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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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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살아(사라)지다
신사와 요정이 한울타리에 공존한 기묘한 곳

사동

사도석우(沙島夕雨). ‘사도에 내리는 저녁 비’는 인천 팔경(八景) 중 하나였다. 여전히 바다에 비가 내리지만 이제 그 빗물을 받아 줄 사도는 없다. 모래섬 사도는 항구가 만들어지면서 지도에서 지워졌다. 사도는 영원히 사라졌지만 ‘사동’이란 지명을 남겼다. 이 동네는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정신적 숭배 공간인 신사(神社)와 육체적인 욕정을 발산한 요정(料亭)이 공존하던 기묘한 곳이었다.   





현재의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자리에는 인천신사(仁川神社)가 있었다. 학교 남쪽은  바로 앞까지 바닷물이 넘실거리는 낭떠러지였다. 일본인들은 그곳에 1890년 6월  신사를 건립했다. 지대가 높으며 시가지에서 떨어진 한적한 곳이어야 한다는 여건이 맞아 떨어진 것이다. ‘신사’는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의 대표적 상징이었다. 우리는 흔히 ‘신사참배’라는 말을 통해 이 땅에 신사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알고 있다.
‘인천부사’에 따르면 당시 인천에 살고 있던 일본인들은 인천에 신사가 없음을 안타깝게 여겼다. 1889년부터 신사 창설의 뜻을 품고 기부금을 모아 신사 건립에 나섰다. 당시 인천에 거주하던 일본인 수는 1천600여명. 신사는 이미 1910년 병탄 이전에 인천을 비롯해 국내 곳곳에 건립되었다. 대신궁 건축공사가 낙성되면서 면모를 갖춘 인천신사는 이후 지속적인 증축 공사를 하며 규모를 넓혔다. 지금도 교정 주위에 쉽게 볼 수 있는 축대와 울타리 공사는 1919년부터 이후 3년여에 걸쳐 축조 한 것이다. 일본인들이 기록한 ‘인천항사’에는 인천신사 부지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시가지의 중앙, 서해에 면하고 지대가 높아 건조한 곳에 있다. 수목이 울창하고 분수가 있다. 경내 중앙의 제일 높은 곳에 천조황태신궁 및 명치 천황을 천좌해서 받든다. 경내는 넓고 조망이 무척 아름답다.’
광복이 되자 신사는 조선인들 분노의 첫 타깃이 되었다. 그날 저녁으로 조선인들의 손에 제일 먼저 파괴당한 곳이 각처의 신사였다. 실제로 8월 15일 저녁 평양신사를 비롯한 전국 신사에 대한 방화와 파괴가 시작되었다. 인천신사도 같은 운명이었다. 일본인들은 신령이 깃든 신체가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느라 전전긍긍했다. 인천신사에는 탁구공 크기의 검은 색 옥사리(玉砂利) 신체가 있었다. 8월 17일 오후 4시 인천신사의 궁사들과 인천부윤, 부두관리국장이 입회한 가운데 인천항 앞바다 한 가운데에 그 신체를 가라앉혔다고 한다. 



