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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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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로 그리는 인천 萬畵
평생 시대정신 꿈꿔온 시사만화가 박흥렬 화백


‘시사만화’란 얽히고설킨 시대현상들을 ‘만화’라는 우스개그림을 이용해 분석하고 비평하는 예술장르다. 흔히 ‘시사만평’, 혹은 줄여서 ‘만평’이라 부르기도 한다. 단 한 컷의 그림을 통해 정치권력이나 사회에 대해 정제된 비판과 풍자를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주 기능인 시사만화는, 전통적으로 ‘신문의 꽃’과 같은 존재로 대접받아왔다. 신문을 접했을 때 가장 먼저 독자의 눈길을 끄는 신문의 얼굴이면서도, 그날의 이슈와 복잡한 시사흐름을 한 방에 짚어주는 급소역할을 하는 까닭이다.


시민운동가이자 타고난 시사만화가
그러나 신문의 만평란을 차지해 시사문제를 그려냈다고 해서 무조건 시사만화로 대접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다. 그 속에 가슴 후련한 웃음의 미학과 경쾌한 해학이 양념처럼 버무려져 있어야 한다. ‘만화’라는 이름을 꼬리표에 달고 있는 이유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그 최종적인 지향점은 시대정신을 가리키고 있어야하는 것이 시사만화의 역할이다. 그래서 시사만화의 창작주체인 시사 만화가들은 운명적으로 시대불화에 시달리곤 한다. 오죽하면 신문편집자들조차 시사만화에 대한 몰이해를 드러내는 경우까지 왕왕 있을 정도니, 실로 시사만화가는 엄호사격도 없이 전장의 한 복판을 헤집는, 고독한 전사들인 셈이다.
“자칫 무거울 수 있는 ‘시사(時事)’라는 주체를 다루지만, 만화적 정체성을 잃어서는 안돼요. 점잖은 주류예술과는 선명하게 차별화된 ‘웃음코드’가 특징이란 얘기죠. 그러나 풍자와 해학이라는 시사만화의 핵심장치에 이미 대상을 희화화 시키고 비꼰다는 의미가 내포되어있는 건 맞지만, 자칫 작가의 개인감정표출이나 인신공격으로 비쳐져서는 곤란해요. 시사만화는 본질적으로 인간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전제로 성립 가능한 예술장르거든요.”



인천시청 앞 커피숍 2층에 위치한 ‘인천지속가능발전협의회’사무실에서 시사만화가 박흥렬 화백을 만났다. 사실 박흥렬 화백은 시사만화가면서도 ‘인천지속가능발전협의회’ 상임회장과 ‘가톨릭환경연대’ 대표를 함께 맡고 있는 시민운동가다. 어쩌면 그는 시사만화도 시민운동의 일환이거나, 아니면 시민운동을 시사만화의 궁극적 실현수단으로 인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분명한 건 그는 시민운동가이기 이전에 타고난 시사만화가라는 사실이다.
“마산에서 태어나 초, 중, 고등학교를 다녔어요. 학력고사1세대죠. 경상고등학교를 거쳐 1982년 고려대학교 철학과에 들어갔어요. 80년 광주민주화운동 열기가 여전히 시퍼렇던 시절이어서 캠퍼스는 날마다 시위로 어지러웠어요. 그 시대상황에서 학생운동에 휩쓸리는 건 너무도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죠. 2학년 때 입대를 해 85년 7월 제대했지만, 데모는 더 극렬해져 있었어요. 누구누구는 감옥에 가고, 또 누구누구는 학교에서 쫓겨나 노동운동에 투신하거나 시민운동가로 변신했죠. 그 참담하던 시절의 피 뜨거운 청춘들에게 다른 선택지란 없었어요. 하필 이런 시대에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태어난, 피할 수 없는 업보라 여겼죠.”
1989년 졸업과 동시에, 그도 노동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무작정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인천에 정착했다. 공사판을 돌며 노가다로 전전하다가, 이듬해 오래 사귀어 오던 부인과 덜컥 결혼을 하게 되었단다. 어찌어찌 부평에 신접살림을 차리고, 생활을 위해 부평부흥로터리 근처 입시학원에서 수학강사로 2년을 연명했다. 하지만 역시 자신에게 맞는 옷은 아니었다.


강화도에서 한때 농사 짓는 농부의 삶을 살다
“어려서부터 뭘 만들거나 그리는 데 손재주가 남달랐어요. 자의반 타의반으로 이곳저곳에서 그림실력을 발휘하곤 했는데, 우연히 ‘우리신학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천주교 주간잡지에 만평을 그려달라는 청탁이 왔어요. 그 인연이 계속 이어지더니, 1992년에는 인천일보에 시사만평을 그리는 화백으로 입사하게 되었죠. 얼결에 인천을 대표하는 정통일간신문에 본격적으로 시사만화를 연재하는 전문작가의 길로 들어선 거예요.”
그렇게 시작된 박 화백의 만평인생은 천주교 인천교구 주보의 ‘바울로 만평’을 비롯해, 평화신문, 가톨릭신문, 시민의 신문, 주간내일신문, 말誌 등 수많은 매체에 시사만화를 연재하면서 향기로운 꽃으로 피어났다.


