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 주요메뉴 | 서브메뉴 | 본문 | 하단


사람과 사람
  • 인천인의 삶
  • 차한잔의 대화(인터뷰)
  • 칼럼

> 기사열람

기사열람

섹션
사람과 사람 > 차한잔의 대화(인터뷰)
등록일
2017-06-13
작성자
무단 전재 및 재편집 금지
다운로드
 
커피로 그리는 인천萬畵
청량산의 몽마르트를 꿈꾸는 도예작가 고선희


그녀는 좀 엉뚱하다. 분명 마더 테레사 코스프레는 아닐 텐데 욕심이나 계산 따위완 담을 쌓고 산다. 팔을 걷어붙이고 일할 때는 억척아줌마 저리가란데 평소엔 세상물정모르는 여리디 여린 사춘기소녀 같다. 만드는 작품들도 죄다 돈벌이완 무관하다. 무려 7년에 걸쳐 새 1004 마리를 빚어 울타리마다 빙 둘러 도자기솟대로 세워두는가 하면, 울퉁불퉁한 바윗덩이를 꼭 닮은 독특한 발상의 화병이나 제멋대로 이긴 투박한 찻잔, 거친 고목나무 거죽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은 소반 따위가 대부분이다.


작업공간을 나누고, 함께하는 아티스트
하나하나 뜯어보면 저마다 신선하고 작가적 영감이 넘치는 실험성 짙은 작품들이긴 하지만, 뺀질뺀질하고 미끈한 그릇들을 선호하는 대중의 기호와는 한참 동떨어져 있다. 이렇듯 상업성을 철저히 외면한 까닭에 그녀는 배고프다. 그래서 호구지책으로 청량산 밑의 작업공간을 카페로 바꿔 커피를 판다. 새에 꽂힌 그녀는, 새 모양의 빵틀도 제작해 새 빵을 커피와 함께 팔아보기도 하지만, 전혀 돈이 되는 눈치는 아니다. 그래도 그녀는 우직하다. 예술인들을 불러 모아 음악회도 열고 작품발표회를 갖는가하면, 무료야외결혼식장으로 개방하기도 한다. 청량산 기슭을 프랑스의 몽마르트르 언덕에 버금가는 문화예술명소로 꾸미고 싶은 당찬 꿈을 향해 날마다 꼼지락꼼지락 행보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언뜻 느리고 답답하고 무모해보이지만, 문득 망태기에 흙을 퍼 날라 태산을 옮겼다는 ‘우공이산’의 지혜가 저런 게 아닐까 싶어 숙연한 심정이 들기도 한다. 청량산 밑 영일정씨 제실 앞에서 인천여성의광장으로 이어지는 이면도로 중간쯤에 ‘돌심방’이라는 도자기공방 겸 ‘숲섬카페’가 자리하고 있다. 그곳 주인장 도예작가 고선희(59세)씨 얘기다.


“이곳 청량산 주변은 문화예술 공간으로 꾸미기에 더 없이 좋은 지리적, 환경적 조건을 갖추고 있어요. 통째로 공원화가 가능한 아담한 산세를 배경으로, 고려 공민왕 때 왕사였던 나옹화상이 640년 전에 개창한 흥륜사와 우리민족의 상흔이 깃든 인천상륙작전기념관, 그리고 인천의 역사가 집약된 시립박물관 등의 볼거리가 이어져 있어요. 이런 둘레길 코스에 각종 미술관과 예술체험공방을 만들고, 특색 있는 먹거리 식당과 카페를 조성한다면 세계의 배낭여행객들을 불러 모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해요. 범의 형상을 닮았다는 범바위, 병풍처럼 둘러진 병풍바위, 일제가 포격훈련을 했다는 포망골 같은 청량산 스토리텔링을 이용해 사찰스테이나 한옥스테이프로그램들을 무궁무진 개발할 수도 있어요. 그러려면 먼저 그런 꿈을 가진 다양한 문화예술인들이 청량산 기슭으로 모여들게 만들어야 해요. 시나 구에서 장기 프로젝트 청사진을 만들어 정책적으로 유도하는 것도 한 방법이겠죠. 아예 예술창작인촌을 조성하는 것도 좋고요. 공항도 지척이고 인근 송도신도시와 연계해 시너지 효과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청량산 몽마르트르 프로젝트’를 설명하는 그녀의 눈이 반짝인다. 실제 간단한 기획서를 만들어 전, 현직 구청장을 찾아보기도 했단다. 하지만 방대한 예산부담 탓인지, 환경파괴우려 때문인지 그녀의 ‘청량산 몽마르트르 프로젝트’ 이야기는 지금껏 감감무소식이다.


