민해 가공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카카오버터를 가공하고 잘 다루는 게 초콜릿을 만드는 기술의 관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곽 대표에 의하면 초콜릿을 만드는 데 총 12번 정도의 가공과정이 들어간다고 한다. 대량 생산하는 초콜릿에 쓰이는 팜류, 대두유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고급재료들이다. 정통 유럽식 핫초코 깊고 진한 풍미곽 대표는 맛있고 건강에 좋은 초콜릿을 만들고자 휴일이면 유명한 초콜릿점을 다니면서 맛을 보고 연구한다. 더 좋은 초콜릿을 만들겠다는 일념에서다. “초콜릿은 온도, 습도, 작업정도, 대리석 온도, 초콜릿 온도까지 잘 맞춰져야 제대로 된 맛있는 초콜릿이 나와요. 특히 마음이 복잡하거나 우울하면 맛이 제대로 안 나와요. 초콜릿은 마음이 편안하고 안정적일 때 만드는 것도 중요해요. 맛에서 차이가 확연히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곽 대표는 맛있고 건강에 좋은 초콜릿을 만들고자 휴일이면 유명한 초콜릿점을 다니면서 맛을 보고 연구한다. 더 좋은 초콜릿을 만들겠다는 일념에서다.     릴레밀레에서 판매하는 수제초콜릿 가지수는 8~10가지 정도다. 먹어보면 달지 않으면서 맛을 음미할수록 기분좋은 단맛이 계속 입속을 맴돈다. 수제 초콜릿만의 장점이다. 릴레밀레에서는 초콜릿 외에도 진정한 유럽식 핫초코를 맛볼 수 있다. ‘쇼콜라쇼’라고 네이밍된 이집 핫초코는 그야말로 우유와 초콜릿 원재료만 넣어 만들어 풍미가 깊고 진한 맛을 느낄수 있다.릴레밀레에서는 원데이(One day) 초콜릿 수업도 연다. 카카오톡이나, 인스타그램을 통해 초콜릿수업을 신청하면 자신이 원하는 수제 초콜릿배우고 가져갈 수 있다. 이곳에서 초콜릿을 배우고 싶으면 인스타나 네이버에 'ㄹㄹㅁㄹ‘을 치거나 카톡에 릴레밀레(Lille mille)를 치고 신청하면 된다.   릴레밀레를 운영하는 곽나현 대표는 이곳 개항장과 수제 초콜릿점의 만남이 운명이라고 믿는다. 예전 학교 다닐때 사진을 찍으로 이곳에 왔었고 느낌이 좋았던 기억을 아직도 갖고 있다. 달콤한 초콜릿점이 영화에서처럼 개항장으로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시민들을 기쁘게 하는 행복의 묘약이 되지 않을 까 상상해 본다.글 이용남 ‘i-View’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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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18.01.29 (월)
  • 국민 음식, 짜장면 어디까지 알고 있니?

    [인천 이야기] 국민 음식, 짜장면 어디까지 알고 있니?

    종류도 다양한 짜장면의 재미난 이야기‘한국 최초의 짜장면’이라는 주제를 들으면 우리의 뇌는 일찰나 “한국 최초의 중국요리점이 한국 최초의 짜장면을 만들었다.”라는 명제를 생성해낸다. 명제는 사고하는데 있어 일종의 방향성을 제시한다. 그 방향에 따라 생각하다보면 “‘짜장면 중화요리’, ‘중화요리 화교’, ‘화교 고향 산동(山東)’, ‘짜장면 산동음식’…….” 등 이러한 논리화 작업을 걸치게 된다. 짜장면은 그렇게 “한국 화교들이 화교들의 고향 산둥에서 한국으로 가지고와 토착화된 음식”이 된다.   한국인을 따라 중국에 재상륙한 짜장면짜장면은 2006년 7월 문화관광부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100대 민족문화상징’으로 선정된다. 짜장면의 한국어 표기 논란이 생기면서 그 무렵 짜장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다. 