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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 차한잔의 대화(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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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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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로 그리는 인천萬畵
광대인생 40년, 마임이스트 최규호

“마임이란 일종의 드림메이커(dream maker)죠. 어릴 적 할머니가 들려주는 호랑이나 도깨비 얘기에 무한상상의 나래를 폈던 것처럼, 마임이스트는 꿈의 메신저여야만 해요. 동작 하나하나를 통해 관객에게 꿈을 전달하는 전령사죠. ‘말없이 몸짓으로 전하는 꿈과 상상의 언어’, 그게 마임이에요.”
한국의 독보적인 마임이스트이자, ‘크라운마임’이라는 장르를 창안해 세계의 마임예술가들로부터도 널리 인정받고 있는, 40년 광대인생 최규호(58세) 선생을 찾았다. 가을비가 뿌리던 9월의 어느 주말저녁 무렵, 최선생이 호구지책으로 운영하고 있는 구월동의 라이브카페 ‘공감’은 한산했다. 카페입구에는 앵무새 두 쌍이 미동도 않고 앉아있고, 왼편에는 드럼이며 색소폰, 피아노 등 악기들로 빼곡하다. 직접 나무를 깎아 만들었다는, 독특한 모양의 콘트라베이스 2대가 인상적이다. 노란 티셔츠에 페도라를 쓴 최선생이 꿈꾸는 소년의 얼굴로 기자를 맞는다.



9월 15일 인천,  전세계 마임이스트들 성지가 된다

“요번 9월 15일, 금요일에는 세계 각국의 마임이스트들이 인천으로 몰려와요. ‘인천국제마임축제’가 돌체소극장을 중심으로 9월 24일까지 10일간 펼쳐질 예정이거든요. 올해로 22회째를 맞는 ‘인천국제마임축제’ 기간 동안, 전 세계 9개국 아티스트들의 수준 높은 공연을 마음껏 감상하실 수 있어요.”
이야기 도중 그의 눈빛이 언뜻 흐려진다. 수년전 인천세계도시축전 공연 중, 광대묘기를 부리다 3m 높이의 탑이 무너지는 바람에 왼쪽 발뒤꿈치가 으스러지는 사고를 당했단다. 엉치뼈를 떼어 내 복원수술을 마쳤다고는 하지만, 그 후 장기공연이나 세밀한 광대묘기는 더 이상 불가능해진 것이다. 무대 위를 펄펄 날던 드림메이커의 좌절에 기자의 마음도 내려앉는다.



“그래도 국제마임축제에 제가 빠질 수야 없죠. 짧고 간단한 크라운마임을 선보일 예정이에요. 용사가 전쟁터에서 불꽃으로 스러지듯, 광대 역시 죽더라도 무대에서 산화되어야죠. 그날 찾아오는 관객들에게 짧지만, 강렬한 꿈을 전해주고 싶어요. 그러자면 제가 먼저 간절히 꿈꾸는 자가 되어야 해요.”
인천 송월동에서 4남1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단다. 해병대 수송부 하사관출신 아버지는, 부대 근처 김포 애기봉 아래 살던 어머니와 결혼해, 인천서해운수의 원목운송용 트레일러기사로 일하셨다.
“송월초등학교 6학년 때  만석동으로 이사했어요. 집이래야 전부 게딱지마냥 덕지덕지한 판자촌뿐이었죠. 그래서 제 뿌리정서는 ‘인천 똥마당’이에요. 당시 만석부두는 똥덩이들이 둥둥 떠다니던 똥부두였거든요. 여름이면 만석바다에 지천으로 떠있는 ‘대성목재’의 통나무껍질을 벗겨 말리는 게 일과였어요. 겨울에 땔감으로 내다팔아, 그 돈으로 먹고 살아야 했으니까요. 지지리 궁상맞던 시절이었죠.”
송월동 얼음공장에서 ‘아이스케키’를 떼어다가 자유공원 관광객들에게 팔아 용돈을 벌었다. 한때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었던, 그런 유년의 경험도 살다보니 요긴한 밑천이 되더란다. 낯모르는 사람과 쉽게 이야기를 풀어가는 화술도 그때부터 학습된 것이고, 살면서 웬만큼 힘든 일은 일도 아닌 것이 되었으니까.


