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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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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로 바닷길 열었던 인천 해양 역사 아시나요?
‘해양의 도시, 인천' 특별전 열려

인천은 해양의 도시이다.  1883년 인천  개항이후 우리 민족의 바다 역사 대부분이 인천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배워 온 근·현대사가 증명하고 있다. 1883년 인천 개항 이후 우리나라의 바다 관련 역사는 거의 대부분이 인천서 그 첫 장을 쓰기 시작했다.
1903년 6월 1일 한 줄기의 빛을 통해 드넓은 바다로 향해 눈을 뜨게 되었다. 팔미도 등대를 첫 점등한 것이다. 인천은 개항과 함께 새로운 모습으로 변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대부분의 것들이 첫 시작이었다. 이로써 인천은 눈을 들어 더 멀리 있는 세계의 모습을 비로소 볼 수 있게 되었다. 낯선 외국인의 모습과 새로운 물건들의 신기함, 새로운 기술과 제도의 도입 등 밀물처럼 밀려드는 새로운 문화와 물건으로 인해 근대적 해양의 도시 모습으로 갖추기 시작하였다.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는 '해양의 도시, 인천' 특별전의 주요내용을 소개한다.


팔미도 등대
팔미도 등대는 1903년 6월 1일 우리나라 최초로 점등하였다. 팔미도에 등대가 설치된 것은 1883년 인천이 개항한 이후 외국 선박의 해난 사고가 빈번하여 서양식의 항로 표지 시설 설치 요구가 제기되었기 때문이다.팔미도 등대의 높이는 7.9m, 지름은 약 2m이며, 10km 밖에서도 불빛을 식별할 수 있다. 건축 재료는 바닷물에 부식되지 않는 콘크리트와 대리석을 사용하였다.

▲300mm 등명기

설치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근대식 등대를 세울만한 과학적인 지식과 기술 축적이 없었기 때문에 등대의 부설과 관리는 덕수궁 석조전을 설계한 영국인 하딩(J. R. Harding)에게 자문을 받았다.

▲등대원 및 가족사진(등탑에서) 국립등대박물관

1950년 6․25전쟁 중 팔미도 등대는 인천상륙작전 성공의 주역이 되었다. 한미 연합 특공대가 5시간의 사투 끝에 팔미도 등대를 탈환하여 불을 밝힘으로써 야간 상륙작전을 감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반세기가 지난 2002년에 인천광역시는 이를 유형문화재 제40호로 지정하였다



세계와의 조우
각국과의 새로운 만남은 제물포라 불리는 작은 포구에서 시작되었다. 인천에서 맺어진 동서 제국과의 조약을 시작으로 제물포의 모습은 점차 근대 인천항의 모습으로 변하게 되었다. 1883년 개항 후 제물포에서 근대식 기관인 해관 설치와 함께 청국과 일본 등 외국인들의 거류지가 점차 확대되었다. 이와 함께 항구 주변으로 관공서와 철도, 우체국 등 근대 시설물이 들어서게 되었고, 호텔과 은행, 외국인 별장 등 외국인을 위한 시설들로 개항장은 세계 각국이 모이는 새로운 장이 되었다. 점차 활발하게 이뤄지는 교류 속에 해관의 업무 확대와 해운업 등 해양 관련 산업이 급속도로 발달하였다. 이로써 인천항을 찾는 많은 배들을 수용하기에 부족한 항만 시설을 새롭게 구축하게 되었고, 인천 앞바다의 특징인 조수 간만의 차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나라 최초로 갑문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지
1876년 조선은 강화도 연무당에서 일본과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을 체결하였다. 이후, 조선 정부는 1880년 일본에 수신사를 파견하였다. 이 때 수신사 김홍집은 청나라의 외교관 황준헌이 쓴 『조선책략』이라는 책을 가지고 귀국한다.
1882년 3월 25일 조선과의 조약 체결을 위해 미국의 전권대사 로버트 슈펠트 제독이 인천에 도착하였고, 4월 6일에 제물포에서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조미수호통상조약은 치외법권과 최혜국 대우를 보장하는 조약이었으나, 서양과 맺은 최초의 근대 조약으로서 의미가 있었다. 조약의 체결 장소는 최근까지 분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2013년에 당시의 제물포 지도가 발견되면서 해관 관리관의 사택이 자유공원 청일 조계 경계 계단 위쪽에 있던 자리임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조미수호통상조약은 해관 관리관의 사택이 있던 언덕 인근에 천막을 치고 체결하였음이 밝혀졌다.