짜장면에 대한 관심은 논문과 저서 그리고 언론에까지 이어진다. 김만태(Kim, Man-Tae) 2009년 논문 〈‘짜장면’의 토착화 요인과 문화적 의미〉은 “19C말 조선과 청국의 여러 정치적․사회적 상황을 감안해볼 때 1882년 인천항 개항 후 조선으로 대거 건너오기 시작한 산둥지방 화상, 화공들에 의해서 한국의 자장면이 유래되었다는 사실은 충분한 설득력을 갖는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2012년 4월 28일 인천 차아니타운 공화춘(共和春)에서 짜장면박물관 개막식 열렸다. 이창호(Lee, Chang-Ho) 2013년 논문 〈박물관을 통한 에스닉 푸드(ethnic food)의 새로운 해석과 구성〉은 인천 짜장면박물관의 사례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전통’(invention of tradition) 그 의도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양세욱(梁世旭)의 2009년 저서 《짜장면뎐》은 “1992년 한중수교 이후, 짜장면은 대규모로 중국에 진출하기 시작한다. 한국인을 따라 중국 대륙에 재상륙한다. 21세기 이제는 중국인들조차 ‘중국집’을 찾아 짜장면을 즐긴다.”고 한다. 짜장면 프랜차이즈 영업이 유행하는 지금 중국에서 이전에는 없던 한국식 짜장면이 생겼다. 그것도 루차이(魯菜)에 발원지인 산둥 옌타이 푸산(山東煙臺福山)에서 생겨났다는 것이 매우 안타깝다. 더군다나 푸산의 자랑 푸산따미엔(福山大麪)에 포함시켜니 받아드리기가 힘들다. 푸산따미엔 제3대 계승자 취안푸지엔(權福健, 1966~)은 자신이 만든 짜장면이 다른 지역과 다를 수도 있다고 하면서 “푸산따미엔의 짜장면에는 ‘乾炸醬(간짜장)’, ‘溫炸醬麪(온짜장면)’, ‘水炸醬麪(물짜장면)’ 3가지가 있다.”고 한다. ‘水炸醬麪(물짜장면)’에 대한 설명은 상세하지 하지 않았지만 ‘溫炸醬麪(온짜장면)’에 대한 설명은 지금 한국에서 말하는 짜장면의 조리법과 일치했다. 취안푸지엔은 2011년 인천관광공사와 MBC에서 공동 주최한 ‘제1회 한·중 자장인생 대박!(第一屆韓中給力炸酱麪大赛韓國仁川激情上演)’ 인천대회의 입상자이다. 그러나 한중수교 이전 책 탕시에정(唐協增), 두둥핑(杜東平)의 1991년 저서 《중국면조집금(中國麪條集錦)》에서는 이와 같은 내용을 찾아볼 수가 없다. 이 책 22페이지 〈산동 대면과 소면(山東大麪和小麪)〉에서는 푸산따미엔과 펑라이샤오미엔(蓬萊小麪)을 다루고 있다.  위쯔짜장은 생선알을 주 재료로 사용최근 몇 년 옌타이 언론에서 자주 등장하는 짜장면 하나가 있다. ‘제1회 한·중 자장인생 대박!’에서 입상한 짜장면 ‘위쯔짜장면(魚籽炸醬麪)’이다. 옌타이의 모 푸산따메엔 프랜차이즈 회사에서 400여년(혹자는 200여년) 역사의 푸산따미엔을 강조하면서 함께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위쯔짜장은 생선 알 짜장이라는 뜻으로 말린 생선 알을 재료로하는 짜장면이다. 양파를 다져서 부재료로 쓰는 것이 인상적인데 짜장면의 느끼함을 중화시키 위해 양파를 사용한다는 설명이 왠지 한국 화교 스푸(師傅, 조리사)들의 설명과 맞아떨어진다. 《중국면조집금(中國麪條集錦)》는 “짜장면은 네모나게 썬 고기 짜장면(肉丁炸醬麪)과 다진 고기 짜장면(肉末炸醬麪) 두 가지이다.”라고 한다. 여기에 하이미(海米, 건새우살)를 부재료를 사용하는 짜장면에 대한 언급은 있어도 ‘위쯔짜장면’에 대한 언급한 없다. 이러다가 푸산따메엔의 라이벌 펑라이샤오미엔에서도 짜장면을 들고 나올지도 모르겠다. 네모나게 썬 고기 짜장면은 한국 간짜장면과 같고 다진 고기 짜장면 한국의 유니(유모)짜장면이다. '화기 중화루’ 주방장은 화교협회 손덕준 회장 외할아버지 따지고 보면 이러한 현상은 낡은 사진 한 장에서부터 시작한다. ‘화기 중화루(和記中華樓)’, 공화춘(共和春)과 함께 한국 중국요리계의 전설이다. 1998년 인하대학교 김광염(金光焰)교수와 산동대학교 예타오(葉濤)교수가 이끄는 중국 문화 탐사 프로그램에서 우연히 건져 올린 한 장의 사진이다. 