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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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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로 그리는 인천萬畵
인생이 나를 희곡으로 이끌었다, 고동희 극작가


인구 300만의 거대도시 인천의 ‘연극예술지수’는 도시규모에 비해 척박한 게 현실이다. 특히 극작가는 손으로 꼽기조차 민망할 정도다. 그런 까닭에 창작극 한편 무대에 올리려면 중앙이나 외부작가의 손을 빌리는 것이 당연시되곤 했다. 그런 상황을 보다 못해, 자의반 타의반으로 배고픈 인천연극판에 뛰어들어 22년간 십여 편이 넘는 굵직한 희곡을 써내며 극작가로 살고 있는 이가 있다. ‘극단 십년후’와 인천시립극단의 기획실장을 역임한 고동희 작가(51세)가 바로 그 사람이다. 아직도 때 묻지 않은 소년의 미소를 만면에 머금고 약속장소에 나타난 고작가는, 사실 연극은 피할 수 없는 악연 같은 거였다며 말문을 열었다.


대학 국문과 연극무대서 주인공 맡은 후 인생 바뀌어
“대학에 처음 들어가 얼떨결에 국문과 연극무대서 주인공을 맡은 적이 있어요. 그때 힘들었던 기억이 뇌리에 어찌나 생생하게 박혔던지, 다시는 연극 따위 돌아보지 않겠노라 혼자 속다짐을 했죠. 그런데 인생이란 게 참 짓궂더라고요. 피하고 싶은 일일수록 교묘히 엮여 기어이 발목을 잡고 말거든요.”
충북 단양이 고향이란다. 구인사에서 불과 15분밖에 떨어지지 않은, 그야말로 하늘아래 첫 동네였던 고향마을은 집 앞 언덕배기의 밭고랑을 경계로 충청도와 강원도가 나뉘는 곳이었다. 그래서 초등학교는 단양에서 마쳤지만, 중학교는 강원도 영월의 연당중학교를 다녔단다. 그리고 고등학교는 다시 충청도의 제천고등학교로 진학했으니, 충청도와 강원도를 넘나들며 학창시절을 마친 셈이다.
“농사꾼이던 아버님은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중풍으로 쓰러진 후 거동이 불편하셨어요. 5남매의 넷째이자 맏아들인 제 앞날이 걱정이셨던지, 공고진학을 권유하셨죠. 당시 금오공고나 수도공고가 범국가적으로 인기를 끌던 시절이었어요. 중학교 때 제법 공부께나 한다고 소문난 아들 실력을 과신하셨던 거죠. 하지만 제 고집대로 결국 인문계 학교를 택하게 되었어요. 그렇다고 딱히 대학진학을 염두에 두었던 것도 아니에요. 3년 내내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대입수험공부 대신 학교도서관에서 빌려온 문학전집을 섭렵하는 데 몰두했으니까요. 당연히 성적은 곤두박질쳤고, 대학입시에 낙방을 했죠.”


 


‘당장 가방 싸!’, 정작 대학에 떨어진 고 작가는 무덤덤한 반면, 아버님은 충격을 받으셨는지 서울 큰누나에게 올려 보내 재수를 명하셨다. 새벽 5시, 학원 문이 채 열리기도 전에 도착해 밤 12시에야 집으로 되돌아오는 생활을 1년간 지속한 끝에, 국민대 국어국문과를 차석으로 합격할 수 있었단다.
“왜 하필 장래성이 없는 국문과냐며 아버님은 또 역정을 내셨지만, 무작정 문학을 동경해 문학책만 파고 살던 제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죠. 초, 중, 고 12년 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자전거로 1시간이나 걸리는 거리를 통학하면서도, 단 한 차례도 결석이나 조퇴를 한 적이 없었어요. 성실했다기보다, 규범적 테두리를 벗어나볼 엄두조차 못 냈던 거죠. 그런데 대학은 달랐어요. 거의 매일 데모를 하는 바람에, 걸핏하면 휴강이다 뭐다 땡땡이를 밥 먹듯 했죠. 국문과 문예창작 서클에 들어가 활동했는데, 반 강제로 국문과 연극발표회의 남자주인공으로 발탁되었어요. 선배들이 모두 꽁무니를 빼는 바람에 신입생인 제가 엉겁결에 등 떠밀린 거죠.”


▲고동희 작가가 쓴 ‘성냥공장 아가씨’ 공연장면

몸무게가 8kg이나 빠질 정도로 생고생을 했단다. 여름방학 때 시골도 못 내려가고 거의 100일 동안, 무덥고 칙칙한 연습실에 붙들려 억지로 대사를 외우고 연기를 연습하는 일은 고행이고 고역이었다. 더구나 제일 막내라 그 와중에도 선배들 뒤치다꺼리까지 도맡아야 했으니 미칠 지경이었단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 소극장이 대학로와 신촌 연대입구 몇 군데뿐이던 시절이었는데, 제 공연을 보고 신촌의 한 극단선배로부터 스카우트 제의가 왔어요. 다시 연극을 하면 성을 갈겠노라, 공언까지 했던 터라 뒤도 안돌아보고 거절했죠. 그 후로도 2~3차례 입단권유가 왔지만 완강하게 잘랐어요. 영혼의 마지막 진액까지 다 쏟아 부어야 비로소 예술이 되는, 연극의 고단함을 그때 이미 간파했던 거죠.”