광복과 동시에 신사가 모두 파괴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일부 시설은 격노한 시민들에 의해 파괴되었지만 원형은 그대로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광복 직후 인천시에서는 인천신사를 허물어서 근로자들의 휴식처인 노동회관으로 개축하려는 계획을 세웠던 것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여러 해 동안 을씨년스런 건물로 남아있던 이곳에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가 들어서면서 신사 부속 건물들이 본격적으로 철거된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인천여상 정문에 들어서면 석축과 석조 난간도 쉽게 발견할 수 있고 교정에 곳곳에서 당시의 석주, 석탑을 만날 수 있다. 학교 아래 동네에는 커다란 방공호가 그대로 남아 있다. 옛 신사를 떠받쳤던 거대한 암석을 양쪽으로 길게 이어지게 방공호를 뚫었다. 유사시 궁사나 승려들 그리고 참배객들이 급히 피신할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지금도 가정집 마당 한 켠에서 입을 크게 벌리고 여전히 그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신사 주변에는 일본인들의 종교 활동 흔적이 남아 있다. 현 송도중학교에는 ‘묘각사’(妙覺寺)가 있었다. 인천여상과 송도중학교 뒤편 사잇길에는 일본식 주택들이 많이 눈에 띤다. 한 가정집 바로 앞에서 일본식 돌기둥과 계단을 볼 수 있다. 이 계단은 지금은 학교 담으로 막혀 있지만 예전에는 이 길이 사찰로 들어가는 입구임을 알 수 있다. 두 개의 돌기둥에는 절의 종파와 이름을 알리는 ‘일연종 묘각사(日蓮宗妙覺寺)’와 부산에 이은 두번째 포교지라는 의미의 ‘서점제이도장(西漸第二道場)’이란 글귀가 써있다. 묘각사 외에 인근에는 동본원사, 서본원사, 명조사, 편조사 등 일본불교 사찰이 많이 있었다. 
이 동네에는 신사와 사찰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일본인들에게 ‘신성(神聖)’은 ‘신성(身性)’과도 통하는 모양이다. 인천신사 건립에 맞춰 수명루와 명월루라는 고급 요정이 한 부지 안에 개업하였다. 일반적으로 신의 위패를 모신 곳은 성스러운 지역이라 반경 몇 미터 안에는 유흥시설을 들일 수 없는 것이 상식인데 인천신사의 경우 그 경내라 할 수 있는 곳에 술과 몸을 파는 요정이 들어선 것이다.
특히 수명루는 ‘제일루’라 불릴 정도로 인천 최고의 요정이었다. 맛있는 술과 음식, 아름다운 여자들, 그리고 청아한 정자와 눈부신 전망을 자랑했다. 당시 시인이자 조선신보사 기자였던 아오야마 고헤이는 “제물포의 빼어난 풍경은 일본공원(동공원)에 있고, 일본공원의 기묘함은 수명루에 모여 있다”라고 수명루에 대한 감상을 표현하였다. 수명루는 청일전쟁이 끝난 후 팔판루(八阪樓)로 이름을 바꾸어 영업을 계속했다. 사람들은 이를 흔히 ‘팔팔로’라고 불렸다. 여러 채의 일본식 건물이 배치돼 있고 대형 연회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인천에 입항하는 일본 함대의 환영 연회를 독점했다고 한다. 초대 조선통감이었던 이토오 히로부미(이등박문)도 이곳에 애첩이 있었고 인천에 올 때마다 즐겨 찾았다고 한다. 광복 후 적산이 된 요정은 전재민(戰災民)을 위한 주거지로 개방하라는 요구를 받기도 했으나 한동안 미군 방첩대 사무소로 사용되었다. 후에 인천여상이 들어서면서 신사와 함께 완전히 철거된 것으로 보인다.



경동 싸리재에서 기독병원을 지나 신흥동으로 넘어가는 길에 긴담모퉁이가 있다. 이름 그대로 돌담이 길게 놓여진 길로 애초에는 꼬불꼬불한 실오라기 산길이었다. 1907년 일본인 공동묘지가 있던 곳에 학교, 사찰 등이 들어서자 구릉을 헤치고 축대를 쌓아 ‘신작로’를 만들었다. 신흥동에서 경동을 거쳐 동인천역으로 가는 길목이자 경인가도와 연결되는 지름길이었다. 고 최성연 선생의 ‘개항과 양관역정’에 따르면 이 공사를 시작한 것은 1907년 4월이며 같은 해 11월에 공사를 마쳤는데 지금의 전동 전환국 청사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 공병대가 이 공사를 맡았다. 완공 후 화수동, 송현동 등에 살던 젊은 아낙네들이 하얀 머리수건을 쓰고 신흥동 정미소 동네로 줄지어 출퇴근했던 슬픈 사연을 지니기도 한 길이다.
긴담모퉁이 중간 쯤 철문으로 굳게 닫친 굴이 있었는데 이 굴은 언덕 너머의 신흥초등학교 내 동산으로 이어졌다. 신흥초 아이들 사이에서는 곰을 기르던 굴이라는 소문도 있었지만 일본군이 총, 폭탄 등 무기를 저장하기위해 굴을 판 것으로 알려졌다. 70년대 들어 학교 측에서 굴의 입구를 봉쇄해 지금은 학교 쪽 입구는 볼 수 없고 긴담모퉁이 쪽은 철문으로 굳게 닫혀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긴담모퉁이 길 윗 편 너머에는 답동성당이 있다. ‘답동’이란 이름은 1977년 신포동에 편입되어 이제는 법정동으로만 존재한다. 하지만 여전히 이곳을 답동이라 부르는 것은 그 중앙에 우뚝 서있는 이 답동성당 때문일 게다.
1889년 파리외방전교회는 제물포항을 포교지로 정하고 빌렘신부를 파견했다. 청일전쟁으로 잠시 중단되었던 성전 건립은 1895년 정초식을 갖고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갔다. 이듬해 종탑이 완공되고 마침내 1897년 7월 4일 조선교구장 뮈텔(1890∼1933년 재임) 주교가 참석한 가운데 역사적인 축성식이 거행됐다. 300평 규모로 전면에 3개의 종탑을 갖춘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전이었다. 뮈텔 주교는 이날의 일을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7시경 신부들이 미사를 드리고 난 후 성당의 강복식이 거행되었고, 다시 미사와 81명의 교우들의 견진이 있었다. 성당은 매우 아름답고 성공적인데, 스테인드글라스와 같은 효과를 내는 유리면과 교우들의 반은 앉을 수 있는 의자들도 갖추었다…본당의 야산과 밭들은 다 조선 사람들에게 세를 주었는데, 그 모든 것들이 하나의 마을을 이루어 요술처럼 훌륭했다.”



