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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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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로 그리는 인천萬畵
한국 바둑계의 풍운아 서능욱 9단

▲커피로 그린 서능욱 9단

고대 중국에서는 ‘천문’이고 ‘철학’이었던 것이 한반도로 넘어 오면서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사대부가의 ‘신선놀음’이 되었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피 토하는 ‘승부’로 변했다는 바둑. 단순히 흑과 백이라는 지극히 간단한 규칙과 패턴으로 천변만화(千變萬化)의 깊이를 매순간 만들어 내고 허무는 바둑은, 기실 그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신비로운 게임이다. 그 법칙과 룰이 언제부터 만들어진 건지도 불가사의다. 까마득한 요순시절의 황제가 아들들의 어리석음을 교화하기 위해 가르쳤다는 전설만이 희미하게 전할 뿐이다. 단지 전원의 스위치를 켜고 끄는 ON, OFF라는 단순한 2진법 방식이 만들어내는, 현 IT시대의 아찔한 변화와 바둑은 어찌 보면 서로 지극히 닮은꼴이다.


조훈현, 서봉수 두 절대고수와 맞섰던 ‘넘버3’
한국프로바둑의 중흥은 천재 조훈현의 등장으로 시작되었다. 10살 어린나이에 일본으로 바둑유학을 떠나 13살에 입단을 하고, 병역을 위해 귀국한 조훈현은 단번에 국내 바둑타이틀을 휩쓸어 버렸다. 그나마 조훈현 9단의 독주를 간간히 막아서는 유일한 적수는 토종 된장바둑의 대명사 서봉수 9단뿐이었다. 돌부처라는 천재 이창호가 혜성처럼 등장해 그 ‘조서시대’를 평정하기까지 한국바둑은 오랫동안 조훈현과 서봉수라는 두 절대고수의 독무대였다. 이 ‘조서’의 철옹성에 가로막혀 마지막 고비에서 번번이 고배를 마셔야했던 비운의 ‘넘버쓰리’가 바로 오늘의 인터뷰주인공 서능욱 9단이다. 무려 13번이나 결승에 올랐지만 12번을 조훈현에게 막히고 어찌어찌 겨우 조훈현을 넘어서니 이번에는 이창호라는 태산이 나타나 가로막았다. 서능욱 9단은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바둑인생 40년 만에 기어코 ‘조서’의 벽을 허물고 타이틀을 차지해 만년 준우승의 한을 씻었다. 2011년 ‘대주배 프로시니어 최강전’ 결승대국에서, 흑을 쥔 서능욱 9단은 물러서지 않고 치고받는 난타전 끝에 대마의 숨통을 끊어 조훈현 9단을 무릎 꿇린 것이다. 2013년 대주배 결승에서는 서봉수 9단마저, 초반 크게 불리했던 바둑을 끈질기게 따라붙어 역전승으로 타이틀 2연패에 성공하는 기염을 토했다. 1천 만 원의 우승상금이 고스란히 술값으로 동이 났을 만큼 후련하고도 짜릿한 운명의 한판이었다. 13전 14기, 그 투혼의 승부사 서능욱9단을 인천 영종신도시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고 이맹회 회장의 어린 바둑사범 역할도
“사실 지천명을 넘기면서 우승에 대한 미련을 접었었죠. 승부를 위해 참았던 술도 다시 마시기 시작했어요. 마음을 비우고 오로지 승부를 즐겼죠. 그랬더니 오히려 타이틀을 연속으로 손에 쥐게 되더라고요. 인생이란 게 참 묘하죠? 이제 더는 여한이 없어요.”
전광석화 같은 속기바둑의 달인 서능욱 9단을 바둑계에서는 ‘손오공’이라 부른다. 그만큼 머리회전이 빠르고 수읽기가 번개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어떤 상대든 오래 생각하는 법이 없이 ‘빛의 속도로 둬버린다’ 해서 얻어진 별칭이다. 덕분에 중요한 대국에서 ‘덜컥수’로 실수를 한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 때문에 어느 때부터인가 그의 손에 항상 염주가 들리기 시작했지만, 예의 ‘번개착수’ 고질병에는 그마저도 별무신통이었단다. 염주 돌리던 손이 반사적으로 급히 나가려다 줄이 끊어져 염주 알이 바둑판에 쏟아져 버린 것.
“1958년 인천에서 태어났어요. 황해도 출신으로 미군부대통역관이던 아버지를 따라 숭의동, 부평동으로 이사 다니며 살았죠. 여섯 살 때 아버지가 두시던 바둑을 어깨너머로 보고 배웠는데 동네 대학생형들도 복덕방 할아버지도 제 상대가 되지 못했어요. 초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처음 기원이라는 곳을 나갔죠. 원로 프로기사 이일선 3단이 운영하던 부평역 앞의 ‘부평기원’이었어요. 5학년 때 서울의 프로기사 고재희 7단이 송도유원지에 놀러왔다가 저와 지도대국을 두게 되었는데, 재능이 있다며 한국기원원생으로 추천해 주셨죠.”


