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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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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로 그리는 인천萬畵
철의 여인, 성수경 고미락 대표

▲커피로 그린 성수경 고미락 대표

‘여성들이 정말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마법을 쓰는 어둠의 기사에게 포로가 된 아서왕이 자신의 목숨과 맞바꿀 이 질문의 답을 찾아 1년을 헤맨 끝에, 늙은 마녀로부터 해답을 얻게 되는데 그것은 ‘여성자신의 삶을 여성자신이 주도하게 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아서왕의 전설을 빙자해 항간에서 꾸며낸 이야기겠지만, 실로 명쾌한 현답이 아닐 수 없다.
‘자기 주도적 삶’은 여성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너무도 당연한 권리이자 가치다. 그러나 오랜 세월 남성중심으로 이어져 온 관습과 편견은 이제껏 여성을 종속적 존재로 머물게 했던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간혹 그 고정관념을 뒤집은 여걸들의 이야기가 동서고금의 역사 속에서 반짝 회자되는 것도, 역설적으로는 남성지배체제의 당위성을 견고히 하기 위한 장치로서의 성격이 짙다.



버스 회사 대표서 구내식당 사장으로 끊없는 변신

“여자가 시내버스회사 대표를 한다고 하면 다들 신기한 눈으로 쳐다봐요. 그리고는 본래 갑부집 딸내미거나, 돈 많은 남편을 등에 업은 얼굴마담사장쯤 되는 걸로 넘겨짚곤 하죠. 물론 약간의 우연과 인연의 끈이 없었다고 할 순 없지만, 거칠기로 소문난 시내버스 운수업계에 맨손으로 뛰어들어 대표직까지 올랐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도, 여전히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분위기가 은연중에 있더라고요. 자금문제며 직원관리보다 그 편견의 벽 앞에서 힘겨울 때가 훨씬 많았죠.”
얼마 전까지 운영해오던 인천시내버스 회사인 ㈜대인교통의 대표직을 내려놓고, 송도 트리플스트리트 지하에 ‘고미락’이라는 구내식당을 오픈, 요식업에 뛰어 든 성수경 ‘고미락푸드’ 대표(47세)를 만났다. 삶을 주체적으로 개척해왔노라 자타가 공인하는 그녀는, 인천시내버스운수업계에서 ‘철의 여인’으로 통하는 유명인사다. 말이 쉽지, 거기까지 이어진 가시밭길이 얼마나 파란만장했을지는 듣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이 간다.
“인간의 삶에서 ‘밥’은 굉장히 중요한 개념이죠. 친밀함의 정도도 함께 밥을 먹는 횟수가 쌓이면서 점점 두터워지는 거잖아요? 오죽하면 ‘식구(食口)’라는 우리말이 생겨났을까요? 그것은 ‘혈연’보다 훨씬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어요. 인연이란 것도 결국 ‘함께 밥을 먹는 관계’에서 출발하는 거죠. ‘고미락(高味樂)’도 그런 철학의 연장선에서 오픈했어요. 고귀한 인연들과 맛있는 식사를 나누면서 즐겁게 살자는 게 ‘고미락’의 목표예요. 최고의 고급음식점이 즐비한 송도 한복판에 한 끼 4,500원의 구내식당을 연 이유죠. 돈벌이가 목적이었다면 고급레스토랑을 차렸을 거예요.”
충남 연기군에서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단다. 거기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는 대전에서 대전여상을 다녔다. 대전여상 3학년 때인 1987년 7월부터 한국조폐공사에 취업이 되어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당시 조폐공사는 화폐종이를 만드는 부여창, 천원권과 여권, 우표 등을 찍는 대전창, 주화와 만원권을 제조하는 경산창으로 나뉘어 있었다.


