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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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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서 나온 100년전 십자가의 사연은?
청학동 외국인 묘지 이장… 선교사 랜디스 묘역서 수습

인천 개항기 시절, 외국인들이 물밀 듯이 들어오던 1914년. 당시 인천은 인구의 40%가 외국인이었다. 10명중에 4명은 외국인이었던 셈이니 그야말로 외국인들의 천국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청학동 외국인묘역에 있던 랜디스 무덤

인천에서 살며 자신들의 이상을 실천했던 외국인들. 그들 중 상당수는 인천에서 사망했다. 인천에 묻힌 그들은 죽은 후에도 인천과의 인연이 계속 이어졌다. 외국인들 중 몇몇은 인천에 자신의 삶에 관한 족적을 남겼다. 그들의 이야기는 1백년이 지난 지금에도 사람들의 입에서 회자될 정도로 인천과 깊은 관계를 형성했다.
인천시는 최근 외국인묘지 이전 사업에 따라 청학동 외국인 묘지를 인천가족공원내로 옮겼다. 외국인 묘지의 이전에 따라 인천에 묻힌 외국인들에 대한 관심이 모아졌다. 이중 가장 눈길을 끄는 사람은 미국에서 의료 선교사로 온 엘리 랜디스(Eli B. Landis, 한국명 ; 남득시, 1865~1898)다. 그의 무덤에서는 이번 이장과정에서 십자가 장신구가 발견됐고 이 유물은 인천시립박물관이 수습해 보관중이다.

▲랜디스 무덤서 수습된 십자가

랜디스의 무덤에서 나온 십자가 장신구는 청동제로 길이 8㎝, 폭 5㎝ 장신구 끝에 고리가 달린 묵주 형태였다. 청동으로 만든 십자가 앞면에는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가 조각되어 있으며 뒷면은 라틴어 명문(The Misericordia, 자비)이 새겨져 있었다.
엘리 랜디스는 미국에서 온 의료 선교사다. 그는  미국 펜실베니아주 랭카스터 출신으로 영국성공회 한국 선교 책임자인 코프(Charlew J. Corfe, 1943~1921)주교를 따라 1890년 제물포에 도착한 후 시약소(施藥所, 약국)를 열어 의료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개항장 제물포에서 의료선교사로서 그리고 한국학 연구자로서 8년간 인천에서 살면서 제물포 최초의 서양병원인 성누가병원을 지어 개항장 주민들에게 의료혜택을 베풀었다. 인천사람들은 그를 ‘藥大人’, 일본, 중국 등 동양인들은 ‘藥善施醫院’, 서양인들은 ‘리틀 닥터’라는 애칭으로 불리면서 존경했다. 그가 머물던 응봉산 자락은 ‘약대인산(약대이산)으로 불렀다.

▲인천가족공원내로 이전한 외국인 묘역

체구가 작아 리틀 닥터로 불린 랜디스는 한국말을 유창하게 잘 했다. 한문을 깨우쳤기에 한자문화권인 동아시아의 고전과 한국의 한문서적을 탐구했다. 그의 추모사를 보면 “그는 한국 한문학의 끈질긴 연구자이기도 했다. 수많은 저녁에 병원을 지나갈 때 우리는 그가 한국식으로 맹자 또는 논어를 읽는 소리를 들었다”라고 적고 있다. 그의 최후는 송림동 한옥에서 고아들과 살다가 병을 얻어 1898년 4월 사망했다. 그의 나이 젊디 젊은 33세(1865.12.18.~1898.4.16)였다.


랜디스 박사외에도 당시 인천에서 활발한 활동을 했던 인천해관의 우리탕, 세창양행의 헤르만 헨켈, 타운센드 상회의 월터 타운샌드 등도 묘지도 함께 이전했다.
시는 청학동 외국인 묘지를 인천가족공원으로 이장하면서 지난 22일 각 국대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합동안장식을 가졌다. 이 자리에는 스페인, 러시아, 영국, 이탈리아, 미국, 프랑스, 중국 등 7개국 주한 대사관 대사 및 관계자들이 함께했다.
이번 인천가족공원 외국인 특화묘역은 국내 지방정부 차원에서 마련한 첫 사례이다.


글 이용남 ‘I-View’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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