세월이 흘러 신자수가 급격히 늘자 1934년 개축공사를 시작했다. 옛 성당을 그대로 둔 채 외곽을 벽돌로 쌓아올리는 난공사 끝에 마침내 1937년 로마네스크식의 성당이 세워졌다. 이것이 현재의 답동성당이다. 정면과 좌우에 반원 아치를 두고 중앙탑 꼭대기와 양측의 작은 철탑 위에 뾰족 돔을 얹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인천 앞바다가 고즈넉하게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서 답동성당은 인천의 온갖 풍상을 함께 겪으며 동고동락해온 인천의 산 증인이다.

답동성당 가톨릭회관 옆에는 개신교 관련 서적을 파는 오래된 서점이 있다. 전국에서 가장 오래된 개신교 관련 서점인 인천복음서점이다. 1957년 배다리에서 10평 정도의 규모로 문을 열어 동인천 대한서림 앞과 내동, 용동을 거쳐 1975년부터 현재의 자리에서 다시 문을 열었다.
1957년에 이 서점을 연 이는 임형섭(82) 어르신이다. 그는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6. 25전쟁 당시 주한 영국군부대 사무원으로 일했다. 영국군 부대가 한국을 떠날 즈음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으로부터 기독교 전문서점을 열면 어떻겠냐는 제의를 받았다. 다시 미군부대 사무원으로 일할 수 있는 추천도 받았지만 서점을 운영하는 쪽에 더 마음이 끌렸다. 기독교 전문서점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성경책, 찬송가, 성서관련 책을 갖췄으나 장사가 그리 잘 되지 않았다. 가게 세를 못내 부인의 결혼반지를 팔아 보태기도 했다. 한때 헤진 성경책 가죽 케이스를 수리해 주거나 성경책을 다시 제본해 주는 일까지 하면서 지금까지 서점을 꾸려왔다. 그는 영국군부대 시절부터 갈고닦아 온 영어실력으로 ‘성경의 역사(All about Bible)’라는 영문 서적을 ‘성경통론’이라는 제목으로 번역해 출간했다.  



〈 그때, 이곳 사동 〉


동공원
일본인들은 기부금을 모아 나무와 꽃을 심는 등 본격적으로 공원을 가꾸어 가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조성된 인천공원은 남쪽 해변으로 밀려드는 파도와 봄철이면 만개한 벚꽃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일본공원은 1914년 각국조계가 폐지되면서 그 이름을 ‘동공원’으로 바꾸었고 이때 만국공원 역시 ‘서공원’으로 변경되었다.

가부키좌
1905년 사동에 '가부키좌(歌舞伎座)'가 개설되었다. 해안을 매립한 300평 대지 위에 일본의 가부키좌를 그대로 모방해 순일본식 2층으로 세워진 가부키좌는 130개의 전등에 불을 밝히고 약 1000명 관객을 수용할 수 있었다. ‘설비가 완성된 점에서는 실로 현재 조선 유일이라 칭할 만한’ 근대극장 면모를 갖추었다. 가부키좌는 연중 245일간의 공연 일수의 3분의 2를 일본 신파극에 할애했다.

인천은행
1967년 3월 인천상공회의소는 ‘인천지방은행설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자본금 1억5천만 원을 확보하기 위해 주식 공모 운동을 벌였다. 1969년 12월 8일 인천은행은 ‘내 고장의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시민의 금고를 자임’하며 키네마극장(현 외환은행 자리)에서 개점식을 갖고 이어 사동 본점 금고의 테이프를 끊어 영업에 들어갔다. 3년 뒤인 1972년 6월1일 상호를 ‘경기은행’으로 변경하고 영업구역도 확대했으나 1998년 6월 우여곡절 끝에 간판을 내리고 말았다.

가톨릭회관

지금의 가톨릭회관 부지는 옛날에 붉은 흙이 드러나는 절개지였다. 도로를 내기 위해 땅을 절개하기 전 언덕이 있었고 탁포현이라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1900년 이 자리에 인천박문보통학교가 자리 잡고 있었는데 2차대전 말 일본관청의 소개명령으로 헐리어 오랫동안 방치되었다. 부지를 정리하고 1974녀 10월 14일 지하 1층 지상 5층의 가톨릭회관이 들어섰다. 한때 전시장과 회의실, 그리고 지하에 다방이 있었다. 

부천군청사

부천군은 부평군 전지역, 인천부를 제외한 인천 전지역, 강화도에 속해 있던 신도, 시도, 모도, 장봉도 및 남양군의 대부면을 관할하던 군이었다. 부천군의 청사는 1923년 4월 답동에 청사를 신축하여 이전하였다. 답동의 부천군청 터는 원래 이하영의 별장이 있었던 자리로 이 건물은 1958년에 헐렸다. 부천군청은 이 건물을 1940년까지 사용하다가 율목동에 건물을 신축해 이전해 1962년 부천시 심곡본동으로 이전할 때까지 사용했다. 옛 부천군청 터에는 현재 말일성도교회가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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