인천해관
1876년 조선은 일본과 최초의 근대적 조약인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을 체결하였다. 하지만 당시 조선 정부는 국제법을 잘 알지 못한 상태에서 일본이 집요하게 요구한 무관세와 무세관 체제를 인정해 버리고 말았다. 조선 정부는 부산을 개항한 뒤에야 관세 자주권의 중요성을 깨닫고 관세의 설정을 중요 정책으로 삼아 해관 창설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인천명소 엽서사진- 인천세관(화도진도서관 제공)

관세 자주권의 확보는 1882년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면서 미국으로부터 관세의 부과 징수권을 인정받게 되어 어느 정도 결실을 보게 되었다. 마침내 인천해관은 경기, 충청, 전라, 황해, 평안 5도를 관할 구역으로 하여 1883년 6월 16일부터 수세 업무를 시작하였는데, 이는 한국 최초의 일이다.


인천항과 갑문
인천항은 1883년 1월 개항하였을 당시에는 천연 지형을 이용하여 약간의 화물이 드나드는 포구에 지나지 않았다. 1884년과 1893년 두 차례에 걸쳐 항구 공사를 하였으나 항만으로서는 초보적인 시설에 불과하였다.
청일전쟁 이후 인천항은 미곡 반출의 창구로 이용되었고 수도의 관문이라는 지리적 조건과 1900년 경인철도의 개통에 힘입어 무역액에서 상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1905년 경부선 철도의 개통 이후 인천항의 지위는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때문에 만조와 간조를 가리지 않고 언제나 선박이 입항할 수 있고, 필요하면 언제나 짐을 싣고 내릴 수 있는 독[선거]를 요구하는 여론이 비등하였다.

▲갑문안으로 입항하는 기선 엽서사진

이에 따라 1911년부터 10m가 넘는 조수 간만의 차를 극복할 수 있는 󰡐이중 갑문식 독󰡑의 구축 공사가 시작되었다. 공사는 시작 7년여 만인 1918년 10월에 마무리되었다. 이중 갑문식 독은 당시 동양에서는 유일한 것으로서 4천500톤 급 3척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었다.


상회사(商會社)와 민간 해운업의 태동
1883년 인천항 개항 후, 조선 상인들은 선진적인 경영 기법과 풍부한 자본, 서양 상품에 대한 독점 무역이라는 유리한 조건을 가진 외국 상인과 경쟁해야 했다. 이러한 외국 상인들에 대응하여 세워진 주요 상회사로는 대동상회와 순신창상회 등이 있었다.
대동회사는 최초의 상회사로서 1883년 설립되었으며, 청과의 무역에서 자본을 축적한 평안도 상인들이 주축을 이루고 관료도 참여했다. 순신창상회는 1883년 정부 관료인 참의 민응식이 사장을, 참의 신기선이 부사장을 맡고, 서상집과 서상옥이 직원으로 있던 일반 상회사였다. 주로 국내 상품의 수출과 구미인들을 위한 수입 무역과 여관업을 했다.




▲ 상회사의 태동. 대판상점주식회사인천지점(사진 화도진도서관)




한편 당시 조선 정부에서 도입하여 주로 세곡 운송 등을 전담한 증기선에 자극을 받아 1886년 10월에 서울 사람 이병선과 김동헌 등에 의하여 대흥상회가 설립되었다. 대흥상회는 72톤급 기선을 1만 달러에 구입하여 대흥호라고 이름을 짓고 해운업을 시작하였다.