김광염 교수의 한국 짜장면에 대한 향수 이야기가 인연이 돼서 이듬해 이 사진과 함께 「바다건너 60년 세월(漂洋過海六十年)」이라는 제목으로 《옌타이일보(煙臺日報)》를 통해 보도가 된다. 다시 사진에 얽힌 격동의 세월과 애환이 경인일보(京仁日報)를 통해 한국에도 보도된다. 이후 2009년 4월 연세대학교 유중하(柳中夏)는 『경인일보』 지면에  『짜장면의 재발견』라는 글을 연재하고 한국 화교에 대해 연구 중이라고 하면서 한국 화교 2세 중국요리점 사장과 함께 4월 20일 옌타이를 찾는다. 옌타이 언론은 다시 「소중한 사진 한 장 해외까지 루차이(산둥요리)명성 떨쳐(一幅珍貴老照片見證鲁菜香海外)」라는 제목의 기사가 나온다. 몇 년 전 유중하 교수와 함께 간 한국 화교 2세가 지금의 중화루를 인수한다. 그 화교 2세가 지금 인천화교협회(仁川華僑協會) 회장 손덕준(孫德俊)이다. 보도에 따르면 손덕준 회장의 아버지가 사진 속 중화루의 주방장이었다고 하고 사진 뒷줄 오른쪽 두 번째 인물이 손덕준 회장의 장인이라고 한다. 얼마 전 손덕준 회장은 그 인물이 본인의 외할아버지고 당시 사진 속 중화루의 지배인이라고 한다. 이후 유중하의 2012년 책 《화교 문화를 읽는 눈 짜장면》이 출간된다.  옛 중화루 사진속 화기(和記)는 대주주 뜻해 사진 속 중화루에 얽힌 향수와 애환에 필자 역시도 매우 공감한다. 한국 화교사에 있어 중요한 한 장의 사진으로 생각되는바 사진에 대한 애정 또한 각별하다. 선명도가 높은 사진을 찾던 중 2층 중앙 간판 중화루 세 글자 사이에 ‘화기(和記)’라는 두 글자가 보인다. 현재 인천시립박물관이 중화루 간판을 소장하고 있다고는 하는데 사진 속 2층 간판이 아니라 글자체로 봤을 때는 1충 중앙에 있는 간판으로 보인다. 당시의 중국의 관례로 봤을 때 중앙 간판에 있는 ‘화기(和記)’가 중화루의 대주주인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정식으로 ‘화기 중화루’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기(記)’는 ‘호(號)’와 같이 당시 중국에서 상호 뒤에 많이 쓰이는 글자이다. 아직까지 ‘화기’에 대한 연구는 없다. 뿐만 아니라 베이징을 북평(北平)으로 부르고 표기하는데  반해 2층 오른쪽 간판은 중화북경(中華北京)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2층 왼쪽 간판의 ‘우등요리점(優等料理店)’을 봤을 때 일제강점기 시절의 일본식 표현이다. 당시 일본이 베이징을 북경으로 부르고 표기했기 때문에 이 사진은 그 시절에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다시 중화북평(中華北平)으로 수정된다. 1층 왼쪽 ‘승우여운(勝友如雲)’은 중국 당나라 태종의 아우 등왕(滕王) 이원영(李元嬰)이 장시성(江西省) 난창(南昌)시 서남쪽에 세운 누각 등왕각(滕王閣)을 그린 당(唐) 왕발(王勃) 《추일등홍부등왕각전별서(秋日登洪府滕王閣餞别序)》의 한 구절 “十旬休暇,勝友如雲。千里逢迎,高朋满座。(매번 10일 휴가 때면 좋은 벗들 많이 모여 저 멀리서 온 손님 영접하니 고귀한 친구들 자리 가득 앉는다.)”에서 따온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진 속 건물 중앙 가로의 영어 간판 ‘CHUNG HWALOO CHINESE RESTAURANT AND BAR’의 ‘CHUNG HWALOO’는 중국 광동어 영어 표기법이며 ‘CHUNG’과 ‘HWALOO’ 사이를 띄어 쓴 이유를 알 수가 없다. 간판 제작 과정에서의 단순 실수일 수도 있겠지만 생각할수록 그 궁금증이 커진다.  