 
“광성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이미 세상에 대해 눈뜨기 시작한 거 같아요. 그때쯤 위대한 생각 하나를 깨치게 되었죠. 내가 만물의 영장인데 뭘 못하겠는가? 나무를 깎아 아버지의 트레일러 차량과 똑같은 모형을 만들고, 시중에서 파는 장난감이며 딱총을 직접 만들어 가지고 놀았어요. 눈에 띄는 족족 뭐든지 연구해서 만드는 버릇은 지금껏 평생을 이어오는 취미가 되었죠.”
실제로 그는 목수나 발명가로 착각할 만큼, 다양한 공구와 기계들을 가지고 별의 별 걸 다 만들어낸다. 가게 인테리어부터 악기제조까지 기발한 아이디어와 착상은, 그를 아는 사람들 모두가 인정하는, 전문가 못지않은 경지에 올라있다.


고등학교때 '첫 무언극' 경험이 졸곧 연극과 인연 이어
“유도로 전 세계를 다니며 집안을 일으키신 당숙어른이 한분 계셨는데, ‘전주최씨’ 집안의 장남은 무조건 유도를 배워야한다며 저를 대구의 중앙중학교 유도부로 전학을 시켰어요. 그 바람에 잠시 팔자에도 없는 유도선수노릇도 했죠. 하지만 고등학교는 다시 인천으로 와 한독실업고등학교(현 정석항공고) 전기과로 진학했어요. 전국 상위권성적에 학교장추천서가 있어야만 응시자격이 부여되던 특차학교였죠. 성적우수 졸업생은 독일 ‘시멘스’社로 유학까지 보내주는 특전 때문에 경쟁률이 장난 아니었어요. 선생님들도 독일유학파들이 많았고, 공구들도 모두 독일제였죠.”
제일 좋아하는 과목은 일주일에 딱 한 번 있던 음악시간이었단다. 당시 그를 총애하던 음악선생님의 권유로 학교예술제인 ‘한독예술제’에서 생애 처음 무언극을 무대에 올렸는데, 공전의 대히트를 치는 바람에 3년 내내 총감독을 도맡기도 했다.
“연극이 무언지도 모르면서 직접 각본 쓰고 연출에 출연까지 했죠. 나중에 미들급 동양챔피언까지 오른, 지금은 목사가 된 유병대라는 친구와 둘이서 ‘결투’라는 제목의 2인 무언극을 공연한 거예요. ‘황야의 무법자’라는 곡이 멋들어지게 연주되는 가운데, 둘이 서로 번갈아가며 총질을 해대요. 탕, 탕, 탕 총알이 발사될 때마다 차례로 서로의 모자와 옷이 벗겨지고 마침내 바지까지 쑥 내려가는 코믹 상황극이었죠. 객석이 뒤집어졌어요.”
이날의 짜릿했던 성공이 그를 평생 무대에 발목 잡히게 만드는 올무가 되었나보다. 다른 친구들이 대학진학을 고민하던 고3시절, 그는 과감히 대학 대신 연기를 선택했다. ‘청실홍실’이라는 영화를 찍은 감독이 아동극 단원을 모집한다는 신문광고를 보고 지원한 것.


“오디션에 합격하고 보니 을지로 3가에 있는 연기학원이었어요. 거기서 연기에 입문하고 다른 연기자들을 만나 교류하기 시작하면서, 소위 ‘딴따라’물이 들기 시작했죠. 졸업 후에는 본격적으로 아동극 배우로 무대에 올랐어요. 당시 연기를 지도하던 강사의 추천으로 고영남 영화감독을 소개받아 전쟁영화에 몇 번 얼굴도 내밀고, FD일도 했어요. 말이 FD지, 피 가져오라면 피 갖다 뿌려주고, 총 가져다주는 심부름꾼이었죠. 그러다 2m 벼랑에서 떨어지는 신을 촬영해야하는데, 겁이 나서 아무도 안 나서는 거예요. 기회다 싶어서 제가 자원했죠. 밑에 짚더미 몇 개만 깔고 멋지게 떨어져 단번에 OK사인을 받아냈어요. 중학교 때 익힌 유도의 낙법을 요긴하게 써먹은 거죠.”
그 일이 소문나면서, 연기보다는 스턴트맨으로 여기저기 불러 다녔단다. 주로 다리나 열차에서 뛰어내려 죽는 역할이었다. 한 영화에서 3번이나 죽는 신을 찍기도 했단다.


