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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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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 조개 찾아 들어온 섬, 제2 고향 됐다
영흥도 내7리 방개골 실향민 마을

인천에는 6.25 전쟁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온 피난민들이 많다. 특히 인천은 황해도와 가까워 황해도 실향민들이 많은 편이다. 이들은  인천에서 전쟁을 피한 후 다시 고향으로 가고자 했지만 돌아갈 수 없었다. 전쟁 후 남북은 분단이 됐고, 인천은 그들에게 제2의 고향으로 남았다.


▲내7리에 살고있는 실향민 어르신들

인천의 섬 영흥도는 실향민이 정착한 곳 중 하나다. 영흥도의 내7리, 외3리 등 바닷가 주변으로 실향민촌이 형성됐고 이곳에 실향민들이 많이 살았다.
20여 년 전만해도 실향민 1세대들 중 생존한 분들이 많았으나 지금은 그들 대부분이 목전에 고향을 두고 눈을 감았다. 내7리의 경우 전체 300여 주민 중 30, 40여 명 정도 거주한다.
영흥도에 정착한 실향민들은 대부분 황해도 옹진군 출신들이 많았다. 황해도 옹진군 바닷가에서 살던 이들은 전쟁의 소용돌이를 피해 남한으로 내려왔고 자신들이 살았던 고향산천과 비슷하고 일거리를 찾을 수 있던 영흥도를 선택해 들어왔다. 그들이 영흥도에 들어왔을 때만해도 이 섬은 아주 외진 곳이었다. 들어오기도 힘들지만 나가는 것도 수월치 않았다. 5,60년대 초창기 피난민들은 산속에 움막이나 흙집을 짓고 살았다. 삶은 곤궁했고 주거지는 형편이 없었다.

▲나길형 어르신

황해도 옹진군 용천면에서 내려왔다는 나길형(85)어르신은 영흥도에서 20여년을 넘게 살았다. 그는 18세 때 전쟁을 피해 어머니, 동생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왔다. 그는 백령도 8240유격대원으로 휴전협정을 맺기 전까지 3년간 북한군과의 전투에 참여했다. 그는 휴전협정 전 1953년 6월 옹진군 흑미면 만고지에서 북한군과 전투를 벌이다 다리, 허리 등에 총상을 입고 상이용사가 됐다. 전쟁의 상흔은 그대로 그의 몸에 박혀버렸다.
이춘구(85)어르신은 22세에 영흥도에 들어와 63년을 살고 있다. 그 역시 황해도 옹진군이 고향이다. 6.25 당시 백령도에 본부가 있었던 8240유격부대 출신으로 자유와 옹진 사수를 위해 북한군과 무수한 전투를 치른 경험을 갖고 있다. 그도 전쟁후 먹고 살기 위해 영흥도로 들어왔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갯벌에 나가 조개와 굴을 캤다. 항상 쪼그리고 굴과 조개를 캤기에 등은 굽고 다리는 틀어져 지금은 걷는 것도 힘들다. 이 어르신은 거동을 할 때 전동차를 타고 다닌다.


▲이춘구 어르신

박선애(85)어르신도 황해도 옹진군 용천면 출신이다. 용천면에서 피난을 나온 후 대청도, 소청도를 거쳐 22세때 영흥도로 들어왔다. 바다에 밥 먹을 게 많다는 이유였다. 박 어르신도 바다에서 평생을 살았다. 63년간을 갯벌에서 굴과 조개를 캐며 자식을 키우고 집을 늘리느라 평생을 허리한번 못 핀 삶이었다. 젊은 시절 고된 노동으로 어르신의 몸은 망가졌다. 다리도 아프고 허리수술도 여러 번 했다고 한다.





김광해 (72)어르신은 6세때 부모님을 따라 황해도 해주에서 피난을 나왔다. 해주앞에 소수압도에 잠시 살았고 다시 배를 타고 덕적도에서 1년을 산 뒤 8세때 영흥도로 들어왔다. 영흥도에서 초등학교를 다녔고 영흥사람이 됐다.
그는 당시 부모님들이 ‘도시에 나가면 도둑밖에 될게 없다’고 말했다고 회고한다. 전쟁으로 다 파괴되고 무너진 상태에서 도시에서 할 수 있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부모님과 함께 농사짓고 굴을 캐며 자식들을 키웠다.


▲황해도 옹진군 용천면 지도

영흥도 실향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5,60년대 만 해도 실향민들끼리 화합과 교류를 위해 동향 사람들끼리 모임이 자주 있었다. 그러나 1세대들이 돌아가시고 자식들 세대로 넘어오면서 모임이 잘 이뤄지지는 않고 있다. 어려운 처지의 실향민들끼리 돕자는 취지에서 친목계도 운영했다. 자식들 결혼때는 쌀을 모아서 잔치하는데 보탰고, 금반지계를 하며 집안의 큰일에 대비하기도 했다. 지금은 다 옛날일이 됐다.
황해도 실향민들이 영흥도에 정착한 이유는 이곳에 먹고살게 많아서였다. 지금도 영흥도는 굴과 조개가 많이 채취되는 곳이다. 당시엔 갯벌에 나가면 바지락, 동죽, 백합 등의 귀한 조개들이 그냥 주워올 수 있을 정도로 많았고, 겨울에는 굴을 많이 캘 수 있었다. 어르신들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갯벌에 나가 돈을 벌어 자식을 키우고 생활을 했다. 하루에 30~50㎏씩 조개를 캐어 어촌계에 내다 팔아 돈을 만들었다. 곤궁했던 이들의 삶도 갯벌에서 건진 보석들과 노동으로 생활이 조금씩 나아졌다.




▲ 영흥도 내7리 마을 전경




나길형 어르신(85)은 나이가 들수록 고향에 가고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젊을때는 사느라 바빠 고향생각을 못하고 살았지만 조상들이 있는 고향에 가고 싶은 마음이 날이 갈수록 커진다고 한다.
영흥도에는 내7리 말고도 외3리에도 실향민들이 많이 산다. 예전에 비하면 숫자는 많이 줄었다. 돌아가신 분들이 많기 때문이고, 지금 남아있는 실향민들도 대부분 7,80대가 대부분이다. 영흥도에 실향민 마을이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섬이라는 제약 때문이다. 이곳 실향민들의 삶도 인천의 역사의 한 부분이다. 그들의 지나온 삶과 역사도 기록으로 남겨져야  한다. 피난민 세대들이 점점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글 이용남 ‘I-View’ 편집위원, 사진 홍승훈 자유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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