대학에서 도예와 첫 만남… 흙을 만질 때는 편안해
“서울에서 태어났어요. 월남파병 십자성부대 육군 장교출신 아버지는 집에서는 엄하고 권위적인, 전형적 가부장이셨죠. 부하들한테만은 자상하고 끔찍해서 걸핏하면 집으로 부대원들을 불러들여 회식을 하곤 하셨어요. 어머니는 음식 장만에 부대원들이 벗어놓은 단화도 손수 닦을 정도로 순종적이었죠. 매일아침 아버지 속옷까지 다려서 대령했어요. 그래도 저는 2남 1녀 고명딸로 귀염을 독차지하며 자랐죠. 어머니는 제가 주방근처엔 얼씬도 못하게 키우셨어요.”
그렇다고 행복했던 것만은 아니었단다. 군대 내무반과 별반 다름없는 상명하복식 가정 분위기에 늘 짓눌려 지냈고 무엇보다도 앞집이 보신탕집이었는데, 당시에는 개를 잡는 일이 흔했다. 목줄에 개를 매달아 몽둥이로 때려죽이는 장면을 직접 목격한 충격은 두고두고 그녀를 괴롭히는 트라우마가 되었다. 그 집 마당에 대롱대롱 걸린, 개를 매다는 링만 봐도 오금이 저리고 심장이 떨려 구역질이 났다. 그 집 앞을 지나쳐 오가는 매일이 지옥 같았다.


▲고선희 대표의 작품들

“신광여중 2학년 때였어요.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왔는데 늘 반겨주던 ’봉이‘라는 우리 집 강아지가 안 보이는 거예요. 쥐약을 잘못 먹고 죽었다고 어머니가 둘러 대셨지만 직감적으로 앞집에 팔려갔다는 사실을 알아챘죠. 끔찍했던 어릴 때 기억이 되살아나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어요. 어머니가 밉고 세상이 싫었어요. 말수가 적어지고 문득문득 우울증과 허무주의에 사로잡히기 시작한 게 그 무렵부터였나 봐요.”
예술적 재능은 중학교 때부터 싹수가 보였다. 크로키 연습을 한 스케치북이 키높이에 달할 만큼 그림을 파고 살았다. 미술부선생님도 부모님을 불러 예고진학을 권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일언지하에 여자학교인 배화여고를 강요하셨다.
“배화여고시절은 그래도 나름 괜찮았어요. 유독 교정에 꽃이 많았죠. 책갈피에 꽃잎을 끼워 ‘압화(壓花)를 만드느라 수업종이 울린 것도 몰랐을 만큼 꽃에 빠져 지냈어요. 꽃에 애착이 갈수록 쉬이 떨어져 사그라지는 꽃잎들을 보면서 생명의 상실감에 가슴 저리기도 했죠. 압화도 그래서 하게 됐어요. 지금도 책장을 뒤지다보면 그 시절 꽃잎들이 쏟아지곤 해요.”
대학만큼은 꼭 예술대학을 가겠노라 우겼다. 성적도 그런대로 괜찮았고 미술학원 실기점수도 늘 A플러스가 나왔는데 1차에서 낙방을 했다. ‘재수는 절대불가’라는 아버지의 불호령에 2차인 성신여자사범대학(현 성신여대) 공예전공에 입학했다. 거기서 처음 도예와 만났다. 물론 도자기외에도 금속공예, 목공예, 판화와 염색까지 두루 공부했지만, 흙을 주물럭대면서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꼈다.