올해 마임인생 40년째… 전세계 돌며 수천회 공연
“‘절정’이라는 영화에서 처음으로 대사가 있는 역을 맡았어요. 웨이터로 출연해 여관방문을 열면서, ‘어, 아무도 없네?’라는 대사 한마디 하는 거였는데, 상영 때 보니 편집되었더라고요. 그 한 신 찍으러 강릉 하조대까지 갔다 왔는데, 참담한 기분이었죠. 영화판을 걷어치우고, 오랜만에 학원엘 나갔더니, 원장님이 ‘순수예술 해볼 생각 없냐?’며 ‘극단 거론’을 추천해주셨어요.”
그래서 찾아간, 신촌역 2층의 ‘극단거론’은 텅 빈 공간에 탁자만 덩그러니 놓여 있더란다. ‘피터 한트케’의 연극 ‘관객모독’을 공연할 계획인데, 무대와 분장실 꾸미는 일로 고민 중이었던 것.
“당장 팔 걷어 부치고 혼자서 무대며 분장실 인테리어 공사를 시작했어요. 고등학교 때 전공이 전기과였던 덕분에 조명이며 음향시설까지, 을지로와 세운상가를 직접 뒤져 기기를 사와 설치했죠. 무대가 밝아졌다가 서서히 어두워지도록 만들어주는 게 ‘디머(dimmer)’라는 장치였는데, ‘트라이액’이라는 반도체부품으로 제어를 했어요. 그런데 주파수가 발생해 음향기기에 잡소리가 섞이는 게 문제였죠. 그것을 보완해 저는 구식 슬라이닥스 4개를 사용해 음향기기에 영향을 안주면서도 미세하게 작동이 되도록 바꿨어요. 거론식구들은 물론이고 다른 극장에서도 와서 보고 놀라더라고요. 그 뒤 민예소극장을 위시해 삼일로극장, 76소극장 등 서울시내 거의 모든 소극장들이 기기고장이 나면 무조건 저를 찾곤 했어요.”





‘극단거론’에서의 생활은 그의 배우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을 가져다 준 시기였다. 송승환, 박영규 등 실력파배우들과의 교류는 물론이고, 무엇보다 마임 1세대인 유진규 감독의 공연을 통해 자신의 배우정체성을 마임이스트로 분명하게 규정하게 된 것이다.
“1978년, 수개월 동안 준비한 끝에 ‘시시딱딱이 놀이’라는 무언극을 ‘극단거론’ 무대에 처음 올렸어요. 그리고 이듬해 인천 최초의 소극장인 ‘돌체소극장’을 처음 송월당 얼음공장 자리에 오픈해 ‘취보영감의 소집영장’이라는 모노드라마를 공연했고, 그해 여름, ‘삐에로의 합창’이라는 창작마임극을 연달아 선보였죠. 그렇게 시작된 제 마임인생이 올해로 만 40년째네요. 그동안 약 300편이 넘는 작품을 무대에 올렸고, 전 세계를 돌며 수천회의 공연을 해왔어요.”





예술이란 석순(石筍) 같은 것이다. 오랜 세월 무형의 미미한 것들이 한 방향으로 쌓이고 쌓여, 단단하고 고유한 형질의 유형문화로 결정되는 것이다. 하루아침에 뚝딱 생겨날 수 있는 도깨비 방망이가 결코 아닌 것이다. 그가 여기까지 끌고 온 한국형 마임 역시 지금도, 앞으로도, 그가 사라진 후에도 거대한 석순으로 어김없이 자라날 것이다.


글. 커피그림 : 유사랑 I-View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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