주안 염전
개항 이후 우리나라는 어업 및 가공 기술이 발달하면서 염장하는 데 필요한 소금의 소비량이 증가하였고, 소금에 절인 어물의 소비량도 증가하였다. 해삼이나 정어리 등 수산물과 염우피(소금에 절인 소가죽) 등의 해외 수출도 증가하면서 소금의 수요는 급격히 많아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지형과 기후, 토질 면에서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경인철도와 항구를 통한 신속한 물자 수송이 가능했던 인천에 최초의 시험용 염전을 축조하였다. 1907년 인천 주안면 십정리에서 한국 최초의 천일염이 생산되었으며, 1909년부터는 본격적인 생산에 들어가게 되었다.




▲ 주안염전



▲인천 부근에서 본 염전의 장관 사진엽서


이후 인천 일대의 염전은 급속히 증대하였고, 1933년경 인천의 염전은 전국 소금 생산량의 절반인 15만 톤을 생산하였다. 그러나 광복 이후 6․25전쟁을 거치면서 주안 염전 일대는 크게 파괴되었다. 주안 염전은 1968년 폐염되었고, 그 자리에 1973년 한국수출공단 5단지, 일명 주안 5공단이 준공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바다를 향한 외침
개항 초기 인천은 바다를 향한 진출과 도전의 의미보다 새로운 문물의 수용과 수탈의 의미가 강했다. 바다를 통한 교류의 중요성이 강조되어 바다를 지키기 위한 노력이 이뤄지게 된다. 해군사관학교의 전신인 조선수사해방학당이 문을 열었고 최초의 군함인 양무호를 도입하였다. 무분별한 부정 수출입을 막기 위해 해관에서는 광제호를 감시선으로 도입하였다. 더불어 인천에서 최초의 함장과 최초의 도선사가 탄생하게 되었다. 광복 후에는 정부 주도로 해양대학교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인천 앞 바다로 향한 그들의 외침은 지금까지 인천 해양의 힘이 되고 있다.


조선수사해방학당
1892년 12월 고종은 근대 해군 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영국 총영사에게 해군 교관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1893년 9월경에 수사해방학당을 강화도에 설치하였다. 수사해방학당은 일반 수군의 조련이 아닌 장교의 육성을 목적으로 창설되었기 때문에 우리나라 최초의 해군사관학교라고 할 수 있다.




▲ 인천조선해양대학 정문


모집된 교육 인원은 15세 이상과 20세 이하의 생도 38명과 수병 300여 명이었으며, 본격적인 군사 교육에 앞서 영어 교육이 실시되었다. 이듬해인 1894년 4월에는 영국에서 파견된 군사 교관인 콜웰 대위와 조교 커티스 하사에 의해 본격적인 군사 교육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수사해방학당은 군사 교육을 시작한 지 3개월 만인 1894년 7월에 청일전쟁이 발발하면서 국내외의 정국이 불안해짐에 따라 운영이 곤란해져 유명무실한 교육기관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 때의 경험은 다시금 군함 도입을 추진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양무호와 광제호
조선 정부는 개항 이래 여러 차례 군함을 도입하려고 시도하였으나 번번히 성사되지 못하였고, 대한제국 시기인 1903년에 이르러서야 성사되었다.
일본의 미쓰이 물산으로부터 구입한 최초의 근대식 군함 양무호는 1903년 4월 15일 제물포항으로 입항하였다. 양무호의 초대 함장으로는 일본 동경상선학교에서 유학을 마친 신순성이 임명되었다. 그러나 중고 화물선에 불과하였던 양무호를 터무니없는 고가에 매입한데다가 하루 43톤에 달하는 석탄 소비량 등 운항 비용도 감당할 수 없었다.




▲ 광제호



▲ 향무호



양무호의 실패를 경험한 대한제국은 일본 가와사키조선에 새로운 군함의 건조를 주문하였다. 이를 통해 1904년에 만들어진 광제호는 전장 약 73m, 너비는 약 10m, 총 톤수는 1,056톤에 달하는 대한제국의 두 번째 군함이자 최초의 신조(新造) 발주선이었다.