▲고선희대표의 작품들




“이제껏 막연히 저를 괴롭히던 제 감정의 정체가 우울증이라는 사실을 대학에 가서야 알았어요. 늘 죽음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는 날들이 늘어나면서 스스로 제 자신을 바꿔보려고 술도 마시고 미팅에도 열심히 나가봤죠. 늘 말이 없어 신비감 때문에 그랬는지, 여고 때부터 또래 남학생들이 저를 쫓아오는 일이 많았어요. 대학 때는 집에까지 들이대다가 아버지한테 혼쭐이 나는 경우도 여러 번이었죠. 그래서 부모님은 결혼을 서두르셨어요. 저는 결혼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성화에 떠밀려 대학4학년 때 미팅에서 만난 남자와 졸업하자마자 덜컥 결혼을 하게 됐죠.”
5살 위 남편은 자상하고 포용력 많고, 무엇보다 밝고 긍정적인 사람이었다. 첫아이 임신 중에 간경화로 쓰러진 아버지는, 고 대표가 아이를 출산하고 채 한 달도 안 돼 세상을 떠나셨다. 출산우울증을 미처 추스르기도 전에 검은 상복차림으로 아버지 산소 앞에서 다시 죽음을 떠올렸다. 둘째 딸이 태어나고 애 둘을 키우면서는 우울증이 더욱 깊어져 혼자 술로 견디는 날이 많아졌다. 남편은 남편대로 사업이 바빠 밤늦게 귀가하는 일이 잦았다. 점점 사는 일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이러다 큰일 나겠다 싶더라고요. 변화가 필요했어요. 그래서 대학원진학을 결심했죠. 모교 성신여대 조형대학원에 들어갔어요. 본격적으로 도자기 공부에만 매달렸죠. 1993년 졸업하고부터는 시간강사로 나섰어요. 가천길대, 공주교대, 성신여대, 인천대 등에서 12년 동안 강의했죠. 개인전도 열고 각종 전시회 참가도 열심히 했어요. 매회 기능경진대회 심사위원에 초빙되기도 했죠. 일부러 바쁘게 살았어요.”


십시일반 사재 털어 ‘돌심방’이라는 공방 설립
대학원 졸업하던 해에, 인천남동공단 부지를 분양받은 남편이 회사를 남동공단으로 이전하면서 그녀도 인천사람이 되었단다. 살집을 구하러 돌아다니는데 청량산이 한눈에 들어왔다. 당장 산 밑 아파트를 계약하고 작업실도 얻었다. 그곳이 아지트가 되어 작가들이 모여들었고, 십시일반 사재를 털어 지금 자리에 ‘돌심방’이라는 공방 겸 문화예술협동조합을 설립했다. 돌심방이라는 이름은 그녀가 키우던 떠돌이 유기견 돌이와 또 다른 암컷 유기견 심복이,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방울이라는 세 강아지의 앞 이름글자를 조합해 만든 단어란다.





“당시 돌이는 구타로 고환이 터져 생식불능이라는 수의사의 소견이 있었는데, 어느 날 기적적으로 방울이를 생산해냈어요. 그 질긴 생명력 앞에서 제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고 초라하게 느껴졌어요. 나도 모르게 펑펑 눈물을 쏟았죠. 이제껏 제가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었다고 믿었는데 실은 삶의 신비와 가치를, 그 강아지들이 제게 가르쳐 준 거였어요, 무슨 일이 닥쳐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삶을 살아내야 하는 분명한 이유도 그들이 깨닫게 해준 거죠. 평생 붙들고 살았던 우울증도, 항상 가슴 밑바닥 서늘했던 허무감도 그날 모두 털어낼 수 있었어요. 제가 ‘돌심방’이라는 이름을 결코 잊지 못하는 이유죠.”
그 세 마리 유기견들은 이제 이 세상에 없지만, 그녀는 여전히 청량산 아래 돌심방에 칩거해 그릇을 빚고 커피를 내리고 새 빵을 구우며 겸손한 하루를 살아내고 있다. 어쩌다 노래하는 가객(歌客)이라도 찾아오는 날이면, 종일 음악에 취해 만사휴업이다.
“흙의 주성분은 탄소죠. 인간도 스러지면 결국 남는 건 탄소뿐이에요. 사람이 흙으로 빚어졌다는 창조설화가 전혀 생뚱맞기만 한 게 아니라는 증거죠. 인간은 본래 한 줌 흙에 불과한 존재라는 걸 잊지 말라는 신의 경고라고나 할까요. 그래서 지금 이대로도 내 삶은 넉넉히 행복하다고, 진흙을 이겨 그릇을 빚을 때마다 다짐하고 또 다짐하죠.”


글. 커피그림 : 유사랑 I-View  기자



© 인터넷신문 incheon@news 는 시민의 알권리 충족과 다양한 정보제공을 목적으로 인천광역시에서 주 2회 발행(화,목)하고 있으며, 시민기자들이 시민을 대표해서 신문제작과 구성에 참여하고 온라인을 통해서만 배포되는 사이버 매체입니다. 계재된 내용은 필자 개인의 견해이며 신문에 실린 사진은 허락을 받은 후 사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