▲고동희 작 ‘아주 특별한 그녀

‘인천시민의 신문’ 창간멤버 활동 후 인천사람 돼
총학생회 대의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단다. 총학회장 탄핵을 준비하는 도중에 마침 6.10 민주항쟁이 터졌고, 개인비리로 탄핵대상이던 총학회장은 물, 불 안 가리고 투쟁대열에 앞장서면서 오히려 열혈민주투사로 뒤바뀌는 코미디 같은 일화도 있었단다. 그렇게 대학을 졸업하고 25살 늦은 나이에 군대를 다녀왔다.
“제대하고 ‘나라사랑’이라는 월간지 기자로 취직을 했어요. 2년간 주로 국회의원과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인터뷰기사를 썼죠. 신념과 실제행동이 따로 노는 그들을, 그럴 듯하게 포장해줘야 하는 일이 지겨워 결국 사표를 냈어요. 마침 문민정부와 함께 본격지방자치가 실시되고, 시민운동도 활발해지면서 인천경실련에서 발행하는 ‘인천시민의 신문’ 창간멤버로 합류했죠. 인천사람이 된 거예요. 하지만 다시 2년 만에 재정난으로 신문이 폐간되면서, ‘극단 십년후’의 기획실장으로 자리를 옮겼어요. 최원영 대표님과의 인연이 크게 작용했죠.
처음에는 기획과 서포트 일만 했는데, 한번은 대본을 써주던 극작가가 지방으로 가버렸어요. 극단 재정형편상 다른 작가를 쓰기에는 작품료가 부담인 상황이었죠. 그래서 직접 극본을 써보기로 대표님과 의기투합했어요.”
그렇게 연극과의 인연이 이어진 지 벌써 22년째란다. ‘성냥공장 아가씨’,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 어머니’, ‘소문’, ‘화’, ‘화장터 이야기’, ‘청자, 물을 만나다’, ‘박달나무 정원’ 등 수많은 창작희곡을 썼고 두 편의 희곡집도 펴냈다. 2002년엔 지역공연계의 우려와는 달리, ‘삼신할머니와 일곱 아이들’이라는 가족뮤지컬을 무대에 올려 마지막 날 ‘만석’을 기록하는 쾌거도 맛보았고, 2008년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 어머니’라는 작품으로 전국연극제 ‘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 고동희 작 ‘소문’ 공연장면



“2004년부터 3년간 인천시립극단 기획실장, 2014년부터 올해 3월까지 부평문화재단 문화사업 본부장을 맡아 두 차례의 외도도 경험했어요. 생활 때문이었죠. 하지만 무엇보다 적지 않은 작품을 쓰고 그것들이 모두 실제 무대에서 재현되었다는 사실은, 글을 쓰는 작가로써 엄청난 행운이자 호사가 아닐 수 없죠. ‘극단 십년후’와 인천연극판에 무한한 고마움과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어요.”


‘인천가치와 문화담긴 공연콘텐츠 시놉시스 공모전’ 당선
요즘 고작가는 올해 5월, 인천시와 시문화재단이 공동으로 공모한 ‘인천의 가치와 문화가 담긴 공연콘텐츠 시놉시스 공모전’에 당선되어 ‘인천대중음악과 음악인들의 이야기’를 다룬 음악극 구상에 골몰해있다.
“대중음악은 인천의 귀중한 문화자산이죠. 처음 부평미군부대를 통해 팝과 재즈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무대와 일거리는 넘쳐났고, 연주자들의 연주솜씨도 최고였죠. 그래서 중앙의 음악인들처럼 구태여 음반 같은 걸 만들 필요도 느끼지 못했는데, TV가 생겨나고 방송이 시작되면서 점점 주변으로 밀려나 퇴조하고 말았어요. 어렵사리 성공한 인천출신 음악가들조차 과거 인천에서의 활동이력을 구태여 밝히기를 꺼려하는 지경이 된 거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어요.”
슬하에 아들 둘을 둔 고작가는 큰 아이가 아비 뒤를 이어 서울예대 극작과에 재학 중이라며 웃었다. 가난한 극작가 아비로 인해 가족들이 많은 것을 희생하며 살아온 사실을 옆에서 경험하고 지켜봐왔으면서도, 굳이 극작과를 선택해준 큰 아이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이 뒤엉킨 웃음이었다.




▲  고동희 작 '청자물을 만나다'


“연극은 하나의 약속이에요. 배우와 스텝, 그리고 관객 사이에서 은연중에 이루어지는 수천 개의 약속들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들어가며 감정과 호흡을 공유하는 작업인 거죠. 극본은 그 약속이 처음 시작되는 지점이고요. 무대와 극단, 배우의 상황에 따라 무수히 시작지점을 재설정해야하는, 고도의 계산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란 얘기죠. 그래서 무대에서 한편의 연극이 실연된 이후에라야 극본은 비로소 완성되어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모른다. 붉은 손바닥뿐인 허허로운 인생이 그를 끝내 연극판으로 이끈 것인지, 아니면 피하고 싶었다던, 날카로운 시절의 첫 경험이 연극에 인생을 몰빵하도록 그 자신을 내몬 것인지. 분명한 것은 그에게 이미 연극과 인생은 하나라는 사실이다.



글, 커피그림 : 유사랑 I-View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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