6학년 때 오류초등학교로 전학을 하고 한국기원을 다녔다. 바둑판에 영혼을 걸어버린, 승부사 인생의 첫걸음이었다. 14살, 중학교 2학년 때 전승으로 프로에 입단해 바둑계를 놀라게 했다. 당시 바둑장학생제도가 있던 학교는 배문과 남산공전(현 리라공고) 뿐이었다.
“원래는 배문중학교에 내정된 상태였어요. 그런데 대통령 아들이 그 학교에 입학하게 되면서 면학분위기 조성이라는 명목으로 바둑부가 갑자기 해체되었죠. 그 바람에 남산중학교로 진학했어요. 하지만 어차피 학업보다는 오로지 바둑공부에만 열중하던 시절이라 아무래도 상관없었죠. 시합장에 나가있는 날이 학교 가는 것보다 많았으니까요.”
문제는 그때 부모님이 이혼을 했단다. 당장 혼자 힘으로 살아가야했기에 바둑레슨으로 돈을 벌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부터였다. 경남양산에 은둔해 지내던 이맹희 회장의 어린 바둑사범 노릇을 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한창 기전성적이 좋아지기 시작하던 차에 영장이 나왔어요. 인천 내려와 월미도에서 해역사방위생활을 했죠. 3년 동안 해안초소 야간경비병으로 근무했는데, 저녁 6시 근무시간에 맞추기 위해 시합 때마다 무조건 초속기로 둬야했어요. 조금이라도 근무에 늦게 되면 고참들의 무지막지한 ‘빠따세례’가 기다리곤 했거든요. ‘번개착수’버릇은 그때 길들여진 건지도 몰라요.”
역시 또 한명의 속기바둑고수 김희중 9단과 동양증권배 8강전에서 만났는데, 미처 시합참관인이 도착하기도 전에 바둑이 끝나버렸다는 일화는 바둑계의 전설로 두고두고 회자될 정도다. 그래도 방위복무시절 부인 현인숙 여사(현 강릉 영동대총장)를 만난 것은 일생일대의 행운이었단다. 당시 서9단이 살던 신포동에는 제물포고동문들만 출입하던 ‘춘추기원’이 있었는데 현여사는 거기 알바생이었던 것. 키 크고 날씬한 미모에 한눈에 반했단다. 현 여사는 바둑계에서도 알아주는 여걸로 통한다. 부창부수인 셈이다.



“1983년 결혼했어요. 한국기원에서 결혼식을 올린 1호 부부가 된 거죠. 당시 한국기원 총재였던 김우중 회장과의 인연으로 대우그룹에 입사해 바둑사범으로 20년간 근무했어요. 1999년에는 바둑TV가 서비스되기 시작하면서 바둑해설가로도 활동했죠. 그때 제 처가 매니저 일을 도왔는데, 나중에 바둑TV 광고담당이사로 스카우트까지 되었어요.”
현인숙 여사는 뛰어난 친화력과 활발한 사업수완으로 여러 개의 기전을 유치해, 한국바둑계의 중흥에 많은 기여를 했다. 그리고  훗날 사업가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단다.
“매일 매일 피 말리는 승부를 벌여야하는 프로기사의 세계는 좁디좁은 반상을 들여다보며 한집이나 반집을 따지고 싸워야 하는 게 일과예요. 당연히 시야가 좁아지기 쉽죠. 승부에만 골몰해야하는 까닭에 쩨쩨하고 편협한 성격에 사로잡힐 위험성도 많아요. 늘 그런 것들을 경계하려고 애쓰죠.”


인터넷바둑사이트 종횡무진하는 최고 스타기사
현재 서9단은 ‘joonki’라는 아이디로 인터넷바둑사이트를 주름 잡으며 수많은 팬들을 몰고 다니는 최고 스타기사다. 인터넷과 궁합이 잘 어우러지는 그의 화끈한 속기바둑은 속도만큼이나 대국수도 엄청나다. 시니어기사들이 점차 무대 뒤쪽으로 퇴장하는 이 순간에도, 여전히 피 튀기는 현란한 싸움바둑으로 바둑팬들을 열광시키며 새로운 전성기를 구가 중이다.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는 승부사인생을 우직하게 살아온 제게도 딱 한 가지 가슴 속에 걸리는 게 있어요. 제가 인천 살 때인데, 최기선 당시 시장님이 갑자기 우리 집을 방문해 바둑을 한판 두시면서, 성공한 사람들은 하나 같이 인천을 떠난다며 한탄하시더군요. 그래서 저는 평생 인천을 지키고 살겠노라 약속을 했던 적이 있어요. 하지만 그 약속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고 2001년 서울로 이사를 해야 했죠. 중학생 아들놈이 ‘일진회’에 가입해 끊임없이 말썽을 피웠기 때문이에요. 그 동료들의 보복이 두려워 집을 옮기는 방법 외엔 달리 도리가 없었어요. 벌써 16년이나 지난 얘기지만, 단 한순간도 그 약속을 잊은 적이 없어요. 명분과 기회가 되면 꼭 다시 인천으로 되돌아올 겁니다.”
인터뷰는 끝내 근처 막걸리집으로까지 이어졌고, 한때 존재했다 사라져버린 인천바둑팀 이야기며 이맹희 회장과 김우중 회장의 뒷얘기들을 안주삼아, 몇 순배의 막걸리사발이 거푸 비워지고 나서야 거나해진 몸을 가까스로 마지막 전철에 실을 수 있었다. ‘너무 이기려 들면 못 이기고, 그렇다고 너무 움츠러들어도 이길 수 없는 것이 승부라는 놈이에요. 결국 상대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 겨루는 것이 승부의 요체죠.’ 덜컹대는 전철 간에서도 서9단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 뚜렷했다.


글. 커피그림 유사랑 ‘I-View’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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