한편, 당시 옌타이에는 ‘화기양행(和記洋行)’을 비롯한 11개의 양행이 성행하고 있었고, 또 한 나의 한국 중국요리계의 전설 ‘공화춘(共和春)’은 북경 짜장면을 처음 팔았다고 하는 북경 다관의 모습을 띠고 있다. 그리고 중국의 짜장면의 역사를 막 100년 남짓 된 것으로 추정하는데 한국의 짜장면은 130여 년 전 산둥지방의 화교들에 의해서 유래되었다고 하니 이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 호에서 이어가도록 하겠다.   글·사진 주희풍 서울대 중어중문학교 박사수료, 인천화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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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18.01.29 (월)
  • 커피로 그리는 인천萬畵

    [인터뷰] 커피로 그리는 인천萬畵

    세월을 찍는 다큐사진작가 류은규 교수​“개똥도 100년만 보존한다면 역사가 되고 유물이 될 수 있어요. 사진이 갖는 최대 미덕 가운데 하나는 기록이라는 측면이죠. 예술성이나 고발성 같은 저널리즘적 관점도 당연히 중요하지만, 사진작가라면 사료적 가치나 사회인류학적 시각까지를 염두에 두고 작품을 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생활다큐사진에 초점을 맞춰 호흡이 긴 작업들을 주로 해왔어요. 청학동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훨씬 이전부터 청학동을 드나들며 사진을 찍기 시작해 지금까지 36년간 청학동사진작업을 계속해오고 있죠. 1982년 처음 청학동에 갔을 때 댕기머리였던 소년이 장성해 장가들고, 다시 그의 자녀들이 시집장가 가서 손자들을 낳아 일가를 이루는 생생한 현장들이 제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겨있어요. 그 자체로 청학동의 변천사이자 역사가 된 셈이죠. 한번 들어가면 짧게는 보름, 길게는 두어 달까지 머물며 그곳 사람들 하나하나의 이야기를 꼼꼼히 기록으로 남겨요. 태어나고 죽고 다른 지역으로 이주한 사람들까지 빼놓지 않고 일일이 챙기죠. 마을에 대소사가 생기면 저에게 제일 먼저 연락이 올 정도예요. 죽기 전까지 이 작업을 놓지 않을 겁니다.” 일본 2월 3일~5일까지 ‘류은규 사진전- 백의의 삶’준비류은규 교수(56세)는 한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진 다큐멘터리사진작가다. 언젠가 기자가 I-View에 소개한 바 있는, 동인천 ‘관동갤러리’ ‘도다 이쿠코’ 관장의 남편이기도 하다. ‘조센징 사진작가 남편과 쪽발이 글쟁이 부인의 알콩달콩 사랑이야기’가 일본 전역에 짜하게 전파를 타기도 했다. 도다 이쿠코 관장 역시 한국과 일본에서 알아주는 작가다.동그란 안경에 시커먼 눈썹, 코밑과 턱을 온통 뒤덮은 허연 구레나룻, 제멋대로 듬성듬성 흐트러진 머리카락, ‘관동갤러리’ 안채서재에서 만난 류교수는 고집스런 외곬작가 이미지 그대로다. 사실 기자는 류교수와의 인터뷰를 작년 초부터 별러왔다. 하지만 그가 중국연변대학에서 교수로 재직 중인데다, 틈틈이 한국에 들어와서도 사진작업으로 번번이 출타 중이었던 탓에 일정 맞추기가 어려웠다. 다행히 오는 2월3일부터 25일까지 일본고베에서 열리는 ‘류은규사진展-백의의 삶’ 준비를 위해 인천에 머물게 된 타이밍을 포착해 인터뷰가 성사된 것이다. “결혼 후 아내와 겨우 6개월 된 아이를 들쳐 업고 연변대학교수로 건너 간 것도, 우리민족의 이주사와 만주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항일독립운동가 후손들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서였어요. 