▲성수경 대표와 가족들

“제가 근무하던 대전창은 나중에 옥천창으로 이전했는데, 돈을 만드는 곳답게, 회사규율이 군대 같았죠. 정문 경비서부터 실탄을 장착한 총을 들고 근무를 서는 가하면, 출근하면 퇴근 때까지 외출은 물론 면회도 금지였어요. 사람손이 묻지 않은 빳빳한 현금으로 월급을 직접 받았죠. 거칠 것 없던 좋은 시절이었지만, 세상과 제 삶에 대한 생각이 너무 많았었던 거 같아요. 그래서 휴식시간이나 기숙사에서 직장동료들이 주로 여성지나 샘터 등의 잡지를 뒤적이는 동안, 저는 매일 일간신문을 꼼꼼히 훑고 시사지나 전집류 등의 책들을 즐겨 보곤 했죠. 퇴근 후에도 혼자 영화관람을 하거나 무언가를 배우러 다니느라 바빴어요. 회사에서도 제 의사를 분명하게 밝히는 똑순이로 소문이 났고요. 그런 모습이 저를 ‘쎄’보이게 했나 봐요.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노동조합 왕언니가 저를 ‘조폐공사노보기자’로 명단에 올리는 바람에 졸지에 팔자에도 없는 ‘노보기자가’ 된 거예요. 마침 친오빠도 조폐공사에 근무하던 터라 혹 문제가 될까봐 조심스러웠지만, 이미 꽁무니를 빼기엔 늦었더라고요. 일주일에 2시간씩 근무를 빼고 편집회의에 참석하곤 했죠.”
그러다 결국 문제가 터졌단다. 편집회의 때 편집장이 기자들이 쓸 기사주제를 미리 몇 꼭지 뽑아 와 선택하게 했는데, 선배들이 먼저 만만한 것들을 골라가고 남은 게 하필 ‘임금인상과 사내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것이었다. 노보가 나가고 회사가 발칵 뒤집혔다. 그녀 대신 애꿎은 오빠가 위에 불려가 곤욕을 치러야 했다. 그녀의 ‘노보기자생활’은 기사 3꼭지 쓰고 그렇게 끝이 났다. 그녀의 오빠는 조폐공사 역대최고매출을 올린, ‘골드바’사업을 주도했던 분으로, 조폐공사사업이사로 얼마 전 퇴직했단다.
“저는 평소 ‘원효 같은 남자와 결혼해 설총 같은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게 꿈’이라고 주위에 농 반 진 반 천명하고 다녔어요. 스스로 원효에 근접하지 않은 남자는 얼씬도 말라고 방어벽을 쳤던 거죠. 그만큼 거침이 없었어요. 화장도 않고 청바지 하나 걸치고도 언제나 당당했죠. 그런 제가 꿈의 직장이라는 조폐공사도 미련 없이 내던지고 덜컥 결혼이라는 걸 한 거예요. 나이도 7살이나 많은, 평범한 샐러리맨이었죠. 단짝 고교동창생의 결혼식 뒤풀이 장소에서 만났어요.”


‘꽃길’만 걸을 것 같았던 결혼…고난의 길로 이어져 
그녀의 결혼에 대한 궁금증은, 지금껏 ‘성수경 결혼미스테리’로 당시 직장동료들에게 회자되고 있을 정도란다. 그만큼 갑작스럽고 의외였단 얘기다. 그렇게 그녀는 1991년 11월, 23살의 어린 나이에 결혼을 했다. 친자매 같던 올케언니가 더 아쉬워했다.
“정말 결혼은 현실이라는 말이 실감나더라고요. 연애시절 순박하기 이를 데 없던 착한 남편은, 막상 결혼을 하고 나니 변하기 시작했어요. 남편의 월급통장은 고스란히 시어머니 주머니로 들어 가버리고, 생활은 해야 하는데, 수중에 단돈 천 원짜리 한 장 없을 때가 많았죠. 거기다 하루가 멀다 않고 만취해 들어온 남편은 끔찍한 술주정에 폭력까지 가리지 않았어요. 큰 아이가 3살 되던 해에 결심을 했죠. 애를 향해 남편이 던진 재떨이가 벽에 부딪쳐 산산조각이 나던 밤이었어요. 독해져야겠구나, 이 아이가 다치거나 죽지 않게 지켜내려면 변하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이를 악물었죠. 남편을 변화시켜보려고 노력하지 않았던 건 아니에요. 끝내 질병으로 이해하기로 했어요. 미움도 미련도 그때 접었죠. 그리고 최후통첩을 했어요. 10년 간 기회를 주마, 그때도 스스로 그 질병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면 어떻게든 당신과 이혼하겠다고요. 그리고는 하루하루 전쟁에 돌입했죠.”


