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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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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 표현한 한글 의성어 아직도 어려워"
중화약국 운영 화교 왕문화 약사

인천에 사는 화교들은 어떤 직업에 종사할까. 많은 화교들이 중국집 등 요식업에 종사하지만 한의사. 치과의사, 약사 등 전문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꽤 된다.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 손자로 이어지는 오랜 역사 동안 그들의 직업도 다양하게 변천해 가고 있다. 특히 젊은 화교들을 중심으로 전문직이 늘고 있는 추세다. 그중 화교 약사는 인천에 몇 명밖에 되지 않는다.



28세때 서울에서 인천으로 내려와 약국 개소

인천 남구 숭의동 현대유비스병원 옆에는 한글로 ‘중화약국’이라는 간판이 걸려있다. 별 생각없이 보면 그냥 약국이려니 하고 지나칠 수 도 있다. 이 약국은 왕문화(王文和, 73)씨가 운영한다. 그는 화교 2세로 인천에서 몇 안 되는 화교 약사다. 원래 인천화교는 아니지만 28세때 서울에서 인천으로 내려왔다.
왕문화씨는 1945년생으로 4세때 한국으로 건너왔다. 당시 중국은 국·공합작과 내분으로 시국이 어수선했다. 그의 아버지는 동사무소 관리였다. 혼돈과 변화의 어수선한 시절 아버지는  사건에 관계되면서 징계의 대상이 됐다. 아버지는 가족들을 데리고 연태로 도망나와 한국으로 가는 마지막 배를 탔다. 당시 중국인들은 고국의 전란과 내분을 피해 한국으로 나오는 사람이 많았다. 한국전쟁 전 많은 중국인들이 조국을 탈출했다. 왕문화씨의 가족들도 작은 배에 몸을 싣고 한국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살기위한 행렬이었다.
그의 가족들은 맨 마지막 배를 탔다. 앞서 배에 탄 사람들은 풍랑에 휩쓸려 죽었고 그의 가족이 탄 마지막 배만 살아남았다. 죽을 고비를 넘겨 도착한 곳은 인천이었다. 한국에 오자마자 6.25 전쟁이 났고 또 다시 피난길에 올랐다. 피난을 가다 먹을 게 없어서 피난간 빈집에 들어가 남아있는 쌀과 김치로 밥을 해먹기도 했다. 가족들은 한국말을 한마디도 할 줄 몰라 애를 먹었고 빨갱이로 오인받기도 했다. 전쟁을 피해 겨우 겨우 피난간 곳은 충남 예산이었다.


왕문화씨 가족은 7,8살 때 서울로 올라왔다. 학교는 9세때 명동에 있는 한성화교학교에 입학했다. 왕 약사의 부모와 형제, 누이들은 먹고 살기 위해 깡통, 마대 등을 주워다 팔았다. 살기위해서는 뭐든 일을 해야만 했다. 깡통과 마대를 팔던 그의 부모는 생활에 기반이 잡히자 서울 청량리 주변에 철물점을 열었다. 못, 철사, 난로, 솥 등을 팔았다. 막내였던 그는 부모님을 도와 철물점 물건을 가게 밖에 내다 놓고 들여놓는 일이며 손님이 왔을 때 아버지를 대신해 물건 값을 흥정하는 일을 했다. 그의 부모는 한국말을 잘 하지 못했다. 당시 화교들 중에는 주물업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인천에서 만든 솥이나 난로를 가져다 팔기도 했다.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그의 가족은 잘 정착했다. 그의 부모가 하는 철물점은 그런대로 잘 됐다. 그도 입학하기 힘든 중앙대학교 약대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고국이 아닌 타향에서 삶은 늘 불안했다. 항상 조심하고 조심해도 어려움은 닥쳤다. 당시 화교들은 건물은 살 수 있어도 땅은 소유할 수 없었다. 법적으로 소유를 제한했기 때문이다. 그의 부모는 철물점을 하면서 번 돈으로 땅을 샀다. 물론 자신들의 이름으로는 살 수 없어 한국사람의 이름을 빌렸다. 그러나 그 땅은 그들도 모르는 사이에 팔렸다. 부모는 땅을 찾기 위해 소송을 벌였다. 


“당시 부모님이 땅을 찾느라 소송을 했는데 4~5년간 계속했어요. 소송은 쉽지 않았고 그때는 돈이 없으면 소송을 못했죠. 소송하느라 돈은 다 쓰고 저는 가정교사 일을 하며 대학공부를 했습니다.”
그때  그는 삶이 만만치 않음을 깨닫고, 악착같이 공부했다.