오랜 호흡으로 동일한 주제의 다큐멘터리 사진을 계속 찍으려면 현장에 거주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거든요. 그 작업 역시 올해로 25년째 이어져오고 있죠. 조선족들의 흔적과 역사가 담긴 옛 사진수집도 병행하고 있고요. 1890년대 초부터 현재까지 만주로 이주해간 조선족들의 발자취가 담긴 자료사진들을 모으고, 김좌진장군과 김규식장군의 후손들 생활상을 현지에서 직접 찍어 ‘잊혀진 흔적–사진으로 보는 조선족100년사展’을 열었죠. 서울 세종문화회관 전시장과 국내 여러 도시들, 그리고 일본 등지를 돌며 순회전시회도 갖고, 작년에는 ‘만주아리랑–조선족 디아스포라의 삶과 기억展’을 인천한중문화관에서 선보이기도 했어요.”류교수는 서울에서 태어나 전동초, 전농중, 동성고를 졸업하고 신구대 사진학과와 상명대 대학원에서 사진을 전공했다. 현재 중국연변대학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고, 한국방송예술진흥원사진과 교수도 겸하고 있다.“어릴 때는 하루라도 빨리 전농동을 떠나고 싶었어요. 버스가 굴다리를 돌아, 소위 ‘청량리588’이라는 동네를 가로질러 다녔거든요. 지금 같으면 사진작업을 위해 일부러 찾기라도 할 텐데, 그땐 그런 현실들과 마주하는 게 왜 그렇게 싫었는지 몰라요. 인생이 180도 바뀐 건, 고등학교 올라가 우연히 사진반에 들면서 부터예요. 입시를 코앞에 두고도 사진 찍고 현상하느라, 암실에서 밤샘하는 일이 다반사였죠. 어느 날 영어수업시간에 잠이 부족해 책상에 엎어져 자고 있는 저를 선생님이 불러 세우셨어요. 그리고는 전교 1등짜리 반장도 함께 일으켜 세워서는 ‘하루 몇 시간 자느냐?’고 동시에 물으셨죠. 공부하느라 ‘4시간 잔다’는 반장의 대답과 달리, 사진 현상하느라 ‘4시간 잔다’는 제 대답에 교실이 뒤집어 졌어요. 영어선생님은 웃는 학생들을 둘러보시더니, ‘지금 웃고 있는 놈들은 30년 후 이 둘을 지켜봐라. 무슨 일을 하던지 하루 4시간만 자고 노력하는 이들의 미래는 무조건 좋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법칙이다.’고 말씀하셨죠. 너무 힘들어 포기하고 싶어질 때마다, 그날 박창도 영어선생님의 그 말씀이 단단한 나무뿌리처럼 저를 지탱해주었어요. 전교1등짜리 반장은 성모병원 정신과교수가 되었죠. 당시 사진에 빠져 지내던 고등학교시절 제 목표는 ‘월간사진’이라는 잡지에 작품이 실리는 것이었어요. 잡지가 나오면 제일 먼저 사서는, 거기 실린 대가들의 작품을 분석하고 구도와 촬영방법을 연구했죠. 끝내 목표가 이뤄졌을 때는, 자연스럽게 사진실력도 일취월장해있었고요. 그 성취감이 저를 작가로까지 이끌었는지도 몰라요. 너무 버겁고 거창한 꿈은 자칫 자신마저 망가뜨리기 쉬워요. 실현 가능한 현실적 목표를 통해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게 훨씬 가치 있는 일이라고 지금도 학생들을 다독이곤 하죠.” 81년 시작된 청학동과 연인 36년간 이어져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하겠다고 하자,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는 ‘기껏 대학 나와 사진관이나 차리려는 거냐’며 반대하셨다. 하지만 대학 1학년 때 보란 듯이 국전에 당선되자, 아버지는 오히려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주셨다. 대학시절은 작가적 철학과 방향을 정립한 시기였다. 사진이 흔히 ‘찰라의 예술’로 불리지만, 오히려 ‘세월의 더께’에 착안해 긴 호흡의 작품들을 시도한 것도 대학시절부터란다. 