최초의 무선 전신
1876년 개항 이전 조선의 주요한 통신 제도는 역원과 봉수였다. 그러나 역원과 봉수 제도는 시간이 흐를수록 문란해져 제대로 운영되고 있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항 이후 조선 정부는 근대 문물과 관련 소식 중에서도 전신과 관련된 소식에 주목했다. 전신이 도입될 수 있다면 역원과 봉수에 비해 압도적으로 빠르고, 민간에서도 이용할 수 있어 수익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월미도무선전신소




이에 1884년 4월에는 최초로 일본의 나가사키와 조선의 부산이 해저 전선으로 연결되었다. 1885년에는 청나라의 주도 하에 전선이 가설되기 시작하여, 9월 28일에 처음으로 인천 ~ 서울 간 전신이 개통되었다. 그리고 1894년 서울을 중심으로 각 주요 도시에 전보사가 설치되면서 정식으로 전신 사무를 관장하여 일반인들의 전보를 취급하기 시작하였다.


바다의 정원
거센 파도와 같이 치열한 열강의 각축장이 되었던 인천 앞바다는 일본의 승리로 적막의 바다로 변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를 맞아서는 더욱 새로운 변화를 겪게 되었다. 월미도를 중심으로 유원지 개발이 이뤄져 호텔과 조탕, 해수욕장 등이 세워졌다. 가족과 연인을 위한 위락 시설이 들어선 인천은 바다를 중심으로 새로운 임해 유원지의 모습도 갖추게 되었다.


월미도 조탕
월미도는 1915년 『인천부 부세일람』에서부터 명소 고적으로 소개되었던 섬이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일본 공사인 하나부사 요시모토가 피난한 장소라는 설명만이 짤막하게 실려 있었다.
이러한 월미도가 본격적인 관광지로 개발된 것은 인천항 갑문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1918년 인천 내항에 독이 완공되기 전인 1917년부터 한강에서 흘러드는 급한 물살을 막기 위해 북성 지구에서 월미도까지 약 1km에 달하는 제방 축조 공사를 하였던 것이다. 1923년에 제방 축조 공사가 완료되면서 월미도는 육지와 연결되었다.




▲ 조탕 간판



1923년 7월 10일 남만주철도회사는 월미도에 우리나라 최초이면서 유일의 조탕 시설을 개장하였다. 조탕은 일반적인 바닷물이 아니라 지하 암반층에서 바닷물과 성분이 비슷한 지하수를 끌어올려 이를 끓여 목욕물로 사용한 것이다. 조탕 건물은 내부에 숙박과 휴게 시설을 모두 갖추고, 서구식 무대 장치를 마련한 연무장을 설치하여 첨단 시설을 자랑하였고 전국 최고의 명소로서 이름을 날렸다.


묘도 해수욕장
묘도는 1906년 준공된 인천 만석동 매립지 끝부분에 위치하였던 섬으로, 조선 말기 이양선의 내침에 대비하여 포대를 축조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묘도 해수욕장은 일본인에 의해 북성동 외국인묘지(지금의 송월변전소 자리)에서 묘도에 이르는 갯벌을 매립해 종합 휴양지로 꾸미기로 하면서 매립지 준공과 함께 1906년에 개장하였다. 이는 1912년 일본 자본의 송도유원주식회사에서 개발한 부산 서구의 송도해수욕장 보다 6년 앞서 개장한 것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해수욕장이라고 할 수 있다.