시어머니에게서 남편의 월급통장을 찾아오는데 만 꼬박 반년이 걸렸다. 당시 시아버지는 산곡동에서 봉고차 7대로 마을버스를 운행하던 운수업자였다. 말이 운수회사지 기사월급도 제대로 못주던 빈 껍데기였다. 그나마 지분의 절반도 경남양산의 동업자 몫이었다. 그러니 돈 문제로 늘 동업자와 다툼이 끊이질 않았다. 그렇다고 회사를 처분해봐야 빚이 곱절인 판이니 진퇴양난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주먹구구식으로 회사를 운영하시는 시아버지로는 답이 안 나왔어요, 이러다 빚을 유산으로 물려받을 판이라며, 남편을 설득해 아버지 회사로 나가게 했죠. 저도 아이를 들쳐 업고 경리로 출근해 팔을 걷어붙였어요. 무분별한 지출을 차단하고, 3개월 치 회사 장부를 꼼꼼히 분석한 끝에 1년에 2차례씩 오르는 요금 인상분을 3년간 긴축하면 은행대출을 줄일 수 있겠다는 답을 찾았어요. 시아버지는, 공연히 잘 다니던 회사 사표내고 아들마저 껍데기뿐인 진창에 발을 담그게 했다며 원망의 화살을 퍼부어대셨죠. 하지만 저는 산곡동에 아파트단지가 계속 들어서고 인구가 느는 현 추세라면, 3년 안에 승부가 날 거라고 확신했어요.”


힘들고 어려운 일 정면 돌파하며 살아온 나날들
다시 완강하게 반대하는 시아버지를 설득해 광주은행에서 1억 대출을 받고, 친정에서 2천만 원을 빌려와 동업자의 지분도 인수했다. 골목이 많은 인천의 지리적 특성상 마을버스의 수요는 계속 늘 수밖에 없고, 가까운 전철역과의 연계성도 시내버스보다 유리할 거라는 그녀의 판단은 적중했다. 회사는 해가 갈수록 건실해졌다. 그 사이 크고 작은 문제해결에도 늘 그녀가 발 벗고 나서서 총대를 멨다. 그리고 정말 10년째 되던 해인 2002년 협의이혼을 했다. 두 딸의 양육권도 소송을 통해 그녀가 차지했다. 이혼을 하고서도 한동안은 시댁회사의 일을 계속 봐줘야 했단다. 그녀가 없으면 회사가 제대로 돌아기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혼과 함께 6-1번 노선 시내버스 3대의 지분을 인수했어요. 원래는 시댁에 할당된 몫이었는데, 시댁에서는 지금 회사만으로도 충분한데 구태여 시내버스에 또다시 목돈을 투자하는 모험을 원치 않았던 거죠. 그래서 제가 대신 인수할 수 있었어요. 그동안 모은 봉급과 여기저기서 끌어온 돈으로 인수한 3대의 버스는, 3년 뒤 20대로 늘어났고, 마침내 법인대표에까지 올랐죠. 걸핏하면 파업을 들고 나오는 60명의 기사들과 때론 타협하고, 때론 정면 돌파하는 전투를 치르면서도, 대표를 맡은 5년간 단 하루도 월급을 늦춘 적이 없어요. 쉼 없이 밀려드는 문제의 파도들 앞에 포기하지 않고, 내 의지로 여기까지 헤엄쳐 온 것에 당당한 자부심을 느껴요.”
그녀는 경인방송 방송위원으로, 송도포럼 총무로, 새로 시작한 ‘고미락사업’으로 여전히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단다. 신은 견딜 수 있을 만큼의 고난만을 허락한다고 했다던가? 설사 그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녀의 인생3막에는 오직 향긋한 꽃길만 펼쳐지기를 진심으로 바래본다. 


글. 커피그림 : 유사랑 I-View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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