1981년 폐쇄조치가 내려져 접근이 통제된 ‘옛 춘천교도소’를 어렵게 들어가 촬영하고 기록으로 남기는가하면, 청학동을 찾아 청학동연작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부터였다.“81년쯤 어느 일간신문 토픽난에 조그맣게 기사 하나가 떴어요. 지리산 등산객 하나가 삼신봉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어느 마을을 찾아들어갔는데, 문명혜택을 전혀 받지 않은 사람들이 마치 조선시대처럼 살고 있었다는 거예요. 지금은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로 되어있지만, 그때만 해도 아예 행정구역 편입 자체가 안 돼 마을 이름도 청학동이 아니었어요. 원래 동학의 한 뿌리인 ‘유불선합일갱정유도(儒佛仙合一更正儒道)’라는 종교를 믿던 신자들이 은둔해 살던 곳이었는데, 정감록에 등장하는 전설의 새, 청학이 사는 이상세계를 따서 ‘청학동(靑鶴洞)이라 불리게 된 거죠. 처음엔 용산역에서 열차로 이리까지 간 다음, 다시 새벽기차를 갈아타고 진주로 가서 버스를 이용해 하동까지, 거기서 하루 2차례 운행하는 묵계리행 버스를 잡아타면 꼬박 18시간이 걸렸어요. 버스를 내려서도 5km 산길을 더 걸어 올라가야 나타나는 오지 중의 오지였죠.” 매번 하동에서 쌀 2말을 사 짊어지고 무거운 사진기와 장비들까지 들쳐 맨 채, 해발 800m의 지리산 골짜기까지 36년간 어김없이 찾아드는 그를 청학동사람들은 처음엔 의아해하다가, 지금은 형제처럼 가까워져 조금이라도 텀이 길어지기라도 하면 언제 올 거냐며 기다릴 지경이 되었단다.5년전 관동갤러리 오픈하면서 인천사람으로 정착 “올해 1월 청학동 1세대 마지막 어르신 ‘김덕준 옹’께서 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셨어요. 장례과정 일체를 제가 일일이 카메라에 담았죠. 애초엔 화전을 일구고 공동체생활을 하던 청학동사람들의 때 묻지 않던 원시적 삶이 청학동까지 지리산국립공원으로 포함되면서 엄청나게 달라진 건 사실이에요. 화전금지로 정부보조금을 받게 되고, 신문방송을 타면서 관광객들이 줄을 잇고, 돈벌이를 위해 자본과 상술이 밀려들기 시작하면서, 우리민족이 근대화를 통해 경험했던 혼란과 격변기의 몸살을 그들도 똑같이 겪게 된 거죠. 하지만 청학동의 외형은 세월에 따라 변했는지 몰라도 청학동정신만큼은 결코 변하지 않았다고 믿어요. 그래서 이번 일본에서 여는 청학동시리즈의 주제도 ‘변하지 않은 꿈 청학’이에요.”대학을 졸업하고 월간잡지사 사진기자로 취업했다. ‘리뷰우먼’이라는 여성지를 시작으로 ‘우먼센스’, ‘마당’ 같은 잡지를 옮겨 다니며 7년여를 근무했다. 일본 아사히신문이 발행하는 주간지 ‘AERA’의 기자로 ‘한국샤머니즘’ 취재를 위해 방문한 ‘도다 이쿠코’ 관장과 만난 것도 그때였다. 경희대 서정범 교수와 셋이서 전국의 무당들을 취재하러 다니다 정분이 나 결혼에까지 골인하게 된 것이다. 프리랜서작가로 독립해서는 대한항공, 아시아나, JAL, ANA 등의 기내지 사진을 도맡아 찍었다. 최고 몸값의 잘 나가는 작가반열에 오른 셈이다. 그러면서도 청학동만큼은 거르지 않고 꼬박꼬박 찾아다녔다. “그러다 1997년 연변대학에서 교수초빙제안이 오면서 갈등이 시작됐어요. 포토저널리즘작가로 회사가 요구하는, 돈 되는 사진을 계속 찍을 것이냐, 이 기회에 조선족과 독립군 후손들에 대한 다큐사진에 도전할 것이냐 결정을 내려야 했죠. 그렇게 중국으로 건너갔어요. 5년 전 평촌 집을 팔고 한국 거주지를 인천으로 옮긴 이유도 사진작업 때문이에요. 공항이 가까워 중국 오가기 편하고, 6만장이 훌쩍 넘는 방대한 사진자료들을 보관하고 발표할 새로운 공간이 필요했거든요. 개항기역사와 근현대사의 뿌리를 고스란히 간직한 도시환경도 제 작업과 궁합이 잘 맞았고요. 그래서 이곳에 ‘관동갤러리’를 오픈하고 인천사람이 된 거죠.” 외국인들, 특히 백인들이 류교수의 청학동사진에 열광하는 이유는, 그들에게는 이미 사라져 관념으로만 존재하는 ‘유토피아’가 한국에는 여전히 실존하기 때문이란다. 