                                                         ▲ 인천묘갑(仁川猫岬) 해수욕장 전경

현재 전해지는 묘도 해수욕장 사진엽서에는 묘도의 바위섬 아래로 휴게실로 보이는 목조 구조물과 함께 다이빙대를 비롯한 시설을 갖추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묘도 해수욕장 인근 언덕에는 휴양 호텔인 팔경원이 지어졌는데, 지금의 괭이부리마을이 있는 곳이다.
만석동에는 해수욕장과 팔경원 이외에도 일본인 6명이 공동으로 출자해 운영하던 묘도 유곽이 있었다. 휴양 시설들은 1923년에 건설된 종합 휴양 시설인 월미도유원지보다 약 15~6년 앞서는 것이었다. 묘도는 이후 1937년 공장 부지 활용 등을 목적으로 매립하면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인천의 수족관
1915년 조선총독부는 조선을 강점한 지 5주년을 기념하고, 식민 지배의 성과를 국내외에 과시하기 위하여 경복궁 경내에서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하였다. 경복궁 외부에도 별관이라는 이름으로 박람회장이 만들어졌는데, 인천 사동 일대에 인천 수족관이 별관으로서 개설되었다. 이는 수족관으로서는 국내 최초의 사례이다. 인천 수족관은 본관이 357㎡(약 108평) 규모로 세워졌고, 부대시설을 포함한 전체 면적은 10,400㎡(3,145평) 정도였다. 수족관에는 악어를 비롯한 각종 어족자원은 물론 독도의 강치와 인천 앞바다에서 어부의 그물에 걸렸던 고래도 전시됐다.




▲ 인천수족관 포스터




수족관은 조선물산공진회의 개최 기간에 맞추어 50일간 운영되었다. 유료 관람객은 98,000명에 달했다. 1915년 인천 인구가 30,828명(부세 일반)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얼마나 대성황을 이루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비록 일제에 의해서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국내 최초로 인천에 수족관이 일정 기간 동안 운영되었고, 이후에도 수족관을 설치하고자 하였던 계속된 움직임은 해양도시로서 인천의 성격을 많은 사람들이 인식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인천항 컨테이너부두
인천항은 6․25전쟁을 겪으면서 항만 시설이 파괴되어 항만 기능이 거의 마비되었다. 그러나 1953년 휴전협정 체결 이후 재건되기 시작하였다. 1962년 3월에 제정된 개항 질서법 시행령에서 인천항은 국내외 선박이 자유로이 입출항할 수 있는 국제항으로 지정되었으며, 1968년 1월 시행된 항만법 시행령에서는 무역항으로 지정되었다.




▲ 인천축항공사 개요- 갑문



1962년부터 시행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핵심은 수출 지향적 공업화 정책이었다. 인천항의 무역 규모도 수출 증가율과 함께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인천항에 대한 투자도 본격적 으로 이루어져 1966년부터 1974년까지 최대 5만 톤급 선박의 접안이 가능한 제2선거의 건설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국제적으로도 해상 무역량의 증가에 따라 선박의 대형화가 진전되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는 일정 규격의 컨테이너를 수송하여 하역 시간과 비용을 단축시킬 수 있는 컨테이너선이 등장하여 크게 발전, 확산되었다.
시대적인 추세에 발맞추어 1974년 5월 10일 우리나라 최초의 컨테이너 전용 부두가 인천항 제2선거 준공과 더불어 인천항 내항 4부두에 개장되었다. 개장 당시 4부두는 연간 232만톤 약 27만개의 컨테이너 하역 능력을 갖추고 있었는데, 컨테이너 전용 부두로는 1978년 개장한 부산항 자성대 부두보다 4년 앞선 것이었다.


하와이 이민
우리나라의 해외 이주는 1860년부터 시작되었으나, 이는 유민(流民)의 성격으로 공식 이민은 아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정식 이민은 1902년 12월 22일 121명이 하와이를 향해 제물포를 출발한 데서 비롯하였다. 이 때 이민 모집이 쉽지 않아 인천 내리교회 목사 존스는 주한 미국 공사인 앨런의 부탁을 받고 교인들에게 이민을 권유하기도 하였다.
하와이 섬의 주요 산업은 사탕수수 농업이었다. 그러나 자체 노동력의 부족으로 거의 외국인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중국인과 일본인 노동자들의 유입을 거쳐 20세기 초 부터 한인의 이민이 시작되었다. 광복 이후 하와이 교포들이 보낸 성금을 보태서 세워진 인하(仁荷) 대학교는 이러한 초기 이민자들의 정신이 구현된 것이었다.



○ ‘해양의 도시 인천’전
- 전시기간 : 9월 12일~10월 29일
- 장    소 : 인천시립박물관 기획전시실
- 문    의 : 440-6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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