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 주요메뉴 | 서브메뉴 | 본문 | 하단


사람과 사람
  • 인천인의 삶
  • 차한잔의 대화(인터뷰)
  • 칼럼

> 기사열람

기사열람

섹션
사람과 사람 > 차한잔의 대화(인터뷰)
등록일
2017-08-22
작성자
무단 전재 및 재편집 금지
다운로드
 
커피로 그리는 인천萬畵
소리꾼 인생, 김경아 명창


하필 우리조상들은 우리 전통노래를 왜 ‘소리’라고 불렀을까? 윌터.J옹이라는 언어학자에 의하면 문자가 아직 발명되기 이전, 오로지 소리로만 의사가 전달되던 구술시대에는 세상의 모든 ‘소리’가 자기 자신인 ‘나’에게로 들려오는 까닭에, 세상의 중심은 언제나 ‘나’였다. 각 개개인이 모두가 ‘지구의 배꼽’인 시대였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나’라는 주체는 중심에서 변방으로 떠밀리게 되었다. 생면부지 존재도 모르는 작가가 써놓은 문자를 읽고 그 의미를 일방적으로 수용해야하는, 피동의 객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소리’에는 우리가 상실해버린, ‘인간중심의 회복에너지’가 내재되어있다. 숙종에서 영조시대를 거쳐 구전돼온 판소리도 어쩌면 문자의 권력에서 밀려난 당시의 민중들이, ‘세상의 중심’을 꿈꾸던 간절한 바람이자 노래였을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판놀음을 벌이는 소리’라는 뜻을 가진 판소리는, 변방으로 떠밀린 인간을 지구의 배꼽으로 돌려놓는 ‘인간성 회복의 예술’인 셈이다.

판소리에 홀려 소릿길 입문… 운명이라 생각
“갈수록 어려운 것이 소릿길이에요. 돌아보면 아찔한 고비가 많았죠. 겁 없이 그 길을 걸어, 멋모르고 여기까지 와버린 거예요. 미리 알았다면 달리 맘을 먹었을지도 몰라요. 소리는 힘이 절반이에요. 젊고 힘 있던 시절에는 자신이 부르는 노래의 깊이를 미처 모르고, 정작 세상을 깨친 지긋한 나이가 되어서는 거꾸로 힘이 부쳐 제대로 된 소리를 풀어놓기 어렵죠.”
지글대던 염천을 소나기가 잠시 식히고 지나간 7월의 마지막 날 오후, 작년 제 24회 임방울국악제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해 명창의 반열에 오른 인천의 독보적 소리꾼 김경아 명창(42세)을 만났다. 구 시민회관 사거리, 이병홍 이비인후과건물 2층에 마련된 ‘한국판소리보존회 인천지부’ 사무실에서 김명창은 마침 어린 제자를 지도하고 있었다. 다소곳이 꿇어 앉아 스승의 소리를 한 소절씩 따라 부르는 판소리 꿈나무의 해맑은 얼굴에 소릿길의 아득함 따윈 찾아볼 수 없다.



“내일부터 ‘산공부’를 떠나요. 몇몇 제자들만 데리고 인적이 드문 산속에 틀어박혀, 8월 한 달간 먹고 자는 시간 외에 통으로 소리공부만 하는 거죠. 빡빡한 공연일정과 번잡한 세상사로 방전되어버린 정신과 내공을 새로이 재충전하는 시간이에요. 전화기나 TV도 꺼놓고 속세와 완전히 단절된 채, 오로지 자신의 내면과 소리에만 집중해 독공수련을 하는 거죠. 올해는 경기도 광주의 무갑산으로 정했는데, 그 준비로 이번 주 내내 정신이 없었어요.”
전북 임실에서 태어나 어릴 때 서울로 이주했단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김명창은 5살 때부터 이미 타고난 소리꾼이었다. 별표전축에서 흘러나오는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를 이미자보다 더 구성지게 불러 제쳐, 성수동 뚝섬동네서는 신동으로 소문이 짜르르했을 정도다. 아버지는 종일 전축을 끼고 살았다. 아버지의 전축에서는 늘 알 수 없는 구닥다리 노래들만 지겹게 흘러나오기 일쑤였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부터는 그런 아버지가 창피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는 결국 돌아가셨어요. 간암이었죠.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저는 변함없이 자타가 공인하는 학교가수로 명성을 날렸어요. 선생님 손에 이끌려 이 교실 저 교실 다니며 노래를 부르곤 했죠. 제 자신은 물론이고 선생님과 친구들까지, 제가 이선희나 문희옥 같은 가수가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어요. 그런데 고교입시를 코앞에 둔 어느 날, TV에서 우연히 판소리공연을 본 거예요. 나도 모르게 목이 콱 메더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어요. 어린 시절 허구한 날 아버지의 전축에서 흘러나오던 그 구닥다리 노래가 바로 판소리였던 거죠. 그리움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나도 모르게 아버지의 그 노랫가락이 내 몸속에 체화되었던 건지도 몰라요. 그 길로 홀리듯 소릿길을 떠나 여기까지 온 거예요. 운명이었던 거죠.”
부랴부랴 한두 달 판소리 개인레슨을 받고 서울국악예고로 진학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도 무모한 치기였단다. 목소리 하나만큼은 누구한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노라 자부했던 그녀였지만, 국악예고 입학과 동시에 그 자존심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고(故) 성우향 명창이 그녀의 큰 스승
“제대로 된 소리를 내려면 목이 쉬었다 풀리는 과정을 수없이 되풀이해야 하는 게 판소리예요. 어릴 때부터 개인레슨을 받아 온 동기들은 이미 그런 과정을 거쳐 완숙한 소리를 낼 수 있었지만, 저는 여전히 아이 티를 벗지 못한, 비린내 풀풀 나는 생소리였으니 상대가 될리 없었죠. 그렇다고 가정형편상 따로 개인과외를 받기도 쉽지 않았어요. 죽을힘을 다해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죠. 틈만 나면 연습실에서 살다시피 했어요. 학교연습실이 문을 닫는 주말이면, 집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연습했죠. 간절했으니까요.”
‘판소리라고 별 거랴?’, 오만한 마음으로 들어 선 소릿길은 갈수록 첩첩산중이었다. 죽을 고생으로 산 하나를 넘으면 더 큰 산이 가로막았다. 걸핏하면 길을 잃고 벼랑 끝을 헤매곤 했다. 그럴수록 오기와 전의는 더 활활 불타올랐다. 기어코 이 길의 끝을 보고야 말리라, 마음을 다잡고 또 다잡았다.
“그렇게 단국대 음대 국악과로 진학했어요. 대학시절에도 연습실은 항상 제 차지였죠. 하루도 쉬지 않고 연습실을 찾는 바람에, 연습실이 텅텅 비기 일쑤인 방학 때조차 이른 새벽부터 문을 열어주고 늦은 저녁시간까지 기다려 연습실 문을 닫느라, 애꿎은 수위아저씨들이 고생했어요.”
김명창은 편하고 안전한 길보다는, 구부러지고 거친 길을 선호했다. 스승을 선택할 때에도 화려한 명성보다는 고르고 골라 진짜 ‘선수’를 찾았다. 17살 때부터 인연을 이어온, 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 춘향가 보유자인 인간문화재 고(故) 성우향 명창이 그런 그녀의 큰 스승이었다.  남해성 선생, 김수연 선생을 사사하기도 했다.
“판소리는 스승 없이는 절대 불가능한 예술이에요. 아는 만큼 들리고, 들리는 꼭 그만큼만 소리를 낼 수가 있죠. 스승 없이는 제대로 된 소리가 무엇인지 도무지 알 도리가 없어요. 판소리의 묘리는 오직 소리에서 소리로만 전달이 가능한 까닭이죠. ”