3년 4월부터 무려 21년 9개월 동안 한주도 거르지 않고 연재를 이어온 ‘바울로 만평’은 천주교계 내에 신선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올해 초 총 1천140여 편의 작품 중 200편을 따로 뽑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버리지 않는 까닭’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펴내고 전시회도 했다. 그가 그려낸 인천을 소개한 단행본, ‘니들이 인천을 알아?’나 ‘만화인천史’는 10만부 이상을 찍어도 금세 동이 날만큼 지금껏 인천시민들의 사랑을 받아오고 있다.
“본격 인터넷시대가 열리고 인천일보도 조간신문 체제로 바뀌면서, 재택근무가 가능해지게 되자 2000년 강화도로 이사를 감행했어요. 배나무가 200그루나 되는 과수원을 사서 농부로 변신을 시도했죠. 농사일에 대해 전혀 모르면서도 귀농은 저희 부부의 오랜 꿈이었거든요. 제게 그 과수원을 판 아저씨가, ‘배농사는 일도 많이 없고 열매가 열리면 얼마나 재밌는지 모른다’는 거예요. 그 말을 철썩 같이 믿었는데, 막상 일에 치여 죽는 줄 알았어요. 나무도 체계적으로 재배한 게 아니라 자연스레 자라난 방사형이라 더 힘들었죠. 내막을 알고 보니, 농사일에 대해서는 백전노장이라 할 그 아저씨도 배농사 짓다 목 디스크가 오는 바람에 제게 넘긴 거더라고요.”
이듬해부터는 인천일보 화백도 그만두고 꼬박 10년을 배농사에 매달렸다. 봄이 채 시작되기도 전인 2월부터 ‘유황합제(유황소독제를 만들어 살포하는 일)’를 시작으로 가지에 새 순이 올라오면 가지치기, 순치기, 유인작업, 꽃이 피기시작하면 그 많은 꽃들 하나하나 솎아내기, 열매가 달리기 시작하면 열매 솎아내기, 커지면 봉지 씌우기, 농약 안 치고  막걸리에 식초와 목초액을 섞어 미생물 제재(製劑)하기, 그렇게 일 년 내내 아침에 눈 뜨면 저녁 해거름까지 제대로 쉴 틈이 없을 정도로 허리가 부러지도록 일만 했다. 겨우 수확을 하게 되니 이번에는 판로가 문제더란다.



"오죽하면 봄이 오는 게 두려울 정도였어요. 그런데 노동이란 게 참 신기하죠? 그 죽을 고생을 사서하면서도 흙을 밟고 땅을 일구어 수확하는 기쁨이, 과일은 물론 제 자신까지 한 인간으로 숙성시켜 준다는 걸 어느 순간 깨달은 거예요. 죽을힘을 다해 매달린 노동의 끝자락에서 건져 올린 그때의 벅찬 감동은, 금방 죽을 것 같던 노동의 압박에서 저를 얼마간 해방시켜 줬어요. 적어도 심리적인 차원에서는 그랬다는 거죠. 그 깨달음의 감동을 조금이라도 나누기 위해 지인들에게 배나무를 한그루씩 분양하는 사업을 시작했어요. 물론 그래도 90%의 일은 여전히 제 몫이었지만, 열매솎기, 봉지 씌우기, 수확하기 등을 함께 하면서 나무를 키워내는 어려움과 배꽃 흐드러진 봄밤의 정취를 지인들과 나눌 수 있어 얼마나 행복했는지 몰라요.”
배농사를 짓는 와중에도 2001년부터 2002년까지 2년여에 걸쳐 강화도 하점면 이강리에 자신의 집, 본채(27평)와 사랑채(7평), 다락과 온실 등을 기초부터 손수 지어나갔단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인천시인터넷신문 I-View’에 ‘내손으로 집짓기’란 코너를 연재하는가하면, 강화군 소식지에는 ‘만화로 보는 강화인물 이야기’를 10년째 연재해오고 있는 중이란다.


시사만화는 IT시대와 궁합이 잘 맞는 장르
“‘가톨릭환경연대’ 대표와 ‘인천지속가능발전협의회’ 상임대표를 맡게 되면서 이제 배농사일은 접었어요. 인천지속가능발전협의회는 시에서 예산을 대고 운영은 시민단체가 맡는 거버넌스 기구예요. 1992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180개국 정상과 NGO들이 모여 ‘지속가능발전추구’선언이라는 걸 했는데, 우리세대를 위해 미래세대가 사용할 자원을 고갈시키거나, 미래세대에게 위험을 전가하는 일을 방지하고 관리하자는 내용이 골자였죠. 그 ‘아젠다21’을 수행하기 위한 기구가 각 나라마다 도시별로 설치되기 시작했는데 우리나라도 ‘지속가능발전법’이 통과되면서 96년 부산에 이어, 2000년 인천에도 8명의 상근직원을 둔 조직으로 출발했어요.”





유럽에서는 1830년경 ‘시민왕 필립’을 서양배의 모습으로 조롱한 캐리커처가 시사만화의 효시였고,  우리나라에서는 1909년 6월 2일 대한민보 창간호에 그린 이도영화백의 한 컷짜리 만평을 그 시작으로 꼽고 있다. 신문과 함께 태동하고 발전해온 우리 시사만화는, 일제강점기와 군사독재시절을 거치며 민중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쳐 왔지만, 신문의 생태환경이 급속히 바뀌면서 부침과 변화의 시기를 맞고 있다.
“언론환경의 변화가 결코 시사만화의 퇴조를 불러오지는 않을 거라고 확신해요. 시사만화만큼 IT시대와 궁합이 잘 맞는 장르도 없을 뿐더러, 어떤 형식으로든 시사만화를 소비하기를 원하는 민중들의 수요가 절대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요. 저도 끊임없이 시대정신을 나침반 삼아 어디서든, 어떤 모양으로든 계속해서 시사만화를 그려 나갈 겁니다.”
시사만화를 그리면서 세상사는 법을 배웠고 흙을 일구면서 그 깊이를 더 했다는, 이 우직한 사내가 일궈냈을 배 밭이 인터뷰 내내 기자의 머릿속에 생생했다, 이제는 모두 베어지고 없을, 그래도 봄이면 다시 배꽃 휘황하게 빛날 것 같은.



글. 커피그림 : 유사랑 I-View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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