약사들의 하얀 가운에 반해 약대로 진학
왕 약사가 약대에 들어가게 된 것도 사연이 있다. 그의 집은 청량리 부근이었고 화교학교는 명동에 있었기에 전철을 타고 다녔다. 간혹 차비가 떨어지면 종로5가를 통과해 걸어서 가야 했다. 당시에도 종로5가에는 약국이 많았고 약사들의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종로5가 약국을 지나가면 약사들이 하얀가운을 입고 있는 모습이 깨끗한 느낌이 들어 참 좋아보였어요, 그래서 약대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저희 매형이 한의사였는데 한의사는 가운을 안 입었거든요. 어린마음에 가운을 입은 모습이 반했던 것 같아요.”
약대에 대한 흠모는 당시 경희대 한의대를 진학하라는 주변의 권유를 뿌리치고 중앙대 약대로 진로를 택했다.
약대 공부는 어려웠다. 화교였던 그는 온전히 한국말로 하는 수업을 따라가기는 쉽지 않았다. 약대 교수들은 엄해 수업에 1분이라도 지각을 하면 교실에 못 들어오게 했다. 지각하는 날은 밖에서 수업을 들어야 했다. 수업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두배는 열심히 공부해야 했다. 특히 한국말로 써야하는 시험지 답안 작성은 어려웠다. 처음 시험에선 한글로 쓰는 답안작성이 안 돼 전부 한문으로 적어낸 적도 있다.
“당장 교수님한테 불려가 혼이 났어요. 니가 뭔데 한문으로 답을 쓰나며 혼쭐이 났지요.”
한국어가 서툴러 반말과 존대어를 적절하게 사용하지 못해 꾸중을 듣기도 했다. 한글로 답을 쓰기가 어려워 한문과 한글을 섞어가며 답안을 작성했다. 한문을 쓰고 그 밑에 한글을 쓰는 방식이었다. 그런 노력과 정성, 우여곡절을 겪으며 그는 약대를 8년만에 졸업했다.


“답안지에 한문과 한글을 같이 쓰다 보니까 항상 시험시간이 부족했어요. 그래서 학점이 좋게 나오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70년을 한국에서 살았지만 아직도 한국말은 어려워요. 특히 아플 때 표현하는 말들이 다양해서 다 이해하기 힘들었어요.”
그는 약대를 졸업한 후 소원대로 하얀 가운을 입을 수 있었다. 을지로에 있는 대형약국에 취직을 했지만 오래 있지는 못했다.
왕 약사는 28세때 인천으로 내려왔다, 그가 처음 인천에서 약국 문을 연 곳은 독쟁이고개였다. 그때 ‘중화약국(中華藥局)’으로 간판을 달았다. 처음 연 약국은 1년이 안 돼 문을 닫았다. 그는 약국을 시작하면서 주민들과 교감을 나누고자 겨울에 눈이 오면 동네길에 쌓인 눈을 치웠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꺼리던 주민들도 점차 마음의 문을 열었고 손님들도 하나둘 늘었다. 독쟁이 고개 다음에 약국 문을 연 곳은 원호처 부근이었다. 이때는 약국이 잘됐다. 그러나 집 주인과의 불화로 다시 숭의교회 부근으로 옮겼다. 그렇게 그는 50여년 가까이 인천에 살며 인천사람이 됐고 결혼했고 아이들을 키웠다.
그는 약국을 운영하면서 한때는 인천화교협회 이사로 활동했고 인천약사회에서 국제분과위원장을 맡아 대만약사회와의 교류를 주도하기도 했다. 젊은시절 주로 국제분과일을 하면서 대외적인 교류와 통역을 도맡아 했다.


약국은 20여 년 전 모습 그대로, 시간이 멈춘 듯
그는 오늘도 매일 매일 약국문을 연다. 고령이지만 쉴 수는 없다. 현대유비스병원 옆에는 약국이 두 개나 있어 병원 환자들은 그의 약국까지 약을 사러 오지는 않는다. 차를 타고 가다 급한 약이 필요한 사람이나 처방없이 먹을 수 있는 약을 사러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약국은 20여 년 전 그대로 시간이 멈춘 듯하다. 숭의동으로 약국을 옮기면서 그가 형광등을 달고, 조제실을 만들며 직접 인테리어를 했던 그 모습 그대로다.
간혹 약국의 단골손님이었던 용현시장 할머니들이 처방전을 들고 찾아온다. 약에 대해 설명해주고 옛날 이야기도 정을 나눈다. 
그는 힘이있고 여력이 될 때까지 약국을 운영할 생각이다. 평생을 화교약사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부모세대가 고생한 만큼은 아니지만 그도 한국사회에 정착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그 결과가 오늘의 그를 있게 했다. 한국에서 살아온 칠십 평생이 즐거울 때도 있고 후회되는 일도 있다. 하지만 그는 70여년을 한국에 살면서도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으며 화교로써 정체성을 지키고 있다. 자신의 뿌리가 어디였고 어디서 왔는지 알고 지켜나가는 것도 그가 지탱하는 삶의 한 부분이다. 일 할 수 있을 때 까지 열심히 살고, 가족들의 건강과 평안이 그의 마지막 바람이자 희망사항이다.

  
글 이용남 ‘I-View’ 편집위원, 사진 서은미 자유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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