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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17-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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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교학생들이 졸업사진 찍었던 장소는?
1965년 중산학교 앨범 통해 본 인천풍경

 

             
인천화교중산중·소학교(仁川華僑中山中·小學校)는 1901년 인천중화상무 총회(현 인천화교협회) 건물의 창고 한 칸을 내어 사숙((私塾) 형태로 시작하였다. 초등학교 과정인 소학교로 시작했으며 학교 이름을 ‘인천화교소학’로 불렀다. 이것이 한국화교 학교의 시작이다. 창립 당시 학제는 7년이었으나 1923년 학생 수가 계속 늘어나자 현재 북성동 화교학교 자리에 교실 3칸을 지었고 이때 학제를 6년으로 변경했다.

▲1965년 당시 인천중산학교 학교 풍경

학교는 화교 사회의 번성과 침체에 따라 그 학생 수가 증감했다. 인천의 화교들은 북성동 주변에 모여 살다가 점차 주안, 용현동, 부평 등으로 퍼져 나갔다. 그곳에도 작은 화교사회가 형성되면서 학교가 세워졌다. 1946년에 주안분교, 1951년에 용현분교와 부평분교가 설립되었다. 그곳 분교에서 3학년까지 마치고 4학년 과정부터는 북성동 본교로 와서 공부했다. 그밖에 수원, 평택 등에서 유학을 오는 학생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을 위해 올림포스 호텔 밑에 있던 영미연초회사(Chemulpo Tabacco Co.)가 있던 건물을 학교 기숙사로 사용했다.





1964년 9월 1일 정식으로 고등부 과정이 생김으로써 인천화교 중산학교는 비로소 완전한 초·중·고의 체계를 갖추게 됐다. 1970년대 초·중·고 전교생은 1,500여명에 이르렀다. 농구 코트 두개 크기의 운동장에 함께 모이면 말 그대로 ‘바글바글’ 했다. 예전에는 소학교 교장, 중고등학교 교장이 따로 있을 만큼 학교 규모가 컸다. 지금은 유치원, 초등학교, 중․고등학교까지 합친 전교생이래야 300여명에 불과하다.


▲1946년 중산학교 주안분교 사진

1965년 졸업앨범을 통해 당시 학교 분위기는 물론 주변 화교 사회를 엿볼 수 있다. 지금은 사라진 학교 주변의 중국식 건물이 많이 보인다. 교내의 부흥당 건물은 지금도 건재하지만 나머지 교사는 다 사라졌다. 계단으로 이어진 정문의 모습은 지금과 아주 흡사하다.
졸업 앨범 촬영 단골 장소는 학교 뒤에 있는 자유공원이다. 특히 1957년 9월 15일에 건립된 맥아더 장군 동상 앞은 인기가 좋은 기념촬영 포인트였다. 자유공원을 품고 있는 산의 정식 이름은 응봉산이다. 앨범에는 ‘북산(北山)’이라고 표기돼 있다. 맥아더는 ‘맥수(麥帥 ․ 맥아더 원수)’라고 불렸다.

▲숭의동에서 화교가 운영했던 농기구와 난로 등을 만들어 팔던 만화주물 광고

소풍은 서울 도봉산으로 다녀왔다. 아마도 인천역에서 기차를 타고 갔을 것이다. 제2회 경기도내 무용콩쿨대회에 참가해 1등상을 받은 모습도 담겨 있다.      
앨범 뒤편에는 졸업생 명부가 수록돼 있다. 중국 본적과 현 주소지가 게재돼 있다. 대부분 인천이지만 서울(한성)을 물론 충남, 부산의 주소지가 눈에 띤다. 부록으로 앨범 제작에 협조한 화교 점포들의 명단이 수록되었다. 평화각,  신생반점 등 주로 중국요리집이지만 도화동의 익생춘한의원, 숭의동에서 농기구와 난로, 솥 등을 만들어 판 만화주물 그리고 사진관, 잡화점, 소금가게 등의 점포가 광고식으로 편집돼  있다.  



글 유동현 ‘굿모닝인천’ 편집장,  사진 1965년도 인천화교학교 졸업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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