물론 한국에서 사진깨나 찍는다는 작가치고 청학동사진 한두 번쯤 찍어보지 않은 사람도 드물 것이다. 하지만 36년째 계속 그 작업을 이어오고 있는 사람은 류은규 교수가 유일하다. 사진은 기억을 기록하는 예술작업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 기억은 희미해져 사라질지라도 기록은 남는다. 기록이 남아있는 한 기억도 복원이 가능하다. 역사는 그렇게 이어져가는 것이다.글· 커피그림 유사랑 I-View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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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18.01.31 (수)
  • 경인식당

    [웹툰 · 갤러리] 울동네 맛고수.5

      

    기간없음
    작성일 2018.01.31 (수)
  • 올해 문화누리카드 1만원 인상 등

    [인천뉴스] 올해 문화누리카드 1만원 인상 등

    설명절 맞아 온누리상품권 개인구매자 10% 할인 행사인천시는 경기침체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전통시장 소상인들의 매출 진작을 위해 민족 고유의 설 명절을 맞아 '전통시장 온누리상품권' 사용 집중 홍보에 나섰다. 그동안 대형마트, SNS 등 유통업체 확장과 소비패턴 변화로 전통시장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어 시민들이 전통시장 이용을 생활화하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전통시장 수요가 증가하는 설 명절 전에 홍보활동을 집중적으로 펼치기로 했다.지류상품권은 인천시 관내 10개 금융기관(IBK기업은행, 광주은행, 농협, 부산은행, 새마을금고, 수협, 신한은행, 신협, 우리은행, 우체국)에서 신분증을 지참하고 구입할 수 있다. 다만, 단위농협은 제외이며 우체국 일부지점(인천, 강화, 서인천, 인천가좌2, 남인천, 인천계양, 백령, 부평, 북인천, 부평대로, 인천남동, 인천중동우체국), 신협일부지점(송림,부평, 미추홀, 용현, 계산, 남인천 지점 둥)에서 구매가능하다.온누리상품권은 평시에는 5% 할인하여 월 최대 30만원까지 구매 가능하였으나, 금년 2월 1일부터 28일까지 최대 50만원까지 구매할 수 있다. 또한 특별판매 행사기간인 2월 1일부터 14일(14일간)까지 10%할인된 가격으로 개인구매자가 취급은행에서 현금으로 구매할 수 있다.상품권은 인천광역시 53개 전통시장 및 상점가를 비롯해 전국 1500여가맹 전통시장과 상점가에서 사용할 수 있으며, 전통시장통통(sijangtong.or.kr)에서 온누리상품권→가맹점포 찾기 메뉴를 활용하여 온누리상품권 가맹점을 미리 손쉽게 확인할 수 있다.인천시는 설 명절에 앞서, 시 산하 전 공무원, 공기업 임직원, 교육기관 등을 대상으로 전통시장 장보기에 공공기관이 앞장서 줄 것을 권유하고 공공기관 에서 지급하는 격려금·위문금품·불우이웃돕기 등에도 온누리상품권을 적극 이용해  줄 것을 당부했다.​         < 설 명절 온누리상품권 구매(1인별) 특별할인 >    - 적용대상 : 현금구매 개인 (신용카드 구매 미적용)   - 할인판매 : 5%(평시) → 10%(특별할인), 2018. 2. 1.~ 2. 14까지   - 구매한도 : 월30만원(평시) → 월50만원(금액상향), ‘18. 2. 1. ~ 2.28.까지 인천 미세먼지 줄고 또 줄었다인천시가 발전소 등 대형사업장 질소산화물 배출허용량 감축·노후 경유차 배출가스 저감장치 부착 등을 추진해 미세먼지를 줄이고 있다. 