대학을 졸업하고 이듬해, 인천에 터를 잡은 것이 1998년 무렵이다. 대학 재학시절부터 인천민예총 풍물팀을 가르쳐왔고, 언니가 부천에 살고 있었던 것이 인천과 인연을 맺은 이유라면 이유였다. 그렇게 동암역 근처에 판소리교실을 열고 의사선생님을 첫 제자로 가르치기 시작한 게 벌써 19년째다.
“그 동안 전국규모의 국악제에서 각종 상을 휩쓸었고, 헤아리기 힘들만큼 많은 공연을 해왔어요. 재작년에는 판소리 춘향가 완창공연도 했죠. 장장 6시간에 걸친 마라톤 공연이었어요. 판소리가 이렇게 재미있는 노래인지 처음 알았다는 관객들의 반응에 벅찬 보람도 느꼈죠. 인천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직접 기획한 ‘청어람’이라는 정기공연도 올해로 2회째 이어갈 계획이에요. 유명하진 않아도, 우리 국악계의 보석으로 커나갈 인재들을 초청해서 꾸미는 무대죠.”


평생 끊임없이 훈련해야 하는 득도의 길
판소리의 발성훈련법에 ‘독공(獨功)’이란 것이 있다. 폭포 앞에서 폭포의 굉음을 이겨내기 위해 피 토하는 수련을 하거나, 수년간 토굴 속에서 다른 잡음과 섞이지 않은 반사음으로 창법을 교정해 득음의 경지를 깨치는 판소리 특유의 수련법이다. 실제 KBS의 실험결과, 득음한 명창들의 소리는 폭포의 굉음(82데시벨)보다 훨씬 큰 107데시벨을 기록했다 한다. 300명이 일시에 지르는 함성과 맞먹는 수치다. 음역대(音域帶)도 벌의 날갯짓과 같은 저음(31.5헬츠)에서 초음속비행기의 엔진소리에 해당하는 고음(1만 6,000헬츠)까지로 폭이 넓었으며, 성역(聲域)도 3옥타브 반, 음성지속시간도 보통성인 남녀를 훨씬 능가하는 것으로 밝혀져 독공을 통한 판소리의 우수성이 과학적으로 입증된 바 있다.
“평생 끊임없이 독공을 위해 피를 토해야하는 것이 소릿길이죠. 어렵사리 득음에 이르렀다 해도, 잠간의 나태로 금세 내공이 시들고 마는 것이 판소리예요. 해마다 산공부를 거를 수 없는 이유죠.”





한 때 마라톤에 도전해 10번이 넘는 완주경험과, 여성의 몸으로 3시간 27분이라는 대단한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김명창은 이제 요가에 빠져 지낸단다. 제 아무리 술을 많이 마신 다음날이라도 새벽이면 어김없이 요가도장에 나가곤 한단다.
“뭐든 그 맛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하려면 최소한 10년은 해봐야 해요. 뭐든 시작하면 길게 가져갈 줄 아는 것, 그것이 제가 지닌 최고의 재능이고 특기예요.”


글. 커피그림 : 유사랑 I-View 기자 


 


© 인터넷신문 incheon@news 는 시민의 알권리 충족과 다양한 정보제공을 목적으로 인천광역시에서 주 2회 발행(화,목)하고 있으며, 시민기자들이 시민을 대표해서 신문제작과 구성에 참여하고 온라인을 통해서만 배포되는 사이버 매체입니다. 계재된 내용은 필자 개인의 견해이며 신문에 실린 사진은 허락을 받은 후 사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