인천시는 ▲발전·산업 ▲수송 ▲생활 등 총 6개 발생원별 추진과제를 담은 ‘2020 미세먼지 저감 종합대책’을 2016년 마련해 시행하고 있다.  ‘발전·산업부문’에서는 발전소, 산업단지, 공항, 항만, 수도권매립지 등 미세먼지 관리 대상을 2016년 61개에서 74개로 확대하고, 사업장별 질소산화물(NOx)과 황산화물(SOx) 배출허용량을 감독해 2015년보다 2017년 배출량을 1,104톤 줄였다. 올해는 19개 사업장을 대상으로‘먼지총량제’를 시행하고, NOx와 SOx 배출량이 많은 31개 사업장의 배출허용총량을 지난해보다 2022년까지 각 26%, 19% 감축토록 했다.‘수송 부문’에서는 2017년 1만4천500대의 노후 운행차에 매연 저감장치를 장착했고, 올해도 1만8천50대 노후차에 저감장치를 한다. 또 지난해 358대의 전기차를 보급한데 이어 올해 500대를 추가 보급하고, 올해 처음으로 어린이 통학 경유차량의 LPG차 전환 지원 등 친환경차 보급을 확대한다.‘생활 부문’에서는 올해까지 도로먼지 제거장비를 29대 확충하고, 총길이 14만5천km의 도로를 물청소한다. 운동장 먼지발생 억제제 배포를 지난해 78개 초·중·고에서 올해 100개교로 확대한다. 시는 정부가 용역중인 ‘수도권 대기환경 시행계획 변경’ 방안이 나오는대로 ‘2020 미세먼지 저감 종합대책’을 강화해 시행한다.​병원 대형화재 예방차원 안전점검인천시는 대형화재 사고를 예방하고자 다음 달 2일까지 관내 병원 461곳에 대해 긴급 안전점검을 시행한다. 점검 내용은 의료시설 피난계획수립 여부와 안전관리 실태, 주·야간 상주 인원 근무 실태, 화재 사고 초기 대응능력, 방화시설 유지관리 상태 등이다. 소규모 숙박시설과 영화관 등 다중이용시설도 점검 대상이다. 설 연휴 기간(2월 15∼18일)에는 인력을 동원해 1일 3차례 순찰하기로 했다. 관내 요양원 358곳에 대해서는 시설의 구조적인 문제를 찾아 근무자 등을 상대로 맞춤형 안전 교육을 시행한다. 인천소방본부는 화재 사고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상황에 대비, 119 전문구급차 10대와 전문의료장비를 보강하기로 했다. 관계기관과 구급훈련도 병행한다.​올해 문화누리카드 1만원 인상, 7만원씩 지원인천시는 6세이상 기초생활수급자와 차상위계층을 대상으로 다음달 1일부터 문화누리카드 발급을 시작한다. 문화누리카드는 소외계층을 대상으로 문화예술, 여행, 체육 분야 지원으로 삶의 질 향상과 계층간 문화격차 해소를 도모하는 사업이다.  ‘문화누리카드’는 지난해까지 개인당 연 6만원이 지원되었으나, 금년에는 1만원이 상향되어 연 7만원씩 지원된다. 그리고 2021년까지 10만원으로 단계적으로 상향할 계획이다. 특히, 금년부터는 저소득층 유․청소년들의 건강한 여가활동을 위한 스포츠강좌이용권자들도 문화누리카드 중복 신청이 가능해졌다. 또한, 수영장, 볼링장, 탁구장, 당구장, 체력단련장, 자전거용품점, 체육사 등 가맹점이 확대되어 이용자 편의를 제공하게 되었다.대상자는 신분증을 지참하여 관내 주민센터에 방문하여 신청해야 하며, 발급기간은 11.30일까지이고 사용기간은 12.31일까지이다. 연말까지 사용하지 않은 지원금은 자동으로 소멸된다. 기타 자세한 사항은 가까운 읍․면․동 주민센터 및 인천시청 문화예술과(☎440-4023), (재)인천문화재단 생활문화팀(☎760-1035) 또는 문화누리 고객지원센터(☎1544-3412)로 문의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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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18.01.29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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